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24년 설교문(손진길)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라는 예수님 말씀의 깊은 의미(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3. 8. 15. 12:39

제목;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라는 예수님 말씀의 깊은 의미”(22:31-33, 11:23-27, 14:16-20, 참고구절은 행7:4, 3:5-16, 6:37-40, 12:28-33절임)

설교일; 주후 2023820일 주일

작성자; 손진길 목사(815일 화요일 작성)

 

모세가 기록하고 있는 모세오경 가운데 출애굽기 제3장을 살펴보면 그가 80세가 되었을 때에 미디안 광야 변경에서 양을 치다가 우연히 호렙 산 중턱의 꺼지지 아니하고 있는 가시나무 불꽃 가운데서 그를 부르고 계시는 여호와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3:1-6). 여호와의 말씀 가운데 모세를 출애굽의 지도자로 세우신다는 하나님의 뜻이 드러나고 있습니다(3:9-10);

그러나 40세가 될 때까지 애굽의 황실에서 제국의 상속권을 보유하고 있는 핫셉수트 공주의 양자로서 권세를 누리고 살아온 모세로서는 애굽의 황제인 바로가 엄청난 권력을 지니고 있음을 경험적으로 익히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절대권력자 바로와 비교할 때 지금의 모세 자신은 타국 미디안 땅의 일개 양치기에 불과합니다.

그러한 처지의 모세가 무슨 배짱으로 애굽의 황궁을 찾아가서 바로를 만날 수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감히 바로에게 애굽의 동북면 고센 땅에서 대를 이어 중노동에 시달리고 있는 이스라엘 자손들을 일시에 해방시켜 달라고 요청할 수가 있겠습니까? 도무지 세상적으로 불가능한 일을 하나님은 80세의 노인 양치기 모세에게 맡기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제2장의 내용을 참조하면, 모세는 지난 40년 세월을 애굽에서 도망자 신세가 되어 타국 미디안 땅에서 양치기라는 비천한 신분으로 계속 살아온 것이 맞습니다. 그러므로 80세의 노인 모세는 그 엄청난 사명을 맡을 담력이 전혀 없습니다.

사실 미디안의 제사장 이드로의 사위가 되어 처가살이를 하면서 장인의 양치기로 근근이 살아가고 있는 80세의 초라한 모세의 입장에서는 그와 같은 엄청난 사명을 맡지 아니하는 것이 올바른 판단으로 보입니다. 따라서 모세의 반응이 다음과 같습니다; “11.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되, 내가 누구이기에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3:11).

그런데 모세가 자신의 세상적인 경험과 이성적인 판단에 빠져서 그만 깜빡하고 있는 중요한 대목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모세에게 출애굽 지도자의 사명을 부여할 때에 하나님께서 먼저 말씀하고 계시는 중차대한 내용이 있다는 것입니다.

훗날 그 대목에 대한 모세의 기록이 다음과 같습니다; “8. 내가(여호와 하나님이) 내려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지방에 데려가려 하노라. 9. 이제 가라… “(3:8-9).

한마디로, 그 말씀의 뜻은 모세를 혼자 하나님의 선지자로 애굽에 보내신다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모세보다 먼저 하나님께서 애굽으로 들어가시며 모세가 하나님의 선지자로서 행동할 수 있도록 제반 조치를 우선적으로 마련하여 주겠다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모세는 혼자서 애굽에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처음부터 끝까기 창조주 하나님께서 모세와 함께 행동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쉽게 말하자면 임마누엘의 은혜이며 하나님과의 동행의 역사입니다.

그와 같은 의미가 출애굽기 제3장 그 다음 구절에서 더 알기 쉽게 설명되고 있습니다. 그 구절들을 차제에 나름대로 풀이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12.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그 백성을 애굽으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3:12);

1)    임마누엘 하나님의 의미가 바로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세가 호렙 산에서 창조주를 만나 사명을 부여 받고 하나님의 선지자로 한평생을 살아간 것과 같이 출애굽한 이스라엘 자손들도 호렙 산, 나중에는 시내 산에서 하나님을 만나 이방 땅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제사장나라 거룩한 백성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19:4-6).

