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24년 설교문(손진길)

유대인들의 경제적 정치적 관심사항과 예수님의 답변(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3. 7. 4. 04:40

제목; “유대인들의 경제적 정치적 관심사항과 예수님의 답변”(6:10-21, 15:39-16:4)

설교일; 주후 202379일 주일

작성자; 손진길 목사(74일 화요일 작성)

 

나사렛 출신의 예수는 누가복음의 기록에 따르면 주후 28년경 30세가 되자 복음전파를 위한 자신의 공생애를 시작합니다(3:1-3, 23). 예수는 요단강 동편의 또다른 작은 성읍 베다니에서 백성들에게 회개의 세례를 베풀고 있는 6개월 연상인 선지자 세례 요한을 만나(1:28, 1:36) 그에게서 물세례를 받게 됨으로써 자신의 정체성과 사명을 거듭 확인하게 됩니다;

나사렛 예수의 정체성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3:21-22). 그리고 그가 감당하게 되는 사명은 이 세상을 구원하는 그리스도이며(3:16) 구체적으로 세상 죄를 지고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입니다(1:29, 36). 세례 요한은 구세주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자신의 눈으로 보고서 그를 백성들에게 가장 먼저 소개하는 선지자입니다.

세례 요한과 달리 나사렛 예수는 구약시대 많은 선지자를 통하여 전파된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의 뜻이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복음이라는 사실을 자신의 공생애를 통하여 백성들에게 전파하고 있습니다(24:44-45). 그리고 아버지 하나님의 뜻에 따라 만민구원을 위하여 자신의 몸을 스스로 대속의 십자가에 속죄의 제물로 바치게 되는 것입니다(3:14-16).

그와 같은 예수님의 정체성과 그리스도의 사명을 깊이 생각하면서 본문에 기록되어 있는 오병이어의 이야기(6:10-21) 그리고 예루살렘의 산헤드린 대공회에서 갈릴리까지 예수님을 찾아온 사두개인과 바리새인들의 질문의 내용 및 그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내용 등을(15:39-16:4)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게 됩니다;

(1)  첫째로, 소위 오병이어’(五餠二魚, 5덩이와 물고기 2마리)의 기적을 맛보게 된 유대인들은 차제에 나사렛 예수를 자신들의 임금으로 삼고자 합니다(6:15). 그 이유는 하나님의 능력을 빌려서 백성들에게 먹을 것을 제공하여 주시는 예수님만 자신들의 임금으로 모시게 되면 선민 유대인들은 앞으로 먹고 사는 경제적인 문제를 손쉽게 해결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점을 다음과 같이 조금 더 살펴봅니다;

1)   특히 농업생산량이 많지 아니한 고대사회의 백성들에게 있어서는 먹고 사는 문제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가장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생계문제를 해결하여 주는 자가 바로 구세주와 같은 자입니다. 그러한 측면에서 현세적인 생계문제의 해결이 가능하게 되었으니 나사렛 예수를 자신들의 임금으로 삼는 것이 당연하다고 하겠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제자들을 먼저 배에 태워서 갈릴리 호수 건너편 게네사렛 쪽으로 보내고 자신은 백성들을 피하여 산으로 들어가십니다.

2)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한마디로, 예수님은 백성들의 경제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온 것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사역의 핵심은 백성들에게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의 뜻이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의 복음이라는 사실을 전파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자를 전부 구원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가 대속의 십자가를 지고자 하십니다(요3:14-15, 6:39). 그와 같은 본질적인 속죄와 구원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오신 그리스도이시기에 예수님은 자신을 임금으로 삼아 경제적인 문제를 쉽게 해결하고자 하는 유대인들을 피하여 산으로 들어가신 것입니다.

