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마태복음 강해 제99강(마15:29-38)(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3. 6. 29. 11:03

마태복음 강해 제99(15:29-38)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5213()

 

장애자를 돌보시는 예수님의 관심과 소위 ‘72기적의 의미(15:29-38)

 

예수님은 많은 백성이 모이면 갈릴리 호숫가 동편 넓은 들판에서 대규모 군중집회를 열고 있습니다. 여러 번 큰 집회를 가지고 있습니다마는 그 가운데 2건이 특별히 기록이 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소위 ‘52의 기적(14:13-21) ‘72의 기적이(15:32-39) 발생한 집회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 2건의 집회는 어떠한 차이점을 가지고 있을까요?

첫째로, 시기적으로 볼 때, ‘52의 기적 때 가진 집회가 먼저이고 ‘72의 기적 때 가진 집회가 나중입니다. 처음 ‘52의 기적이 발생하자(14:13-21) 군중들이 예수님을 자신들의 임금으로 삼으려고 논의하기를 시작했습니다(6:15). 그러한 민심의 동향이 예루살렘의 유대교지도자들에게 보고가 된 것으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갑자기 예루살렘 산헤드린 대 공회에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갈릴리 현지로 급파하고 있기 때문입니다(15:1).

그들이 고의적으로 예수님 일행의 복음사역을 방해하기 위하여 시비를 걸어오고 있습니다(15:2). 일일이 복음적인 시각에서 응대를 하시던 예수님께서 더 이상 견디지를 못하시고 아예 이방 땅인 두로와 시돈 지역으로 피신을 하십니다(15:21). 다시 예수님 일행이 갈릴리 호수로 돌아온 이후에 ‘72의 기적이 또 발생을 하고 있습니다(15:32-38). 그러므로 두 가지 이적의 사이에는 산헤드린 대 공회의 방해공작이 존재를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그들의 시비를 피하여 예수님 일행이 복음사역의 지역을 옮기고 있는 모습을 간파할 수가 있습니다. 그 대목은 마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21:18)는 예수님의 말씀의 의미를 미리 보여주는 것과 같습니다.

둘째로, 처음 ‘52의 기적의 현장에서는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그 중에 있는 병자를 고쳐주시니라”(14:14)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반면에 ‘72의 기적의 현장에서는 큰 무리가 다리 저는 사람과 장애인과 맹인과 말 못하는 사람과 기타 여럿을 데리고 와서 예수의 발 앞에 앉히매 고쳐 주시니”(15:30)라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두 집회의 차이는 예수님의 관심이 처음에는 병자를 고쳐주는데 있습니다. 나중에는 장애인을 고쳐주는데 있는 것입니다. 두 가지의 경우는 조금 차이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병자는 병이 나으면 바로 생업에 종사를 할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장애자는 좀처럼 나을 기회가 없으며 설혹 낫는다고 하더라도 바로 생업에 종사를 하기가 힘듭니다. 장애를 고친다고 하더라도 정상인으로 활동하기 위하여 상당기간 직업교육과 적응훈련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시몬의 장모가 열병에 걸려 있습니다(8:14). 예수님께서 심방을 하시고 당장 고쳐주십니다. 그녀는 금방 나아서 예수님 일행을 위하여 시중을 들고 있습니다(8:15). 그러나 오랜 장애를 가지고 있던 사람이 고침을 받게 되는 것도 힘들지만 금방 생업에 종사하기가 힘듭니다. 그들은 불구자이기 때문에 평소에도 변변한 직업을 가질 수 없습니다. 베데스다 못 가의 38년된 병자(5:5-6), 실로암으로 보냄을 받은 날 때부터의 소경(9:6-7), 여리고 성문의 어린 소경 바디매오(10:46), 그리고 우화 속에 등장하는 장애인 나사로(16:20-21) 등은 모두 유일한 직업이 거지라는 사실이 그 점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병자보다는 고대사회에서 장애자가 더 불쌍한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제 예수님의 관심이 병자에게서 장애자에게로 옮겨가고 있습니다.

