가지를 뚫는 햇살(손진길 소설)

가지를 뚫는 햇살2(손진길 소설)

손진길 2023. 12. 15. 19:34

가지를 뚫는 햇살2(손진길 소설)

 

서운갑이 양부모님을 모시고 포항으로 이사하여 자전거점포 서가네를 개점한 것이 1942년 여름이다. 일년간 기술자를 고용하여 고객이 맡긴 자전거를 수리하고 신품 및 중고 자전거와 리어카(リヤカ)를 일반인에게 판매하였더니 나름대로 흑자가 나고 있다.

당시에는 농촌에서 지방 소도시로 이주한 농민들이 리어카만 한대 있어도 남의 짐을 옮겨주고서 나름대로 호구지책을 마련할 수가 있던 시절이다;

그리고 철도역에 가면 상하역업체 마루보시()에서 구루마(くるま)로 화물을 옮겨주는 업종이 크게 활기를 띠고 있다. 멀리 가는 화물과 이삿짐을 주로 열차편으로 보내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많은 공무원과 학생들이 자전거를 타고서 신작로를 누비던 시절이다. 그에 따라 서운갑의 자전거점포가 바쁘게 돌아가고 있다. 그것을 보고서 그는 아예 기술자 양씨(梁氏)의 일을 도와주면서 그 기술을 습득하고 있다. 양씨는 젊은 사장이 눈썰미가 있고 빨리 기술을 배우는 것을 보고서 제자 하나 기른다고 말하면서 잘 가르쳐주고 있다.

그렇게 1년반을 지내고 1944년에 들어서자 길 건너편에 있는 양장점 모던 걸에 젊은 처녀 황옥주(黃玉珠)가 새로 점원으로 일하고 있는 것이 서운갑의 눈에 들어온다. 작년 12월에 만 20세가 된 서운갑은 자신보다 2살정도 적어 보이는 그 처녀를 볼 때마다 이상하게도 마음이 설레고 있다.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지성미가 있어 보인다. 크게 관심이 생긴 서운갑이 그 양장점에 고객으로 다니고 있는 이웃집 황씨 아주머니에게 반갑게 인사하면서 그 처녀에 대한 신상을 은근히 알아보았다. 황씨 아주머니가 반색을 하면서 그녀에 대하여 말해준다. 그 이유는 그 양장점 주인과 황씨 아주머니가 친척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인연으로 서운갑이 미리 얻고 있는 그녀에 대한 정보가 다음과 같다; “금년에 19살이 되는 그 처녀는 이름이 황옥주인데 그 양장점 주인 황사장의 딸이다. 양장점은 황사장의 부인이 여성복을 만드는 기술자이기에 잘 운영이 되고 있다. 황옥주는 포항에서 중학과정을 공부하고 작년말에 수업을 마쳤다. 혹시 전쟁통에 끌려갈지 몰라서 그 집에서는 조용히 양장점에 나가서 모친에게서 기술을 배우도록 조치하고 있다”.

참으로 좋은 정보이다. 진작에 대구에 유학하여 중학과정 5년을 공부한 서운갑은 포항에서 5년간 중학과정을 공부한 젊은 처녀 황옥주를 나름대로 마음에 품고서 그녀와 개인적으로 만날 궁리를 하고 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인편으로 편지를 보낼 것인가? 아니면 직접 만나볼 것인가?...

서운갑의 선택은 후자이다. 왜냐하면, 젊은 그가 크게 용기를 한번 내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서운갑1944년 정월 중순에 일부러 양잠점에서 일을 마치고 나오는 황옥주를 기다려서 차를 한잔 하자고 말하고 있다.

그녀 역시 맞은편 자전거포에서 일하고 있는 젊은 청년 서운갑에게 관심이 있는지 순순히 그렇게 하자고 따라나선다. 조금 떨어진 시내의 다방에 들린 두사람은 조심스럽게 커피를 마시면서 천천히 이야기를 나눈다.

서운갑이 먼저 자기소개를 한다; “제 이름은 서운갑이고 만으로 20살이 조금 지났습니다. 2년전에 부모님을 모시고 기계면에서 이곳 포항으로 이사를 왔지요. 지금은 아시는 바와 같이 자전거포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대구에서 중학과정을 마치고 곧이어 사업을 시작했지요. 그런데 제가 다른 사람을 통해서 댁의 이름을 황옥주라고 들었는데 그것이 맞습니까?... “.