(2)  둘째로, 갈릴리호수를 건너가서 게네사렛 지방은 물론 이방지역 두로와 시돈까지 두루 천국복음을 전파하고 병자를 고치신 예수님께서는 다시 갈릴리 동편지역으로 돌아와서 많은 병자와 장애자를 고치고 계십니다(14:34-35, 15:21-31). 며칠이 지나도 무리들이 흩어지지 아니하는 것을 보시고 그곳에서 이제는 칠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십니다(15:32-38). 그리고 조용히 갈릴리 호수 건너편 마가단 지역으로 떠나십니다(15:39);

1)   그런데 변방 갈릴리지역에서 모든 병자와 장애자를 고치시고 천국의 복음을 전파하고 계시는 큰 선지자 예수님이 하늘의 곳간을 열어서 백성들을 먹이시는 기적을 두차례나 행하고 있다는 소식이 예루살렘의 산헤드린 대공회에 들려오고 있습니다. 그것은 선지자의 능력을 뛰어넘는 것이며 메시아의 신위적인 능력에 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판단한 산헤드린 대공회에서는 갈릴리 현장으로 바리새인 출신의 서기관들과 사두개인 출신의 장로들을 조사단으로 파견합니다(16:1). 그들이 갈릴리 호수 서쪽 호안(湖岸)지역 마가단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있습니다(15:39-16:1). 과연 그들의 사명이 무엇일까요?

2)   한마디로, 그들의 사명은 나사렛 예수가 과연 메시아인지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당시 유대교리에 따르게 되면 메시아는 다윗의 후계자이며 모세와 같이 출애굽의 기적을 베푸는 자입니다. 구체적으로 유대인들이 기다리고 있는 메시아는 유대인들을 무력으로 통치하고 있는 당시의 외세 곧 로마총독부와 헤롯왕가를 그 옛날 모세처럼 하나님의 능력으로 물리쳐야 합니다. 그리고 그 옛날 다윗대왕처럼 선민 이스라엘의 제국을 중동 땅에 굳건하게 재건해야 합니다. 그것이 선민의 영광을 사해에 떨치는 길이며 동시에 시온의 여호와 하나님에게 이 세상의 영광을 올려드리는 방법입니다.

3)   선민 유대인들이 바라고 있는 그와 같은 정치적인 메시아의 표적을 보여달라고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에게 요청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답변은 그것이 아닙니다. 단지 그 옛날 갈릴리 산골마을 가드헤벨의 선지자 요나의 표적을 깊이 생각해보라고 그들에게 대답하고 있습니다(16:4, 왕하14:25). 동방에 있는 이방인 도시 니느웨로 가서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라고 했더니 요나 선지자가 여호와의 말씀을 이방인들에게 전파하기 싫어하여 청개구리처럼 반대방향 곧 지중해 서쪽 끝 다시스 항구로 가는 배를 타고서 도망을 칩니다(1:1-3).

4)   하나님께서는 신위적인 능력으로 선지자 요나를 큰 물고기 뱃속에 넣어서 3일간 회개시킨 다음에 다시 니느웨로 보내고 있습니다(2:7-10);

그것은 선민 유대인들의 존재이유가 무엇인지를 말하고 있는 이른바 요나의 표적입니다(12:1-5, 19:4-6, 16:4, 12:39). 요나가 단지 하루동안 하나님의 진노의 말씀을 그들에게 전했더니 예상외로 임금부터 일반백성에 이르기까지 모두 회개의 마당으로 나아오고 있습니다. 그 결과 니느웨가 멸망이 아니라 여호와의 구원의 대상이 되고 맙니다(3:7-10). 그것이 요나가 직면하고 있는 하나님의 또 하나의 표적입니다.

5)   그러나 요나는 여호와의 만민구원의 뜻을 받아들이지 아니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선민만의 구원사상에 투철한 유대인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요나는 고향으로 돌아가지 아니하고 니느웨 백성들이 다시 하나님께 죄를 범하고 그 도시가 멸망하는 광경을 보고자 교외지역에서 마냥 기다리고 있습니다(4:5). 그와 같이 선민사상에 물들어 있는 요나에게 여호와께서는 만민구원의 복음이 무엇인가를 알기 쉽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11.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12만여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그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4:11);

이제는 본문에 대한 구절풀이에 들어가기 전에 전체적인 맥락에서 먼저 다음과 같은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우선적으로 예수님의 복음사역의 행로를 결정하는데 영향을 미치고 있는 요인들이 무엇인지부터 살펴보겠습니다(15:39, 16:4). 예수님의 복음사역의 행로는 자신의 의지와 뜻대로 결정이 되고 있지 않습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통하여 그 길을 인도하시고 있음을 마태의 복음서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사도 요한의 글을 되돌아보게 해주고 있습니다; “18.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21:18).

