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선비 이야기(손진길 소설)

허굉필(許宏弼) 허선비 이야기16(손진길 소설)

손진길 2023. 8. 11. 03:13

허굉필() 허선비 이야기16(손진길 소설)

 

허굉필은 절영도를 떠나온 다음에 동래에 살고 있는 통역 김준우(金俊宇)와 헤어진다. 30대 중반의 사내인 김준우는 젊은 시절 동래 초량 왜관의  점포에서 점원으로 일을 하다가 왜국말을 배우게 되었다고 한다;

 더구나 그의 아내가 그 점포에서 눈이 맞은 왜인 처녀이기 때문에 자연히 왜국말에 능통한 것이다.

동래를 떠난 허굉필은 천천히 거제도를 방문한다. 그곳에서 당숙 허영도(許英道)를 다시 만나 5일전에 부탁한 ()을 받는다. 부자선주인 허영도 부부는 당질인 허굉필에게 환만 주는 것이 아니다. 차제에 그를 환영한다면서 아예 이웃에 살고 있는 딸과 사위를 전부 불러모아 잔치를 베풀고 있다;

큰딸 허금란(許錦蘭)은 멀리 진주(晋州)로 시집가서 그곳에서 살고 있지만 둘째 딸 허옥란(許玉蘭)과 셋째 딸 허수란(許秀蘭)은 모두 거제도에서 이웃하여 살고 있기에 그날 딸네 식구들이 자리를 함께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둘째사위 전오중(全午中)과 셋째사위 옥인우(玉仁雨)는 장인을 도와서 멸치어장을 열심히 관리하고 있다.

허굉필은 어릴 때에 부친과 함께 당숙을 방문하여 어선을 타고 멸치어장에 나가본 적이 있다. 당시 큰 배에서 여러 명의 인부가 어영차장단에 맞추어서  멸치가 가득 들어 있는 큰 그물을 힘겹게 끌어올리는 광경을 인상깊게 보았다.

그때 어선에서 부친 허정도(許正道)가 사촌 형인 허영도에게 말한 내용을 총명한 허굉필이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허허, 형님은 바다에서 매번 일확천금’(千金)()를 거두고 계시는 것이군요. 참으로 좋은 어장입니다”. 멸치 값이 대단하기에 멸치 잡이 어로작업을 부친이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그 말을 듣자 허영도하하하웃으면서 다음과 같이 대답한 바가 있다; “하하하, 동생 말이 맞아. 멸치가 아니라 때로는 ()라고 불리고 있지. 그러니 일확천금이 맞고 말고! 내가 이 황금어장을 사들이는데 참으로 공을 많이 들였어. 이제는 대를 이어갈 아들만 얻으면 되는데 말이야, 하하하… “.  

그렇게 거제도에서 거부가 된 선주 허영도는 사촌 동생 허정도에게 둘째아들인 허굉필을 자신에게 양자로 달라고 두번이나 부탁했다. 그러나 허정도허허라고 웃으면서 모두 완곡하게 거절했다. 그때마다 허정도의 답변이 다음과 같았다; “허허허 형님, 제가 셋째 아들을 얻게 되면 그때에는 그렇게 하겠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아들이 둘 뿐이라 아직은 아닙니다”.

그런데 허정도에게는 여전히 아들이 둘 뿐이고 그 다음에는 줄줄이 딸이다. 말하자면, 장남이 허상필()이고 차남이 허굉필()이며 그 아래로 장녀가 허설란(許雪蘭)이고 차녀가 허영란(許英蘭)이다. 그러니 거부이지만 허영도가 더 이상은 허굉필을 자신의 양자로 달라고 부탁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어릴 때부터 영특하게 보였던 허굉필이 조선의 헌종(憲宗) 10년인 1844년 가을 약관의 나이에 한양에 올라가서 대과를 보고 어전시 문과시험에서 전체 차석을 차지했다;

 그때 고향인 김해 뿐만 아니라 당숙인 허영도가 살고 있는 거제도에서도 큰 잔치가 열렸다. 김해 허씨 가문의 큰 경사였던 것이다.

