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마태복음 강해 제104강(마16:13-20)(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3. 7. 1. 02:37

마태복음 강해 제104(16:13-20)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5216()

 

예루살렘, 가버나움, 그리고 빌립보 가이사랴(16:13, 15:1, 14:1-2, 4:46)

 

사도 마태는 갈릴리에서 행한 예수님 일행의 복음사역에 대하여 우선 그의 복음서 제4장부터 제16장 사이에서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기록 가운데 은연중에 드러나고 있는 흥미로운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 일행의 움직임을 예의 주시하고 있는 정치권과 종교권의 뜨거운 관심입니다. 그들의 관심을 끌 수밖에 없는 요인이 몇 가지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의 사역현장에 많은 백성들이 운집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14:21, 15:38). 둘째, 기적이 많이 발생을 하고 있습니다(14:14, 36, 15:30-31). 셋째, 갈릴리 백성들이 두 차례나 하늘양식이 내리는 것을 보고서 예수님을 아예 자신들의 임금으로 삼고자 논의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6:15). 넷째, 예수님이 주장하고 있는 복음의 내용이 유대교의 성경해석과 상당히 차이가 나고 있습니다(8:10-13, 9:15-17, 12:11-13, 21, 38-45, 15:3-6).

당시 갈릴리 지방을 다스리고 있는 자는 분봉 왕 헤롯 안디바입니다. 그는 가버나움 자신의 왕궁에서(4:46) 전전긍긍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그가 목 베어 죽인 세례 요한이 다시 나사렛 예수로 되살아난 것이 아닌가 여기고 있기 때문입니다(14:1-2). 그리고 예루살렘의 산헤드린 대 공회에서는 현지에 조사단을 두 차례나 파견하고 있습니다(15:1-2, 16:1). 예수님의 말씀사역과 이적의 발생이 심상하지가 않기 때문입니다. 능력면에서 그것은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그러나 선포하고 있는 복음의 내용은 이미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유대교의 교리를 근본적으로 비판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본문을 보면, 예수님이 정치권과 종교권의 관심을 피하여 갈릴리 북쪽으로 피난을 가고 있습니다. 그 지역이 분봉 왕 헤롯 빌립이 다스리고 있는 헬몬 산 지역입니다. 빌립의 왕궁이 있는 수도의 이름이 빌립보 가이사랴입니다(16:13). 그 위치는 아마도 그 옛날 북조 이스라엘 왕국의 북쪽 국경지대의 거점도시 으로 추정이 됩니다(왕상12:29). 그곳 동쪽 교외에 분봉 왕 빌립은 아름다운 신도시를 건설하고 그 이름을 빌립보 가이사랴로 명명하고 있습니다. 그 뜻은 일종의 충성서약입니다. 로마황제의 이름 가이사랴와 자신의 이름 빌립보를 결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누가 보더라도, 로마황제에게 절대충성하고 있는 신하 빌립보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렇게 은근히 정치적인 처신을 잘 하고 있는 인물이 헤롯 안디바의 이복동생이자 이두래와 드라고닛 지방의 분봉 왕인 빌립입니다(3:1). 그는 실익이 없는 유대교지도자와 예수님 일행과의 분쟁에 대하여 일체 관여를 하지 아니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 일행이 마음 편하게 빌립보 가이사랴로 피신을 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참고로, 공관복음의 저자 가운데 예수님 당시의 정치적 상황에 대하여 가장 구체적으로 설명을 하고 있는 사람은 의사 누가입니다. 그의 복음서 제3장 첫머리가 특히 그러합니다; “디베료 황제가 통치한 지 열다섯 해 곧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의 총독으로, 헤롯이 갈릴리의 분봉 왕으로, 그 동생 빌립이 이두래와 드라고닛 지방의 분봉 왕으로, 루사니아가 아빌레네의 분봉 왕으로, 안나스와 가야바가 대제사장으로 있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빈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한지라”(3:1-2). 좋은 정보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1) 세례 요한이 세상에 선지자로서 그 모습을 드러낸 시점이 로마 제2대 황제 티베리우스 통치 15년째가 되던 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때는 주후 28년쯤입니다. 티베리우스 황제의 즉위연도가 주후 14년이라고 알려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2) 분봉 왕 루사니아는 베레아 지역을 다스리고 있는데 그곳은 요단 강 이동지역 길르앗입니다. (3) 가야바가 현임 대제사장이고(11:49) 그의 장인인 안나스는 전임 대제사장입니다. 그러나 유대교 막후실세는 여전히 안나스입니다(18:13).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이길 수 있는 베드로의 신앙고백(16:13-20)

 

예수님이 빌립보 가이사랴에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자신의 정체에 대하여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에 대하여 묻고 있습니다. 왜 하필이면 그곳에서 제자들에게 그러한 질문을 하시고 있는 것일까요? 다음과 같이 그 이유를 유추할 수가 있습니다;

(1) 모처럼 그곳에서 여유를 누리고 있습니다. 갈릴리 지방에서 복음사역을 하면서 가버나움 왕궁에 있는 분봉 왕 헤롯 안디바의 정치적인 사찰을 의식하지 아니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산헤드린 대 공회에서 파견하고 있는 조사단의 심문도 응대하기에 만만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와 같은 견제를 벗어난 곳에 피난을 와 있습니다. 모처럼 마음이 편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일을 되돌아 볼 수 있는 여유가 생기고 있습니다. 아울러 백성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도 궁금해집니다.

