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선비 이야기(손진길 소설)

허굉필(許宏弼) 허선비 이야기27(손진길 소설)

손진길 2023. 8. 26. 06:46

허굉필() 허선비 이야기27(손진길 소설)

 

허좌랑이 눈을 번쩍 뜨고서 강이방에게 말한다; “강이방, 1천 마지기의 논을 이조천변의 땅을 개간하여 만들고자 하는데 시간이 어느 정도 걸릴까요? 자금은 본관이 책임지고 마련해볼 테니 호방인 김호준 그리고 공방인 장사무와 상의를 해주면 좋겠어요. 부탁합니다… “.

사또의 명을 받은 강이방이 김호방 및 장공방과 진지하게 상의를 한다. 그리고 그들 3인이 허사또를 배알한다. 그 자리에서 김호방이 대표로 말한다; “사또 나리께서 전적으로 책임을 지시고 자금을 마련하여 대신다고 하시면 저희들이 합심하여 한번 나서 보겠습니다. 그 이유는… “.

잠깐 기침을 하고서 김호준 호방의 말이 이어진다; “무엇보다도 이조천변의 땅을 개간하여 논을 만들게 되면 우리 구례현의 인구를 늘릴 수가 있기 때문이지요;

 호방인 저의 입장에서는 현의 세수(稅收)가 늘어나게 되니 그것이 두고두고 좋은 것이지요.  그리고 개간한 논에 대해서는 일단 농민들에게 소작을 주고 매년 소작료를 호방인 제가 거두어서 개간자금을 투자하신 분들에게 배분하면 됩니다. 또한… “.

허좌랑이 진지하게 듣고 있다. 드디어 김호방의 중요한 말이 들려온다; 저희들이 인력을 최대한 동원하여 2년안에 그 공사를 끝내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니 5백 마지기의 논을 살 수 있는 그 자금만 사전에 마련하여 주시면 되겠습니다!... .

그 말을 듣자 허좌랑이 김호방의 옆에 서있는 공방 장사무를 쳐다본다. 그리고 확인 차 질문한다; “장공방, 확실하게 개간공사를 2년안에 끝낼 수가 있겠어요? 만약 장공방이 지금 확약한다고 하면 내가 이제부터 조속히 자금을 모집할 생각입니다마는… “.

장공방이 허사또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고서 장부 답게 말한다; “제 고향인 구례현에서 농토의 면적을 넓히는 뜻있는 공사입니다. 사실은 지금까지 자금이 없어서 하지 못한 우리들의 숙원사업입니다. 그러니 제가 앞장을 서서 반드시 2년 안에 이조천변에서 논을 1천 마지기 개간하도록 하겠습니다. 아무 걱정하지 마시고 사또 나리께서는 필요한 자금만 마련하여 주십시오!”.

그 말을 듣자 허좌랑이 고개를 크게 끄떡인다. 그리고 그는 최다모와 함께 열흘동안 고향의 친지들을 방문하고 오겠다고 강이방에게 말하고서 자리를 비운다. 열흘 후에 두사람이 마차를 끌고서 구례 현청에 들어온다. 거기에는 은괴가 10개의 상자에 1천개나 가득 실려 있다. 5백 마지기를 능히 살 수 있는 거금이다.

그때부터 구례현의 섬진강 유역 이조 천변에서는 100명의 인부가 동원되어 연일 개천의 자갈을 걸러내고 땅을 일구느라고 구슬땀을 흘리고 있다;

 그들에게 매일같이 노임을 지불하고 있다. 그렇게 2년이 지나가자 거짓말처럼 1천 마지기의 논이 마련되고 있는 것이다.

그 논을 1가구에 10마지기 씩 소작농에게 배분한다. 그들 소작농들은 지난 2년간 개간사업에 열심히 참여한 가장이 있는 집들이다. 그들에게 일일이 논을 배분하고 가을에 3할의 소출을 거둘 것이라고 호방 김호준이 선언하고 있다. 조선에서는 보통 4할 내지 5할의 소출을 지주가 가지고 간다. 하지만 허굉필은 단지 3할만 거두라고 김호방에게 미리 말한 것이다.

