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마태복음 강해 제169강(마25:1-13)(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3. 8. 4. 01:51

마태복음 강해 제169(25:1-13)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54 20()

 

10 처녀 비유의 의미(25:1-13)

 

지난 번 강해에서 이미 열 처녀의 비유에 대해서는 대체적인 설명이 이루어진 바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번 강해에서는 다음과 같이 보완적인 입장에서 본문의 구절을 하나하나씩 나열하면서 그 의미를 한번 묵상해보고자 합니다;

(1)  그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25:1); 여기서 그때에는 앞 장 곧 제24장에서 말하고 있는 종말의 때를 받아주고 있는 말입니다. 종말의 때는 세 가지의 의미를 모두 내포하고 있습니다; 첫째, ‘개인적인 인생의 종말의 때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 점을 무화과 나무의 비유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24:32-51). 자신이 살고 있는 이 세대”(24:34)에서  각자 열매가 있는지 없는지가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주인이 갑자기 찾아와서 그것을 점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24:44-51). 둘째, ‘세상의 종말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이 망하고 이어서 모든 이방세계에 종말전쟁이 발생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24:1-28, 25:29). 셋째, ‘주님이 재림하시는 때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종말론적인 심판을 위하여 다시 오시는 것입니다(24:29-31). 그 종말은 개인적인 인생의 종말 후에 또는 세상의 종말 후에라는 양자가 모두 해당이 되고 있는 개념입니다. 왜냐하면, 죽은 자의 깊은 잠을 깨우기 위하여 어떤 모양이든지 부활의 주님이 인간의 시간의 개념을 뛰어넘어서 반드시 찾아오시기 때문입니다(5:28-29, 11:11, 43-44, 살전4:16, 벧후3:8).

(2)  그 중의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 있는 자라”(25:2); 예수님은 천국에 들어가고 못 들어가는 비율을 반반으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것은 엄청난 은혜입니다. ‘좁은 문의 개념(7:13-14) 그리고 열두 지파 144천명이라는 적은 수의 개념이(7:4) 주님의 은혜로 넓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참고로 출애굽 당시 해방을 맞이한 열두 지파 장정의 수는 60만입니다(12:37). 그 수에 비해서 종말론적인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수 144천명’(7:4)이라는 개념은 상당히 제한적이라는 상징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3)  미련한 자들은 등을 가지되, 기름을 가지지 아니하고”(25:3); 인생길을 밝혀주는 등불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6:23). 그리고 등불을 계속 밝혀줄 수 있는 것이 기름이듯이(27:20) 말씀을 실천할 수 있도록 능력을 공급해주는 것은 성령충만입니다(1:8). 성도들은 성령충만으로 능력을 받아야 지상명령을 수행할 수가 있습니다(24:45-49, 1:8).

(4)  슬기 있는 자들은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져갔더니”(25:4); 말씀충만과 성령충만으로 주님의 지상명령을 능력 있게 실천하고 있는 성도들이 바로 슬기 있는 다섯 처녀와 같습니다.

(5)  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잘새”(25:5);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자신이 져야만 하는 대속의 십자가를 두고서 피땀을 흘리며 기도하고 있지만 제자들은 마냥 졸려서 자고 있습니다(26:36-40).

(6)  밤중에 소리가 나되,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 하매”(25:6);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의 관습이 그러한지 모르겠습니다마는 신랑이 밤중에 신부의 집으로 찾아오고 있습니다. 혼인잔치가 밤에 시작이 되고 있습니다. 여기서 늦은 만찬의 자리가 천국잔치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 장면은 예수님의 마지막 유월절 만찬의 의미를 다시 음미하게 만들고 있습니다(26:19-21). 또 하나 밤중에 신랑이 방문한다는 것은 불시에 예고도 없이 종말이 임하고 주님께서 찾아오신다는 뜻을 그대로 담고 있다고 하겠습니다(24:36-37, 44).

(7)  이에 그 처녀들이 다 일어나 등을 준비할새”(25:7); 신랑은 예수님을 상징하고 있습니다(3:28-29, 21:9). 다시 오시는 주님을 맞이하기 위하여 성도들은 영적으로 깨어있어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고 예수님처럼 복음을 생활화하는 삶이 바로 영적으로 깨어있는 성도의 인생이라고 하겠습니다.

(8)  미련한 자들이 슬기 있는 자들에게 이르되, 우리 등불이 꺼져가니 너희 기름을 좀 나눠달라 하거늘”(25:8); 천국잔치를 위하여 신랑 되시는 주님이 찾아오시는 때는 종말의 때입니다. 인생이 끝나가는 시점이므로 더 이상 지상명령을 실천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육체를 가지고 자신의 인생을 살고 있는 동안에 성령충만으로 열매를 맺는 말씀의 삶을 신실하게 살아가야만 합니다. 심판의 날 주님 앞에 자신이 인생 가운데 열매를 맺은 예물을 직접 내어놓아야만 합니다(66:20). 남의 공로를 빌려서 구원의 문을 통과할 수가 없다는 사실을 다시 인식시켜주고 있는 대목입니다.

(9)  슬기 있는 자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와 너희가 쓰기에 다 부족할까 하노니, 차라리 파는 자들에게 가서 너희 쓸 것을 사라 하니”(25:9); 자신의 인생 가운데 말씀충만 성령충만으로 하나님의 일을 행한 것은 온전히 천국 자신의 구좌에 적립이 되는 것입니다. 그 천국에 쌓아놓은 크레딧’(credit)은 너무나 안전하게 관리가 되고 있습니다(6:20). 그래서 남에게 빌려주거나 나누어줄 수조차 없다고 하겠습니다(16:24-26).

(10)    그들이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오므로 준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힌 지라. 그 후에 남은 처녀들이 와서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주소서”(25:10-11); 한번 닫힌 구원의 문이 다시 열리지는 않습니다(16:26). 그 문은 육체를 가지고 인생을 살고 있는 동안에만 열려 있습니다(16:27-31). 그러므로 천국의 열쇠를 가지고 있는 동안에 그 문을 열고 들어가야만 합니다(16:19). 같은 맥락에서, 사람들은 이 세상에 살고 있는 동안에 매인 것을 풀어야만 합니다. 서로가 용서하면서 자신도 용서를 받아야만 합니다. 나중에 한다고 미루다가 종말이 닥치게 되면 만사가 수포로 돌아가고 맙니다. 더 이상의 기회가 없으며 연기는 아예 불가능합니다. 그것이 불시에 닥치고 있는 심판의 때 곧 인생살이의 결산의 때의 특징입니다.

(11)    대답하여 이르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하였느니라”(25:12); 아무리 주여 주여 라고 외쳐보아야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지 아니했기에 인정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똑 같은 취지의 말씀이 다음과 같습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7:21).

(12)    그런즉 깨어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때를 알지 못하느니라”(25:13); 이른 바 열 처녀 비유의 결론입니다. 그 결론은 이미 예수님이 무화과나무의 비유에서 말씀하신 내용과 동일합니다; “두 여자가 맷돌질을 하고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24:41-42).

 

  오늘 강해의 결론을 맺어보고자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심판주이시기 이전에 이 세상의 구원주이십니다(3:16-17). 그러므로 모든 사람들이 구원을 받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그와 같은 입장에서 같은 내용의 말씀을 각각 다른 비유를 동원하여 더 알기 쉽게 다시 설명을 해주시고 있습니다(24:32-25:13).  , 동일한 결론을 다시 한번 강조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주님의 마음을 깨닫게 되면(2:5) 모두가 자신의 인생을 살고 있는 동안에 더욱 신실한 제자와 성도의 삶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