(2) 지금 머무르고 있는 곳이 빌립보 가이사랴입니다. 그 도시 이름의 뜻이 로마황제 가이사랴에게 분봉 왕 빌립이 충성을 바치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 이름을 보면서 예수님은 백성들의 생각과 제자들의 생각이 궁금합니다. 세상의 황제를 받들고자 하는데 있어서도 충성서약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선민들과 제자들은 자신에게 어떠한 충성서약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3) 헬몬 산에 인접하고 있는 그 지역에서는 당분간 백성들을 상대로 하는 복음사역을 하지 아니할 생각입니다. 그 대신에 제자들에게 집중적인 말씀공부를 시킬 생각입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의 영적인 지식의 상태를 파악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 조사가 바로 예수님의 정체에 대한 제자들의 인식이 어느 정도인가를 파악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16:13)는 예수님의 질문에 제자들이 대답을 하고 있습니다;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16:14). 한 마디로, 예수님을 선지자 중의 하나로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은 섭섭합니다. 메시아는 선지자와 급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선지자는 땅에서 난 사람에게 성령님이 상당기간 임재한 정도입니다. 그러나 메시아는 하늘에서 이 땅으로 왔으며(3:13)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1:29)입니다. 하나님 독생자의 영광을 지니고 있습니다(1:14).

그래서 예수님이 제자들의 자체인식에 대하여 묻고 있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16:15) 시몬 베드로가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즉석에서 대답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일종의 충성서약입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16:16). 예수님이 깜짝 놀라고 있습니다. 우직한 베드로, 무식한 베드로에게서 쉽게 들을 수 있는 대답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 순간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위로하고 격려하시기 위하여 베드로의 입술을 통하여 역사하고 있음을 눈치채고 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를 다음과 같이 칭찬하고 있습니다;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이에 제자들에게 경고하사 자기가 그리스도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라”(16:17-20). 이제부터 그 의미를 새겨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베드로의 신앙고백은 세상의 지혜가 아니라 하늘의 지혜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세상지혜의 특징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으로 표현이 된 적이 있습니다(16:6, 11-12).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것은 바리새인들처럼 산헤드린 대 공회의 결정에 따라 의롭다고 판결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인정과 판결에 따라야 합니다. 그리고 사두개인들처럼 원수를 쳐부수고 재앙을 내리도록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반대입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구원을 해주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5:44). 그 일을 행하기 위하여 이 세상에 그리스도를 보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는 것이 하늘의 지혜입니다. 그 지혜가 지금 베드로의 답변 가운데 생생합니다. 구체적으로 사도 베드로는 예수님이 이 세상을 구원하실 그리스도이시며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보내신 아들이라고 믿고 있는 것입니다(16:16). 그러므로 그것은 하늘의 지혜를 하나님께서 베드로에게 믿음으로 주신 것입니다(16:17).

둘째로, 세상의 지혜를 이기는 것이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으로 표현이 되고 있는 세상적인 교훈을(16:12) 이길 수 있는 능력도 역시 살아계신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오고 있는 말씀의 능력입니다. 그 말씀의 능력이 교회를 세우는 반석이 되고 있습니다(16:18). 여러 해 전에 한국에서 급속하게 성장하고 있는 교회를 대상으로 하여 성장의 요인을 조사한 적이 있습니다. 가장 주요한 요인이 담임목사의 설교의 능력이라고 발표가 되었습니다. 그것은 맞는 말입니다. 초대교회의 역사도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은 말씀연구 및 전파 그리고 기도에 전념하기 위하여’(6:4) 다른 일을 집사들에게 넘겨주고 있는 것입니다.

셋째로,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공부하게 되면 하늘의 지혜를 제법 얻게 됩니다. 그리고 아버지 하나님의 역사섭리에 대하여 많이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말씀의 종을 선지자라고 부릅니다.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 역시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말씀의 뜻을 깨닫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나의 선지자’(20:7)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선지자에게는 하나의 권세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을 가나안 땅으로 보내시면서 그 권세가 다음과 같이 주어지고 있습니다;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12:3). 블레셋의 땅에서 다시 확인이 되고 있습니다; “이제 그 사람의 아내를 돌려보내라. 그는 선지자라. 그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리니 네가 살려니와 네가 돌려보내지 아니하면 너와 네게 속한 자가 다 반드시 죽을 줄 알지니라”(20:7). 그 대목이 빌립보 가이사랴에서는 더 강력하게 선지자인 제자들에게 천국의 열쇠를 주는 것으로 묘사가 되고 있습니다(16:19).

넷째로, 예수님 당시 유대교지도자들과 백성들은 모세나 다윗과 같은 메시아를 고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칼과 같이 휘둘러서 외세를 물리치고 구원과 해방의 감격을 자신들에게 가져다 주는 메시아를 고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령님의 감동으로 시몬 베드로가 고백하고 있는 메시아는 다른 성격의 인물입니다. 살아계신 창조주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기 위하여 오시는 그리스도입니다. 그 뜻을 사도 요한이 더 쉽게 풀이하고 있습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3:13-16).

그렇게 그리스도의 개념이 다르다는 사실을 백성들에게 일부러 알릴 필요가 없다는 뜻이 드러나고 있습니다(16:20). 그 의미가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 직접 그 입으로 선포하실 때까지 기다리며 입 조심을 하라는 것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성도들은 성령님의 역사보다 앞서서 무엇을 하겠다고 스스로 분주할 이유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영적으로 확실하게 깨닫지 못한 것을 앞서서 떠벌릴 이유도 없다고 하겠습니다. 큰일은 모두 주인에게 맡기고 그저 주어진 사명에 종으로써 최선을 다하면 그것으로 성도의 삶은 충분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