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수기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민수기 강해 제171강(민33:8b-13)(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3. 12. 13. 04:00

민수기 강해 제171(33:8b-13)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터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8423()

 

어째서 오아시스 엘림은 쓴 물이 있는 마라 다음에 나타나고 있는가?(33:8b-13, 15:22-27)

 

세상사람들은 자신의 인생의 의미에 대하여 여러가지로 달리 말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어떤 시인은 자신은 이 세상에 소풍을 나왔다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 소풍이 끝나면 하늘로 돌아간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열심히 일하여 가족을 잘 보살피기 위하여 이 세상에 왔다고 말합니다.

집단적으로도 사람들이 이 세상에 온 목적을 달리 말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1960년대와 70년대에 있어서 한국에서는 국민교육헌장을 통하여 국민들에게 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고 가르쳤습니다. 과연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난 목적이 그런 것일까요?

성도의 입장에서는 성경에서 그 답을 구해야만 합니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의 완전계시자라고 알려지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경청해봅니다; “너희는 나의 모든 시험 중에 항상 나와 함께한 자들인즉, 내 아버지께서 나라를 내게 맡기신 것같이 나도 너희에게 맡겨 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또는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12지파를 다스리게 하려 하노라”(22:28-30).

요컨대, 인생은 시험기간이라는 것입니다. 그 시험을 이겨야 하나님나라에 들어가서 주님과 함께 이 세상을 다스리는 영광에 참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성도는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제자로 복음사역을 하여야 하는 것이기에 그 시험이란 일종의 시보’(試補, 보직을 주고 한시적으로 그 자격과 능력을 시험함) 기간을 의미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참고로, 시보기간을 마친 다음의 정식사역에 대해서는 사도 바울이 로마서 제8장에서 흥미롭게 기술하고 있습니다(8:18-23).

그러한 맥락에서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8:16-18).

본문에서 모세는 이스라엘 자손들의 출애굽의 행로를 적으면서, 먼저 쓴 물을 만난 마라 다음에 오아시스 엘림에 이르게 된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33:8b-9). 그것은 그 행적을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는 출애굽기 제15장의 마라와 엘림에 대한 기록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참고로, 출애굽기의 기록을 옮겨봅니다; “모세가 홍해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매, 그들이 나와서 수르 광야로 들어가서 거기서 사흘길을 걸었으나 물을 얻지 못하고 마라에 이르렀더니, 그곳 물이 써서 마시지 못하겠으므로 그 이름을 마라라 하였더라. 백성이 모세에게 원망하여 이르되,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 하매,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가리키시니, 그가 물에 던지니 물이 달게 되었더라. 거기서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법도와 율례를 정하시고 그들을 시험하실새, 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들어 순종하고, 내가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 중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 그들이 엘림에 이르니, 거기에 물 샘 12과 종려나무 70 그루가 있는지라. 거기서 그들이 그 물 곁에 장막을 치니라”(15:22-27). 다음과 같은 몇가지 사실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1)  첫째,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먼저 고난을 주시고 사람들이 그 고난을 잘 극복하게 되면 오아시스로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2)  둘째, 고난은 시험의 목적이므로 그 고난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완전히 멸망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고난을 주신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를 못하고 계속 원망을 하게 되면 고난을 이길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3)  셋째, 고난 가운데에서도 여호와를 의지하고 그 고난을 극복할 수 있도록 간구하게 되면 쓴 물을 단물로 바꾸어 주시는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하나님의 역사섭리는 이미 설명한 누가복음 제22장과 로마서 제8장의 말씀을 참조할 때에 다음과 같은 사실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인생 전체를 두고 볼 때에 이 세상에서의 성도의 삶은 고난의 기간이지만 그 시험을 믿음으로 이겨나가게 되면 성도가 육신을 가진 시보기간을 지나고 영의 몸으로 부활하여 영생의 하나님의 나라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모든 피조물의 구원에 참여하며 하나님자녀의 영광을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상과 같은 사실들을 염두에 두고서 이제부터 본문의 말씀을 한 구절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그 깊은 의미와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파악해봅니다;

첫째로,에담 광야사흘 길을 가서 마라진을 치고, 마라를 떠나 엘림에 이르니, 엘림에는 샘물 12과 종려 70 그루가 있으므로 거기에 진을 치고”(33:8b-9); 다음과 같이 두 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봅니다;

(1)  에담 광야사흘 길을 가서 마라진을 치고”(33:8b);

1)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에담 광야 믹돌 앞 홍해 수에즈 만 서편에서 애굽의 추격군을 만나게 됩니다(14:2, 9).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애굽의 군대를 홍해에 수장시켜 버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홍해 건너편 에담 광야로 들어서게 하십니다(14:21-30). 에담에서 한 동안 진을 치고 있던 이스라엘 자손들이 구름기둥과 불기둥의 안내를 받아서 다시 행진을 시작합니다(13:21-22). 그들은 여호와께서 애초에 모세에게 지시하신 장소 미디안 땅 서쪽 변경에 있는 르비딤 광야 호렙 산으로 가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그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호렙, 3:1)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3:12).

