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24년 설교문(손진길)

베데스다 못가에서 일어나 예수님께 가면 무엇을 얻을 수 있는가(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3. 7. 18. 13:33

제목; “베데스다 못가에서 일어나 예수님께 가면 무엇을 얻을 수 있는가?”(5:1-15, 15:29-31, 참고구절은 사9:1-2절임)

설교일; 주후 2023723일 주일

작성자; 손진길 목사(718일 화요일 작성)

 

예수님의 복음사역을 위한 공생애를 기록하고 있는 제4복음서인 요한복음을 참조하면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알 수가 있습니다;

(1)  첫째로, 나사렛 예수는 30세가 되자(3:23) 고향이 있는 갈릴리에서 남하하여 요단강 동편에 있는 시냇가 마을 베다니를 방문합니다(1:28). 그 이유는 선지자 세례 요한이 백성들에게 주고 있는 회개의 세례를 그가 받기 위한 것입니다. 나사렛 예수가 세례 요한으로부터 물세례를 받고 있는 바로 그때에 요한이 주위의 유대인들에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32. (세례) 요한이 또 증언하여 이르되, 내가 보매 성령이 비둘기 같이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그(나사렛 예수)의 위에 머물렀더라. 33.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베풀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는 이인 줄 알라 하셨기에, 34. 내가 보고 (나사렛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였노라 하니라”(1:32-34);

세례 요한의 증언 그대로 하나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여자의 아들로 태어나 30세가 되자 드디어 복음사역을 위한 공생애를 시작하고 있는 것입니다.

(2)  둘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사역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예수님의 제자인 사도 요한이 그의 복음서에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의 기록은 나름대로 시간적인 순서로 배열이 되어 있는데 그 점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예수님이 세례 요한으로부터 물세례를 받은 시기가 의사 누가의 복음서를 참조하면 대략 주후 28년의 유월절이 지난 시점입니다(3:1, 3:23). 만약 그때가 봄철 4월 중순 유월절기 이전이라고 한다면 예수님은 공생애 첫해에 순례자가 되어 곧바로 예루살렘을 방문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시점이 유월절을 한참 지난 시기이므로 예수님은 자신의 연고가 있는 갈릴리 지방으로 북상하여 그곳에서 제자들을 불러모은 다음에 복음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듬해가 되자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에서 유월절을 지내기 위하여 제자들과 함께 남행에 나서신 것입니다(2:13). 그러므로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 중 첫번째 유월절 예루살렘 방문은 주후 294월입니다. 그때 사도 요한은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이 성전청결사건을 일으켰으며 바리새인 공회원 니고데모의 은밀한 방문을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2:15-3:21);

2)    그 다음해인 주후 304월에도 유월절이 되자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재차 예루살렘을 방문하십니다(5:1). 그러나 이번에는 성전 주위에 있는 베데스다 못가에서 38년된 병자 한사람만을 고쳐 주십니다(5:2-15). 그 일이 안식일에 발생하고 있으므로 그때부터 유대인들이 나사렛 예수의 복음사역을 이단시하면서 핍박하기를 시작하고 있습니다(5:16). 더구나 예수님이 아버지 하나님의 명령으로 자신이 천국복음을 전하면서 안식일에도 생명을 살리는 복음사역을 시행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으므로 유대인들이 크게 반발하고 있습니다(3:4).

3)    그 이유는 유대교의 신앙의 대상인 산술적인 유일신 여호와를 제멋대로 성부와 성자로 나누고 있으며 또한 모세율법의 대강령인 안식일 계명을 어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유대인들은 전통적인 유대교를 보호하기 위하여 이단아 나사렛 예수를 잡아서 죽이고자 살의를 품게 됩니다(5:18). 사실 예수님이 백성들에게 전하고 있는 아버지 하나님의 복음은 전통적인 유대교의 가르침과는 상당히 다른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복음은 선민만의 구원이 아니라 이방인까지 전부 구원하고자 하는 만민구원 사상입니다(9:1-7, 12:39-42). 그리고 다윗의 제국 곧 선민의 제국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 세상에 재건하고자 하는 정치적 메시아의 사명이 아니라 만민을 구원하여 함께 천국으로 인도하겠다고 하는 소위 영생구원사상이기 때문입니다(3:16, 6:39-40).