2)    그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제자인 성도들도 그 심령속에 임재하신 보혜사 진리의 성령님의 내주 역사하심으로 말미암아 성경말씀의 깊은 뜻을 깨닫고 그때부터 그리스도의 복음을 실천하는 선지자로 남은 인생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14:16-20, 28:18-20, 24:44-53, 1:8, 2:1-42).

(2)  14.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3:14); 창조주 하나님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가장 쉽게 표현하고 있는 대목입니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는 말씀의 뜻은 적어도 다음 3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1)    첫째가, 피조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피조물은 타자에 의하여 만들어진 존재입니다. 그것은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제조자로 말미암아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와 달리 창조자가 없는 그 분이 바로 스스로 있는 자 곧 창조주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2)    둘째가, 스스로 자의에 의하여 의사결정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피조물의 능력과 영향력으로 하나님의 보좌를 움직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에 따라, 피조물에 불과한 종은 자신의 뜻과 행동을 주인이신 창조주 하나님의 뜻에 맞추어 나가야 합니다. 그 반대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요컨대, 창조주 하나님의 뜻을 피조물인 인간의 뜻에 맞추어 나가고자 시도하는 것은 패역 그 자체입니다. 역사적으로 그와 같이 시도하는 자들이 바로 거짓 그리스도이고 거짓 선지자이며 제멋대로 우상을 만들어 섬기고 있는 우상 숭배자들입니다.

3)    셋째가, 이 세상이 만들어지기 이전에 스스로 존재하신 분이 바로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그것이 이른바 창조주의 선재성(先在性, pre-existence)’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창조주의 한 위격이심을 세례 요한이 훗날 다음과 같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29. 이튿날 (세례)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30.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는 사람이 있는데 나보다 앞선 것은 그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창조주의 선재성)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31.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베푸는 것은 그를 이스라엘에 나타내려 함이라 하니라. 32. 요한이 또 증언하여 이르되, 내가 보매 성령이 비둘기 같이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그의 위에 머물렀더라. 33.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베풀라 하신 그 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는 이인 줄 알라 하셨기에, 34.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언하였노라 하니라”(1:29-34); 세례 요한은 창조주에 의하여 피조된 인간입니다. 따라서 그는 회개의 물세례를 백성들에게 주고 있습니다. 그와 달리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며 창조주의 위격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가고자 결단하는 사람들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십니다. 그와 같은 사실을 세례 요한이 백성들에게 말하고 있는 구절인 것입니다.

(3)  15. 하나님이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너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칭호니라”(3:15); 오늘의 본문과 직결되고 있는 구절입니다. 모세는 동족인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창조주 하나님의 정체를 가장 쉽게 설명해주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1)    그때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이 이해하기 쉽게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말씀의 뜻은 한마디로, 영이신 하나님 영생의 여호와 앞에서 자신의 인생을 살아간 아브라함과 이삭 그리고 야곱은 영원히 하나님 품에서 영생을 누리고 있다는 것입니다(22:32, 11:26, 14:19-20);

2)    여호와 하나님을 모시고 그 뜻을 실천하면서 살아갔기에 호렙 산에서 모세에게 허락하신 하나님과 동행하는 인생이 벌써 그들 믿음의 선진들에게 이루어진 것입니다(11:8-16).

3)    그러므로 앞으로 아브라함, 이삭, 야곱, 그리고 모세와 같은 모습의 인생을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게 되면 누구나 여호와 하나님의 영적인 임재와 동행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영생구원을 확신하며 천국에 이를 때까지 마음속에 그 기쁨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의미에서 오늘의 본문에서는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계십니다; “31. 죽은 자의 부활을 논할 진대, 하나님이 너희에게 말씀하신 바, 32.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하시니, 33. 무리가 듣고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더라”(22:31-33).

오늘날에도 예수님의 가르치심에 깜짝 놀랄 수밖에 없습니다. 그 이유는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라는 말씀의 뜻을 예수님께서 너무나 알기 쉽게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니라고 풀이하여 주시기 때문입니다(22:32).

