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마태복음 강해 제128강(마20:29-34, 막10:46-53)(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3. 7. 12. 11:15

마태복음 강해 제128(20:29-34, 10:46-53)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5311()

 

 

똑 같은 바디매오사건을 바라보고 있는 복음서 네 저자의 관점의 차이(20:29-34, 10:46-53, 18:35-43)

 

주후 60년을 전후하여 마가에 의하여 예수님의 교훈과 생애가 복음서로 편찬이 되어 세상에 나왔습니다. 그 당시는 기독교인들이 감히 로마제국의 황제숭배사상에 대하여 반대를 했기 때문에 엄청난 탄압을 받고 있던 시대입니다. 황제를 신으로 모시지 아니했으며 경배하지 아니했기 때문에 정치적 경제적 탄압이 계속 되었습니다. 배교를 하지 아니하면, 형장으로 끌려가서 짐승에게 찢기거나 화형을 당했습니다. 그대로 탄압이 계속되면 기독교가 사라질 판입니다. 그러한 때에 마가가 급히 복음서를 저술하여 세상에 내놓았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서 진리를 파수하고자 환난을 당했으며 고난의 십자가를 졌기 때문에 부활의 영광에 참여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강조했습니다. 그 복음서를 읽고서 많은 기독교인들이 큰 힘을 얻었습니다.

급하게 발행한 마가복음의 내용을 보완하여 열두 사도의 한 사람인 마태가 새로운 복음서를 편찬하여 내놓았습니다. 이름하여 마태복음입니다. 그리고 의사 누가는 또 다른 시각에서 복음서를 기록했습니다. 그는 기존의 자료에만 의존하지 아니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지역과 성장지역 그리고 주요 행적지를 모두 발로 뛰면서 취재를 했습니다. 증인의 이야기를 새로 수집하고 철저한 검증과 증거분석을 통하여 그의 복음서를 저술했습니다. 이상 세 권의 복음서는 주후 60년대에 세상에 나온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유대 땅에서 발행이 되었으므로 유대인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세 권이 모두 유대인을 대상으로 히브리사상에 기초하여 복음을 설명하고 있다고 하여 공관복음’(共觀福音, the Synoptic Gospels)이라고 불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20년 남짓 세월이 흐르자 주후 90년을 전후하여 소아시아 에베소에서 제4복음서가 나타났습니다. 저자는 막내 사도라고 불리고 있는 요한입니다. 그는 주후 70년에 로마군대에 의하여 예루살렘과 유대 땅이 멸망을 당하자 큰 이모 마리아를 모시고 에베소 지역으로 탈출했습니다. 그 후 20년 세월을 소아시아에 있는 여러 교회를 돌보면서 헬라인들과 소통을 하고자 애를 썼습니다. 그는 이국 땅에서 늙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헬라의 철학과 학문을 끈질기게 공부했습니다. 이유는 오직 하나입니다. 헬라인들의 언어와 사상체계로서 예수님의 교훈과 생애에 대하여 말하고 동시에 글로 작성하여 수 많은 이방인들에게 보여주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그의 기도가 응답이 되어서 제4복음서로 불리고 있는 요한복음이 탄생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사도 요한에게 차고 넘쳤습니다. 복음의 핵심을 다시 설명하는 세 권의 서신서와 세상의 종말과 예수님의 재림을 보여주고 있는 계시록이 그에 의하여 저술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역사 가운데 남겨졌습니다.