그렇게 영향을 미치도록 쓰임을 받고 있는 사람들이 누구일까요? 놀랍게도 예수님의 복음사역의 혜택을 받았던 백성들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복음사역을 못마땅하게 생각하여 유대교의 논리로 시비를 걸어왔던 유대교의 지도자들입니다. 그 점을 본문에서 한번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예수님이 갈릴리 동편 먼 곳 데가볼리 가다라 지방에서 군대귀신을 사람에게서 쫓아내어주었습니다(8:28-34). 귀신 떼가 2천 마리나 되는 돼지 무리에게 들어가자 돼지 떼가 견디지 못하고 물로 뛰어들어 몰사(沒死)를 해버리고 말았습니다(8:32). 그 때문에 손해를 보게 된 주인들이 고을 사람들을 선동하여 예수님을 동네에서 몰아내고 있습니다(8:33-34). 그 결과 예수님이 이방지역 선교를 멈추고 갈릴리 경내로 되돌아 오십니다(9:1). 이방인들은 경제적인 불이익을 원하지 아니하여 그만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를 내쫓고 마는 것입니다.  

(2)  그러나 예수님이 갈릴리 동편 들판에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켰을 때에(14:13-21) 만나와 같은 기적을 맛본 선민 유대인들은 달리 행동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자신들의 임금으로 삼으려고 합니다(6:15). 그러자 그들을 피하여 예수님께서는 산으로 갔다가 곧 배편으로 호수의 북쪽 대도시 가버나움으로 피신을 하십니다(14:22, 6:17). 그때부터 예수님의 복음사역은 실제적으로 가버나움과 막달라 사이 게네사렛 땅에서 주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15:34)

(3)  갈릴리 백성들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하고 있던 예루살렘 산헤드린 대 공회에서는 현장조사를 위하여 두차례나 대표단을 파견하고 있습니다. 첫번째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급파한 것입니다(15:1). 그들이 게네사렛 지방에서 예수님에게 시비를 걸어왔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식사를 할 때에 손을 씻지 않고 있으니 예수님 일행이 유대교인들이 지키고 있는 장로들의 전통을 범하고 있다는 지적입니다(15:2). 예수님은 율법을 만드신 하나님의 본뜻을 한참 설명하고 있습니다(15:3-14). 그러나 전혀 이해를 하지 못하고 있는 그들을 보시고서 그만 그 자리를 피하고 있습니다.

(4)  그 다음 행로가 서북면 지중해 바닷가 이방지역 두로 시돈입니다(15:21). 그곳에서 가나안 여인을 만나서 창조주의 능력이 메시아로부터 흘러나오고 있다고 확신하고 있는 그녀의 놀라운 믿음을 보게 됩니다(15:22-28). 그리고 하나님 신앙과 지식을 파수하고 있는 선민으로부터 취급을 받더라도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그녀의 겸손함을 보게 됩니다(15:26-27). 예수님은 선민사회 내에서도 사람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는 불쌍한 인생들이 있음을 깨닫고서 갈릴리 가버나움으로 되돌아 오십니다(15:29).

(5)  예수님은 다시 갈릴리 동편 광야에서 이제는 병자가 아니라 장애자와 불구자들을 모아 놓고서 그들을 치유하는 군중집회를 가지게 됩니다(15:30-31). 삼일 동안 복음을 전하고 치유집회를 계속하는 동안에 장정만 계산해도 사천 명이나 몰려들어 있습니다(15:32, 38). 먹을 것이 없이 굶으면서 집회가 계속이 되고 있습니다. 불쌍하게 생각하신 예수님이 이른 바 칠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십니다. 그것이 그곳을 떠나 반대쪽인 갈릴리 호수 서편 마가단 지경으로 떠나게 되는 이유가 되고 있습니다(15:39). 전번 오병이어의 기적 때처럼(6:15) 또 예수님을 임금으로 삼으려고 하는 움직임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이 되는 대목입니다.