당시 선주 허영도가 종제인 허정도와 나눈 대화가 다음과 같다; “여보게 아우, 자네가 차남 허굉필을 내게 양자로 주지 아니하고 버티더니 오늘날 이렇게 큰 경사를 다 얻게 되는구만. 부러워 정말 부러워, 허허허… “.

그 말에 허정도가 종형을 위로하고 있다; “형님, 우리 문중에서 문과 차석이 나왔으니 함께 기뻐할 일입니다. 이제 굉필이는 우리가 종반 간에 힘을 합하여 우리들의 자식인 줄 알고 그 뒤를 밀어주어야 마땅하지요. 그러니 아들로 여기시고 힘을 모아주십시오”.

허영도가 조용히 고개를 끄떡이는 것을 보고서 허정도가 부연설명을 한다; “앞으로 한양에서 굉필이가 관료생활을 하자면 재정적인 도움이 필요합니다. 그러니 우리 문중에서 십시일반으로 도와주어야 합니다. 형님, 그렇게 부탁을 드립니다!... “. 그 말에 크게 고개를 끄떡인 허영도이다.

이듬해 1845년 가을부터 한성부에서 관료생활을 시작한 허굉필3년째가 되는 1847년 지금까지 김해의 본가와 거제도의 당숙으로부터 재정적인 지원을 받은 것이 사실이다. 그 가운데 큰 보탬은 당숙인 허영도로부터이다. 그 점을 잘 알고 있는 허굉필이다.

사실 조선에서는 과거에 급제를 한다고 하더라도 미관말직인 벼슬에서부터 시작해야 하므로 그 녹봉이 많지 아니하다. 그러므로 집안이나 문중의 재정적인 도움이 있어야 당당하게 관료생활을 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모두들 세도가인 안동 김씨를 부러워하고 있다.

조정에서 세도정치를 펴고 있는 그 가문은 과거에 급제하여 출사를 하는 자제들에게 온 문중에서 재정적인 지원 뿐만 아니라 탄탄대로 꽃 길을 펼쳐주고 있다. 그러니 같은 급제자라고 하더라도 관료생활에 있어서 출발점은 물론 그 위세와 위상이 전혀 다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허굉필은 기가 죽지 아니하고 나름대로 출세의 가도를 달리고 있다.

그 이유가 두가지이다; 하나는, 허굉필의 두뇌가 안동 김씨의 자제들보다 훨씬 뛰어나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김해 허씨의 문중에서 그를 밀어주고 있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김해에 살고 있는 부친 허정도도 나름대로 지방의 유지이지만 거제도의 선주인 당숙 허영도가 거부인 것이다.

그 점을 잘 알고 있는 허굉필이 거제도에서 당숙 허영도가 잔치자리를 마련하자 그날 마치 부친을 대하듯이 그렇게 허영도를 대하고 있는 것이다. 그와 같은 허굉필의 모습을 보고서 허영도가 속으로 중얼거린다; “내가 아들은 없지만 허굉필은 내 아들이나 진배가 없지. 속이 깊고 영특하니 능히 우리 김해 허씨 전체 문중의 아들 노릇을 할 것이야. 그러면 된 것이야, 허허허“.

거제도에서의 일이 모두 끝나자 그때서야 허굉필은 발걸음을 김해 본가로 향한다. 부친 허정도와 모친 신정옥(愼貞玉)이 기다리고 있는 집으로 가는 것이다. 3살 연상인 가형 허상필이 약관의 나이에 일찍 결혼하였지만 분가하지 아니하고 본가에서 부모님을 모시고 함께 살고 있다. 그는 벌써 슬하에 21녀를 두고 있다.

허굉필이 참으로 오래간만에 본가에 들렀더니 부모님은 물론 형 내외와 조카들 그리고 막내 여동생 허영란이 그를 크게 반긴다. 바로 아래의 여동생인 장녀 허설란2년전에 창원(昌原)으로 시집을 갔다. 이제는 막내인 허영란에게 혼담이 들어오고 있는 모양이다.