그런데 사도 요한은 마태, 마가, 누가 등 세 명에 의하여 저술된 공관복음 세 권에 담겨 있지 아니한 이야기를 많이 보완했습니다. 하지만 특이하게도 본문의 내용 맹인 바디매오의 기적에 대해서는 전혀 기술하지를 아니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제부터 왜 복음서의 저자 네 명이 그 사건을 조금씩 다르게 기술하면서 어떠한 관점의 차이를 보이고 있는지를 한번 살펴보고 또한 그 의미를 묵상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마가가 기술하고 있는 여리고 맹인거지의 사건은 다음과 같습니다; (1) 마가만이 여리고의 맹인거지로서 예수님을 만나 고침을 받고서 제자로 따라나선 사람의 이름이 나이가 어린 바디매오라고 정확하게 기술하고 있습니다(10:46). (2) 바디매오는 예수님이 그를 가까이 부르자 너무나 기뻐서 그 소중한 겉옷까지 내버리고 뛰어 갔다고 적고 있습니다(10:50). (3) 그 결과 바디매오는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10:52a)고 하는 귀한 주님의 말씀을 들었으며 그때부터 예수님을 따라 남은 인생길을 살아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왜 마가만이 맹인거지의 이름이 바디매오임을 기억하고 있을까요? 그 이유는 마가가 예수님의 제자로 따라나선 바디매오와 친했으며 그의 간증내용을 익히 듣고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마가는 그들이 여리고에 이르렀더니 예수께서 제자들과 허다한 무리와 함께 여리고에서 나가실 때에 디매오의 아들인 맹인 거지 바디매오가 길가에 앉았다가”(10:46)라고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바디매오는 어린 나이이기 때문에 아버지의 이름 디매오를 사용하여 디매오의 아들이라고 여전히 불리고 있습니다. 성인이 되었다면 자신의 본 이름을 사용했을 것입니다. 예를 들면 결혼을 이미 하고 있는 시몬 베드로의 경우에는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16:17)에서 볼 수 있듯이 요나의 아들인 시몬이라고 지칭이 되고 있습니다. 그냥 바요나라고만 불리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미성년자인 경우에는 아버지의 이름자를 사용하여 누구의 아들이라고만 지칭이 되고 있습니다. 여기 바디매오가 그러한 경우입니다.

바디매오가 어리기 때문에 천방지축입니다. 예수님께서 부르시자 너무 좋아서 겉옷까지 챙기지 아니하고 뛰어나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미성년자이며 부양할 가족이 없기에 맹인거지신세를 면하자 당장 예수님의 제자로 따라 나서고 있습니다. 그때가 예수님이 예루살렘 입성을 하기 직전입니다. 따라서 마가의 다락방에서 마지막 만찬을 하기(14:15-16) 전이므로 다락방 주인의 아들인 마가보다(14:51-52) 바디매오가 약간 일찍 예수님을 따라나선 셈입니다. 약간의 고참선배인 바디매오와 역시 동년배로 보이는 마가와는 만나자마자 굉장히 친해진 것으로 보입니다.

둘째로, 일반적으로 사도 마태는 16(, chapter)에 불과한 마가복음을 크게 보완하여 전체 28장의 가장 긴 복음서를 저술하고 있다고 말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바디매오의 이야기에 있어서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오히려 간략하게 처리하고 있으며 주인공이 약간 다릅니다; (1) 바디매오의 이야기를 두 맹인거지의 이야기로 바꾸고 있습니다(20:29-30). (2) 역시 두 차례나 소리쳐 불쌍히 여겨서 고쳐달라고 했다는 이야기와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예수님이 그들의 눈을 만져서 낫게 해주었다는 이야기를 그대로 인용하고 있습니다(20:30-33a). (3) ‘믿음이 너를 낫게 하였다라고 하는 언급을 생략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곧 보게 되어 그들이 예수님을 따랐다고 하는 사실을 그대로 적고 있습니다(20:34b).

사도 마태의 경우에는 갈릴리에서부터 예수님의 제자로 따라나선 소위 1대 제자입니다(9:9-10). 그리고 열두 제자 가운데 가장 유식한 사람입니다. 따라서 삼 년 후에 여리고에서 합류하게 된 바디매오와 같은 꼬마거지출신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와 같이 불쌍한 사람들이 고침을 받고서 예수님의 말기 제자가 되어 함께 공생애를 보냈다고 하는 사실에 대해서는 동의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리고에서 대표적으로 두 사람의 맹인거지가 고침을 받고서 따라 나섰다고 하는 사실을 익명으로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믿음보다는 예수님이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고쳐주셨으며 제자로 거두었다는 사실을 더 강조하고 있습니다.