(6)  칠병이어의 기적이 발생했다는 보고를 받은 산헤드린 대 공회에서 이번에는 바리새인과 더불어 사두개인들을 조사단으로 파견한 것으로 보입니다(16:1). 그들이 막달라 일대의 마가단 지경으로 예수님 일행을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모세처럼 하나님의 표적을 자신들이 보는 앞에서 보여달라고 요청을 합니다. 그들이 원하고 있는 표적은 그 옛날 출애굽기의 기적과 같은 것입니다. 한 마디로, 애굽제국에는 진노와 재앙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구원과 해방을 주는 그러한 이적을 말하고 있습니다(12:29-36). 그렇다면 예수님 당시에 있어서는 외세인 로마제국과 헤롯 왕가에게는 진노와 재앙을 내리고, 반대로 선민 유대인들에게는 구원과 영광을 드러내는 하나님의 이적을 행하라는 주문인 것입니다.

(7)  예수님께서 한마디로 거절하십니다. 그 이유는 선민사상에 물들어 있는 유대교지도자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이적이란 요나의 표적 밖에는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16:4). 선민이거나 이방인이거나 구별 없이 모두를 구원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벌써 요나 선지자의 기사를 통하여 이 세상에 드러나고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라는 질책의 말씀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들을 다시 떠나 북쪽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으로 들어가십니다(16:13).

  이상의 내용을 음미해보면 다음 두 가지 사실을 알 수가 있습니다;

첫째로, 백성들이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의 능력이 흘러나온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그를 자신들의 임금으로 모시고자 합니다(6:15). 이유는 자신들의 경제적인 문제를 단숨에 해결 받고자 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요청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피조물인 사람들의 생존권을 보장하고 계시는데(1:26-29) 왜 예수님은 그 요청을 거절하고 계시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단지 먹고 사는 문제의 해결을 위하여 하나님의 능력을 사모하는 것이 위험하기 때문입니다.

근본적으로, 사람이란 먹고 사는 이유와 목적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할 때에만 그 인생이 구원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인생의 목적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며 창조주의 공의의 정신을 구현하는 데 있습니다.

그 일에 모든 것을 바쳐서 매진을 하는 인생이라면 하나님 아버지께서 세상적으로 필요한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아니하겠다고 예수님을 통하여 이미 약속하고 있습니다(6:33). 그런데 사람들은 그 약속을 믿지 아니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당장 먹고 사는 문제부터 해결해주면 그 일에 나서겠다고 고집을 부리고 있습니다. 그것이 소위 기복신앙입니다. 달리 유식하게 표현하자면 도구주의적인 신앙관이며 그 특징은 인간들이 스스로 우상을 만들어 편리하게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경우에는 경제적인 문제가 해결되고 나면 십중팔구 하나님을 떠나게 됩니다. 모세의 예리한 지적이 다음과 같습니다; “12. 네가 먹어서 배부르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주하게 되며, 13. 또 네 소와 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14.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하노라”(8:12-14).

둘째로, 자신들에게 편리한 종교를 계속 유지하기 위하여 예수님의 만민구원사상을 배척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선민들의 이익을 극대화하고 있는 유대교를 지키고자 합니다;

