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선비 이야기(손진길 소설)

허굉필(許宏弼) 허선비 이야기51(손진길 소설)

손진길 2023. 10. 12. 11:47

허굉필() 허선비 이야기51(손진길 소설)

 

허굉필의 가문은 본래 넓은 김해평야에서 큰 농사를 짓고 있는 대농(大農)의 집안이다. 지금은 가형인 허상필()이 성혼하였지만 그는 분가하지 아니하고 부모님을 모시고 농사를 짓고 있다. 고향에서 조상대대로 넓은 전답을 소유하고 있기에 허굉필은 유복한 가정에서 자란 인물이다.

그렇지만 그가 지방수령으로 지난 14년간 구례, 영덕, 김포, 거제에서 지내는 동안 한가지 발견하고 있는 사실이 있다. 그것은 넓은 평야가 있는 김포를 제외하고 다른 곳에서는 농업소득과 어업소득으로 백성들이 생활을 꾸려가기 상당히 힘들다는 것이다.

농업에 있어서 풍년이 계속되고 어업에 있어서 어획량이 많으면 문제가 크게 없지만 흉년이 들고 태풍 등으로 어획량이 크게 줄어들게 되면 그때에는 농민과 어민들이 생계의 위협에 봉착하고 굶주리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주(地主)에게 내야 하는 소작료와 ()에 바쳐야 하는 각종 세금은 줄어들지가 않는다.

그와 같은 풍흉의 계절적인 어려움 이외에도 조선 팔도에서는 심각한 구조적인 어려움이 둘이나 더 있다;

하나는, 세도정치가 60년이나 지속되면서 권신에게 돈을 주면 평민이 양반이 되고 있다. 그에 따라 군역의 부담을 지는 평민의 수가 줄어들면서 그 부담이 자꾸만 가중되고 있는 것이다;

또 하나는, 보릿고개를 넘기기 위하여 어쩔 수 없이 관에서 곡식을 빌렸는데 이듬해 추수하고서 환곡을 하는데 있어서 그것이 너무나 고리대인 것이다. 따라서 내년의 춘궁기를 견딜 재간이 도저히 없다;

더구나 군포조차 바칠 여력이 없다. 유일한 살길은 고향을 떠나 야반 도주하여 깊은 산에 들어가서 화전민(火田民)이 되거나 아예 신분을 숨기고 타향에서 품꾼으로 떠도는 것이다. 야반 도주하는 유민의 수가 자꾸만 늘어나지만 조정과 관아에서는 마을공동체에서 그 부담을 전부 나누어 지도록 제도화하고 있다;

그 결과 1862임술년(壬戌年)이 되자 초봄에 드디어 민란(民亂)이 발생한다. 그 최초의 발생지역이 경상도 남부 진주(晋州)의 작은 지역이므로 거제부에서 크게 멀지가 아니하다. 개인적으로는 허굉필1861년 봄에 거제부사로 부임하여 한해를 지내고 1862년 초봄이 되자 농토가 나름대로 많이 있는 진주지역에서 민란이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그 이유는 위와 같은 계절적이고 구조적인 문제에 또 하나의 요인이 더해졌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그 지역에 진주목경상우병영이 병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행정기관인 진주목과 군사기관인 경상우병영이 경쟁적으로 군포와 고리대 환곡을 농민들에게 강제하였기에 그 피해가 극심했던 것이다.

농민들이 한해농사를 잘 지어도 지주와 조정에 소출을 바치고 나면 살림이 빠듯한데 갈수록 군포의 부담과 환곡의 부담이 가중되니 미칠 지경이다. 더구나 진주목에 더하여 경상우병영에서도 농민을 대상으로 가혹하게 세금을 징수하고 있으니 도저히 견딜 재간이 없어서 농민들이 봉기한 것이다;

그러나 농민의 봉기라고 하는 것이 기본적으로 지금의 왕정을 뒤엎자고 하는 식의 정치적인 반란이 아니다. 그러므로 농촌의 현실을 반영하여 작금의 세제(稅制)를 합리적으로 개혁하면 수그러들기 마련이다. 그런데 오랜 세월 안일하게 세도정치를 계속해온 한양의 조정대신들이 그 심각성을 외면하고 임시방편으로 문제해결에 나선다.

그 결과 진주의 민란이 그만 경상도, 충청도, 전라도의 삼남(三南)지방에 들불처럼 널리 퍼지고 만다. 따라서 1862년 한해는 초봄부터 여름 끝자락까지 요란한 민란의 발생과 그것을 토벌하는 관군의 살기가 등등하다;

그것을 별로 멀지 아니한 곳에서 바라보고 있는 거제부사 허굉필은 마음이 답답하기만 하다. 따라서 그는 깊이 생각하여 나름대로 문제의 본질을 다음과 같이 파악하기에 이른다; “민란의 발생요인은 따지고 보면 두가지이다; 하나는, 중앙 집권적인 조선의 통치체제가 본질적으로 지니고 있는 모순이다. 또 하나는, 세도정치의 단맛에 취해 있는 조정대신들의 잘못이 초래하고 있는 것이 민란이다”.