셋째로, ‘52의 기적은 병자들을 하루 만에 모두 치유한 당일 저녁에 발생한 사건입니다(14:14-15). 그러나 ‘72의 기적은 장애자들을 3일만에 모두 고치자 그날 오후 늦게 발생한 사건입니다(15:32). 하나님의 능력을 행사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입장에서도 병자를 치유하는 것이 더 쉽습니다. 장애자의 불구를 완전하게 고치는 것은 새로운 창조의 능력이 발동을 해야만 하는 경우가 많아서 시간이 더 많이 걸리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넷째로, ‘52의 기적은 어린아이가 내놓은 작은 도시락을 가지고(14:16-17, 6:9) 예수님이 축사하시고 하늘곳간을 여신 사건입니다. 반면에 ‘72의 기적은 예수님 일행이 지니고 있는 음식을 가지고(15:34) 하늘곳간을 여신 사건입니다. 어린아이의 정성이 동원이 된 경우에는 장정만 5천명(14:21), 전체적으로는 2만명 정도의 군중을 먹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어린아이 도시락의 희사가 없는 ‘72의 경우에는 장정이 4천명(15:38) 합계 16천명 정도의 인원이 먹을 거리를 얻고 있습니다. 결국, 작은 정성이라도 기울인 경우에 더 큰 역사가 발생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묵상을 해보고자 하는 이슈가 있습니다. 그것은 어째서 예수님의 관심이 병자에게서 장애자에게로 옮겨오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의 복음사역은 하나님의 말씀의 깊은 뜻을 복음으로 선포하시고 제자들에게 상세하게 가르쳐주시는 일이 가장 기본이며 중요합니다. 그 다음에 귀신을 쫓아내고 병자를 낫게 하고 장애자를 고쳐주는 일이 있습니다. 끝으로, 복음사역의 현장에서 열심히 참여를 하다가 그만 끼니를 넘기게 된 백성들을 위하여 기적을 베풀어서 먹을 것을 제공하신 경우가 두 번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오병이어의 기적의 현장에서는 주로 병자들을 치유하셨고 두로와 시돈이라는 이방지역을 다녀오신 다음에는 칠병이어의 현장에서 장애자를 주로 고쳐주시고 있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치유의 대상이 달라지고 있는 것일까요? 아무래도 그 사이에 있었던 사건이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 사건은 두로와 시돈을 방문하다가 가나안 여인을 만난 일입니다(15:21-28). 그 여인은 예수님의 시험을 통과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그 옛날 두로와 시돈의 사람들이 가나안 땅에 바알 신을 섬기도록 우상문화를 전파한 장본인들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왕상16:31). 그래서 그 여인을 라고 부르고 있습니다(15:26). 그러나 그 여인은 라고 부르는 것이 당연하다고 받아 들이고 있습니다(15:27). 그만큼 하나님 신앙과 지식이 없었던 이방민족임을 시인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천지의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는 피조물을 골고루 사랑하시고 구원하시기 위하여 메시아 예수님을 보내어주신 것이라는 사실을 고백하고 있습니다(15:22, 27-28). 따라서 선민 이스라엘에게 치유의 역사를 베푸셨다면 이방인인 자신에게도 그 역사를 달라고 겸손하게 간청을 하고 있습니다. 그 모습을 보시고서 예수님께서 무엇을 생각하셨을까요? 영적인 불구자가 나음을 얻고 있습니다. 이제는 정신적인 장애자와 육체적인 장애자들에게 고침을 베풀어야 할 때입니다. 사람들이 취급을 하고 있는 그들을 구원하여야 할 때임을 깨닫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와 같은 깨달음이 갈릴리를 방문하여 복음사역의 방향을 선회하고 있는 이유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모세오경에 따르면, “고아와 과부 그리고 나그네와 기업이 없는 레위인을 돌보는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기업을 얻은 선민의 의무”(22:21, 10:18, 14:29, 16:14)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보다 더 불쌍한 인생들이 두 종류 있습니다; “병자와 장애인들입니다”. 하지만 병자는 병원에 수용을 하고 치유를 할 수가 있습니다. 전염병이 아닌 이상 가족이 돌볼 수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장애자 곧 불구자인 경우에는 그 대접이 매우 가혹합니다. 동냥 이외에는 직업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가족이 온전히 돌보는 경우도 드뭅니다.

그렇다면, 복지가 없는 고대사회에서 장애인들을 어떻게 취급할까요? 방치를 하거나 격리를 하는 것이 고작입니다. 그리고 정상인으로부터 차가운 대접을 받게 됩니다. 한 마디로, 병신으로 불리는 것입니다. 그러한 취급을 하는데 일조를 하고 있는 관념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고대인들이 지니고 있는 인과응보의 철칙입니다. 욥기를 참고하면, 그 요지가 다음과 같습니다; “의인은 복을 받고 죄인은 저주를 받는다. 정상인은 복을 받은 자이며 불구자는 저주를 받은 자이다”(4:7-9, 15:20-35, 36:5-7, 17-19). 그러므로 잘못된 인과응보의 통념에 따라 장애인들이 억울하게 죄인취급을 받고 있습니다. 요컨대, 고대사회에서 가장 불쌍한 인생이 바로 장애인들이라고 하겠습니다.

현대사회에 있어서도 상당히 그러합니다. 좋은 예가 있습니다; “올림픽과 같은 큰 국제대회를 앞두고서 개최국이 장애인이나 거지를 길거리에서 격리시키는 잘못된 관행이 왕왕 있습니다”. 자유자본주의 국가에서도 그러하며 공산주의 국가에서는 더 심각합니다. 예를 들면, 평양에서는 정상인이 아니면 거주를 할 수가 없습니다. 아예 길거리에서는 병자나 장애자를 구경조차 할 수가 없습니다. 집밖 출입을 통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장애자들에게는 거주이전의 자유와 인신의 자유가 없습니다. 한 마디로, 인권이 크게 제약을 받고 있습니다. 현대사회도 그러한데 고대사회에서야 오죽하겠습니까? 그러므로 본문에서 예수님의 복음사역이 장애자를 고쳐주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하는 것은 갈릴리 지역에서의 예수님의 사역이 이제 거의 막바지를 향하여 가고 있다는 사실을 시사해주고 있다고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