 그런데 만민구원사상을 설파하고 있는 예수님의 움직임이 그들의 종교적인 기반을 송두리째 뒤흔들고 있습니다. 따라서 어떻게 해서든지 나사렛 예수의 약점을 잡아서 처형을 해버리고자 몸부림을 치고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만 그러한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에도 자기 교회와 교단의 이익을 극대화 해주고 있는 해석만을 고집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유일한 잣대로 사용하여 하나님 말씀과 예수님의 복음을 풀이하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면, 자신들의 교리를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님의 일생을 고찰하고 있는 경우가 다반사입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말하자면 그 반대여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뜻을 복음으로 밝히고 그것을 실천하고 있는 예수님의 복음적인 일생에 대하여 깊은 묵상을 해야만 합니다. 그 묵상의 결과를 가지고 자신의 삶도 종교적 교리도 재정비를 하는 것이 올바른 수순이라고 하겠습니다”. 차제에 너나없이 겸손하게 그렇게 생각을 해보는 것이 좋겠다고 하는 것이 본문에서 얻을 수 있는 또 하나의 소중한 결론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그와 같은 사실들을 염두에 두고서 본문말씀에 대하여 구절풀이를 간략하게 하고자 합니다. 아울러 말씀에 대한 묵상을 통하여 얻은 교훈을 다음과 같이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로, “10.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사람들로 앉게 하라 하시니, 그곳에 잔디가 많은지라. 사람들이 앉으니, 수가 5천명쯤 되더라. 11.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아 있는 자들에게 나눠 주시고 물고기도 그렇게 그들의 원대로 주시니라. 12. 그들이 배부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 하시므로, 13. 이에 거두니, 보리떡 5개로 먹고 남은 조각이 12바구니에 찼더라. 14. 그 사람들이 예수께서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 15.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이 와서 자기를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는 줄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 가시니라. 16. 저물매 제자들이 바다에 내려가서, 17.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가버나움으로 가는데 이미 어두웠고 예수는 아직 그들에게 오시지 아니하셨더니”(6:10-17);

(1)  인간세상에서는 유한한 재화를 서로 차지하겠다고 생존경쟁이 치열합니다. 그것이 소위 제로섬 게임’(Zero-Sum game)입니다. 그와 달리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처럼 창조주 하나님의 하늘 곳간을 열게 되면 플러스섬 게임’(Plus-Sum game)이 가능해집니다. 그것은 모두의 파이를 크게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그러나 그 방법을 실시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세가지 조건이 필요함을 본문에서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2)  첫째, 수혜자가 되고 있는 백성들이 먼저 질서를 지켜야 합니다. 사도들의 지시로 그 자리에 앉아서 조용히 하늘의 떡이 나타나기를 기다려야 하는 것입니다(10). 둘째,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나님께 은혜를 베풀어달라고 간절하게 기도해야 합니다(11). 셋째, 하나님께서 주신 귀한 선물을 공짜라고 생각하여 제 마음껏 먹고 함부로 헤프게 사용해서는 안됩니다. 먹고 남은 조각을 알뜰하게 거두어서 배고픈 무리를 위하여 제공하는 것이 옳은 것입니다(12-13). 그와 같은 마음의 자세가 없으면 거대한 재벌이나 제국이라고 하더라도 마침내 거덜이 나서 망하고 마는 것입니다.

(3)  예수님이 아버지 하나님께 간구하여 예외적으로 굶고 있는 무리들에게 먹을 것을 주신 대사건입니다. 그것은 그 옛날 가뭄 때에 자신이 피신한 집에 먹을 것이 화수분처럼 솟아나도록 만든 선지자 엘리야와 가난한 어느 과부와 그녀의 두 아들에게 기름이 넘치게 하여 살길을 마련해준 엘리사의 경우를 다시 보는 것과 비슷합니다(왕상17:12-16, 왕하4:2-7). 따라서 무리들은 예수님을 이 세상에 다시 오는 큰 선지자 엘리야로 여기고 있습니다(14, 4:5-6).

(4)  그것을 보고서 일부 정치적인 인물들이 앞장을 서고 있습니다. 차제에 나사렛 예수를 자신들의 임금으로 삼고서 경제적인 문제를 쉽게 해결하고자 하는 것입니다(15a). 그러나 그것은 아버지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맡긴 사명에서 벗어나는 방법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당장 그 자리를 피하여 산으로 들어가십니다(15b). 그리고 일체 제자들에게도 백성들의 요구에 호응하지 못하도록 배를 타고 멀리 호수 건너편으로 가도록 조치하고 있습니다(16-17).