별로 말이 많지 아니한 서운갑인데 그날은 어째서 그렇게 씩씩하게 자기소개도 하고 그녀의 이름까지 재삼 확인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러자 그녀가 웃음기를 띄면서 대답한다; “호호호, 벌써 제 이름까지 알고 계시는군요. 맞아요. 제가 모던 걸을 경영하고 있는 황사장의 딸 황옥주입니다. 그리고 저는“.

그녀가 한 모금 커피를 마시고 입을 축인 다음에 말한다; “지난 1939년에 새로 생긴 포항고등여학교에 들어가서 공부하고 지금은 졸업을 앞두고 있어요. 작년말에 수업이 전부 끝났기에 우리집 양장점에서 어머니 일을 도와주고 또한 양장일을 배우고 있습니다. 그런데… “;

갑자기 황옥주가 당돌하게도 서운갑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본다. 그리고 무슨 결심을 했는지 단도직입적으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지금 조선의 상황을 잘 알고 계시겠지요? 제 나이가 벌써 만으로 18살입니다. 잘못하면 정신대에 끌려가기 십상이지요. 그러니 빨리 결혼을 해야 합니다. 혹시 제게 관심이 있으시면 저에게 청혼을 해주세요. 그럴 마음이 없으시면 저는 그만 자리에서 일어나겠습니다”.

그 말을 듣자 서운갑은 깜짝 놀라서 그녀를 한참 바라본다. 실로 담대한 성격이며 과단성이 있는 처녀이다. 청춘남녀가 처음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는 어려운 자리임에도 불구하고 자기 할 말을 거침없이 하고 있는 것이다. 그녀의 성격을 파악한 서운갑이 싱긋 웃는다.

그리고 역시 대담하게 말한다; “잘 알겠습니다. 한번 진지하게 결혼을 전제로 하여 교제를 해보도록 합시다. 저는 황옥주 당신이 마음에 듭니다. 그렇게 하시지요!”. 그 말에 황옥주가 그때서야 부끄러운지 고개를 푹 숙인다. 그리고 조용하게 대답한다; “좋아요. 한번 사귀어 보도록 해요. 그렇지만 오래 시간을 드릴 수는 없어요. 저희 집에서 저의 결혼을 서두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서운갑은 봄이 될 때까지 두 달간 황옥주와 만나서 사귀어 보니 상당히 똑똑한 여성이다. 그리고 현모양처감으로 보인다. 따라서 하루는 그녀에게 말한다; “매파를 보내어 우리집에 혼담을 넣도록 하세요. 내가 기회를 보아 부모님께 당신과 사귀고 있다는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러한 차중에 묘하게도 양어머니 장화련(張華蓮)이 먼저 말을 꺼낸 것이다. 그날 저녁식사자리에서 그녀는 아들 서운갑이 마음에 황옥주를 두고 있다는 말을 듣고서 그렇게 좋아한다. 그 결과 그해 1944년 봄이 끝나기 전에 서운갑황옥주는 일사천리로 결혼에 골인하게 된다;

그때를 추억하면서 202312월에 백세를 맞이하고 있는 서운갑 옹의 얼굴에 달콤한 미소가 번지고 있다. 해방을 맞이하기 1년전 그때 그녀와 결혼식을 올리고 포항의 집에서 신혼생활을 하던 그 시절이 참으로 행복했다고 새삼 생각이 되는 것이다. 오래 사귀어 보고서 한 결혼은 아니다. 그렇지만 서로 좋아서 한 결혼이다.

그 마음이 조금도 변하지 아니하고 평생을 함께 살아온 그들이다. 비록 아내 황옥주7년전에 별세하고 말았지만 아직도 늙은 서운갑의 마음속에서는 그녀가 자리를 잡고서 살고 있다. 밤에 잠자리에 들어가면 어느 사이에 아내가 꿈에 나타나서 함께 알콩달콩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100세가 되자 노인 서운갑이 때로는 중얼거리듯이 혼잣말을 한다; “여보, 당신과 헤어지고 나는 100세 노인이 되어 있어. 이제 곧 당신을 만나기 위하여 나도 여기를 떠날 것 같아요. 내 마음속에 있는 당신도 나와 함께 다시 먼 길을 떠날 준비를 해야 할 거예요!... “.

