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마태복음 강해 제130강(마21:7-11)(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3. 7. 13. 12:28

마태복음 강해 제130(21:7-11)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5 3 12()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환영하고 있는 백성들의 모습을 기록하면서 사도 마태가 진정으로 전하고 싶어하는 내용들(21:7-11)

 

첫째로, 예수님의 제자들과 백성들의 대다수는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환영하기 위하여 그들의 겉옷을 내어놓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태울 나귀에 안장을 대신하여 자신들의 겉옷을 포개어 놓음으로써 예수님이 안락하게 나귀를 탈 수 있도록 했습니다(21:7). 그리고 예루살렘 백성 가운데 직접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지켜보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 무리들 가운데 대다수는 예수님을 크게 환영한다는 의미에서 최대의 경의를 표하고자 자신들의 겉옷을 벗어서 그 길에 깔고 있습니다(21:8a). 그 의미가 과연 무엇일까요?

()사막성에 가까운 날씨를 지니고 있는 예루살렘 지역에 살고 있는 주민들에게 있어서 겉옷은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광야에 어울리는 반사막성 기후는 비가 적고 일교차가 심합니다. 그러므로 기후의 변화에 쉽게 대응하기 위하여 주민들은 겉옷을 입고 있습니다. 햇빛이 강한 낮 시간대에는 온몸을 겉옷으로 감싸야만 합니다. 날씨가 갑자기 추워지는 저녁에는 겉옷이 없으면 추위를 막을 수가 없습니다. 그때에는 겉옷이 이불을 대신한다고 말할 정도입니다. 그러므로 유대인에게 있어서 겉옷이란 참으로 소중한 것입니다. 그와 같이 귀한 것을 예수님을 환영하고 그 장도를 편하게 만들고자 내어놓고 있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나귀의 안장으로, 많은 백성들은 예수님이 지나는 길에 포장용으로 아낌없이 제공하고 있습니다.

제자들 및 환영인파 가운데 대다수가 자신들의 겉옷을 내어줄 정도로 예수님을 환영하고 있다는 것은 특별한 의미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역사가 도래할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모세와 다윗을 합친 것과 같은 놀라운 능력을 행하고 있는 메시아가 이제 예루살렘 성으로 진입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로마의 군정은 물러갈 것이며 이두매 출신 헤롯 왕가도 끝장이 나고 말 것입니다. 선민 이스라엘은 다시 독립할 것이며 온 세상에 시온의 영광을 떨칠 것입니다. 자신들의 힘으로는 어림도 없지만 하나님의 사자인 메시아가 예루살렘으로 입성하고 계시는 것이기에 그와 같은 기적이 현실적으로 발생할 것입니다”. 따라서 자신들의 귀한 겉옷을 메시아를 환영하기 위하여 잠시 내어놓는 것은 당연합니다.

둘째로, 사도 마태는 비록 다수가 아니고 소수이지만 자신들의 겉옷 대신에 예수님이 가시는 그 길에 나뭇가지를 베어서 깔고 있는 무리가 있다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21:8b). 그들 역시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환영하기 위하여 길로 쏟아져 나온 백성들입니다. 하지만 겉옷이 아니고 나뭇가지를 길에 깔고 있습니다. 왜 그러할까요? 마침 겉옷을 집에 두고서 그냥 길로 뛰어나왔기 때문일까요? 그럴 수도 있겠지만 여리고의 소년 맹인거지인 바디매오조차 겉옷을 입고 있었다는 마가의 기록을(10:50) 참고해보면, 그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자신들의 겉옷에 흙을 묻히는 것을 원하지 아니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가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겉옷을 아낌없이 벗어서 땅에 깔아줄 정도로 감격스럽게 예수님을 맞이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 이유는 당장 예수님이 큰 능력으로 외세를 물리치고 다윗의 제국을 수립할 메시아라고 믿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이 선지자의 한 사람인 것은 틀림이 없다고 여기고 있습니다(21:11, 16:14). 사실은 그와 같은 견해가 더 우세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도 마태가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둘러싸고 발생하고 있는 소동에 대하여 일반백성들이 다음과 같이 여론을 모으고 있다는 사실을 곧 이어서 기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니 온 성이 소동하여 이르되 이는 누구냐 하거늘, 무리가 이르되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라 하니라”(2110-11).

셋째로, 예수님을 메시아로 또는 선지자로 여기고서 관심을 그에게 두고 있는 백성들이 예수님 일행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들이 걸치고 있는 겉옷이든지 아니면 베어온 나뭇가지이든지 모두 길에 깔아서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진심으로 환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환영은 그 정도로 그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 일행을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21:9a) 모두가 큰 소리로 외치고 있습니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21:9b). 여기서 다윗의 자손메시아를 의미하고 있습니다(11:1, 10). 그리고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선지자를 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어느 경우 곧 메시아이거나 선지자이거나 상관없이 사자를 보내어주신 여호와 하나님을 찬송한다는 의미입니다.

당시는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 말라기 이후 430년 이상의 세월이 지나고 있는 시점입니다. 그 긴 세월 동안 유대 땅에 선지자의 그림자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선지자가 없었던 시대가 오래 계속이 되었기에 선지자 세례 요한이나 나사렛 예수의 등장은 유대인들이 크게 환영할 만한 일임이 틀림없습니다. 더구나 백성들은 일찍 갈릴리에서 죽은 세례 요한보다 예수님에 대하여 관심이 더 큽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이 선포하고 있는 천국복음의 메시지와 놀라운 이적은 보통 선지자의 수준을 훨씬 상회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환영의 분위기가 대단합니다.

그런데 그와 같은 예루살렘 백성들의 대대적인 예수님 환영무드가 유대교지도자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백성들은 메시아일지도 모르는 예수님에게 걸고 있는 기대가 클지 몰라도 유대교지도자들은 전혀 그러하지가 않습니다. 그들이 조사한 바로는 예수님의 복음사역이 그들의 교리와 어긋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대로 살려두었다가는 나사렛 예수 파라고 하는 유대교의 새로운 이단이 큰 세력을 얻을 것만 같습니다. 그 결과 그들의 음모는 구체적으로 진행이 되고 있습니다. 반면에 일반백성들의 입장은 다릅니다. 예수님의 복음사역에 대하여 굉장히 호의적입니다. 천국의 복음을 전해주고 모든 병자와 장애자를 고쳐주며 귀신까지 쫓아내어주고 있으니 그저 고마울 따름입니다.

끝으로, 사도 마태는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의 모습을 기록하면서 또 하나의 의미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그 위에 태우고 있는 나귀 새끼가 주님과 함께 백성들이 펼쳐놓은 겉옷 위를 밟고서 그 성으로 들어서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태우고 그 지시대로 길을 가고 있는 그 어린 나귀가 누구일까요? 한 마디로, 예수님의 제자들과 성도들을 상징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장차 부활 승천하시게 되면 성령님과 함께 영적으로 제자들과 성도들에게 내주(內住) 역사하시면서 그 길을 인도하실 것입니다(16:6-10). 주님께서는 교회의 머리가 되시고 동시에 성도들의 머리가 되셔서 영적으로 함께 인생길을 살아가시는 것입니다.

참고로, 사도 요한이 그 대목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을 다음과 같이 기록으로 남기고 있습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것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아있고 너희도 살아있겠음이라. 그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14:16-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