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선비 이야기(손진길 소설)

허굉필(許宏弼) 허선비 이야기57(손진길 소설)

손진길 2023. 10. 25. 03:54

허굉필() 허선비 이야기57(손진길 소설)

 

사실 허선비186610월 하순에 거제부로 가서 장병화를 만나기 전에 새로운 어업기지로 어디를 선정하면 좋을까? 깊이 생각을 했다. 그 결과 그는 경주부 내남 자신이 살고 있는 집에서 크게 멀지 아니한 고기잡이 항구인 울산 방어진이 적합하다고 판단했다. 그 이유가 두가지이다;

하나는, 울산 방어진에서 어민들이 때로 상어를 잡아 오고 있다. 그런데 상어고기는 특이하게도 식중독을 일으키지 않는다. 시골 양반들이 상어고기를 벽장속에 몇달을 보관하여도 쇄에한 냄새만 풍길 뿐 그 고기가 상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맛은 변하고 있다. 따라서 그 고기를 경상도 내륙에서는 돔배기라고 부르고 있다;

그런데 돔배기를 구워서 먹거나 탕으로 끓여서 먹으면 그 맛이 일품이다. 그런 특징이 있기에 경상도 일원에서는 시골 양반들이 제사상을 차릴 때에 반드시 돔배기 구이와 탕을 올린다. 그에 따라 수요는 큰데 공급이 딸리고 있다;

그 주된 이유는 어선이 구식이라서 그렇다. 그러므로 증기기관을 부착한 어선으로 어로작업을 하면 상어를 빠른 시간에 많이 잡아서 공급할 수가 있다. 그것이 수익성이 좋을 것으로 허선비가 예리하게 판단한 것이다.

그런데 울산 방어진 앞바다에서 멀리 동력선을 타고 나가서 상어를 잡으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는 허선비의 판단은 실제로 그 일에 나선 본 결과 현실타당성이 충분히 있는 것으로 판명이 나고 있다. 그것을 보면 관료출신인 허선비는 사업에도 수완이 있는 셈이다.

또 하나는, 영덕현에서 오래 어선의 선장으로 일한 장병화는 동해바다가 남해바다보다 더 익숙하다. 그러므로 그를 울산 방어진에서 어로작업을 하도록 조치하는 것이 수익을 올릴 수 있는 방법이다. 그에 따라 허선비가 장병화의 가족을 거제 섬에서 이제는 울산 방어진으로 이주할 수 있도록 적극 도와준 것이다.

게다가 허선비는 말로만 상대방을 설득하는 그러한 유형의 인물이 아니다. 그 자신이 모범을 보이거나 상당기간 그 일에 동참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울산 방어진 장병화의 집 근처에 자신이 거주할 만한 집을 따로 구해 둔다. 그리고 성어기가 되면 아예 내남의 집을 떠나서 울산 방어진에서 생활한다. 거리가 아주 먼 것이 아니므로 그것이 가능하다.

이듬해 1867년 가을에 허선비장병화와 함께 하동으로 가서 이인용을 만났다. 그와 함께 홍콩으로 가서 3인이 영국인 버터필드가 일하고 있는 조그만 조선소에서 증기기관을 부착한 어선을 2척 구입했다. 그 자금은 이인용의 조언을 듣고서 허선비가 미리 금괴로 마련한 것이다.

허선비장병화는 신식어선을 운전하기 위하여 한달간 홍콩 섬의 연안에서 유경험자인 이인용의 지도를 받아 철저하게 연수를 했다. 그 결과 3척의 증기선 어선을 몰고서 허선비 일행 3인이 무사히 그해 초겨울에 조선으로 돌아온 것이다.

물론 이인용은 하동으로, 허선비와 장병화는 울산 방어진으로 가서 동력선을 정박했다. 그런데 한가지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 그것은 이인용의 선박과 허선비 및 장병화의 선박의 모습이 상당히 다르다는 것이다.

이인용의 배는 조선의 어선으로서 노와 돛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사이에 굴뚝을 하나 숨기고 있는 형태이다. 그 이유는 애초에 조선의 목선인 어선 내부에 증기기관을 설비한 것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그것은 일종의 개조(改造)이다.