둘째로, “18. 큰 바람이 불어 파도가 일어나더라. 19. 제자들이 노를 저어 십여 리쯤 가다가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 배에 가까이 오심을 보고 두려워하거늘, 20. 이르시되,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 하신대, 21. 이에 기뻐서 배로 영접하니, 배는 곧 그들이 가려던 땅에 이르렀더라”(6:18-21);

(1)  갈릴리 호수는 서편 지중해에서 높은 산지를 넘어오는 강한 바람과 동편 광야에서 강하게 불어오는 바람이 충돌하는 지점에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그 두 세력이 낮은 지역 갈릴리 호수에서 상충할 때에는 큰 풍랑이 발생하게 됩니다(18). 그때에는 아무리 노를 빨리 저어도 파도를 헤치고 나갈 수가 없습니다(19a). 한마디로 일엽편주가 뒤집힐 지경입니다.

(2)  그와 같은 위기상황을 10여리나 떨어진 먼 지역에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예수님이 보고 있습니다(19b). 급히 호수위를 걸어서 다가오십니다(19c). 그 모습을 보고 유령인 줄 알고서 제자들이 두려워합니다(19d).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20);

(3)  주님을 자신의 인생 가운데 영적으로 만나게 되면 걱정거리와 풍랑이 잠잠하게 됩니다. 그 기쁨이 크기에 오늘날에도 성도들이 주님을 성령님과 함께 심령속에 모시고 남은 인생을 마치 그 옛날 갈릴리호수의 사도들처럼 그리스도의 제자로 한평생 끝까지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21).

셋째로, “39. 예수께서 무리를 흩어 보내시고, 배에 오르사 마가단 지경으로 가시니라. 1.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예루살렘 산헤드린 대공회에서) 와서 예수를 (그들이 기다리고 있는 정치적인 메시아인지 알기 위하여) 시험하여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 보이기를 청하니, 2.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 하고, 3.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너희가 날씨는 분별할 줄 알면서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의 복음이 새언약으로 작동하기 시작하는, 31:31)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 4.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줄 표적이 없느니라 하시고, 그들을 떠나 가시니라”(15:39-16:4);

(1)  마가단 지경은 갈릴리 호수의 서쪽 중부 호안가에 있는 막달라 일대를 말하고 있습니다(15:39). 그러므로 마가단은 호수의 서북쪽 호안가를 말하고 있는 게네사렛의 남쪽입니다. 마가단의 위치가 서쪽 중부 호안가이기에 예수님 일행이 복음사역을 하시고 병자와 장애자를 많이 고친 지역 곧 오병이어칠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신 장소가 바로 갈릴리 호수의 동편 중부의 광야라는 사실을 넉넉하게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2)  예루살렘성전에 자리를 잡고 있는 산헤드린 대()공회는 대제사장이 이끌고 있는 유대교의 최고 의결기관이며 동시에 최종적인 종교재판소입니다;

 산헤드린 대공회는 대제사장과 70인의 대()공회원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내부적으로는 주로 사두개인의 대표인 장로들이 다수이고 바리새인 출신의 서기관들이 소수입니다. 참고로, 사두개인들은 모세오경만 공부하고 유대교의 장로가 되어 종교적인 권력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3)  그와 달리 바리새인들은 오랜 세월 히브리경전을 두루 공부하면서 평생을 바쳐서 사제지간에 주석을 만들고 또한 탈무드를 만들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선민 유대인들에게 히브리경전을 가르치기 위한 것입니다. 바리새인 가운데 정식으로 율법선생의 자격을 얻은 자들이 랍비이고 명성이 높은 랍비가 산헤드린 대공회에 영입이 되어 교법사 또는 서기관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4)  그런데 예루살렘의 산헤드린 대공회에서는 대공회원인 장로들과 서기관들을 현지조사차 갈릴리로 보내고 있습니다(16:1a). 그 목적은 나사렛 예수가 과연 그들이 기다리고 있는 정치적인 메시아인지를 확인하고자 하는 것입니다(1b). 만약 예수가 유대교인들이 소망하고 있는 메시아라고 한다면 하나님의 능력을 사용하여 외세를 물리치고 시온의 영광을 사해에 떨쳐야만 합니다. 과연 예수가 그들에게 그러한 하나님의 능력을 메시아의 표적으로 보여줄까요?