서운갑이 한참 눈을 감고서 1944년과 1945년 그녀와 함께 살아간 참으로 좋았던 그 신혼시절을 다시금 회상한다. 태평양전쟁으로 말미암아 일본 열도는 물론 조선반도까지 미국의 폭격기 B29의 공습에 시달리고 있었지만 그래도 포항에서는 큰 피해가 없었다. 그저 등화관제훈련이 요란했을 뿐이다.

그렇지만 전쟁물자가 부족해진 일본제국이 조선인에게서 제사에 사용하는 유기그릇은 물론 밥그릇과 숟가락까지 공출로 가져갔기에 당시에는 나무로 깎아서 만든 수저와 목기를 사용했다;

 일상생활이 너무 어려워진 것이 사실이다. 생업에 있어서도 정어리 철에 잡은 생선을 거두어서 일본군이 가지고 갔다. 기름을 짜내어 연료로 사용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한 물자의 피해 뿐만이 아니다. 많은 조선인 남학생들이 일본군으로 징집되어 전쟁터에 보내지고 있다. 일반인 남자들도 전쟁마당에 일꾼으로 뽑혀서 징용을 나갔기에 그 피해가 컸다. 농업과 어업에 종사할 남자 일꾼의 수가 엄청 부족해지고 있다. 게다가 어린 처녀들까지 전쟁터와 군수공장의 일꾼으로 끌려가고 있으니 조선사람들은 일제의 만행이라고 하면 자다가도 치가 떨릴 지경이다;

서운갑은 머리가 명석하고 대구에서 중학과정을 공부한 인물이다. 따라서 일본제국이 어째서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을 부르짖으면서 미국과의 전쟁에 뛰어들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나름대로 짐작하고 있다. 그가 알기로는 1905년 일본제국이 미국과 협상하면서 벌써 조선을 일제가 식민지로 가지는 대신에 필리핀을 미국이 차지하는 것으로 서로 양해하였다.

그런데 그후 1910년대와 1930년대말에 유럽에서 2차례나 큰 전쟁이 발생했다. 서세동점에 앞장을 섰던 영국과 불란서가 뒤늦게 제국주의 경쟁에 뛰어든 독일 때문에 유럽에서 전쟁을 벌인 것이다. 그때마다 멀리 북아메리카에 있는 미국이 대영제국을 경영하고 있는 영국의 편을 들면서 전쟁물자를 수출하여 큰 이익을 얻고 있다.

한편 1932년부터 만주침략에 나선 일제도 승승장구를 하고 있다. 유럽열강의 힘이 약화된 틈을 타서 중국의 동해안의 큰 도시를 대거 점령한 것이다. 그런데 대영제국이 두차례 유럽전쟁에 휘말려서 쇠퇴하자 그 자리를 얼른 미국이 대신하고자 나서고 있다. 그것이 일본제국으로서는 가장 큰 문제이다.

1941년이 되자 미국은 일본제국에게 강력한 경고를 하고 있다; “중국에서 철수하라. 조선을 식민지로 삼아도 좋다고 1905년에 양해를 했다. 그렇지만 중국대륙으로의 군사적 진출을 허용한 것은 아니다. 관동군은 만주로 철수하라. 그러하지 아니하면 석유의 수송로를 차단할 것이다”.

미국의 경고는 공갈이 아니다. 실제로 일제가 중동에서 수입하고 있는 원유의 수송로를 말레이 반도와 수마트라 섬 사이의 좁은 말라카 해협(Strait of Malacca)에서 차단하고 나선 것이다;

 석유를 얻지 못하자 일제는 넓은 중국대륙에서 더 이상 전쟁을 계속할 수가 없다. 아무리 일본과 조선 그리고 만주에서 전쟁물자를 끌어 모아도 태부족이다.

유일한 타개책이 194112월에 기습적으로 하와이의 진주만을 공습하여 미국의 해군전력을 궤멸하는 것이다;

 일제의 생각으로는 미국의 태평양사령부를 성공적으로 공격하고 나면 적어도 2년의 시간을 벌 수가 있다고 보고 있다. 그 사이에 중국을 완전 장악하면 된다. 그러면 미국과의 협상에서 유리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엄청난 착각이다.

왜냐하면, 하와이를 벗어나 있던 미국의 항공모함이 6개월 후 괌과 하와이 사이에 있는 미드웨이 해전(Battle of Midway)에서 일제의 해군을 이기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19454월말에 히틀러가 자살함으로써 유럽전쟁이 연합군의 승리로 끝나고 말았다.