그러나 허선비장병화가 아예 홍콩의 영국사람이 운영하는 조선소에서 구입한 동력어선은 그것이 아니다. 그것은 영국사람들이 만든 완전한 증기선으로서 단지 어선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선박구조가 그렇게 만들어진 것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누가 보아도 노와 돛이 없으므로 무동력선이 아니라 확실한 동력선이다. 그것을 어떻게 다른 사람들에게 소개할 것인가? 그 점을 궁리하다가 머리가 좋은 허선비가 그 이름을 아주 편리하게 짓고 있다. 이름하여 그것이 통통배이다;

그래서 그런지 2척의 신식선박을 끌고 울산 방어진에 도착한 허선비가 어로작업에 나서기 전에 용의주도하게 행동한다. 그는 가장 먼저 동네잔치를 벌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주민들에게 친절하게 사정설명을 한다.

허선비가 궁금하여 몰려든 많은 선주와 어민들에게 친절하게 설명하고 있다; “이것이 서양식의 동력인 증기기관을 부착한 통통배입니다. 앞으로 이 신식배로 저는 방어진 앞바다 멀리 나가서 상어를 잡아올 것입니다. 지켜 보시고 수익성이 있다고 판단되시면 장차 이러한 통통배를 많이 구입하여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구입하는 방법은 제가 개인적으로 안내를 해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 사이에 10월 중순에는 허선비의 아내 최선미가 준마를 타고 멀리 구례까지 가서 거상 김상준에게서 환을 받는다. 그녀는 그것을 김해 시집에 들러 시아버지에게 전달한다. 매년 자신이 하던 일을 이제는 아내 최선미가 대신하게 되니 허선비는 그것이 마음에 들고 흡족하다.

그리고 이듬해 1868년 봄이 되자 내남 집을 떠나 허선비가 울산 방어진으로 가서 어로작업을 한다. 그때 최선미는 아예 딸 허정순을 데리고 그곳으로 가서 함께 일을 돕는다. 그 옛날 한성부의 다모 최선미의 기질이 유감없이 어로현장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무예로 단련이 된 그녀이기에 젊은 장정의 몫을 너끈히 해내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바라보고서 기어코 장병화가 한마디를 한다; “역시 형수님은 여장부이시군요. 허선비 그대는 행운아입니다. 선장과 작업반장이 일심동체 부부이니 어획고가 보통이 아니군요, 하하하… “. 그 말에 허선비가 웃으면서 대꾸한다; “부러우면 병화 자네도 안사람을 작업반장으로 삼아 같이 어로작업에 나서면 되지, 무엇이 어려운가? 하하하… “.

그런데 증기력을 동력으로 삼고 있으니 장병화의 어선과 허선비의 어선은 그 힘이 대단하다. 그래서 그런지 그들은 제법 먼바다까지 나가서 어로작업을 한다. 그러다가 보니 때로는 상어 뿐만이 아니라 작은 고래까지 잡아서 올린다;

그것을 울산 방어진에서 시판한 결과 그곳이 훗날 고래잡이 항구로 널리 알려지게 된다. 그리고 장병화와 허선비가 운전하고 있는 증기기관을 부착한 어선을 주민들이 이제는 너나없이 통통배라고 부르고 있다. 그것은 노와 돛대만 사용하고 있는 구식 어선과는 확연하게 다른 것이다.

허선비는 그러한 현상이 발생하자 흡족한 미소를 짓고 있다. 그 이유는 한양의 조정에서 선진산업국이 되고자 하는 노력을 전혀 하지 아니하고 있으므로 허선비 자신이 백성들 사이에 들어가서 개인적으로 그러한 기풍을 일으키고자 애초에 계획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매년 어로작업을 하는 시기에는 울산 방어진 그 집으로 가서 선장으로 일하고 있다. 그가 그렇게 하고 있는 이유는 장병화와 함께 어획고를 많이 올려서 어민들에게 신식어선이 참으로 좋다는 사실을 일깨워주고 싶은 것이다.

그 결과 신식문명을 받아들이게 되면 얼마나 좋을까? 그것이 조선백성을 일깨우고 선진문명으로 나아가게 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허선비가 굳게 믿고 있는 것이다. 그 다음에 허선비는 어떠한 일을 또 시작하게 되는 것일까? 당장은 통통배가 동해에서 많이 사용이 되도록 홍보를 하고 선주들에게 구입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 일이 생각보다 쉽게 풀리고 있다. 왜냐하면, 구식어선보다는 신식어선인 통통배가 훨씬 어획고가 높고 먼바다까지 진출하여 비싼 어종을 잡아서 돌아오고 있으므로 그 소문이 어선을 가진 선주들 사이에 널리 퍼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자 장병화허선비에게 그러한 배를 구입할 수 있는 방법을 돈 많은 선주들이 문의하고 있다.