2)    아라비아 서북쪽에 위치하고 있는 호렙 산으로 가장 빨리 도달할 수 있는 길은 에담에서 수르 광야를 지나 바란 광야 남쪽을 통과하는 경로 곧 동남동쪽으로 직행하는 광야 길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들은 그 첩경을 선택하여 사흘 동안 잠시 잠시 쉬어 가면서 마침내 마라에 도착을 하고 있습니다. 백성들이 지니고 온 물이 3일만에 바닥이 나고 있으므로 이제는 더 이상의 행진은 무리입니다(15:22). 따라서 마라에서 진을 치고 그곳에서 샘물을 발견하고자 애를 쓰고 있습니다. 겨우 샘물을 발견하였는데 그것이 사람과 가축이 마실 수가 없는 쓴 물입니다(15:23).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길로 인도하신 여호와를 원망하고 모세에게는 물을 만들어 내라고 재촉을 하고 있습니다(15:24-25).

3)    여호와께서는 모세에게 명령하여 한 나무를 선택하여 그것을 그 물에 던지라고 하십니다(15:25a). 그러자 신기하게도 그 쓴 물이 사람과 가축이 마실 수 있는 단물로 변하고 있습니다(15:25b).  그러한 변화를 경험하게 한 다음에 하나님께서는 하나의 언약을 세우고 계십니다. 그 내용은 세가지입니다(15:25-26); ①첫째, 여호와를 창조주 하나님으로 알고 피조물인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법도를 지키라는 것입니다. ②둘째,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계명과 율법을 잘 지키면 그 인생길을 보호해주시고 치유를 해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③셋째, 그러하지 못하고 시험에 불합격을 하게 되면 치유함을 받지를 못하고 인생의 쓴 물을 계속 맛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요컨대,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인생 가운데 고난을 주시면서 계속 그 세가지를 감찰하시고 시험하신다고 하겠습니다.

(2)  마라를 떠나 엘림에 이르니, 엘림에는 샘물 12과 종려 70 그루가 있으므로 거기에 진을 치고”(33:9); 마라의 고난을 통과하게 되면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을 오아시스가 있는 엘림으로 인도하십니다. 수르 광야 길에서 돌이켜 서쪽 홍해 가로 행진하게 하십니다. 그곳에 오아시스가 펼쳐지고 있습니다. 샘물이 12개나 있고 수 많은 종려나무(palm tree)가 시원한 그늘을 만들고 있습니다. 그리고 종려나무의 일종인 대추야자(date palm) 나무에서는 꿀과 같이 단 열매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엘림 오아시스에서 진을 치고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얼마나 기뻐하며 여호와에게 감사하는지 모릅니다. 그것은 마라의 고난을 통과한 백성들이 얻을 수 있는 꿀과 같은 휴식이라고 하겠습니다.

둘째로,엘림을 떠나 홍해 가에 진을 치고, 홍해 가를 떠나 (Sin) 광야에 진을 치고, 신 광야를 떠나 돕가에 진을 치고 돕가를 떠나 알루스에 진을 치고”(33:10-13); 다음과 같이 세 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봅니다;

(1)  엘림을 떠나 홍해 가에 진을 치고, 홍해 가를 떠나 (Sin) 광야에 진을 치고”(33:10-11);

1)    엘림의 오아시스가 크다고는 하지만 240만명에 달하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오래 머물 수 있는 곳은 아닙니다. 샘물 12개와 종려나무 70그루로 얼마나 오래 버틸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일단 홍해 가를 따라서 조금 남하를 합니다. 그렇게 몇 차례 진을 치면서 원기를 회복하고 물을 많이 비축한 다음에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임재하신 호렙 산으로 직행하고자 합니다(33:10, 3:12).

2)    이스라엘 자손들이 물이 풍부하고 살기에 좋은 홍해 가를 떠나고 있습니다. 해변을 떠나게 되면 시나이 반도에서는 얼마 아니 가서 광야가 나타납니다. 엘림의 남쪽 홍해 가에 인접하고 있는 그 광야의 이름이 신(Sin) 광야입니다. 여기서의 신 광야는 가나안 남부 네게브와 바란 광야 사이에 있는 신(Zin) 광야와는 발음이 비슷하지만 다른 광야입니다. 일단 신(Sin) 광야에 들어와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진을 치고 있습니다(33:11).

