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마태복음 강해 제103강(마16:4-13)(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3. 7. 1. 02:36

마태복음 강해 제103(16:4-13)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5216()

 

갈릴리 서쪽 마가단 지경에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을 만나신 예수님이 그들을 떠나서 북쪽 빌립보 가이사랴로 향하시며 제자들에게 그들의 누룩(교훈, 16:12)을 주의하라고 가르치시다(16:4-13)

 

이미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예수님은 갈릴리 동편광야에서 많은 장애자와 불구자들을 모아놓고서 그들을 치유하는 대규모 군중집회를 열고 있습니다(15:30). 복음을 전하고 치유집회를 계속했는데 삼일 동안 장애가 떠나가고 불구자가 정상인이 되는 기적이 수없이 나타나고 있습니다(15:31). 그 집회에 참석하고 있는 장애자들과 불구자들은 고침을 받게 됨으로써 그들의 인생이 달라지고 있습니다. 정상인이 된다는 것, 그것은 말로 다할 수 없는 감격입니다. 그래서 고침을 받은 후에도 집으로 돌아가지를 아니하고 능력 있는 창조주 하나님의 말씀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듣고 깨달음을 얻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드디어 집회 삼 일째가 되었을 때에 예수님은 약 사천 명의 장정 가운데 대부분이 치유함을 받은 것으로 진단하고 있습니다(15:32b, 38). 이제는 해산을 해야만 하는 시간입니다. 그런데 넓은 평지를 찾아서 이동을 해오는 동안에 그만 인가에서 너무 멀리와 버렸습니다. 그대로 해산을 했다가는 백성들이 집까지 먼 길을 가는 동안에 대부분 기진해서 쓰러져버릴 것만 같습니다(15:32c). 따라서 그들의 처지를 불쌍하게 여기고 계시는 주님께서(15:32a) 어쩔 수 없이 다시 하늘곳간을 여시고 먹을 것을 제공하고 있습니다(15:36-38).

그런데 지난 번 오병이어의 기적에서 경험한 바와 같은 위험이 역시 이번에도 뒤따르고 있습니다; 첫째, 만나의 기적을 다시 맛본 백성들이 예수님을 자신들의 임금으로 모시고자 그 방법을 모색하게 됩니다(6:15). 그래서 예수님이 즉시 호수 건너편 마가단 지경으로 피신을 하고 있습니다(15:39). 둘째, 예수님의 복음사역을 주시하고 있던 예루살렘 산헤드린 대 공회에서 이번에도 어김없이 조사단을 파견하고 있습니다. 전번보다 더 강력한 조사 팀 구성입니다; “점잖은 율법학자인 서기관이 아니라 유대교의 교권을 장악하고 있는 정치꾼 사두개인들을 보낸 것입니다”(16:1). 그들은 마가단 지경까지 따라와서 예수님에게 다윗의 후계자 메시아라면 그 증거를 보여달라고 요구합니다(16:2). 그것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외세를 몰아내는 기적을 연출해보라고 강요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의견에 찬성을 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세상을 구원하러 오신 것이지 선민만의 나라를 재건해주기 위하여 오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환언하면, 예수님은 선민과 이방인을 구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는 모든 죄인들을 구원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 뜻이 이루어지는 나라는 한 마디로, ‘선민의 나라가 아니고 메시아의 나라또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7:14, 22, 27, 4:17, 6:33).

예수님의 설명에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고개를 끄떡이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계속 예수님 일행을 따라 다니면서 꼬투리를 잡으려고 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멀리 북쪽으로 피신을 하시고 있습니다(16:4). 분봉 왕 헤롯 아니바의 통치영역을 벗어나서 헤롯 빌립의 영역으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빌립의 왕궁이 있는 빌립보 가이사랴가 그 목적지가 되고 있습니다(16:13).

길을 가는 도중에 예수님이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제자들에게 경고를 하고 있습니다(16:6). 그런데 마침 여행 도중에 먹을 떡을 제대로 챙겨오지 못한 제자들은 그것을 염려하고 계시는 스승님의 언급인 줄로만 여기고 서로 수군거리고 있습니다(16:5-7).  그러자 예수님은 그 뜻이 아니라고 설명을 하시고 있습니다(16:8b). 더불어 하나님의 능력을 선보이고 있는 예수님을 여전히 믿지를 못하고 있는 제자들의 불신앙을 책망하고 있습니다(16:8a). 하늘곳간을 열어서라도 떡을 제공할 수 있는 능력을 두 차례나 선보이고 있는데 아직도 그 사실을 믿지를 못하고 금방 잊어버리고서 충분한 양의 떡을 여행 중에 준비하지 못한 사실만 염려하여 수군거리고 있으니 그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16:8-11a).