그래서 그런지 부모님이 둘째아들 허굉필에게 말한다; “너도 이제 나이가 23살이다. 마땅한 혼처를 알아보고 성가를 해야 하지 않겠느냐? 언제까지나 한양 하숙집에서 총각으로 살 수는 없지 않겠니? 이곳에서는 너를 사위로 삼겠다고 나서는 유력한 가문이 많단다!... “.

부모님의 권유에도 허굉필이 끄떡하지 아니하고 있다. 그 점이 이상하고도 궁금하여 부친 허정도와 모친 신정옥은 서로 마주보고서 고개를 갸우뚱하고 있다. 마침내 신정옥이 남편을 보고서 조용히 말한다; “아마도 굉필이가 한양에 좋은 처자가 있는 것 같아요. 우리 조금 지켜보도록 하지요!... “;

고향을 방문하여 본가에서 이틀을 푹 쉰 다음에 허굉필이 다시 동래를 방문한다. 그는 상인 장만수와 약속한 날이 되자 정확하게 그 점포에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먼저 은괴 180개가 확실하게 챙겨져 있는지를 확인한다. 우마차 한대에 3개의 궤짝이 놓여 있고 각각 60개의 은괴가 들어 있다.

확인이 끝나자 허굉필이 품에서 ()을 꺼내어 장만수에게 건넨다. 그가 환의 내용을 꼼꼼하게 살펴보더니 고개를 끄떡인다. 그리고 별도로 은괴 2개를 김광수라고 자신의 신분을 위장하고 있는 허굉필에게 준다.

장만수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약속한대로 120개의 금괴를 한양 종로의 골목에 있는 쌍문점에 전달해 주세요. 그곳에 행수로 있는 장우(張雨)에게 인계하면 됩니다. 그러면 이 은괴 2개는 완전히 당신의 것입니다. 그리고 우마차도 그에게 주면 됩니다!... “.

허굉필은 동래를 벗어나자 우선 마시장을 찾아간다. 그곳에서 말을 두 필이나 사고 있다. 그리고 우마차에 실려 있는 은괴를 빨리 운반하기 위하여 소를 떼어내고 그 대신에 두 마리의 말이 그 마차를 끌도록 조치한다. 마침 마시장 근처에 우시장이 자리를 잡고 있다. 허굉필은 우마차에서 떼어낸 튼실한 소를 우시장에서 팔고 그 돈을 챙긴다.

그와 같이 조치한 허굉필이 쌍두마차를 몰고서 거제도로 향한다. 당숙 허영도를 만나서 한상자의 은괴를 전달한다. 60개의 은괴가 들어 있음을 그 자리에서 당숙이 확인한다. 그리고 나름대로 은의 상태가 어떠한지를 살핀다.

 그 다음에 당숙이 말한다; “은의 상태가 좋아. 내가 자네에게 준 그 환의 값어치나 여기 은괴 60개의 값어치나 셈셈이구만. 내가 손해본 것은 없어. 그런데 굉필이 자네는 그 마차를 몰고서 한양까지 먼 길을 가야만 하는군. 부디 몸조심하게나!... “.

허굉필이 문관이기 이전에 뛰어난 무인임을 전혀 모르고 있는 당숙이기에 걱정이 되어서 하신 말씀이다. 그 말에 허굉필은 고개 숙여 사의를 표하고 있다. 그렇지만 그는 자신이 있다. 13년이나 내공수련을 하고 또한 고향에서 은밀하게 외공을 익힌 바가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허굉필은 평소 애지중지하는 활을 어깨에 메고 있다. 그리고 품속에는 여러 개의 단도를 간직하고 있다. 안에는 편리하게 무인 복장을 하고서 그저 그 위에 선비의 차림을 하고 있을 뿐이다. 그렇게 차비를 한 허굉필이 쌍두마차를 빠르게 몰고 있는 것이다;

 과연 허굉필이 한양에 도착하게 되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