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마태복음 강해 제129강(마20:25-21:7)(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3. 7. 13. 12:27

마태복음 강해 제129(20:25-21:7)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5 3 12()

 

어린 나귀를 선택하여 타신 예수님(20:25-21:7, 11:7)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1:29)이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사역은 예수님의 예언 그대로,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주어 그를 조롱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박게 할 것이나 제삼일에 살아나리라”(20:18-19)는 방향으로 전개가 될 것입니다.

마태복음 제20장에 기록이 되고 있는 위의 예언은 세 번째의 것입니다. 바야흐로 예루살렘 입성을 앞두고 예수님이 자신의 대속의 십자가 죽음과 삼일만의 부활이 확정적으로 예비되고 있다고 거듭 말씀하신 장면입니다. 그와 같은 침통한 예언을 거듭 거듭 되풀이하고 계시는 예수님의 심정은 착잡하기 그지 없습니다. 가장 끔직한 처형의 방법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줄 뻔히 알면서도 예루살렘을 향하여 발걸음을 옮기고 있다는 것은 실로 비장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과 기타 일행들의 생각은 전혀 딴판입니다.

그들은 하나같이 예수님이 대속의 죽음을 선택하거나 그것을 향하여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예수님은 죽은 자를 살리는 그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으로 외세를 모조리 물리치기 위하여 지금 예루살렘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으로 제 나름대로 믿고 있습니다. 이제 유대 땅에 다시 한번 위대한 다윗 제국이 메시아 예수에 의하여 탄생하게 되면 그 다음 수순은 어떻게 될까요? 그 나라를 통치하기 위하여 자신들이 한 자리씩을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사전에 더 높은 자리를 얻기 위하여 예수님 앞에서 서로 경쟁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20:20-25).

그 모습을 바라보시고서 예수님이 뼈아픈 교훈을 그들에게 주고 있습니다. 그 내용을 요약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세상의 임금이나 관리처럼 높은 자리에서 세도를 부리는 자는 그리스도의 제자가 아니다. 그와 반대이다. 그리스도의 나라에서는 스스로 하나님의 종이 되어 형제와 이웃을 불쌍히 여기고 섬기는 자가 큰 사람이다. 나를 보고서 섬김의 동기와 자세를 배우도록 하라”(20:25-28 의미적 해석). 사도 마태는 그와 같은 측면에서 여리고 두 맹인거지의 사건과 어린 나귀를 선택하여 타신 예수님의 모습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깊은 내용을 한번 묵상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어떻게 자신의 권리와 이익을 손해를 보면서 형제와 이웃을 섬길 수가 있을까요? 세상적인 방법으로는 어림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그렇게 할 수 있는 방법을 제자들에게 직접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깊은 내용을 사도 마태는 여리고 성의 두 맹인거지를 고치시는 예수님의 행적 가운데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맹인거지 두 사람이) 큰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하니 무리가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더욱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지라.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그들을 불러 이르시되,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이르되, 주여 우리의 눈 뜨기를 원하나이다.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그들의 눈을 만지시니 곧 보게 되어 그들이 예수를 따르니라”(20:30-34).

두 맹인거지가 자신들을 부디 불쌍히 여겨서 맹인신세도 면하고 거지신세도 면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능력이 많으신 다윗의 자손 그리스도 예수님께 부르짖고 있습니다. 그들을 천시하고 있는 무리들이 시끄럽다고 야단을 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두 맹인거지는 이번 기회가 아니면 인간답게 온전하게 되어 새로운 운명으로 살아볼 수 있는 기회가 영영 없다는 사실을 철석같이 믿고 있습니다(20:32-33). 따라서 더 큰 소리로 외치고 있습니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20:30-31).

그들의 부르짖음을 듣고서 예수님이 가시던 발걸음을 일부러 멈추고 있습니다. 그 마음 속에 맹인거지의 신세에 처해있는 그들을 지극히 불쌍히 여기시는 마음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20:34a, 2:5). 그래서 그들을 낫게 하고 아울러 예수님을 따르는 성도가 되어 새로운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 기회를 그들에게 허용해주고 있는 것입니다(20:34b). 한 마디로, 상대방을 불쌍하게 여기는 그리스도의 마음이 없으면 결코 섬기는 리더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가르쳐주고 있는 대목이라고 하겠습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두 제자를 보내면서 주인의 허락을 받고 두 마리의 나귀를 끌고 오도록 지시하고 있습니다(21:1-3). 제자들이 그대로 시행하여 감람 산 기슭 벳바게 마을로 들어갑니다(21:1-2). 그곳에서 주인의 허락을 얻어서 나귀와 나귀 새끼를 함께 끌고 예수님 앞으로 옵니다(21:3, 6-7a). 그리고 자신들의 겉옷을 벗어서 두 마리의 나귀에게 안장을 대신하여 얹고 있습니다(21:7b). 이제는 예수님께서 두 마리의 나귀 가운데 어느 쪽을 타실지 선택을 해야만 하는 순간입니다. 예수님은 구약의 선지서에서 예언하고 있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잘 알고 있습니다(53:1-11, 9:9, 24:44, 21:4-5). 그러므로 서슴지 아니하시고 당연하다는 듯이 어린 나귀를 선택하여 타시고 계십니다(11:7). 그렇게 겸손하며 평화의 사자’(peace-maker)로 이 세상에 오신 분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님이심을 예루살렘과 온 유대의 선민들에게 알려주고 있는 대목이라고 하겠습니다.

