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마태복음 강해 제170강(마25:14)(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3. 8. 4. 01:53

마태복음 강해 제170(25:14)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5 4 21()

 

천국(天國, the kingdom of heaven)은 어째서 등(, lamp)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으며 주인이 타국에 갈 때에 그 종들에게 자기 소유를 맡긴 경우와 같다고 말하고 있는가?(25:1, 14) 여기서 찾아볼 수 있는 교훈과 천국의 의미

 

 천국은 한 마디로, 신랑이신 예수님을 영접하여 함께 혼인잔치자리에 들어가고자 하는 처녀들에게 임하고 있습니다(25:1, 10). 그것은 천국이 사람들에게 임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는 대목입니다. 그리고 천국은 하나님의 소유를 맡은 종들이 주인의 뜻대로 신실하게 관리를 하는 경우에 확장이 되고 있습니다(25:14, 21). 반면에 천국을 혼자서만 누리고 하나님께서 원하고 계시는 천국복음의 전파와 나눔이 없다고 한다면 그것은 책망의 대상이 되고 맙니다(25:26-30). 사도마태의 복음서 제24충성된 종과 악한 종의 비유’(24:45-51)와 제25장의 달란트 비유’(25:14-30)가 그 사실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사람들에게 임하고 있다는 천국의 의미에 대하여 묵상을 하면서 동시에 과연 어떤 사실을 깨닫고 실천하는 자에 의하여 천국이 확장이 되고 있는지를 한번 살펴보고자 합니다;

한 마디로, 천국은 하나님의 나라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나라는 이 땅위에 어떻게 건설이 되는 것일까요? ‘씨뿌리는 비유를 참조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좋은 씨를 제 (마음)밭에 뿌린 사람과 같습니다(13:24). 그 말은 하나님의 나라가 창조주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행하는 자의 마음 속에서 건설이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는 계속 확장이 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창조주이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 땅에서 실현하고자 예수님처럼 열심히 기도하며 하나님의 말씀대로 실천하는 자들이 계속 나타나고 있기 때문입니다(6:10). 말씀의 씨앗이 먼저 예수님의 마음 속에, 그 다음에는 제자들의 마음 속에, 또 그 다음에는 성도들의 마음 속에 뿌려져서 연쇄적으로 발아를 하고 계속 자라나고 있으므로 그렇게 하나님의 나라는 확장이 되고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28:19-20).

그와 같은 사실을 명쾌하게 예수님이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있다 저기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17:20-21). 여기서 바리새인들의 질문의 뜻과 예수님의 답변의 의미의 차이가 무엇일까요? 조금 깊이있게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바리새인들은 사두개인들과 달리 부활을 믿고 있습니다(23:8). 그런데 그들이 믿고 있는 부활은 세상 끝 곧 종말의 때에 이루어지는 죽은 자의 부활입니다. 그것은 에스겔 선지자가 죽은 자의 마른 뼈가 부활하여 하나님의 군대가 된다고 하는 예언과 맥을 같이하고 있는 것입니다(37:10). 그 하나님의 군대에 의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건설이 될 것입니다. 그와 같은 사실을 믿고 있는 바리새인들이 시험적으로 나사렛 예수님에게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17:20a).

그런데 예수님의 답변은 바리새인들의 종말론적인 부활신앙과 상상력의 한계를 초월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다음과 같이 현재적인 부활신앙으로 하나님의 나라의 임재를 설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가 없지만 이미 성도들의 마음 속에 임하고 있는 것입니다”(17:20b-21). 참고로,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의 부활신앙을 선민 유대인들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 결과 유대인들은 베다니의 마르다와 같은 신앙고백을 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마지막 날 부활의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11:24).

둘째로, 부활에 대한 예수님의 생각은 다릅니다. 부활은 죽은 다음에 다시 살아나서 경험할 수 있는 미래적인 사건에 그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부활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영이 임재하여 성도의 마음 속에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할 때에 이미 맛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적으로는 이미 이루어진 현재적인 것이 부활의 신앙입니다. 그 점을 예수님이 마르다에게 다음과 같이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11:26).

위의 말씀은 이미 예수님이 백성들에게 선포하신 다음 말씀과 함께 그 의미를 묵상할 필요가 있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5:24-25). 여기서 죽은 자들은 영적으로 죽은 자를 말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육체적으로 죽은 경우에 대해서는 잠들었다는 용어를 예수님이 제자들 앞에서 대신 사용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11:11).

예수님이 마르다에게 가르쳐주시고 있는 부활신앙의 의미를 되새겨봅니다; (1) 예수님이 부활과 생명의 주인이라는 진리를 믿는 자는 육체적으로 죽더라도 그 영혼이 죽는 것이 아닙니다. (2) 부활의 몸을 입게 됨으로써 예수님의 본보기처럼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20:17-19, 고전15:20-24). (3) 그러므로 예수님을 구원주로 믿고서 하나님 앞에서 그 영혼이 살아난 자는 이미 육신적인 죽음과 상관없이 영적으로는 영생을 누리고 있다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4) 이미 자신에게 있어서 죽음은 육체적인 것에 불과하고 영적으로는 하나님의 자녀이며 영생의 존재로 그 운명이 바뀌어 있다고 믿는 자가 부활의 신앙을 소유하고 있는 자입니다. (5) 따라서 부활과 영생은 육신적으로는 다가올 미래이지만 동시에 영적으로는 이미 성도들이 이 세상에서 남은 인생 가운데 마땅히 누리고 있는 하나님 자녀의 권세에 속하고 있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1:12-13).