따라서 다시 한번 강조하고 있습니다; “어찌 내 말한 것이 떡에 관함이 아닌 줄을 깨닫지 못하느냐? 오직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16:11). 그 말씀을 듣고 나자 제자들이 비로서 깨닫고 있습니다; “그들의 누룩이란 떡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그들의 잘못된 교훈을 말하고 있는 것이구나!”(16:12). 그렇다면 그들의 잘못된 교훈은 정확하게 무엇일까요? 다시 한번 간단하게 그 요점을 정리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바리새인의 누룩이란 그들이 전통적으로 산헤드린 대 공회의 결정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절대적인 권위를 부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장로들의 전통에 불과한데 바리새인들은 그와 같은 장로들의 지혜와 판단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의 내용과 그 취지가 되고 있는 하나님의 계명을 함부로 재단하고 있으니 그것이 잘못이라는 예수님의 지적입니다(15:3).

그런데 그와 같은 바리새인의 누룩은 예수님 당시에만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날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성령님의 감동으로 하나님의 지혜를 얻어서 그 진리성을 깨닫지를 못하고 있는 경우에 허다히 발생하고 있습니다. 원칙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이해와 그 해석의 문제는 양적인 차원이 아니고 질적인 차원에 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흔히 질적인 차원의 것을 양적인 수의 우세로 대체하고 있습니다. 특히 영적인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것도 함부로 그렇게 처리를 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다수의 논리로 또는 조직의 우세로 진리성을 함부로 좌지우지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오늘 날에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유권해석의 권한이 오로지 조직적인 종교적 최고기관에 있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교황의 말씀이 성경말씀과 같은 정확무오성’(正確無誤性, absolutely nothing wrong)을 가진다고 주장하다가 종교개혁의 대상이 된 적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날에도 교단의 교리에 마치 하나님의 말씀과 같은 절대적인 권위를 부여하고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시대착오적인 자가당착(自家撞着, self-contradiction)이라고 하겠습니다.

둘째로, 사두개인들의 관심은 모세시대의 하나님의 능력을 다시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옛날 모세처럼 선민을 구원하기 위하여 메시아가 이 세상에 다시 오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력이 메시아를 통하여 마치 모세시대처럼 선민에게는 구원과 해방으로, 외세와 이방인에 대해서는 분노와 저주 그리고 재앙이라는 심판으로 나타나야만 합니다. 그것이 표적입니다.  그들의 주장은 무서운 선민사상 또는 민족우월주의에 기초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누룩은 예수님 당시에만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날에도 민족적인 집단이기주의로 번영을 누리고 있습니다.

참고로, 예수님 당시에 유대인들은 스스로 의인이며 하나님을 잘 섬기고 있다고 자신하고 있는 자칭 선민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신앙은 매우 이기적이며 하나님의 구원의 폭을 선민사회 내로 제약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남의 눈만을 의식하는 율법의 준수에 머물고 있는 초보적인 외식적(外飾的, 겉만 치장한) 신앙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것으로 능히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따라서 기타 삶의 영역과 남의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부분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뜻과 이익이 아니라 자신들의 탐욕을 채우며 세상적인 이익을 극대화하는데 거리낌이 없습니다.

끝으로, 하나님을 자신들의 이익과 소원성취를 보장해주는 방편으로 바라보고 있으므로 심각한 종교적인 부작용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사람이 만든 우상의 하나로 치부하면서 함부로 부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 결과 아전인수격이고 지극히 이기적인 기복신앙이 만연되고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세상적인 창대함과 번성함 그리고 교회라는 조직체의 성장이라는 표적이 나타나지 아니하게 되면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능력으로 함께하지 아니하고 있는 것이라고 단정을 하게 되는 무서운 사조가 온 세상에 널리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질적이며 영적인 하나님의 말씀을 양적이며 물질적인 개념으로 격하시키고 있습니다. 그 결과 다수의 논리가 마치 진리인 것처럼 행세를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이른 바 오늘 날에도 맹위를 떨치고 있는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이라고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