그들의 요구에 부응하여 1870년 가을에는 홍콩으로 가는 일행에 7명의 선주들이 합세하게 된다. 그들은 주로 동해안에 살고 있는 선주들이다. 그들을 인솔하여 허선비는 하동에서 온 이인용의 배와 장병화가 운전하는 배에 나누어 타고서 도합 10명이 홍콩으로 간다. 그곳에서 금괴를 주고서 각자 통통배를 한 척 씩 구입한다.

그리고 역시 홍콩 항 연안에서 한달간 운전하는 방법을 이인용과 장병화로부터 철저하게 배운다. 그 다음에 각자 선박을 몰고서 이인용의 배를 지도선으로 삼아 조선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남해안에 도착하자 이인용은 하동으로, 그리고 장병화와 허선비 그리고 기타 선주들은 동해안 각자의 항구로 돌아간다;

그와 같이 울산과 포항 그리고 영덕의 앞바다에서 통통배가 먼저 운용되기를 시작한다. 그것을 보고서 영해 도호부경상 좌수영에서 한양의 병조에 상소문을 올린다. 그 내용이 증기기관을 부착한 함선을 마련하는 것이 수군의 기동력을 높이는 방법이라는 설명이며 그러한 신식함선을 도입하자는 제안이다;

그러나 흥선대원군은 그 요구를 외면한다. 그 이유는 서해안으로 들어오는 서양의 함대를 상대하기 위하여 포대를 설치하는데 재정을 우선적으로 사용하고 있으므로 수군의 요청을 당장은 들어줄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한 이야기를 전해 들으면서 허선비가 혼자서 생각하고 있다; “조선의 재정상태라고 하는 것이 참으로 빈약하다. 그 이유는 다분히 양반들이 세금을 내지 아니하고 있기 때문이다!… “.

그의 상념이 한숨과 더불어 이어지고 있다; “지금의 대원군의 조정은 세도정치 당시와 별로 다름이 없다. 돈을 받고 상민을 대거 양반으로 만들어주고 있으니 평민으로부터 거두는 세수가 자꾸만 줄어들고 있다. 그러니 무슨 재정으로 신식군대를 만들 것이며 동력선을 갖출 것인가? 앞으로가 더 큰일이겠구나!... “.

허선비는 수년동안 어로작업을 하는 시기에는 울산 방어진 그 집으로 가서 계속 선장으로 일하고 있다. 그가 그렇게 하고 있는 이유는 장병화와 함께 어획고를 많이 올려서 어민들에게 신식어선이 참으로 좋다는 사실을 지속적으로 선주들과 어민들에게 일깨워주고 싶은 것이다.

그 결과 누구나 신식문명을 받아들이게 되면 얼마나 좋을까? 그것이 조선백성을 일깨우고 선진문명으로 나아가게 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허선비가 굳게 믿고 있는 것이다. 일단 그러한 기풍이 동해안에서 일어나자 그 다음에 허선비는 어떠한 일을 또 시작하게 되는 것일까?...

허선비최선미1868년부터 풍어기가 지나게 되면 딸 허정순을 데리고 동래 초량에 있는 김준우의 료칸을 자주 방문한다;

 그 이유는 장남인 허지동을 만나서 여러가지로 지도하고 싶은 일이 있기 때문이다. 사실 허선비1864년말에 관직을 떠나서 고향으로 돌아오자 그 다음해 봄에 한동안 동래로 가서 장남 허지동을 만났다.

15살이 된 허지동에게 허선비는 자신이 알고 있는 내공법을 전수했다. 물론 방문을 잠그고 은밀하게 전수한 것이다. 그리고 그때부터 자신이 익히고 있는 무예와 학문을 체계적으로 매년 장남 허지동에게 가르치고 있다.

그런데 1868년부터는 그 일이 더욱 쉽다. 왜냐하면, 마차가 아니라 통통배를 타고서 바다로 하여 동래로 들어가면 편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18세가 된 허지동은 부친 허선비로부터 더 많은 학문과 무예를 배우게 된다.

그렇게 지내고 있는데 1866년에 하루는 허지동이 같은 료칸에서 3년간 머물고 있는 4살 연상의 젊은이에 관한 이야기를 부친 허선비에게 해준다. 그 이야기를 듣자 허선비가 크게 흥미를 가지고 되묻는다; “지동아, 옆방에 1864년부터 오래 머물고 있는 젊은이의 이름이 최강일(崔康鎰)이고 그가 경주사람 최경상(慶翔)의 조카라고 하는 것이 사실이냐?... “. 어째서 허선비가 그렇게 되묻고 있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