선민 유대인들이 히브리 사상에 의거하여 한결같이 바라고 있는 메시아의 모습은 하나님의 진노와 재앙을 세상제국에 내리고 있는 민족의 구원자 모세의 모습이거나 칼과 무력으로 적을 섬멸하고서 이스라엘 제국을 건설하는 다윗의 영웅적인 모습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선민우월사상의 발로이며 이방인들을 차별하고 지배하겠다고 하는 집단이기주의의 또 다른 모습에 불과합니다. 실제로 인간의 역사는 한 없이 그와 같은 모습으로 전개가 되어 왔습니다. 그렇지만 세상의 오랜 역사 가운데 자신들의 정의는 실현했는지 몰라도 결코 모든 피조물을 살리고 구원하고자 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의 공의의 생명살림의 뜻은 전혀 실현되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출애굽기를 보더라도 세상 많은 족속 가운데 특별하게 이스라엘 백성을 선택하여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신 이유가 천명이 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제사장나라 거룩한 백성으로 삼기 위한 것입니다(19:6)”. 이스라엘 백성과 나라가 모두 세상만민의 구원을 위하여 속죄의 제사를 드려주는 거룩한 하나님의 제사장이 되어야만 한다는 요구입니다. 그 일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바로 알고 올바로 섬길 수 있는 방법을 이방인들에게 먼저 전해주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역사를 섭리하시고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을 목숨을 걸어놓고 이방 땅에 전하는 선지자가 필요합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자손들은 전혀 그렇게 실천하지를 아니했습니다.

심히 답답하신 하나님께서는 변방 갈릴리의 선지자 요나를 선택하여 이방 땅 니느웨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라고 했지만 그는 반대방향으로 도망을 치고 있습니다(1:1-3). 하나님은 그를 깊은 바다에 던져 삼일동안 큰 물고기 뱃속에 넣고서 항복을 받은 다음에 다시 니느웨로 파송을 합니다(1:17-3:4). 그러자 하나님의 말씀을 외친지 하루 만에 이방인 왕과 백성들이 모조리 회개를 하고 있습니다(3:4-10). 그 결과 이방인들이 쉽게 구원을 얻는 모습을 보고서 요나 선지자는 속이 뒤틀리고 있습니다(4:1-4). 따라서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지를 아니하고 니느웨 외곽 동산에 올라가서 다시 그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멸망을 당하는 모습을 지켜보고자 하고 있습니다(4:5-9). 그때 요나에게 주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다음과 같습니다;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재배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라버린 이 박 넝쿨을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12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4:10-11).

만민구원을 진정으로 원하고 계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다시 전하기 위하여 예수님께서 복음사역을 유대 땅에서 행하시고 있습니다. 따라서 요나 선지자의 이야기를 예수님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유대인들에게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요나가 밤낮 사흘 동안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 동안 땅 속에 있으리라”(12:39-40),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느니라 하시고 그들을 떠나 가시니라”(16:4).

결론적으로, 예수님은 이 세상에 선민만을 구원하기 위하여 오신 메시아가 아닙니다. 이방인까지 모두 구원하시는 만민의 구원주 그리스도로 오셨습니다. 결코 선민을 구원하고자 외세에 대하여 칼을 휘두르시거나 하나님의 진노를 그대로 재앙으로 퍼부으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입성을 하실 때에 군마(軍馬, war horse)를 타시지를 않습니다. 그 대신에 나귀를 타십니다. 그것도 힘이 센 어미 나귀를 선택한 것이 아니고 평화의 상징인 나귀 새끼를 선택하여 타시고 있습니다. 그 모습을 사도 마태가 스가랴 선지자의 예언을 인용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는 선지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21:4-5, 9:9).

사족을 더하자면, 또 다른 복음서의 저자인 마가는 분명히 예수님이 나귀 새끼를 타셨다고 처음부터 끝까지 일목요연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나귀 새끼를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어 놓으매 예수께서 타시니”(11:7). 그 점을 사도 마태는 두 마리 가운데 예수님의 선택이 그러하신 것이라고 더 깊은 내막을 전해주고 있다고 하겠습니다(21:4-7). 참고로, 본문에 나타나고 있는 지명 벳바게는 예루살렘과 베다니 사이 감람 산의 동편 기슭에 위치하고 있는 작은 동네입니다. 예루살렘 입구 동쪽 성문의 바깥 지근거리(至近距離, 지극히 가까운 거리)에 있는 그 마을에서 두 마리의 나귀를 빌리고 있는 것입니다(21: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