셋째로, 의사 누가는 직업상 병자나 장애자에게 관심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여리고 맹인거지가 나음을 입은 이야기에 대하여 마가만큼 상세히 전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역시 나이가 있기 때문에 바디매오라는 미성년자의 이름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저 여리고에서 만난 한 사람의 맹인거지라고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18:35). 하지만 기타의 내용은 마가복음의 내용과 같이 충실합니다. 다만 독특한 대목이 두 군데 나타나고 있습니다; (1) 무리가 지나감을 귀로 듣고 그 맹인거지가 사람들에게 물었다는 것입니다(18:36). 나사렛 예수가 지나간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목소리를 높여서 크게 부르짖었다는 것입니다(18:37-39). (2) 예수님의 말씀의 능력으로 곧 보게 되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를 따라갔다는 것입니다(18:43a). 그 모습을 지켜본 백성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나님을 찬양했다는 기록입니다(18:43b).

의사 누가의 관심사를 잘 나타내고 있는 대목입니다. 그는 직업이 의사이므로 과학자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복음사상이 그저 말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의 능력이 기적으로 그 예수님의 복음사상이 옳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다는 사실을 중시하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관점에서 그는 그 맹인거지가 낫게 되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예수님의 제자로 따라 나섰다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나아가서 그 광경을 보고서 백성들이 모두 하나님을 찬양했다는 사실을 특기사항으로 적고 있는 것입니다.

넷째로, 사도 요한은 바디매오 사건에 대해서는 일체 적고 있지를 않습니다. 왜 그러할까요? 몇 가지 이유를 추정할 수 있습니다; (1) 사도 요한은 여리고에 대한 기억보다는 베다니에 대한 기억이 더 생생합니다. 그는 제4복음서를 노년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리고 성의 어린 맹인거지 바디매오가 고침을 받고 예수님을 따라나선 이야기보다는 베다니의 나사로가 무덤에서 되살아나온 이야기에 더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11:38-44). 이제 몇 년 내에 80대의 노인 사도 요한이 임종을 맞이할 것입니다. 소천을 앞두고 있으므로 무덤 속 부활과 승천에 더 관심이 집중이 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2) 뿐만 아니라 요한은 그 옛날 젊은 나이에 정이 들고 사랑하던 사람들에게 관심이 큽니다. 베다니에는 나이가 비슷한 젊은 처녀 마리아가 살고 있습니다(11:2, 12:3-8). 그리고 그 언니 마르다는 음식솜씨가 좋습니다(11:1, 12:1-2). 스승인 예수님과 함께 예루살렘에서 복음사역을 할 때에는 항상 베다니의 민박집을 이용했습니다(8:1-2). 사도 요한의 부모님은 요한이 어릴 때부터 나사로와 마리아 자매의 민박집을 이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므로 어린 날의 추억과 무덤 속 부활의 대 사건이 발생한 베다니를 중심으로 그의 복음서를 기술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사도 요한은 헬라의 철학과 과학적인 학문의 한계를 돌파하고 있는 복음적인 내용이 무엇인가를 잘 파악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사건이며 베다니 나사로의 부활사건입니다. 아무리 철학적인 사색을 하고 과학적인 연구를 하더라도 창조주 하나님의 생명살림의 역사에는 미치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능력의 발현을 중심으로 사도 요한은 그의 복음서를 저술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헬라인들과 로마인들이 희구하고 있는 것은 병 고침과 장애의 극복 정도가 아닙니다. 유한한 인생이 영원한 구원과 생명을 얻는 것, 그것이 철학과 과학의 목표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과감하게 여리고의 바디매오의 이야기를 생략하고 그 대신에 베다니 사건에 집중적인 기술을 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