그렇다면 이제는 하나님 보시기에 살아 있는 자죽은 자의 차이가 무엇인지를 성경말씀 가운데 찾아보고자 합니다. 고맙게도 집사 스데반이 고별설교를 하면서 그 사실을 은근히 말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족장 데라가 하란에서 죽자 그의 장남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쫓아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간 것으로 그가 증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7:4).

그런데 그 말씀 가운데 다음과 같은 깊은 의미가 숨어 있습니다;

(1)  첫째, 족장 데라가 70세에 낳은 아들 아브람이(11:26) 75세가 되자 145세의 노인인 부친을 홀로 하란 땅에 남겨두고 여호와의 뜻을 준행하기 위하여 가나안으로 남행하고 맙니다(12:1-5). 그때부터 족장 데라는 205세 향년을 맞이할 때까지 하란 땅에서 계속 살아가고 있습니다(11:31-32). 그런데 집사 스데반은 여호와의 명령을 거부하고 제멋대로 하란 땅에서 부를 축적하고 있는 족장 데라는 하나님 보시기에 이미 죽은 자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7:4);

(2)  둘째, 그 점은 일찍이 모세가 기록한 창세기 제6장의 한대목을 되돌아보게 합니다; “3.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120년이 되리라 하시니라”(6:3). 영이신 하나님을 버리고 제멋대로 세상의 부와 향락을 쫓아서 육신적인 삶을 영위하게 되면 누구나 영생의 존재가 아니라 기껏해야 120년의 수명만을 누리는 유한한 인생이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3)  셋째, 창조주 하나님과 동행할 때에 여호와의 생기를 받아서 에덴동산의 아담부부처럼 영생을 누리게 되는데(2:7) 세상사람들이 그만 여호와의 명령을 저버렸기에 결국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아담부부처럼 다음과 같은 동일한 하나님의 처벌을 받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19.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3:19).

이상과 같은 영적인 사실을 이해할 때에 사도 요한이 기록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가운데 이해하기 어려운 다음과 같은 구절들 곧 요3:5-16, 6:37-40, 12:28-33절을 새로운 관점에서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참고로, 그 구절들을 옮기면서 다음과 같이 나름대로  약간의 설명을 구절 내에 삽입하였습니다;

(1)  먼저 요한복음 제3장의 말씀입니다; “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이것은 진리이다), 사람이 (회개의 물세례, 3:26)성령(칭의 받은 성도에게 임하는 성령님의 강림과 내주 역사하심, 1:32-34, 2:1-5)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6.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7.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 8. 바람이 임으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9. 니고데모가 대답하여 이르되, 어찌 그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 10. 예수께서 그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것들을 알지 못하느냐? 11.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우리는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언하노라. 그러나 너희가 우리의 증언을 받지 아니하는 도다. 12.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13.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영생의 몸으로 부활하여 승천한 유일한 사람이 예수그리스도)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14.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대속의 십자가를 지고 희생의 제물이 되어야) 하리니, 15.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대속의 어린양 예수님의 희생을 보고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자는 누구나)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3:5-16).  

(2)  다음은 요한복음 제6장의 말씀입니다; “37.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예정론, 1:4-7),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 38.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39.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무덤 속의 성도를 그리스도께서 영생의 부활로 나아오게 하심, 5:28-29, 살전4:16)이니라. 40.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인생의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주님을 만나 자기 인생의 주인으로 영접하고 부활을 믿어 영생을 얻는 그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세상에 종말심판이 임할지라도 성도는 부활하여 그리스도의 인도로 영생의 천국에 들어감) 하시니라”(6:37-40).