허부사는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그 점을 다음과 같이 구체적으로 파악하고있다;

첫째로, 외직인 지방의 수령으로 나오면 그 임기가 평균 3년이 되지 않는다. 그 이유가 두가지이다;

(1)  하나는, 너나없이 중앙으로 다시 올라가려고 발버둥을 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방수령으로 있으면서 돈을 마련하여야 조정대신에게 인사청탁을 할 수가 있으니 좋은 목민관이 되는 것이 아니라 농민을 수탈하는 자가 되고 만다.

(2)  또 하나는, 한곳에 지방수령으로 오래 있게 되면 자신의 터전으로 만들어 지방세력을 형성할 가능성이 있다. 그것은 중앙집권제 국가인 조선의 통치에 있어서 장애요인이 된다. 결국 지방수령의 임기를 2-3년 정도로 제한할 필요가 있다. 현실이 그러하니 애초에 좋은 목민관이 되려고 해도 3년의 짧은 임기로는 조선에서 가능한 일이 아닌 것이다.

둘째로, 지방수령을 보좌하고 있는 6방의 장들과 관리들인 향리들은 국가에서 받는 봉록이 전혀 없다. 그 대신에 조정에서는 향리들이 자신들의 직무와 권세를 이용하여 요령껏 관내에서 먹고 살도록 묵인하고 있다. 그러니 그들이 각종 이권을 탐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명분만 있으면 무슨 핑계를 마련해서라도 수탈에 나선다;

참으로 조선의 중앙집권제라고 하는 것은 지방의 농어민들에게 있어서는 가렴주구(苛斂誅求, 가혹하게 세금을 거두거나 백성의 재물을 억지로 빼앗는 )의 제도운영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1862년 임술년 한해동안 그와 같은 3남지역의 민란소식을 들으면서 허부사는 한양의 조정에서 세도정치가 이제는 막을 내려야 한다는 생각이 더욱 굳어지고 있다. 조정대신들이 정치자금을 마련하기 위하여 전국적으로 양민들에게서 돈을 받고 양반으로 신분을 바꾸어 주고 있으며 죽은 조상들에게 벼슬까지 팔고 있으니 그것이 정치적인 개혁의 대상인 것이다;

그것 뿐만이 아니다. 지금의 조선의 조정은 청나라의 황제를 섬기면 만사가 태평이라고 하는 이상한 사대주의와 무사안일사조에 푹 빠져 있다. 산업화를 먼저 성취한 서양의 세력이 청나라에 이어 일본에까지 들어오고 있는데 조선의 조정은 천하태평이다. 그러한 세월이 계속되면 조선이라고 하는 나라가 어떻게 될지 앞날이 캄캄하다.

그래서 거제부사인 허굉필은 자신의 가정부터 조선의 앞날을 대비하는 일에 앞장을 서고자 한다. 그가 자신의 결심을 그해가 가기 전에 최선미에게 밝히고 있다; “선미, 우리 차남 지서(知西)를 이제는 하동으로 보내어 이인용으로부터 청나라 말과 영어를 모두 배우도록 조치합시다. 그가 형인 지동이처럼 조선의 개화와 산업화의 일꾼이 되어야 합니다”.

최선미가 고개를 끄떡이며 찬성을 한다; “옳으신 말씀입니다. 지서가 벌써 8살이니 하동으로 보내도록 하지요. 그리고 막내인 정순이도 5살이니 이제는 내아에서 혼자 지낼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 저도 관아에 나가서 적극적으로 다모 일을 보겠습니다. 여자 죄수들을 돌보는 것이 저의 소임이지요”.

그해 186210월 중순에 허부사가 차남 허지서를 데리고 준마를 타고서 하동으로 달린다. 그는 하동현에서 통역으로 일하고 있는 이인용을 찾아서 그에게 지서를 맡긴다. 작년 10월 하순에 허굉필이 하동을 방문하여 내년에 자신의 차남을 그 집에 맡길 것이라고 미리 말해 둔 바가 있다. 따라서 이인용 부부가 허지서를 맡아서 키우면서 청나라 말과 영어를 가르치기 시작한다;

그 다음에 허굉필은 예년과 마찬가지로 구례에 살고 있는 거상 김상준을 만나 거액의 ()을 받는다. 천석지기 소출의 4분의 1을 환으로 받고 있는데 그것이 백미 500가마니에 해당한다. 지금까지 10년 이상 그가 받은 돈을 전부 투자하여 허굉필은 고향 김해평야에서 전답을 사고 있다.

