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마태복음 강해 제171강(마25:14-30)(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3. 8. 5. 02:35

마태복음 강해 제171(25:14-30)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5422()

 

달란트 비유에 담겨있는 교훈들(25:14-30)

 

첫째로, 주인이 종들에게 자신의 소유를 나누어서 맡긴 후에 타국으로 떠나갔습니다(25:14). 주인이 왜 타국으로 갔는지 그 이유나 목적에 대한 설명이 전혀 없습니다. 여기서의 주인은 창조주 하나님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종들은 그 청지기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창조주 하나님께서 피조세계의 경영을 청지기들에게 맡기고 또 다른 세상에서 무엇을 하고 계시는지 일체 알 수가 없습니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하게 알 수 있는 내용은 부재중(不在中, during absence)에 종들이 주인을 대신하여 소유를 관리하도록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종인 사람들은 소유권이 없으며 오로지 창조주의 것을 관리하는 기능만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요컨대, 이 세상에서 사람들이 아무리 일을 열심히 하고 잘해도 자신의 것으로 영원히 등기를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욥의 신앙고백과 동일합니다;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1:21).

둘째로, 주인이 한 사람의 종에게 전 소유를 맡긴 것이 아니라 여러 명의 종들에게 나누어서 맡기고 있습니다(25:14-15). 세상에는 이름하여 황제(皇帝, emperor)의 논리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 내용은 권력을 독점하고 있는 자가 황제이며 황제만이 자신의 절대적인 권력으로 세상을 제 마음대로 지배할 수 있다는 논리입니다. 쉽게 말하자면, 황제 위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도 없으며 간섭을 할 수 있는 어떠한 존재도 없습니다. 황제의 자리가 바로 우상이 되는 자리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나 최고의 권력, 이왕이면 마치 황제와 같은 절대적인 권력을 추구하게 됩니다. 그 결과 사람들이 정신 없이 대권욕’(大權慾, 가장 큰 권력을 차지하고자 하는 욕심)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그 이유는 누구나 지배를 받기 보다는 지배하기를 더 좋아하고 그것을 간절히 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와 같이 황제의 논리가 사람들의 권력욕을 부추기고 있으며 실제적으로 더 많은 권력을 얻고자 하는 치열한 경쟁의 사회를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일종의 권력지상주의’(權力至上主義, 권력이 최고라는 사상, 곧 권력만 장악하면 모든 일을 제 마음대로 처리할 수가 있다는 권력만능주의 사상임)가 만들어낸 우상과 같은 사상입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권력을 더 많이 차지하기 위하여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을 오늘날도 마치 야수와 같이 벌이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사회를 일종의 정글’(jungle)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러한 세상의 사회모습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본문에서처럼 하나님은 자신의 소유를 한 사람의 종에게 전적으로 맡기고 있지를 아니하기 때문입니다(25:14-15). 여러 명의 종들에게 나누어서 맡기고 있습니다. 창세기를 보더라도 처음부터 단수가 아니고 복수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1:27-28). 그러므로 독재가 아니라 집단지도체제가 더욱 성경말씀에 어울리는 정치제도라고 하겠습니다.

셋째로, 달란트를 맡기되 세 가지로 차별이 나게 맡기고 있습니다; “5달란트, 2달란트, 그리고 1달란트 등입니다”(25:15). 차이가 나고 있는 이유는 각자 재능대로 맡겼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사람들을 재능의 측면에서 서로 차이가 나게 차별적으로 창조하신 것일까요? 공평(公平, 모두에게 평등함)과 형평(衡平, 치우침이 없도록 균형을 잡아줌)을 중시하고 계시는 공의(公義, righteousness)의 하나님께서 스스로 창조의 정신을 어기고 계시는 것은 아닐까요? 그와 같은 의구심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실마리를 가지고 깊은 묵상에 들어갈 필요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1)  자연계에서 자라나고 있는 나무를 보더라도 뿌리가 있고 큰 줄기가 있으며 작은 줄기에서 더 작은 가지가 뻗어나가고 있습니다. 모두가 뿌리일 수가 없으며 모두가 큰 줄기가 될 수가 없습니다. 작은 줄기가 있어야 가지가 뻗어나가고 잎을 생성하여 탄소동화작용을 수행할 수가 있습니다. 식물에 탄수화물을 만들어서 영양분을 공급하고 있는 것은 가느다란 줄기에 매달려 있는 수 많은 잎들임을 잊어서는 아니 됩니다.

(2)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자연계에 있어서는 역할과 기능의 차이가 있을 뿐 서로 더 중요하다고 자신의 권력을 자랑할 수가 없습니다. 권력적인 서열관계를 중시하며 신분에 따른 차별성을 강조하는 것은 인위적인 논리이며 사람들의 자기중심적인 엉뚱한 시각일 수가 있습니다.