4)    그에 따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자신들 유대인만을 구원하고 그들 선민의 제국을 건설하여 주기를 소원하고 있는 유대교인들의 입장에서는 나사렛 예수의 복음사역이라고 하는 것은 그들의 전통적인 유대교의 신앙체계를 뿌리째 뒤흔들고 있는 것에 불과합니다. 게다가 나사렛 예수가 안식일을 지키지 아니하면서 병자와 장애자를 하나님의 능력으로 마구 고쳐주고 있으니 그것은 창조주 여호와의 계명을 어기고 있는 잘못된 능력 행함이라고 판단하고 있는 것입니다(5:10-16). 그와 같은 유대인들의 반대와 핍박 때문에 예수님은 제자들을 데리고 얼른 변방 갈릴리 지방으로 떠나가십니다. 그리고 다음해인 주후 314월의 유월절에는 예수님이 예루살렘을 방문하지 아니하십니다(7:1).

5)    그렇지만 그해 겨울이 되자 은밀하게 제자들과 함께 남하하여 예루살렘에 들어오십니다(7:10). 유대 땅에서 반년 가까이 복음사역을 하신 다음에 이듬해인 주후 324월 유월절이 되기 전에 예루살렘 동편 인근지역 베다니에서 나사로를 무덤속에서 살려 내십니다(11:43-453). 그리고 예루살렘 시내에서 유월절 만찬을 가지시고 그날 밤 감람산에서 체포를 당하신 후 새벽에 산헤드린 대공회에서 율법위반으로 죽음의 정죄를 당하십니다(13:26-30, 18:1-14, 24, 22:70-71). 아침에 유대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을 로마총독에게 끌고가서 반란의 수괴라고 주장하면서 십자가에 처형을 해달라고 강력하게 요청합니다. 강경한 유대교지도자들과 유다 백성들의 요구에 정치적으로 굴복한 빌라도 총독이 모든 책임을 그들에게 전가하면서 마침내 예수를 십자가에 처형하도록 판결하고 마는 것입니다(19:12-16);

(3)  셋째로, 오늘의 본문은 요한복음 제5장에 수록되어 있는 베데스다 못가에서의 예수님의 사역에 관한 내용입니다(5:1-15). 사도 요한이 위와 같이 예수님의 복음사역의 내용을 알기 쉽게 기록하고 있는데 이미 살펴본 전체적인 맥락에서 그 대목을 다시 묵상해보면 다음과 같은 두가지 의문을 가지게 됩니다;

1)   하나는, 베데스다 못가에는 많은 병자와 장애자들이 모여서 홀연히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와 못의 물을 휘젓는 때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때 가장 먼저 물에 뛰어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과 장애라도 고침을 받을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성전으로 들어가기 전에 베데스다 못가에서 그 기회를 기다리고 있는 많은 병자와 장애자를 목격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중에 오직 한사람 곧 38년된 병자로서 장애자인 그 사람만을 낫게 하십니다. 그는 자력으로는 도저히 가장 먼저 그 연못에 들어갈 수가 없는 장애인입니다;

 그렇다면 어째서 그 베데스다 못가에서 예수님은 불쌍한 그곳의 병자와 장애자를 전부 고쳐주지 아니하고 계시는 것일까요?

2)   또 하나는, 마태복음 제15장 제29-31절 말씀을 참조하면 갈릴리 지역에서는 자신에게 나아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복음으로 열심히 듣고 있는 모든 장애자와 병자들을 예수님이 하나같이 고쳐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예루살렘의 주민과 갈릴리의 주민을 예수님은 차별하고 계시는 것일까요? 그렇다고 하면 베데스다 못가의 병자와 장애자들이 예수님으로부터 고침을 받자면 이제 어찌하면 되는 것일까요?

3)   그 점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그 옛날 이사야의 기록이 일단 참고가 됩니다; “1. 전에 고통받던 자들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나사렛을 중심으로 하는) 스불론 땅(가버나움을 중심으로 하는) 납달리 땅이 멸시를 당하게 하셨더니, 후에는 (두로와 시돈 등 이방인이 살고 있는, 15:21-28) 해변길과 요단 저쪽 이방의 갈릴리를(헬라인들이 살고 있는 거라사와 데가볼리 지역 등을, 8:26-39)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2.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도다”(9:1-2).