(3)  그 다음은 요한복음 제12장의 말씀입니다; “28.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하시니, 이에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되,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말씀의 성육신과 그리스도의 공생애) 하였고 또 다시 영광스럽게(그리스도의 대속의 십자가 죽으심과 무덤 속 부활과 승천) 하리라 하시니, 29. 곁에 서서 들은 무리는 천둥이 울었다고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천사가 그에게 말하였다고도 하니, 3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소리가 난 것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성도들이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감으로써 영생의 부활을 얻는 것)이니라. 31. 이제 이 세상에 대한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의 임금이 쫓겨나리라. 32.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시니, 33. 이렇게 말씀하심은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보이심이러라”(12:28-33);

이상과 같은 내용을 염두에 두고서 이제부터 본문의 말씀에 대하여 한 구절 씩 간략하게 살펴보고자 합니다. 아울러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얻은 교훈들을 다음과 같이 더불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첫째로, “31. 죽은 자의 부활을 논할 진대, 하나님이 너희에게 말씀하신 바, 32.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하시니, 33. 무리가 듣고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더라”(22:31-33);

(1)  세상 사람들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과 같은 위대한 믿음의 조상들이라고 하더라도 일단 향년을 맞이하여 이 세상을 떠나고 말았기에 다시는 역사 가운데 돌아오지 못하므로 그들조차 죽음의 세계에 완전히 들어가버린 것으로 치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가르치심은 그와 전혀 다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죽은 자의 부활을 기정사실화하고 있습니다(31). 따라서 그들 믿음의 조상들이 세상사람들이 보기에는 죽었는지 몰라도 사실은 영이신 하나님 안에서 그들은 모두 살아있는 존재라고 말씀하십니다(32).

(2)  32절과 같이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아브라함과 이삭 그리고 야곱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믿음의 인생을 이 세상에서 살아갔기에 영생의 하나님께서 그들과 영원히 함께하시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요컨대, 영생의 하나님을 믿고 신실한 종으로 살아간 믿음의 사람은 부활을 통하여 영원히 하나님 안에서 살아있다는 것입니다.

(3)  달리 말하자면, 비록 세상적으로는 죽어서 무덤에 들어갔지만 그리스도의 선례를 쫓아서 훗날 영생의 몸으로 부활할 것이기에 그들은 영원히 영생의 하나님에게 속한 존재들인 것입니다(고전15:23). 그 옛날 모세가 기록한 출애굽기 제3장의 내용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풀이와 가르치심은 유대인들을 깜짝 놀라게 하기에 충분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33).

둘째로, “23.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오라비가 (지금) 다시 살아나리라. 24. 마르다가 이르되,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바리새인들의 가르침 그대로) 내가 아나이다. 2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무덤 속에서 그리스도에 의하여 영생으로 부활함), 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성령님의 내주 역사하심으로 영생구원의 확신을 가진 자)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심령 속 성령님의 전에 영적으로 영생의 삼위일체 하나님이 임마누엘로 임하시고 인생을 함께 살아가고 있으므로 이미 영생구원을 받은 자임), 이것을 네가 믿느냐?(믿음에 대한 참으로 희귀한 예수님의 질문임.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임)”(11:23-26);

(1)  예수님이 제자들을 데리고 예루살렘 동편 교외지역에 자리를 잡고 있는 베다니의 나사로 집을 방문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친구인 나사로가 급한 병에 걸려서 이미 죽고 무덤속에 들어간지 나흘이 되는 날입니다(11:39). 나사로의 여동생인 마르다와 마리아 그리고 아직도 초상집에 남아 있는 가까운 친지들 모두가 여전히 슬픔에 빠져 있습니다. 그런데 마르다를 만난 예수 그리스도는 그녀에게 나사로가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예언하십니다(23). 그 말씀을 마르다가 바리새인들에게서 배운 부활의 가르침으로만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 세상에 종말이 임하면 죽은 자들이 모두 부활하여 여호와의 심판대에 서게 된다는 것입니다(24).

(2)  그때 예수님은 세상 종말에 임하는 부활사건은 물론이고(25) 그 이상으로 당장 이자리에서 실현되고 있는 영적인 부활에 대한 믿음을 말씀하십니다. 그 내용이 다음과 같습니다; “부활과 영생이 무엇인지 그리스도인 예수님이 직접 보여주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대속의 십자가를 지시고 무덤에 들어가셔서 3일만에 영생의 몸으로 부활하여 제자들을 찾아오시게 되면 그때부터 주님을 모시고 남은 인생을 그리스도의 제자 답게 살아가는 성도들에게는 부활의 소망과 영생의 믿음이 넘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사실을 영적인 진리로 믿는 자들에게는 부활과 영생이 현재적인 능력으로 역사하게 될 것이라는 가르침인 것입니다”(26절 의역).