(3)  사회적으로 하나님은 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더 많은 과실을 요구하고 있습니다(25:20-30). 5달란트의 재능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면 그 재능을 십분 발휘하여 다시 5달란트의 이익을 남겨야만 합니다. 만약 2달란트만 맡았다고 한다면 5달란트가 아니고 2달란트만 남겨도 충분합니다.

(4)  그런데 문제는 권한과 책임의 불균형에 있습니다. 현실적으로 모두가 더 큰 권력을 원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같이 권력이 클수록 그 권력을 행사하여 책임을 더 많이 부하들에게 떠다 넘기고 자신은 편하게 부하들에게 책임추궁이나 하면 된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고 철저하게 사람들의 잘못된 사고방식입니다.  그와 같은 인식 때문에 재능의 차이를 말하고 있는 본문이 인간 차별성의 원천으로 오인이 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넷째로, 오랜 후에 주인이 돌아와서 종들과 결산을 하고 있습니다(25:19). 타국에 간 주인이 오랫동안 소식이 없으면 종들이 자만에 빠질 수가 있습니다. 세월이 지날수록 주인이 돌아오지 않는다고 하는 생각이 확신으로 변하게 됩니다. 그러한 생각이 만연하고 있을 때에 생각하지도 아니한 때에 반드시 주인이 돌아옵니다. 그리고 결산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한결 같은 주장입니다(21:40-41, 24:44, 50, 25:5-6, 19). 그러므로 예수님의 제자들은 스승님의 말씀에 따라 항상 결산을 염두에 두고서 자신의 달란트를 최대한 활용해야만 합니다. 그것이 충성입니다.

다섯째로, 열심히 일하여 자신이 받은 달란트만큼 이익을 남긴 종들은 차별 없이 모두가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고 동일하게 칭찬을 받고 있습니다(24:45-46, 25:16-17, 20-23). 사실 재능의 차이를 능력의 차별성이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차이를 치유하고 있습니다; “똑같은 비율의 과실을 맺는다면 주인으로부터 동일한 칭찬을 받을 수 있다고 하는 소위 차별 없는 공평함으로 치유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필요에 따라 선천적으로 주고 있는 재능의 차이를 어째서 사람들이 인간차별성의 근원이라고 인식하고 있는지에 관하여 잠시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사실 재능의 차이를 능력의 차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재능이 돈으로 환산이 되고 있는 계약적인 모습의 산업사회에 익숙한 현대인의 입장에서 보면, 비싼 재능과 저급한 재능의 분별이 확실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소득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능력의 타고난 차별성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2)  그렇다면 선천적인 능력의 차별을 어떻게 하면 후천적으로 사회에서 치유해줄 수가 있을까요? 이른바 공산사회주의 이론이 그 점을 중시하고 있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은 자유자본주의를 탐욕적이고 추악하며 타락한 것이라고 다음과 같이 비판하고 있습니다; “자본주의는 인간의 자기실현을 위한 신성한 창의성과 노동력을 돈으로 사고 팔 수 있는 일종의 상품으로 취급하고 있다. 이에 따라 인간의 존엄성이 파괴되고 비인간화가 이루어지고 있다. 특히 자본주의는 사람의 추악한 이기심과 탐욕을 극도로 충동질하여 사회전반의 경쟁력을 제고하고 산업생산력을 높이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가장 좋은 제도라고 선전을 하고 있다”.

(3)  한 마디로, 공산주의는 자유자본주의를 뒷받침하고 있는 시장경제와 상호경쟁의 원리를 부인하고 있습니다. 그 대신에 능력대로 일하고 필요한 만큼 배급을 해줄 수 있는 매우 이상적인 공동체를 인위적으로 마련하고 운영을 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불행한 사실은 그와 같은 이상적인 공동체 사상이 현실에 있어서 실패를 했다는 것입니다. 재능과 능력을 다하여 100% 일했지만 그 열매 가운데 수백만 분의 하나밖에 당사자에게 돌아오지를 아니하고 있으니 모두가 적게 일하고 배급을 많이 받겠다고 혈안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것이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소위 연대적인 태업(怠業, 게으르게 일하는 파업의 종류)운동입니다.

(4)  그 결과 생산량의 격감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공산주의 이념을 설명하고 사명감을 고취해봐도 그 효력이 채 십 년을 지속하지를 못합니다. 그렇다고 하여 매 십 년마다 더욱 강도를 높여가면서 계속 숙청과 혁명을 일으킬 수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찌하면 될까요? 인위적인 혁명이나 제도화가 아니라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의 능력이 역사 가운데 재등장을 해야만 합니다. 사도행전 제2장 말미에 기록되어 있는 초대교회와 같은 공동체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역사 가운데 다시 임하는 도리밖에 없다고 하겠습니다.