4)   요컨대, 예수를 잡아서 죽이고자 하는 예루살렘과 유대 땅을 떠나 즉시 갈릴리로 달려가서 예수님을 만나게 되면 모든 질병과 장애에서 고침을 받고 영육 간에 강건하게 그리스도의 제자로 한평생 살아가게 되는 길이 열리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복음사역에 나서는 제자들에게 온전한 구원의 확신이 믿음으로 주어지고 있습니다. 오늘의 강해설교는 그 점을 한번 깊이 생각해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제부터 본문말씀을 한 구절 씩 풀이하면서 그 질문에 대한 해답을 구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얻은 소중한 교훈을 더불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첫째로,1. 그후에 유대인의 명절이 되어(참조 요2:13)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니라. 2.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5이 있고, 3. 그 안에 많은 병자,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들이 누워 물의 움직임을 기다리니, 4.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움직인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 5. 거기 38년된 병자가 있더라. 6.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래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7.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 가나이다(참조 마25:40). 8.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9.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이 날은 안식일이니”(15:1-9);  다음과 같이 3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봅니다;

(1)  1. 그후유대인의 명절이 되어(참조 요2:13)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니라”(15:1);

1)    여기서 그후에는 예수님께서 복음사역을 위한 공생애를 고향이 있는 갈릴리지방에서 시작하고 그 이듬해 4월에 예루살렘성전을 다녀온 그 이후를 말하고 있습니다(1a).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주후 28년 하반기에 나사렛 예수가 요단강 동편 시냇가 마을 베다니에서 세례 요한으로부터 물세례를 받고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며 그리스도라는 사실이 유대인들에게 알려지자 갈릴리로 돌아와서 제자들을 불러 모으고 복음사역을 위한 공생애를 시작하십니다.

2)    그리고 이듬해 주후 294월에는 공생애를 시작한 이후 처음의 유월절을 지내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가십니다. 하지만 성전청결운동을 벌이셨기에 유대교지도자들의 눈 밖에 나고 있습니다(2:13-20). 따라서 고향이 있는 갈릴리 지역으로 돌아와서 복음사역에 전념하십니다. 그렇지만 또 해가 바뀌고 있습니다. 따라서 저자인 사도 요한은 주후 30년 봄의 일을 이제부터 기록하기 위하여 그후에라는 용어를 여기서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1a).  

3)    공생애를 시작한 후 두번째의 유월절 명절이 다가오고 있습니다(1b). 따라서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으로 순례길을 나서고 있습니다. 북쪽의 갈릴리에서 남쪽의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은 고도상으로 보면 요단강물이 흘러가듯이 높은 지역에서 낮은 지역으로 내려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니라”(1c)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4)    그 이유가 두가지입니다; 하나는, 예루살렘이 해발 780미터의 고지대에 자리를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는, 여호와를 모시는 성전이 있는 곳이기에 피조물인 사람들이 여호와를 예배하고자 올라가는 것입니다. 참고로, 그것은 그 옛날 임금이 있는 도성으로 올라간다는 표현과 동일한 것입니다.

(2)  2.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5이 있고, 3. 그 안에 많은 병자,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들이 누워 물의 움직임을 기다리니, 4.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움직인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15:2-4);

1)    예루살렘성에는 8개의 성문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양문(羊門, sheep gate)은 성전으로 들어가는 동문의 하나입니다(2a). 성전에 제물로 바치는 양을 그 문으로 반입하고 있기에 예로부터 양문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문을 들어서면 성전에 도달하기 전에 베데스다 못이라고 불리고 있는 두개의 연못이 있습니다(2b); 하나의 연못은 제물인 양을 깨끗하게 씻기 위한 것입니다. 또 하나는 그 물을 길어가서 성전의 뜰에 설치되어 있는 물두멍에 붓기 위한 것입니다. 제사장이 물두멍에서 손발을 씻고 있습니다. 그들은 깨끗한 손과 발로 제물을 번제단에 태우고 있는 것입니다.

2)    그런데 베데스다 못 가까이에는 그늘을 만들어주고 있는 5개의 행각이 있습니다(2c). 그곳에는 많은 병자와 장애자들이 모여서 하나의 기적을 기다리고 있습니다(3). 가끔 천사가 하늘에서 그 연못으로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면 그 직후에 곧바로 연못에 뛰어들어가는 자가 병에서 그리고 장애에서 해방을 얻게 되기 때문입니다(4). 그들 대기자들은 눈이 빠지게 그때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들은 속으로 여호와께 기도하고 있습니다; “부디 천사를 보내셔서 베데스다의 물을 움직여 주십시오. 그리고 제가 가장 먼저 그 물에 들어가서 완전히 낫도록 도와 주십시오”.