셋째로, “16. 내가 아버지 (하나님)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성령님의 강림과 영원한 내주 역사) 하리니, 17.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세상의 이치를 초월하고 있는 영적인 창조주 하나님을 세상사람들이 믿지 못하고 있음), 이는 그를(영이신 하나님을, 4:24)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성령님의 내주 역사하심으로 말미암아) 그를(영이신 하나님을)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18.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 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영생의 몸으로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오리라. 19.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것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아 있고(그리스도의 영생 부활이 이루어짐), 너희도 살아 있겠음(부활하신 주님의 임재와 동행이 이루어짐) 이라. 20. 그날에는 내가 (부활 승천으로 말미암아) 아버지 안에, 너희가 (말씀의 종이 되어)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성령님의 전에 아버지와 함께 주님이 임재하심)을 너희가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인하여) 알리라”(14:16-20); 다음과 같이 3부분으로 나누어서 조금 상세하게 살펴보고자 합니다;

(1)  16. a. 내가 아버지 (하나님)께 구하겠으니, b. 그가 또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c.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성령님의 강림과 영원한 내주 역사) 하리니, 17.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세상의 이치를 초월하고 있는 영적인 창조주 하나님을 세상사람들이 믿지 못하고 있음), 이는 그를(영이신 하나님을, 4:24)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성령님의 내주 역사하심으로 말미암아) 그를(영이신 하나님을)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14:16-17);

1)    창조주 하나님의 세상심판과 구원의 은혜를 이 세상에 전달하는 보혜사가 두분이라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첫번째 보혜사는 이 세상에 성육신하여 30세부터 제자들과 함께 복음사역의 공생애를 살아가시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 승천하고 나면 또다른 보혜사가 이 세상에 오신다는 예언의 말씀입니다(16b).

2)    그렇다면 또다른 보혜사의 정체가 무엇이며 첫번째 보혜사인 예수 그리스도와의 차이점이 무엇일까요? 무엇보다 또다른 보혜사는 그리스도와 같은 말씀의 성육신이 아니라 성부 하나님의 말씀과 성자 하나님의 가르치심에 합치가 되는 진리가 무엇인지를 영적으로 깨닫게 해주는 하나님의 영 자체입니다(17a).

3)    흔히 진리의 성령으로 이해가 되고 있는 성령님의 임재는 구약시대 극소수 선택 받은 선지자에게 필요한 경우에만 나타난 것입니다. 그런데 부활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아버지 하나님께 요청하여 성도들에게 보내주시는 또다른 보혜사인 진리의 성령님의 강림과 내주 역사하심은 구약시대와 판이하게 다릅니다(16a).

4)    그 이유는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성령님의 강림과 영원한 내주 역사) 하리니”(16c)라고 예수님이 여기서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진리의 성령님은 그리스도의 제자인 성도들의 심령속에 강림하여 영원히 내주 역사하시는 특징을 지니고 있습니다(17b).

(2)  18.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 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영생의 몸으로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오리라. 19.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것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아 있고(그리스도의 영생 부활이 이루어짐), 너희도 살아 있겠음(부활하신 주님의 임재와 동행이 이루어짐) 이라”(14:18-19);

1)    대속의 십자가를 지시면 예수님은 죽음을 맞이하시고 무덤속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것은 세상적으로 말하자면 제자들과의 영원한 이별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창조주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영생의 몸으로 자신이 부활하는 사건이 발생할 것임을 이미 알고 계십니다.