(5)  그들의 예상과는 달리 예수님은 한마디로 거절하고 있습니다. 그 답변이 다음과 같기 때문입니다; “4.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줄 표적이 없느니라 하시고, 그들을 떠나 가시니라”(16:4). 요나의 표적은 구체적으로 두가지로 구성이 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창조주 여호와의 말씀을 선민이 독점하지 말고 이방인에게도 전파하라는 것입니다. 선민사상에 물들어 있는 선지자 요나가 그와 같은 여호와의 뜻에 불순종하다가 큰 물고기 뱃속에서 회개를 합니다(2:9-10). 그것이 첫번째 요나의 표적입니다.

(6)  또 하나는, 이방인들이 회개하고 여호와의 용서와 죄로부터 구원을 받는 것을 시기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에 불복하여 요나가 니느웨의 멸망을 교외언덕에서 지켜보고 있다가 여호와의 질책을 받고 있습니다(4:11). 그것이 두번째 요나의 표적입니다. 그와 같은 여호와 말씀의 분명한 뜻을 선민사상에 젖어 있는 유대교인의 지도자들이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날씨의 변화의 징조를 예로 들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16:2-3). 그 말씀의 뜻은 날씨를 미리 예측하듯이 그렇게 선지자 예레미야와 이사야가 진작에 예언하고 있는 메시아의 오심과 새 언약 시대의 특징을 이제는 깊이 생각하고 제대로 분별하라는 것입니다(31:31-34, 9:1-7, 53:4-12);

결론적으로, 유대인들의 선민사상은 창조주 하나님의 구원은 선민들에게 한정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측면에서 선민들에게 복종하지 아니하고 있는 모든 이방인들은 창조주 하나님의 진노의 자식이며 멸망의 대상에 불과합니다. 그것은 역사적으로 이방인들의 침입을 경험하면서 유대인들이 주변의 나라와 민족을 얼마나 미워하고 있는지를 정확하게 반영하고 있습니다(5:43).  

따라서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주변의 나라나 이방인들에게 전혀 전달하지 아니하고 있습니다. 혹시 그 말씀을 영접하고 회개함으로써 창조주 여호와의 구원을 얻는 것을 보고 싶어하지 아니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와 같은 생각으로 살아가고 있기에 창조주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선민과 이방인을 구별할 실익이 전혀 없습니다. 유대인들의 선민사상은 모든 이방인들이 지니고 있는 민족우월사상과 한치의 오차도 없이 꼭 같기 때문입니다.

여호와께서는 주전 15세기 애굽의 치하에서 노예와 같은 비참한 삶을 영위하고 있는 이스라엘 자손들을 모세를 보내어 신위적인 능력으로 출애굽시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홍해까지 추격하고 있는 바로의 군대를 전부 수장시키고 마십니다.

그 대가로 여호와께서는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여호와신앙을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처럼 이방 땅에 전파하라고 말씀하십니다(12:1-5, 20:17-18, 26:26-29, 47:7-10).

구체적으로 선민 이스라엘 자손들은 모두가 이방인들의 속죄와 구원을 위하여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는 제사장나라가 되고 또한 중보 기도하는 거룩한 백성들이 되라고 하는 것입니다(19:4-6, 18:23-32). 그러나 그와 같은 하나님의 말씀의 뜻을 유대인들은 외면하고 있습니다.

그 대신에 하나님의 말씀을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하여 선민구원사상만을 강화하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맥락에서 유대인들의 사회에서는 정치적인 메시아사상이 발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외세를 물리치고 선민의 영광을 사해에 떨치겠다고 하는 그러한 산헤드린 대공회원들의 요구를 물리치십니다. 그리고 유대교의 지도자들에게 선지자 요나를 여호와께서 어떻게 회개시켜서 이방도시 니느웨로 보내셨던가 하는 사실을 깊이 생각하라고 말씀하십니다(16:4, 5:44-48).

그러므로 아무쪼록 창조주 하나님께서 진정 원하고 계시는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을 위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고 실천하는데 전력투구하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모두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