3)    질병과 장애에서 해방을 얻고자 하는 그들은 적어도 두가지 신앙을 지니고 있습니다; 하나는, 여호와의 도우심과 천사의 기적을 소망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일종의 천사숭배사상(the cult of angels)에 가까운 것입니다. 또 하나는, 현세적인 병 나음과 장애의 나음을 지극히 원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영혼의 영생구원보다 앞서고 있는 목숨에 대한 현세적인 구원 사상입니다. 그와 같은 사상을 지니고 있는 병자와 장애자들을 보시면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어떠한 반응을 보이게 되는 것일까요? 그것은 오늘날 현세 기복적인 신앙을 지니고 있는 현대인들을 주님께서 어떻게 보고 계시는가? 하는 질문에 대하여 그 대답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는 대목입니다.

(3)  5. 거기 38년된 병자가 있더라. 6.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래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7.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 가나이다(참조 마25:40). 8.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9.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이 날은 안식일이니”(15:5-9);

1)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관심은 그 중에 가장 소자인 하나님의 형제라고 부를 수 있는 38년된 병자이며 장애자에게 집중이 되고 있습니다(5-6a). 그 이유는 사도 마태가 기록한 글에서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40.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25:40).

2)    그 자는 자력으로 베데스다 못에 들어갈 수 있는 확률이 거의 없습니다. 그 이유는 몸이 부자유한 장애를 크게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가 천천히 움직이고 있는 사이에 병만 지니고 있는 자들이 먼저 들어가서 나음을 입고 말기 때문입니다(7). 그와 같은 처지는 피조물이 직면하고 있는 살기다툼 곧 제로섬 게임’(zero-sum game)에 해당합니다.

3)    그렇지만 사회적으로 가장 연약한 가난한 자에게 창조주 하나님의 돌보심의 은혜가 가장 먼저 임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모세의 율법으로 벌써 선포가 되어 있습니다; “18.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정의를 행하시며 나그네를 사랑하여 그에게 떡과 옷을 주시나니”(10:18).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가장 연약한 자 곧 38년된 병자이며 장애자인 그 사람을 낫게 하십니다.

4)    그런데 그 치유의 절차가 특이합니다. 그자에게 먼저 네가 낫고자 하느냐?”(6b)고 질문하십니다. 그 의미가 무엇일까요? 너무나 뻔한 질문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깊이 생각해보면 다음과 같은 색다른 의미를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그저 (육체적으로)질병과 장애만 낫고자 하느냐? 아니면 진심으로 (영적인 구원을 받기에 합당한) 새로운 거듭난 인생을 살아보고 싶은 것이냐?”. 언뜻 보기에는 전자의 소원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제15절 말씀을 미리 참조하면 구원주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삶이 전개가 되고 있습니다.

5)    그 자리에서 예수님의 말씀으로 그 병자가 나음을 얻고 있습니다(8). 천사가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처방이기에 순식간에 완전히 깨끗하게 나아서 이제는 자리를 들고 걸어가면서 바야흐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고 있는 것입니다(9a). 그렇지만 그 일은 유대교인들이 보기에 2가지 측면에서 안식일 율법을 어기고 있습니다(9b); 하나는, 자리를 들고서 걸어가는 것이 안식일에 행할 수 없는 노동에 해당하기 때문입니다(9a). 또 하나는 안식일에 금지가 되어 있는 불법적인 치료 행위이기 때문입니다(8). 그에 따라 예수님은 유대교지도자들의 시비거리의 대상이 다시 되고 마는 것입니다;

둘째로, “10. 유대인들이 병 나은 사람에게 이르되, 안식일인데 네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아니하니라. 11. 대답하되, 나를 낫게 한 그가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더라 하니, 12. 그들이 묻되, 너에게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한 사람이 누구냐? 하되, 13. 고침을 받은 사람은 그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니, 이는 거기 사람이 많으므로 예수께서 이미 피하셨음이라. 14. 그후에 예수께서 성전에서 그 사람을 만나 이르시되,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 15. 그 사람이 유대인들에게 가서 자기를 고친 이는 예수라 하니라”(15:10-15); 다음과 같이 2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1)  10. 유대인들이 병 나은 사람에게 이르되, 안식일인데 네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아니하니라. 11. 대답하되, 나를 낫게 한 그가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더라 하니, 12. 그들이 묻되, 너에게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한 사람이 누구냐? 하되, 13. 고침을 받은 사람은 그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니, 이는 거기 사람이 많으므로 예수께서 이미 피하셨음이라”(15:10-13);