2)    부활하시면 가장 먼저 뿔뿔이 흩어진 제자들을 다시 찾아오시겠다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18). 영생의 몸으로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다시 오시게 되면 그때에는 육신적인 사제지간이 아니라 부활의 소망과 영생의 믿음이 살아 숨쉬는 새로운 공동체가 시작이 됩니다;

3)    그것이 제19절의 깊은 의미라고 하겠습니다. 그 새로운 영적인 공동체는 주님이 승천하시고 나면 누가 어떻게 운영하게 되는 것일까요? 그에 대한 설명을 제20절에서 살펴볼 수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3)  20. 그날에는 내가 (부활 승천으로 말미암아) 아버지 안에, 너희가 (말씀의 종이 되어)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성령님의 전에 아버지와 함께 주님이 임재하심)을 너희가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인하여) 알리라”(14:20); 주님께서 부활 승천하시고 나면 다시 이 세상에 오시지 아니하시는 것일까요? 그것이 아니라고 본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1)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 성육신하여 육신을 가진 인자 곧 사람의 아들로 살아가셨지만 일단 무덤에서 영생의 몸으로 부활하신 다음에는 동시에 영으로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시공간을 초월하여 동시에 제자들에게 임재하고 내주 역사하실 수가 있습니다.

2)    또다른 보혜사이신 성령님이 먼저 성도의 심령속에 임재하고 계시면 그 성전에 주님께서 아버지 하나님을 모시고 영적으로 함께 임재하여 내주 역사하겠다는 약속의 말씀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20. 그날에는 내가 (부활 승천으로 말미암아) 아버지 안에, 너희가 (말씀의 종이 되어)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성령님의 전에 아버지와 함께 주님이 임재하심)을 너희가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인하여) 알리라”(14:20).

3)    그와 같은 약속의 말씀이 실현되자 삼위일체 하나님을 모시고 영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는 성도들은 사망과 죄의 권세에서 벗어나 힘있는 복음의 용사로 살아가게 됩니다. 그 점에 대한 사도 바울의 감격스러운 증언이 다음과 같습니다; “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3.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4.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8:1-4).

결론적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는 이때가 자신의 마지막 인생입니다. 죽음이 찾아오기 전에 주님을 모시고 그 제자로 살아갈 것인지 아니면 주님을 외면하고 세상적인 이익과 향락을 쫓아서 계속 살아갈 것인지 확실한 선택을 해야 합니다. 중간단계의 유보는 죽고 나면 후자의 것으로 처리가 되고 말 따름입니다.

그와 같은 의미를 진하게 담고 있는 예수님의 비유가 사실은 누가복음 제16장에 수록되어 있는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입니다. 일단 인생의 종말을 맞이하고 나면 다시는 복음을 전파할 기회와 천국으로 올라갈 기회가 모두 사라지고 마는 것입니다(16:26, 31).

오늘의 본문은 대속의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하신 예언의 말씀입니다. 십자가에서 죽고 무덤속에 들어가는 것으로 모든 일이 끝나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영생의 몸으로 부활하여 제자들을 찾아오는 미래가 전개되기 때문입니다.

40일간 부활하신 예수님을 모시고 성경말씀을 다시 배우게 되면 제자들에게 어떠한 변화가 찾아오게 될까요?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 그리고 영생의 천국복음을 세상 끝까지 힘있게 증거하는 증인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공생애를 함께한 제자들 그리고 승천한 이후 믿게 되는 사도 바울과 같은 성도들을 위하여 두가지 선물을 주시고 있습니다; 하나가 또다른 보혜사 진리의 성령님을 아버지 하나님께 요청하여 성도들에게 보내주시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승천하신 주님께서 아버지 하나님을 모시고 영적으로 성도들의 심령속에 건설한 성령님의 전에 함께 임재하여 영원히 내주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삼위일체 하나님을 영적으로 모시고 복음사역을 실천하게 되면 그 믿음이 놀랍게 달라지게 됩니다. 영생의 소망과 부활의 믿음이 그 심령속에 강한 확신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진리의 성령님의 역사로 성도들이 이 세상과 죽음을 이기는 신앙인으로 끝까지 살아가게 됩니다.

그 점을 본문에서는 성도들이 그 옛날 믿음의 조상들인 아브라함, 이삭, 야곱처럼 영생의 하나님 안에서 모두가 영원히 살아 있는 존재들이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무쪼록 육신의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나의 부활과 영생이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확보되어 있다는 사실을 굳게 믿고서 끝까지 복음의 용사로 살아가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모두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