물론 그 중의 일부는 3자녀를 면천하는 비용으로 사용한 바가 있다. 그리고 또 일부는 장차 처가 집안의 양반신분을 회복하는 일에 사용하고자 계획하고 있다. 그 다음에 남는 재산에 대해서는 조선의 개화와 산업화에 필요한 종자돈으로 활용할 계획을 세우고 있는 부부가 허굉필최선미이다.

거제부로 돌아오기 전에 허부사는 고향을 방문하여 부모와 가형이 있는 자리에서 자신이 받은 대부분의 환을 그들에게 맡긴다. 그 돈으로 더 많은 고향의 전답을 사들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나머지 일부는 동래 초량에 있는 김준우 부부에게 전달한다. 그곳에서 장남 허지동을 만나고 허부사는 거제부로 돌아오는 것이다.

그렇게 한해를 보내고 나자 새해 1863년이 밝아온다. 2월에 들어서자 한양의 조정에서 기별이 온다. 허굉필1계급 승진시켜 정3참의 벼슬에 봉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조 참의로 임명하니 빨리 한양으로 올라오라는 인사명령이다;

그와 같은 인사와 더불어 한양의 조정에서 소폭의 판서와 참판의 인사가 더불어 이루어지고 있다. 마침내 병조참판 홍재덕이 병조판서로 올라서고 있다. 그에 따라 병조참의 조항준이 병조참판이 되고 있다. 그리고 거제부사 허굉필이 이조참의에 임명되고 있는 것이다.

어째서 그와 같은 놀라운 인사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일까? 그 이유는 세도정치를 강력하게 펴고 있던 안동 김씨의 칼날인 쌍문점의 살수집단이 흥선군홍재덕 그리고 조항준허굉필의 연합세력에 의하여 지난 18607월에 궤멸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조정에서는 병조참판인 홍재덕과 병조참의인 조항준의 입김이 강해지고 있다. 그러다가 18626월에 갑자기 병조판서인 김용수(金勇修) 대감이 중풍에 걸려서 조정회의에 나오지를 못하게 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3남 지역에서는 민란이 계속 발생하고 있는데 병권을 장악하고 있는 병조판서가 조정에 나오지를 못하니 안동 김씨 대신들이 고민이다. 우선 급한대로 병조참판 홍재덕이 토벌군을 내보내고 선무사를 먼저 현장에 보내고 있다.

참판 홍재덕과 참의 조항준이 기민하게 대처한 결과 가을이 오기전에 삼남지방의 민란이 수습되고 있다. 그 공로를 안동 김씨의 실세들이 무시할 수가 없다. 따라서 숙의를 거듭한 끝에 홍재덕을 병조판서로 임명하게 된다.

그와 같은 결정의 배후에는 사실 왕대비인 조씨와 대비인 홍씨의 입김이 작용하고 있다. 왕대비는 친정 조카인 조항준을 병조참판으로 만들기 위하여 홍재덕을 병조판서에 임명하도록 영향력을 행사한 것이다. 그리고 대비는 당숙인 홍재덕이 병권을 장악하는 것이 자신에게 유리하므로 적극 나선 것이다.

흥선군은 그때 왕대비인 조씨에게 접근하여 다음과 같은 계책을 말하고 있다; “우선 홍재덕조항준으로 하여금 병권을 장악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 다음에는 금상이 승하하는 경우 후계자를 소신의 어린 아들로 선택하시고 왕대비께서는 수렴첨정을 하십시오. 그것이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를 뿌리뽑고 조선의 국왕의 위엄을 되찾는 길입니다”;

그와 같은 복잡한 정치적인 역학관계가 한양의 권문세가를 중심으로 하여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한 묘한 시기 18632월말에 허굉필은 거제부사의 자리를 떠나서 최다모와 딸 정순을 데리고 한양으로 가고 있다. 아직 겨울의 마지막 추위가 남아 있다. 그렇지만 쌍두마차를 몰고 있는 허참의는 땀을 흘리고 있다.

다모 최선미는 딸 허정순을 꼭 껴안고 있다. 이제 6살이 되어가는 정순은 남에서 북으로 달리고 있는 마차 안에서 바깥구경을 신나게 하고 있다. 마차에는 간단한 옷가지와 가재도구만이 실리어 있다. 당장 한양에 도착하면 일단은 남산골 최경수의 하숙집을 찾아갈 생각이다.

그곳에서는 최경수의 아들인 최한주(崔漢州)가 대를 이어서 하숙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가는 걸음에 수원에 들러 허굉필은 장인과 장모를 만나보고자 한다. 그들은 과연 어떻게 살고 있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