1)    죽어가는 연약한 생명을 살리는 한편 자력으로 질병과 장애에서 나음을 얻을 방도가 전혀 없는 불쌍한 자들을 구원하여 여호와신앙인으로 그리고 그리스도의 제자로 남은 인생을 힘있게 살아가게 만들고자 하나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성육신하시고 이제는 복음전파와 치유사역의 공생애를 살아가고 계십니다. 그러한 사실을 예수님이 그리스도의 복음사역의 내용으로 벌써 선포하고 있습니다; “22.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가서 보고 들은 것을 (세례) 요한에게 알리되,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먹은 사람이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23.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7:22-23).

2)    그런데 유대교인인 유대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아니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모세가 전해준 율법을 실생활에 적용할 수 있도록 그들의 선진들이 만든 생활율법을 준수하는 것을 절대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38년된 불쌍한 병자이며 장애자가 나아서 새로운 인생을 살아가게 되는 것을 축하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에 안식일에는 아무 일도 하지 아니하도록 되어 있는 생활율법을 어긴 자를 색출하여 처벌하는 것이 급선무입니다(10). 그 사실을 벌써 알고 있는 예수님은 그 자리를 피해 버리십니다(13b). 따라서 유대교인들이 예수님의 신병을 확보하고자 병 나은 자에게 질문공세를 벌이지만 그 소득이 없습니다(11-13a).  

(2)  14. 그후에 예수께서 성전에서 그 사람을 만나 이르시되,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 15. 그 사람이 유대인들에게 가서 자기를 고친 이는 예수라 하니라”(15:14-15);

1)    육신적인 질병과 장애가 나으며 목숨을 연장 받는 것은 현세적으로는 가장 큰 복으로 보일지 몰라도 무덤에서 영생의 몸으로 부활하여 천국에 들어가서 창조주 하나님의 자녀로 영원히 살게 되는 영광과 비교하면 한없이 작은 축복에 불과합니다(8:15-18). 그 이치를 모르고 38년된 병자가 나음을 입고서 그 다음에 세상적인 축복에 만족하여 현세적인 기복신앙으로 다시 살아가게 되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2)    그 점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바가 있습니다; “43.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성령의 능력이 미치지 아니하는 곳, 1:2)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쉴 곳을 얻지 못하고, 44. 이에 이르되, 내가 나온 내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와보니 그 집이 (여호와신앙과 그리스도의 복음을 버려서) 비고 청소되고 수리되었거늘, 45.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느니라. 이 악한 세대가 또한 이렇게 되리라”(12:43-45).

3)    그러므로 예수님은 자신의 신변의 위험을 무릅쓰고서 그 병 나은 자를 찾아가서 다음과 같이 권면하고 있습니다;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14). 그 말을 들은 그 자는 이제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자가 되고자 합니다. 따라서 자신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나음을 입었다고 간증하면서 새로운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15).

셋째로, “29. 예수께서 거기서(두로와 시돈) 떠나사 갈릴리 호숫가에 이르러, 산에 올라가 거기 앉으시니, 30. 큰 무리가 다리 저는 사람과 장애인과 맹인과 말 못하는 사람과 기타 여럿을 데리고 와서 예수의 발 앞에 앉히매 고쳐 주시니, 31. 말 못하는 사람이 말하고, 장애인이 온전하게 되고, 다리 저는 사람이 걸으며, 맹인이 보는 것을 무리가 보고 놀랍게 여겨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15:29-31);

(1) 오늘의 본문말씀 곧 요한복음 제5장 제1-15절 말씀을 검토하면 한가지 큰 의문사항을 얻게 됩니다. 그것은 어째서 베데스다 못가에서 나음을 얻고자 물의 움직임을 기다리고 있는 병자와 장애자들 가운데 예수님은 오로지 38년된 병자 한사람만 구원하여 주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나머지 많은 병자와 장애자들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그들은 재생의 기회와 새로운 영적인 치유의 기회를 얻지 못한 채 그 자리에서 마냥 천사의 기적만 기다리다가 죽고 마는 인생이 되고 마는 것일까요?