3년째가 되는 1851년 가을걷이가 끝나자 호방이 세금을 미리 공제하고 25푼의 곡식을 허굉필에게 주고 있다. 그것을 허좌랑은 구례현에서 곡물을 모두 사들이고 있는 큰 상인 김상준(金相俊)에게서 환으로 바꾸고 있다. 거상 김상준이 사실은 김호방의 가형이므로 그 일이 쉽게 이루어지고 있다.

그때부터 매년 허굉필은 거상 김상준10월 하순에 만나고 있다. 그 이유는 김행수로부터 구례현의 개간 논 1천 마지기에서 생산되고 있는 쌀 2천 가마니의 4분의 15백 가마니의 소출을 환으로 계산하여 받고 있기 때문이다.

그 돈으로 허굉필은 착실하게 은괴를 사서 철저하게 보관한다. 왜냐하면 그 자금으로 그는 훗날 최다모와의 사이에서 태어나는 자녀들을 모두 양민으로 만들고자 하며 또한 그 가문의 신원회복을 완전히 이루어 주기를 지극히 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3년을 구례현감으로 지내고 있는 동안에 3가지의 사건이 발생하고 있다. 그 내용이 다음과 같다;

첫째로, 첫해인 18497월 중순에 금상이 승하하고 후계왕으로 강화도령이 즉위하고 있다. 그것은 훗날 헌종으로 불리게 되는 금상이 붕어하고 19세의 강화도령 이원범(李元範)이 조선의 제25대 임금이 된 것을 말하고 있다. 이원범은 본래 정조(正祖) 임금의 바로 아래 이복동생인 은언군(恩彦)의 손자이지만 서자이다;

그렇지만 정조 임금이 1800년에 승하하자 그의 세자가 너무 어린 나이에 즉위하게 된다. 당시 섭정을 하게 된 여인이 경주 김씨 출신으로서 영조의 후계 왕비였던 정순왕후(貞純王)이다. 그녀는 정적이 될 수 있는 왕의 숙부 은언군부터 제거한다. 그 명분이 은언군의 아내와 며느리가 천주교를 신봉하여 조선의 미풍양속을 크게 해치고 있다는 것이다.

그 때문에 은언군이 사사가 되고 그의 아들들이 왕족으로 대접 받지 못하고 귀양살이를 거듭하다가 차례로 죽고 만다. 그러므로 그 후손인 이원범도 한양에서 태어나 겨우 소학을 떼었을 뿐 15세가 되자 강화도로 유배가서 19세가 될 때까지 고난 가운데 연명하고 있다;

특히 이원범은 적자가 아니고 서자 출신의 왕족이다. 그러하기에 그가 정상적으로 왕이 되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와 같은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도리어 헌종 당시에 세도정치를 펴고 있는 안동 김씨에게는 좋은 조건이다.

따라서 순조의 왕비였던 안동 김씨 출신인 대왕대비 순원왕후(純元王)가 강화도령으로 불리고 있는 이원범덕완군(德完君)으로 봉하고 자신의 남편인 순조의 양자로 삼아 신왕으로 즉위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녀가 섭정함으로써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가 계속된다.

물론 새로운 임금 철종의 정비도 안동 김씨 출신으로 간택이 되고 있다. 그와 같은 일련의 변화를 18497월 하순에 전해 듣고서 허굉필최선미에게 딱 한마디를 하고 있다;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가 생각보다 오래갈 것 같아요. 당신 가문의 신원회복이 늦어질 것 같아요. 좀더 세월을 기다려 보도록 하지요!... “.

  둘째로, 허굉필이 구례현감으로 부임하고서 실질적으로 다모인 최선미와 살림을 차리고 있다. 겉으로 보기에는 최선미가 현지처에 불과하다. 하지만 허좌랑의 생각은 그것이 아니다. 그녀가 바로 그의 하나뿐인 반려자인 것이다. 그와 같이 알뜰살뜰하게 살고 있는데 이듬해 18502월에 장남이 태어난다;

그 이름을 허굉필이 허지동(許知東)이라고 짓고 있다. 그 의미는 청나라의 속국으로 살아가고 있는 조선의 쇄국정책에 억매이지 말고 부디 동쪽에 있는 섬나라 왜국(倭國) 일본(日本)의 변화를 미리 알고 대처를 잘 하라는 것이다.