셋째로, 사도 바울의 다메섹 체험을 잘 들여다보게 되면 위와 같은 사실을 쉽게 알 수가 있습니다. 그의 간증이 사도행전 제9장과 제22장에 수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 내용의 대강은 다음과 같습니다;

(1)   랍비 사울은 유대인들 가운데 기독교인이 된 자들을 체포하기 위하여 시리아의 수도 다메섹으로 가고 있습니다(9:1-3). 도중에 길가에서 그는 영적인 체험을 하게 됩니다.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보이지 아니하지만 하늘에서 태양보다 더 강한 빛이 자신에게 비쳐오는 것을 눈으로 보게 됩니다(9:7). 그 자리에서 눈이 멀어버립니다. 그리고 영적인 눈이 떠져서 기이한 현상을 보게 됩니다. 빛 가운데 사람의 형상으로 나타나고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된 것입니다(9:3-6).

(2)   유대교의 율법선생인 랍비였던 사울은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행운을 누리게 됩니다. 이제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한 말씀만 듣게 되면 랍비의 역사상 처음으로 자신이 선지자가 될 즈음입니다. 따라서 사람의 형상으로 나타난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듣게 된 말은 의외입니다. 그가 핍박한 나사렛 예수가 바로 하나님이라는 놀라운 사실입니다(9:4-5). 그 순간 유대교리에 충실했던 랍비 사울의 신앙체계가 완전히 붕괴되고 맙니다(3:7-8).

(3)   그 대신에 그가 얻게 된 복음적인 깨달음은 대단합니다; 첫째, 부활하신 주님을 그가 만났기에 그는 부활의 증인이라는 것입니다. 그 사실을 그는 부활의 장인 고린도전서 제15장에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습니다;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고전15:8). 둘째, 부활 승천하신 주님께서 자신에게 찾아오셨기에 그는 재림예수를 영접한 것으로 믿었습니다. 그때부터 그는 종말론적인 삶을 살게 됩니다. 육신적으로는 미래 종말의 때에 이루어질 부활과 천국에의 입성이지만 이미 주님을 만나고 자신의 인생의 주인으로 받아들인 그 순간부터 부활신앙과 천국의 백성이라는 정체성은 바울 자신의 것이 되고 맙니다. 여기서 미래적인 not yet의 것들이 바울의 영적인 삶에 있어서는 이미 현재화되고 있는 already라고하겠습니다.

(4)   무엇보다도 사도 바울에 의하여 삼위일체’(三位一體, the holy trinity, three in one) 하나님의 관념이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는 역사적으로 가장 먼저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의 이름으로 성도들에게 축도’(祝禱, benediction)를 하고 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고후13:13). 그리고 독특한 삼위일체 이론을 정립하고 있습니다.

(5)   사도 바울이 발견하고 있는 삼위일체 하나님은 그 내용이 첫째, 천지를 창조하시고 온 우주의 바깥 수면 위에 운행하고 계시는 창조주 하나님께서(1:1-2) 둘째, 이 세상에 주님의 모습으로 오셔서 하나님신앙을 통일하시고 부활 승천하셨으며 셋째, 이제는 그 영을 보내셔서 성도들에게 내주 역사하심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진리가 증거되고 모든 인류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삼위일체 하나님신앙을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절묘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주도 한 분이시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곧 믿음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4:5-6).

(6)   다메섹 도상의 영적체험의 의미를 오랜 세월 공부하고 묵상했던(1:18, 2:1) 사도 바울은 부활 승천하신 주님이 그를 찾아오셔서 이방인 사도의 직분을 맡겼다는 사실을 믿게 됩니다(22:17-21). 영적으로 십자가로 향하고 있는 구원주 예수님의 생애와 심판주로 다시 오시는 주님의 영광을 알게 되자 그 깨달음은 사람의 운명을 변화시키고 있습니다(8:17-18, 3:8-12). 구체적으로, 그것은 오랜 세월 유대교리를 절대진리로 신봉하고 있었던 랍비 사울의 종말을 의미합니다(3:4-8). 동시에 그리스도의 종 사도 바울의 탄생입니다(1:1). 환언하면, 부활의 주님을 가슴에 품고서 그 마음 속에 임하고 있는 하나님 나라의 진리를 온 세상에 전하고자 하는 새로운 인생의 시작이라고 하겠습니다.

  결론적으로, 사도 바울의 간증과 영적인 깨달음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사람이 아직 육신적인 삶을 살고 있는 동안에는 부활과 하나님의 나라의 임재는 종말론적인 미래의 사건입니다. 그러나 성도들이 성령님을 모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면서 예수님처럼 남은 인생을 그 제자로서 살아가고 있는 경우에는 더 이상 미래적인 사건만이 아닙니다. 그 이유는 성도가 벌써 삼위일체 하나님의 임재와 내주 역사하심 가운데 하나님 자녀로서 자신의 부활을 확신하고 있으며 더구나 하나님나라의 백성으로서 당연히 이미 영생이 확보되었음을 자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6:4-5, 8:1-2, 37-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