  여섯째로, 주인으로부터 받은 달란트를 파묻어 두고서 제멋대로 살았던 종은 악하고 게으른 종으로 정죄가 되고 무익(無益, useless)한 종이 받는 형벌에 처해지고 있습니다(24:48-51, 25:18, 24-30). 예수님은 달란트 비유에서 세 가지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첫째, 주인과 종과의 관계 둘째, 맡김과 결산의 관계 셋째, 처벌의 기준 등입니다.

(1)  먼저 주인과 종과의 관계에서는 무엇보다도 종이 주인의 뜻대로 자신의 달란트를 최대한 활용을 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종이 주인의 소유를 맡은 이유는 그것으로 장사를 열심히 하여 최대의 이익을 얻는 것입니다(25:16). 환언하면 사람이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이 세상에서 인생을 살고 있는 목적이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얻고자 하시는 과실을 최대한 예물로 올려드리는 것입니다(66:20, 고전15:24). 달리 말하자면 그것이 목적이 이끄는 삶’(purpose driven life)입니다.

(2)  주인이 맡긴 소유에 대해서는 반드시 관리의 책임을 묻고 있습니다. 그것이 불시에 이루어지고 있는 결산(決算)입니다. 인생을 제멋대로 살아서는 아니 됩니다. 결산의 때가 있으며 반드시 심판이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만 합니다(5:27-29). 그때 무엇을 내놓아야만 할까요?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재능이 무엇인지 열심히 발견해야만 합니다. 그 재능을 가지고 어떻게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해서 올려드려야만 하는지 그 방법을 찾아야만 합니다.

(3)  본문에서의 결산은 인생의 결과에 대한 심판입니다. 어떠한 인생을 살았든지 간에 두 가지로 분류가 되고 있습니다; 첫째, 착하고 충성된 종입니다(25:21a, 23). 그러한 종들은 주인으로부터 칭찬을 받으며 천국의 즐거운 잔치에 참여하게 됩니다(25:21b, 23b). 둘째, 악하고 게으른 종입니다(25:26). 하나님께서 주신 재능을 개발하지 아니하고 제멋대로 세상적인 이익만을 쫓아서 살아온 인생입니다. 무엇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려야만 하는지 생각조차 하지 아니한 채 자신의 영광만을 위하여 한평생을 살아왔습니다. 후회가 막심합니다. 그러나 되돌리기에는 너무 늦었습니다(16:26).

(4)  참고로, 악하고 게으른 종의 변명이 실려 있습니다; “한 달란트 받았던 자는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안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가지셨나이다”(25:24-25).  하나님이 본전을 챙기시는 분인 줄로만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혹시 장사를 잘못하여 본전을 까먹게 되지나 않을까 염려를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무 노력도 하지를 아니하고 달란트를 깊이 묻어둔 이유입니다. 그럴듯한 변명이지만 그 주장이 통하지를 않습니다.

(5)  그 이유가 다음과 같습니다; “그 주인이 대답하여 이르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그러면 네가 마땅히 내 돈을 취리(取利, 이자놀이)하는 자들에게나 맡겼다가 내가 돌아와서 내 원금과 이자를 받게 하였을 것이니라 하고”(25:26-27). 은행에 맡겼더라면 이자라도 얻었을 터인데 게으른 종이 원금만을 가지고 왔을 뿐입니다. 사실 주인은 재산을 은행에 맡기는 것을 처음부터 좋아하지 아니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소유를 은행에 맡기지 아니하고 종들에게 분담시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주인의 의도는 단순하게 은행보다 더 높은 수익을 얻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고차원적으로 종들이 청지기로서의 사명을 완수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한 것입니다.

(6)  그 점을 창세기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1:31). 사람이 창조가 된 그대로 제 달란트를 사용하여 열심히 청지기의 일을 하고 있을 때에 자연과 사회는 참으로 보기에 매우 좋은 상태라는 하나님의 종합적인 평가가 태초부터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일곱째로, 착하고 충성된 종은 더 많은 것을 맡게 되어 풍족하게 되고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하게 되지만 악하고 게으른 종은 자신의 달란트까지 빼앗기고 그만 바깥 어두운 곳으로 내어 쫓기고 맙니다(25:21, 27-29). 그 의미는 구원과 영생을 얻지를 못하고 영벌에 처해졌다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주님께서 심판주로서 재림하시는 그때 종들이 행한 일이 심판의 대상이 됩니다. 그 결과에 따라서 영생이냐 영벌이냐가 확정이 되고 맙니다. 다시는 변경이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개인의 종말일 뿐만 아니라 세상의 종말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인생 가운데 숨을 쉬고 있을 때에 열심히 생명을 살리는 선한 종, 그리고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충성스러운 종으로서 살아가야만 할 것입니다. 그렇게 행할 수 있는 충분한 달란트를 하나님께로부터 이미 얻었다는 사실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고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