그와 같은 정치적인 의식을 보이고 있는 허굉필은 자신이 그 일에 앞장을 서고 있다. 왜냐하면, 그는 구례현의 현감이 되자 이웃에 살고 있는 이지룡 곧 청나라에서 조선으로 이민 와서 통역으로 일하고 있는 화교(華僑) 이지룡에게서 청나라 말과 문물을 열심히 배우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허굉필은 훗날 기회가 있으면 동래 초량에 살고 있는 왜국 말 통역인 김준우(金俊宇)에게서 일본의 문물과 언어도 직접 배울 생각을 일찌감치 가지고 있다. 그와 같이 이웃나라의 변화를 읽고자 노력하고 있는 인물이 19세기 조선의 선비 허굉필인 것이다.

따라서 그는 장남 허지동에게서 관노비라고 하는 신분의 멍에를 우선적으로 없애 주고자 한다. 그 방법은 생각보다 간단하다. 돈으로 처방하면 되는 것이다. 그 일을 위하여 그는 미리 은괴와 더불어 철전을 은밀하게 보관해둔 것이다. 은괴는 모조리 간척사업을 하는데 사용하고 있다.

이제는 나름대로 그 철전을 사용하고자 한다. 따라서 그는 인편으로 전주감영에 있는 전라도관찰사(全羅道觀察使) 김광준(金光俊)에게 넉넉하게 속전을 보내어 관비 최다모에게서 태어난 허지동의 신분을 양민으로 바꾸어 달라고 요청한다;

2품인 김광준은 외직을 벗어나 한양에 들어가서 조정의 진짜 참판이 되고자 노력하고 있으므로 개인적으로 재물이 필요하다. 따라서 돈을 많이 받고서 구례현감 허좌랑의 요청을 그대로 승인한다. 그것이 참으로 다행이다.  

셋째로, 허굉필이 구례현감으로 부임한지 만 3년이 되는 18521월 중순에 그가 조정의 정기인사에서 한 계급 품계가 높아지고 있다. 6좌랑에서 종5판관이 된 것이다. 그리고 2월초에는 임지가 바뀌고 있다. 이제는 현감이 아니라 현령(縣令)이 되었기에 허판관(許判官)의 임지가 경상도의 동해 바닷가 큰 현인 영덕현(盈德縣)이다.

따라서 허판관은 지난 3년간 지낸 구례현감의 자리를 내려놓고 18522월초에 최다모 및 아들 허지동과 함께 경상도 영덕현으로 이주를 시작한다. 그가 구례현을 떠나는 날 육방의 관속은 물론이고 지방유지들이 매우 서운해 한다.

특히 향청(鄕廳)의 우두머리인 좌수() 손주영(孫柱榮)이 다음과 같이 말한다; “허판관, 그대가 영전하여 이곳을 영광스럽게 떠나게 되니 내가 개인적으로는 기쁘면서도 서운합니다. 하지만 진심으로 허판관의 장도를 축하합니다. 그동안 이곳 현청에 허사또가 버티고 있는 것만으로도 사실 나는 매우 든든했어요. 내 조카인 것만 같아서 속으로는 기쁘기도 했고요. 이제 멀리 경상도 영덕 현령으로 떠나가지만 언제 기회가 닿으면 이곳을 다시 방문해주세요. 내가 크게 잔치를 베풀어 줄 것입니다!... “.

28세의 허판관65세가 되어가고 있는 좌수 손주영 진사의 손을 마주 잡고서 깊이 허리를 굽혀서 하직인사를 올린다. 그는 진심으로 자신의 백부 격으로 손진사를 대접하고 있는 것이다. 그 모습을 보고서 육방관속과 지방유지들이 한마음으로 이별을 아쉬워하면서 허판관을 배웅한다.

이제 구례현을 떠나고 있는 허굉필 가족은 경상도 영덕현에서 어떠한 일들을 만나게 되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