(2) 그 점과 관련하여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복음사역이 유대교의 총본산인 예루살렘과 그 변방인 갈릴리지방에 있어서 상당히 다르다는 사실을 먼저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의 복음사역에 대하여 그 옛날 선지자 이사야가 다음과 같이 예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1. 전에 고통받던 자들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나사렛을 중심으로 하는) 스불론 땅(가버나움을 중심으로 하는) 납달리 땅이 멸시를 당하게 하셨더니, 후에는 (두로와 시돈 등 이방인이 살고 있는, 15:21-28) 해변길과 요단 저쪽 이방의 갈릴리를(헬라인들이 살고 있는 거라사와 데가볼리 지역 등을, 8:26-39)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2.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도다”(9:1-2);

(3) 유대인들의 선민구원사상은 전통적으로 여호와의 말씀을 그들 유대인이 독점하여 선민만이 구원을 얻으며 그 반면에 이방인들은 창조주 하나님의 뜻을 모르고 제멋대로 우상을 섬기고 살다가 여호와의 진노로 멸망을 당하는 것이 이스라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측면에서 그들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외세를 물리치고 선민의 제국을 재건하여 줄 메시아를 계속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세상을 구원하기 위하여 성육신하시고 복음사역의 공생애를 살아가고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각은 전혀 다릅니다.

(4) 그리스도의 복음은 선지자 이사야의 예언 그대로 선민은 물론 이방인까지 모두 구원하고자 하는 만민에 대한 구원입니다. 그리고 현세적인 구원이 아니라 영생의 구원입니다. 목숨보다 더 소중한 것이 영원한 생명이며 천국에서의 영생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6:33, 10:28, 6:40). 그러므로 베데스다 못가에 모여 있는 병자와 장애자들은 유대교리에서 벗어나 이제는 갈릴리에서 선포가 되고 있는 예수님의 복음사역의 현장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5) 그곳에서 얻을 수 있는 은혜가 본문에 정확하게 기록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29. 예수께서 거기서(두로와 시돈) 떠나사 갈릴리 호숫가에 이르러, 산에 올라가 거기 앉으시니, 30. 큰 무리가 다리 저는 사람과 장애인과 맹인과 말 못하는 사람과 기타 여럿을 데리고 와서 예수의 발 앞에 앉히매 고쳐 주시니, 31. 말 못하는 사람이 말하고, 장애인이 온전하게 되고, 다리 저는 사람이 걸으며, 맹인이 보는 것을 무리가 보고 놀랍게 여겨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15:29-31).

결론적으로, 이 세상은 부족한 재화를 서로 많이 차지하고자 살기다툼을 하고 있는 현장입니다. 개인적으로 그러하고 국제사회에서는 국가 간에도 그러합니다. 그와 같은 살기다툼의 현장이 베데스다 못가에 모여 있는 병자들의 사회입니다.

그들을 바라보시고 예수님은 자력으로는 도저히 베데스다 못에 일등으로 들어가서 고침을 받을 확률이 전혀 없는 38년된 병자이며 장애자인 그 사람을 주목하십니다. 그리고 그에게 네가 낫고자 하느냐?’고 이상한 질문을 하시고서 즉시 완전한 치유를 행하십니다.

그렇지만 나머지 그 수많은 병자를 그곳에서 낫게 하셨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어디로 가야 예수 그리스도의 치유를 받을 수가 있을까요? 그 점에 대하여 무엇보다도 유대교의 총본산인 예루살렘성전이 아니라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만민구원의 복음이 선포되고 있는 변방 갈릴리로 찾아가는 일이 필요하다고 하겠습니다.

갈릴리지역에는 호수 건너 동편에 이방인 헬라인들이 열개의 성읍을 이루어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북쪽 해안가에는 두로와 시돈 지역에 또 이방인 베니게인들이 살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예수님이 천국의 복음을 전파하시면서 치유사역을 병행하고 계십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갈릴리지방에서는 복음을 선포하시면서 모든 병자와 장애자를 고쳐 주시는 예수님의 치유사역이 활발합니다. 그러므로 유대교의 본산을 떠나서 이제는 예수님의 복음이 치유사역과 더불어 강력하게 발생하고 있는 갈릴리로 발걸음을 옮겨야 합니다;

그렇게 갈릴리를 찾아가는 자들에게는 첫째로, 목숨구원보다는 천국에서의 영생이 훨씬 소중하다는 새로운 가치관과 세계관이 주어지고 있습니다. 둘째로, 남은 인생을 주님의 지상명령을 실천하면서 그리스도의 제자로 끝까지 살아가는 영적인 삶이 더 소중하다는 새로운 인생관이 주어질 것입니다.

그와 같은 은혜가 저와 여러분에게 풍성하게 임하시기를 거듭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