이제 미국은 태평양전쟁을 끝내기 위하여 전력을 기울이고 있다. 일본제국에 대하여 총공세를 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19455월부터 일본제국의 지도자들은 패전의 위험을 크게 느끼고 있다. 그러나 일본국민들과 식민지의 백성들에게는 일체 그러한 내색을 하지 아니하고 있다;

그와 같은 당시의 긴박한 사정을 서운갑이 구체적으로 파악하게 된 데에는 한가지의 기이한 인연이 존재하고 있다. 그는 고향에서 소학교를 마치자 양부모의 재정지원으로 대구에 유학하여 등록금이 비싼 사립명문에서 5년간 공부했다. 그때 만난 절친의 이름이 오요한인데 요한의 부친이 미국인 선교사이다.

미국인 신분인 오요한(John Ross)은 대구에서 중학교 5년과정을 마치자 부모님의 주선으로 미국의 대학에 진학하고자 배를 타고서 아메리카로 떠났다;

그런데 그가 장문의 편지를 개인적으로 부모님께 보내어 왔는데 거기에 아무쪼록 절친 서운갑에게 자신의 소식을 전해달라고 하는 신신당부가 들어 있었던 것이다.

미국사람인 오요한이 그러한 당부를 일부러 한 이유가 사실은 두가지이다; 하나는, 당시 대구의 그 명문 사립중학교에서 공부한 학생 가운데 포항에서 유학을 가서 공부한 학생이 오요한서운갑 두 사람이어서 너무나 그들이 친했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오요한의 부친인 오천덕(David Paul Ross) 선교사가 포항에서 선교사로 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방학기간에 포항에서 서운갑오요한을 만나면 두사람은 주일날 오천덕 선교사가 설교하는 교회를 쫓아다니면서 함께 예배를 드렸다. 자연히 오천덕 선교사 부부도 서운갑을 아들 오요한처럼 생각하고서 그를 집으로 초청하여 함께 식사하기를 좋아했다.

그렇게 5년의 시간을 함께 지내다가 오요한이 대학에 진학하고자 그만 미국으로 떠나고 만 것이다. 그러자 서운갑도 친구가 그 집에 없기에 일부러 오천덕 선교사의 집을 방문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사정을 알고서 절친 오요한이 소식과 더불어 한가지 당부를 전해온 것이다.

아들의 서신을 받은 오천덕 선교사가 일부러 시내 자전거포로 서운갑을 찾아와서 말한다; “운갑, 내 아들 요한이 자네에게 소식을 전해달라고 서신을 보내왔어. 그러니 모처럼 우리집에 가서 그 편지를 한번 읽어보도록 해. 나도 다시 자네를 우리집에 초청하여 함께 식사도 하고 이야기도 나누고 싶구만. 사실은 그것이 내 아들의 당부이기도 해!… “.

50줄에 들어선 오천덕 선교사가 아들 생각이 나는지 서운갑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서 하는 이야기이다. 그 말을 듣자 서운갑이 말한다; “알겠습니다. 제가 그동안 문안을 드리지 못했습니다. 선교사님 댁이 여기서 크게 멀지가 않으니 함께 가시지요. 저는 요한이의 서신도 읽어보고 오래간만에 선교사님의 이야기도 듣고 싶습니다”.

물론 오요한이 부친 오천덕 선교사에게 보낸 서신은 영어로 기록이 되어 있다. 그런데 그 내용을 서운갑이 쉽게 읽고 있다. 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본 오선교사가 한마디를 한다; “우리 요한이도 공부를 잘 하지만 자네 운갑이가 더 공부를 잘하는 것 같구만. 자네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더라면 아주 뛰어난 인물이 될 사람인데 그럴 형편이 아닌 것이 아쉽구만!... “.

그때부터 서운갑은 절친 오요한을 대신하여 주일마다 오선교사가 설교하는 교회를 함께 방문한다. 그리고 오천덕 선교사의 집에서 식사를 같이하면서 그들 부부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 그러니 자연히 미국의 소식에 정통한 오천덕(David Paul Ross) 선교사로부터 태평양전쟁에 관한 최신소식을 정확하게 듣고 있는 것이다.

다른 조선사람들은 몰라도 비록 지방도시 포항에 살고 있지만 서운갑은 미국과 일본 사이의 전쟁의 경과를 정확하게 알고 있다. 그 결과 그는 19457월경에 어떠한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