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마태복음 강해 제127강(마20:29-34)(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3. 7. 12. 11:13

마태복음 강해 제127(20:29-34)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538(주일)

 

여리고 성의 또 다른 기적, 과연 믿음이란 무엇인가?(20:29-34, 6:13-21)

 

여리고 성은 요단 강 동편에서 예루살렘으로 들어오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시리아나 인근국가에서 들어오는 물동량이 여리고 성을 거쳐가고 있으며 그곳에 유대 땅에서 가장 큰 세관이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19:1-2, 삭개오가 그곳의 책임자입니다. 한글판 공동번역 또는 표준새번역). 그와 같은 관문으로서의 지리적인 특징 때문에 그 옛날 여호수아 시대에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길갈 쪽으로 요단 강을 건너고 나서 곧 바로 여리고 성을 정복하기 위하여 심혈을 기울인 것입니다(3:16, 4:13, 19-22)

그런데 가나안 땅을 정복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여리고 성부터 함락을 하여 공격의 발판을 마련해야만 하는데 그것이 영 쉽지가 않습니다. 천혜의 요새이기 때문입니다. 역사적으로 그 견고함 때문에 함락이 된 적이 별로 없는 여리고 성입니다. 그래서 여호수아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절실한 믿음으로 여호와 하나님께 납작 엎드려서 매어 달렸습니다(5:14-15). 그 결과 하나님의 명령으로 장정들이 6일 동안 언약궤를 앞세워서 여리고 성을 매일같이 한 바퀴씩 돌게 됩니다(6:1-3). 7일에는 특히 7번을 돌도록 합니다(6:4).

그것은 굉장히 위험한 행동입니다. 여리고 성 위에서 아래쪽으로 화살을 쏘게 되면 꼼짝없이 고슴도치가 되고 말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방법으로 여리고 성을 점령하게 해주겠다고 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기 때문에 백성들이 겸손하게 이의를 제기하지 아니하고 순종을 했습니다. 마지막 날이 가장 위험합니다. 한 바퀴가 아니고 7바퀴 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지난 6일 동안의 위험을 다 합친 죽음의 위기가 단 하루 만에 집중이 되고 있습니다. 그 명령마저 순종하고 백성들이 여리고 성을 하나님께서 주셨다고 외쳤을 때에 마침내 그 성이 무너져 내리고 있습니다(6:20-21). 그 대목이 구약에서 보여주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큰 믿음의 행보입니다.

그와 비슷한 일이 신약시대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입니다. 예수님이 마지막 유월절을 보내시기 위하여 예루살렘을 방문하고 계시는 그때가 마치 여리고 성을 7일째 돌고 있는 그 시기와 같습니다. 가장 큰 죽음의 위험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그 위험을 감수하면서 십자가의 길을 끝까지 믿음으로 나아갈 때에 그 옛날 여리고 성이 무너지듯이 죄와 사망의 세력이 무너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죽음의 위기와 큰 믿음의 행보가 예수 그리스도의 예루살렘 입성의 길이기에(20:17-19) 그 관문인 여리고 성에서 큰 믿음의 사건이 다시 발생하고 있습니다(20:29-34). 이른 바 맹인거지 바디매오 사건이 그것입니다. 그런데 처음 나온 복음서의 저자 마가는 그것이 바디매오사건이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는데(10:46-52) 그와 달리 그 기록을 참고하여 사도 마태가 저술한 복음서에서는 바디매오의 이름이 사라지고 없습니다. 그 대신에 한 사람의 맹인거지 바디매오가 아니고 익명의 두 사람의 맹인거지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20:29-34). 그와 같은 차이가 왜 발생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다음 강해에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예수님 일행이 여리고 성을 떠나서 예루살렘 쪽으로 길을 잡고 있을 때의 일입니다. 큰 무리가 여전히 예수님 일행의 뒤를 따라오고 있습니다(20:29). 그 엄청난 소동을 눈으로 보지를 못하고 오직 귀로써만 듣고 있는 맹인거지가 예루살렘 성문에 두 사람 있습니다(20:30a). 그들은 지금 메시아가 그 성을 빠져나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 두 사람은 동족인 유대인으로부터 천대를 받아오고 있던 맹인거지입니다. 따라서 선민 이스라엘의 독립이라든가 다윗 제국의 영광을 다시 떨치는 일 따위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 일을 위하여 이 땅에 오셨다고 하는 다윗의 후계자 메시아에 대해서는 전혀 흥미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 두 사람의 맹인거지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능력을 행하는 선지자이며 많은 병자와 장애인을 치유해주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과 같은 장애자에게도 새로운 인생을 살아갈 수 있도록 고쳐주고 놀라운 천국의 복음도 들려주시는 분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들이 알고 있으며 절실하게 매어 달리고 있는 그것이 바로 구원주 그리스도의 사명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예수님 일행을 향하여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힘을 다하여 외치고 있습니다(20:30b). 맹인거지를 천대하고 있는 유대인들이 조용히 하라고 꾸중을 하지만 유일한 희망 그리스도 예수를 그냥 떠나시게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온 힘을 다하여 다시 부르짖고 있습니다(20:31).

그들의 부르짖음에 예수님이 반응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바라보십니다. 그리고 뻔히 아시면서도 묻고 계십니다;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20:32). 왜 그러한 질문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본인의 소원을 이루어주기 위하여 마지막 절차를 거치고 있는 것입니다. 창세기의 말씀 그대로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이기에(1:26-27) 하나님의 아들과 대화를 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세상사람들은 두 사람의 맹인거지에게 조용히 하라고 윽박지르고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다릅니다. 그 두 맹인거지에게 하나님 자녀의 권리를 인정하고 있으며 대화의 상대방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자신들의 자유의지로 새로운 인생을 살고 싶어한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싶어하십니다. 그들에게 그러한 선택과 의지가 있을 때에 또한 그들이 오직 그리스도가 그들의 소원을 이루어줄 수가 있다고 확고하게 믿고 있을 때에 하나님의 능력은 긍정적으로 임하게 됩니다.  

나머지 순서는 거의 자동적입니다; “주여, 우리의 눈 뜨기를 원하나이다!”(20:34). 예수님이 불쌍히 여기시고 그들의 눈을 만져주시자 곧 보게 됩니다(20:34a). 하지만 본문에서 마지막으로 중요한 대목을 사도 마태가 다음과 같이 적고 있습니다; “곧 보게 되어 그들이 예수를 따르니라”(20:34b). 새로운 인생을 살고 싶으면 예수 그리스도의 뒤를 따르며 천국의 말씀을 올바로 배워야만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자녀답게 나머지 인생을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세상사람들은 병이 낫고 장애가 고침을 받게 되면 그것으로 즉시 새로운 인생을 살아갈 수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믿음의 길에서 떠난 경우입니다. 세상 대부분의 사람들은 건강하고 신체가 온전합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가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살아가다가 땅을 치고 후회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결론적으로, 두 맹인거지가 볼 수 있게 되자 당장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하여 그 뒤를 따라가기 시작했다는 대목이 온전한 믿음이 무엇인가를 웅변적으로 말해주고 있다고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