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마태복음 강해 제101강(마16:1-4)(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3. 6. 30. 03:48

마태복음 강해 제101(16:1-4)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5214()

 

예수님을 시험하고 있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차이점과 예수님의 대응의 차이점(16:1-4)

 

예수님이 갈릴리 지방에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켰을 때에(14:13-21) 그 소문을 들은 예루살렘의 유대교지도자들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현지로 급파했습니다(15:1). 그들은 예수님에게 음식을 먹을 때에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있으니 그것은 장로들의 전통을 범하고 있는 것이라고 시비를 걸었습니다(15:2). 그 시험의 핵심은 일종의 율법의 해석과 적용에 관한 문제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장로들의 전통하나님의 계명과의 본질적인 차이와 그 우선순위의 문제를 제기하면서 성공적으로 응대하시고 잘 설명을 하셨습니다(15:3-12).

하지만 예수님이 그 후에 칠병이어의 기적을 일으켰을 때에는 다릅니다(15:32-39). 유대교의 총본산인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에서 이번에는 바리새인과 더불어 사두개인들을 파견하고 있습니다(16:1a). 여기서 사두개인들이 동행하고 있으므로 자연히 시비거리가 달라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율법논쟁이 아니라 이제는 표적논쟁을 시작하고 있는 것입니다(16:1b).

참고로, 유대교의 지도자들은 제도적으로 예루살렘 산헤드린 대 공회의 회원들입니다. 대 공회는 대제사장을 비롯하여 70명의 회원으로 구성이 되어 있는데 제사장, 장로, 서기관들로 나누어집니다(26:57). 그 가운데 구약선생으로서 백성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자 곧 랍비인 바리새인들 중에서 일부가 율법학자로서 크게 명성을 얻어 일약 공회의 서기관으로 참여하고 있습니다(23:9). 나머지 회원들은 모두 사두개인들이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두개인들은 히브리정경에 대한 이해의 폭이 좁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전통적으로 모세의 오경만을 공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직접 백성들의 율법교육을 담당하고 율법학자를 길러내고 있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히브리정경 전체를 공부하고 연구합니다(23:6-9). 그 차이가 큽니다. 한 마디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율법의 의미와 해석을 히브리정경 전체에서 다룰 수 있는 실력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면 대제사장을 포함하여 사두개인들은 표적을 중심으로 하는 율법과 제례의식에 그 관심이 집중되어 있다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바리새인들과 함께 예수님에게 표적에 관한 문제를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를 시험하여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 보이기를 청하니”(16:1). 그들의 속내와 두 파 간의 차이를 이미 익히 알고 계시는 예수님의 응대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로, 일상생활 가운데 날씨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능히 분별하지를 못하고 있는 그들의 영적인 무감각에 대하여 먼저 책망을 하고 있습니다(16:3). 그 말씀은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 곧 유대교지도자들이 종교적인 일상생활에 있어서 필요한 교리적인 지식과 지혜를 추구하는데 있어서는 관심이 크다고 합니다. 그러나 종교적인 교리 및 제례나 의례를 넘어서는 하나님의 시대적 표적과 징후에 대해서는 그것을 읽을 수 있는 능력을 전혀 배양하지 아니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그와 같은 책망은 예수님 당시의 유대교지도자들에 국한이 되고 있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오늘 날 교회의 지도자들에게 있어서도 만약 교회의 정치와 행정 그리고 교회의 성장에 지나친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대신에 하나님께서 보여주시고 있는 신앙의 본질 및 시대적 징후와 표적에 대하여 영적으로 무감각하다고 한다면 똑 같은 책망을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영적인 지도자들이 분별하기를 원하시고 있는 시대적 표적은 과연 무엇일까요? 예수님의 대답이 다음과 같습니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줄 표적이 없느니라”(16:4). ‘요나의 표적에 주목을 하라는 것입니다. 히브리 정경에는 수많은 선지자들이 등장을 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요나 선지자만이 특이한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변방 갈릴리 출신 선지자 요나에게 하나님이 명령하고 계십니다; “동쪽 800km이상 떨어져 있는 티크리스 강 상류 이방인 대도시 니느웨에 가서 회개하지 아니하면 40일만에 멸망을 당할 것이라고 예언을 하라”(1:2, 3:2-4).

그 명령을 들은 요나는 내심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역사상 이방인의 도시에 가서 하나님의 멸망의 예언을 전한 선지자가 없는 것입니다. 유대교의 전통에 의하면 하나님을 모르고 제멋대로 살고 있는 이방인들은 모두 멸망의 대상입니다. 구원의 은혜는 그들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오로지 선민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유대교의 전통을 깨고서 이방인의 도시에 가서 말씀사역을 하라고 하니 요나가 이상하게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동쪽으로 가지 아니하고 반대쪽으로 멀리 달아났습니다(1:3).

그렇지만 하나님의 시대적 징후와 표적은 선지자 요나의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습니다. 바다에 제물로 던져졌으나 하나님이 큰 물고기를 보내어서 삼 일간 그 속에서 숨을 쉬고 살 수 있도록 만들었습니다(1:17). 그리고 참회하는 그를 육지에 토해내어 다시 사명을 감당할 기회를 제공했습니다(2:9-10). 요나가 그 명령에 순종하여 니느웨로 가서 하루 동안 말씀사역을 했습니다. 족히 삼 일을 다녀야 대충 도시를 한번 돌 수 있는데 단 하루 만에 니느웨 왕으로부터 모든 백성이 그만 회개를 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의 대상이 되고 맙니다(3:3-10).

결국 예수님께서 말씀하고 계시는 요나의 표적의 교훈은 무엇일까요? 한 마디로, 하나님의 말씀은 선민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전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제는 요나 선지자처럼 이방인 지역으로 가서 말씀사역을 해야만 합니다. 그와 같은 복음사역의 시대를 열고자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시대적 표적이라는 것입니다. 선민사상으로 무장하고 있는 유대교의 지도자들이 각성을 해야만 합니다. 선민이 그리고 제사장의 나라가 왜 이 세상에 필요한지 하나님의 의도를 다시 살펴야만 합니다(19:4-6). 이방인을 구원하고 만민을 구원하기 위하여 속죄의 제사를 드리는 자들이 선민 제사장들임을 깨달으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고 계시는 대목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이 무슨 의미인지를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귀가 있으나 하나님 말씀의 본뜻을 듣지를 못하고 눈이 있으나 영적으로 무지하고 우둔하여 하나님의 역사를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항상 하나님이 자신들 선민의 편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방인을 포함하는 만민의 창조주 하나님이심을 왜곡하고 있습니다. 요컨대, 그들은 아전인수격으로 하나님의 말씀과 표적을 독차지하고자 하는 죄악을 범하고 있는 자들입니다(16:4a). 또한 선민은 무슨 일을 행하든지 하나님께서 무조건 구원해주신다고 믿고 있기에 그들의 종교적인 행동이 타락일로입니다. 눈속임이 태반입니다. 그리고 필요하다면 우상을 섬기고 기복신앙과 무당신앙에 빠져들고 있습니다. 그 점을 예수님은 여기서 음란한 세대라고 질책하고 있습니다(16:4b).

결론적으로, 여전히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이 무슨 의미인지를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실망하신 예수님이 더 이상 설명을 그만 두시고 아예 그들을 떠나버리시고 있습니다(16:4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