(2)   신 광야를 떠나 돕가에 진을 치고”(33:12-13a);

1)    여호와 하나님께서 모세를 보내어 애굽에서 노예생활을 하고 있는 이스라엘 자손들을 광야로 이끌어 내신 목적은 그들을 거룩한 백성으로 만들어 이 세상에서 처음으로 창조주 여호와를 하나님으로 섬기는 신정국가를 출범시키고자 하시는 것입니다(15:26, 19:4-6). 그 일을 위하여 여호와께서는 그들을 호렙 산에서 만나기를 원하시고 계십니다(3:12).

2)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들은 마냥 물 좋고 그늘이 좋은 홍해 가 오아시스에 머물고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곳을 떠나서 다시 광야 길을 가로 질러 아카바 만 북쪽의 에시온 게벨을 지나 호렙 산이 위치하고 있는 미디안 땅 르비딤 광야로 들어가야만 하는 것입니다(17:1, 6, 18:1-3).

3)    그렇게 시나이 반도를 횡단하는 길에 처음 나타나고 있는 지명이 돕가(Dophkah, ‘두드림이라는 뜻)입니다(33:13a). 학자들이 그곳은 시내 산 북서쪽 75km지점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그곳에서 일단 진을 치고서 바란 광야와 시내 광야 사이를 통과하여 에시온 게벨로 접근할 방법을 모색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참으로 조심스러운 두드림과 같습니다.

(3)  돕가를 떠나 알루스에 진을 치고”(33:10-13b);

1)    알루스’(Alush)의 위치가 어디인지를 알기 위하여 학자들이 연구에 연구를 거듭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크게 보아 두가지의 견해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①하나의 견해는 와디 엘 에쉬쉬’(Wadi el-Eshsh)이며 돕가에서 동쪽으로 약 18km 떨어진 거친 땅으로 보고 있습니다. ②또 하나의 견해는 하나의 지명이 아니라 옮겨 다니는 비슷한 유형의 장소로 보고 있습니다. 그 내용은 알루스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여 9번째로 진을 친 장소이지만 그것은 하나의 장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2)    요컨대, 알루스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친 광야를 42번 장소를 옮겨 가면서 진을 계속하여 친 것이며 그것을 통칭하고 있는 용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고 있는 이유는 알루스라고 하는 말의 의미가 사람의 무리가 거친 땅에서 빵을 굽다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거친 광야에서는 물이 발견이 되어야 사람들이 일단 진을 치고 머물 수가 있으며 빵을 구울 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자손들이 바란 광야와 시내 광야 사이를 횡단하면서 그 거친 광야에서 물이 있는 곳에 임시로 진을 치고서 만나로 빵을 굽고 계속 동쪽으로 이동을 했다고 하겠습니다. 그렇다고 보면, 참으로 엄청 고생한 그 땅들의 이름이 알루스’(Alush)인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인생이란 오아시스를 발견하였다고 하여 그곳에 마냥 머물러 있어도 좋은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사람을 이 세상에 보내신 창조주 하나님의 목적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그 뜻은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처럼 하나님의 공의의 정신을 실천하고 만민을 구원하여 영생의 하나님나라로 인도하는 복음사역자로 살아가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 고난을 당하셨듯이 그의 제자인 성도들도 복음사역의 현장에서 고난을 당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평범한 고난이 아닙니다. 그 고난을 성도들이 어떻게 감내하고 극복하는가를 여호와께서 보고 계시기에 그것은 일종의 시험과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생애 기간을 자신과 함께하면서 시험에 참가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앞으로 예수님처럼 자신들의 공생애를 살아가면서 그 시험을 통과하게 되면 하나님나라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먹고 마시며 이 세상을 통치하는 영광을 더불어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영광은 육신을 가진 성도들이 이 세상의 고난과 시험을 이긴 다음에 주어지는 것입니다. 본문의 민수기 내용도 그러한 사실을 마라의 쓴 물과 엘림의 오아시스로 알기 쉽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무쪼록 그러한 말씀의 뜻을 깨닫고 고난 가운데 끝까지 충성하시는 주님의 제자들이 모두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

 

(이스라엘 백성의 출애굽 경로; 다만 르비딤 광야는 시나이 반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미디안 땅 호렙 산과 함께 아라비아 반도 서북부에 위치하고 있는 것으로 출애굽기가 말하고 있음, 3:1, 12, 4:18-20, 17:1, 6, 18:2-3, 12, 19:2 참조 요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