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마태복음 강해 제102강(마15:39, 16:4)(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3. 6. 30. 03:49

마태복음 강해 제102(15:39, 16:4)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5215(주일)

 

예수님의 복음사역의 행로를 결정하는데 영향을 미치고 있는 요인들(15:39, 16:4)

 

예수님의 복음사역의 행로는 자신의 의지와 뜻대로 결정이 되고 있지를 않습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통하여 그 길을 인도하시고 있음을 마태의 복음서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사도 요한의 글을 되돌아보게 해주고 있습니다;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21:18). 그렇게 영향을 미치도록 쓰임을 받고 있는 사람들이 누구일까요? 놀랍게도 예수님의 복음사역의 혜택을 받았던 백성들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복음사역을 못마땅하게 생각하여 유대교의 논리로 시비를 걸어왔던 유대교지도자들입니다. 그 점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예수님이 갈릴리 동편 먼 곳 데가볼리 가다라 지방에서 군대귀신을 사람에게서 쫓아내어주었습니다(8:28-34). 귀신 떼가 이천 마리나 되는 돼지 무리에게 들어가자 돼지 떼가 견디지를 못하고 물로 뛰어들어 몰사(沒死)를 해버리고 말았습니다(8:32). 그 때문에 손해를 보게 된 주인들이 고을 사람들을 선동하여 예수님을 동네에서 몰아내고 있습니다(8:33-34). 그 결과 예수님이 이방지역 선교를 멈추고 갈릴리 경내로 되돌아 오십니다(9:1).

(2)  예수님이 갈릴리 동편 들판에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켰을 때에(14:13-21) 만나와 같은 기적을 맛본 백성들이 자신을 임금으로 삼으려고 했습니다(6:15). 그들을 피하여 예수님께서 호수 북쪽 대도시 가버나움으로 피신을 하셨습니다(14:22, 6:17). 그때부터 예수님의 복음사역은 가버나움과 막달라 사이 게네사렛 땅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15:34)

(3)  갈릴리 백성들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하고 있던 예루살렘 산헤드린 대 공회에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먼저 급파했습니다(15:1). 그들이 게네사렛 지방에서 예수님에게 시비를 걸어왔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식사를 할 때에 손을 씻지 않고 있으니 예수님 일행이 유대교인들이 지키고 있는 장로들의 전통을 범하고 있다는 지적입니다(15:2). 예수님은 율법을 만드신 하나님의 본뜻을 한참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15:3-14). 그러나 전혀 이해를 하지 못하고 있는 그들을 보시고서 그만 그 자리를 피하고 있습니다.

(4)  그 다음 행로가 서북면 지중해 바닷가 이방지역 두로와 시돈입니다(15:21). 그곳에서 가나안 여인을 만나서 창조주의 능력이 메시아로부터 흘러나오고 있다고 확신하고 있는 그녀의 놀라운 믿음을 보게 됩니다(15:22-28). 그리고 하나님 신앙과 지식을 파수하고 있는 선민으로부터 취급을 받더라도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그 겸손함을 보게 됩니다(15:26-27). 예수님은 선민사회 내에서도 사람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는 불쌍한 인생들이 있음을 깨닫고서 갈릴리 가버나움으로 되돌아 오십니다(15:29).

(5)  예수님은 다시 동편광야에서 이제는 병자가 아니라 장애자와 불구자들을 모아놓고서 그들을 치유하는 군중집회를 가지게 됩니다(15:30-31). 삼일 동안 복음을 전하고 치유집회를 계속하는 동안에 장정만 계산해도 사천 명이나 몰려들어 있습니다(15:32, 38). 먹을 것이 없이 굶으면서 집회가 계속이 되고 있습니다. 불쌍하게 생각하신 예수님이 이른 바 칠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십니다. 그것이 그곳을 떠나 반대쪽인 갈릴리 호수 서편 마가단 지경으로 떠나게 되는 이유가 되고 있습니다(15:39). 전번 오병이어의 기적 때처럼(6:15) 또 예수님을 임금으로 삼으려고 하는 움직임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이 되는 대목입니다.

(6)  칠병이어의 기적이 발생했다는 보고를 받은 산헤드린 대 공회에서 이번에는 바리새인과 더불어 사두개인들을 조사단으로 파견한 것으로 보입니다(16:1). 그들이 막달라 일대의 마가단 지경으로 예수님 일행을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모세처럼 하나님의 표적을 자신들이 보는 앞에서 보여달라고 요청을 합니다. 그들이 원하고 있는 표적은 그 옛날 출애굽기의 기적과 같은 것입니다. 한 마디로, 애굽 제국에는 진노와 재앙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구원과 해방을 주는 그러한 이적을 말하고 있습니다(12:29-36). 그렇다면 예수님 당시에 있어서는 외세인 로마제국과 헤롯 왕가에게는 진노와 재앙을 내리고, 반대로 선민 유대인들에게는 구원과 영광을 드러내는 하나님의 이적을 행하라는 주문인 것입니다.

(7)  예수님께서 한 마디로 거절하십니다. 그 이유는 선민사상에 물들어 있는 유대교지도자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이적이란 요나의 표적 밖에는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16:4). 선민이거나 이방인이거나 구별 없이 모두를 구원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벌써 요나 선지자의 기사를 통하여 이 세상에 드러나고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라는 질책의 말씀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들을 다시 떠나 북쪽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으로 들어가십니다(16:13).

 

  이상의 내용을 음미해보면 다음 두 가지 사실을 알 수가 있습니다;

첫째로, 백성들이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의 능력이 흘러나온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그를 자신들의 임금으로 모시고자 합니다(6:15). 이유는 자신들의 경제적인 문제를 단숨에 해결 받고자 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요청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피조물인 사람들의 생존권을 보장하고 계시는데(1:26-29) 왜 예수님은 그 요청을 거절하고 계시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먹고 사는 문제의 해결을 위하여 하나님의 능력을 사모하는 것이 위험하기 때문입니다.

근본적으로, 사람이란 먹고 사는 이유와 목적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할 때에만 그 인생이 구원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인생의 목적은 하나님의 나라와 공의를 구현하는 데 있습니다. 그 일에 모든 것을 바쳐서 매진을 하는 인생이라면 하나님 아버지께서 세상적으로 필요한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아니하겠다고 예수님을 통하여 이미 약속을 하고 있습니다(6:33). 그런데 사람들은 그 약속을 믿지 아니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당장 먹고 사는 문제부터 해결을 해주면 그 일에 나서겠다고 고집을 부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소위 기복신앙입니다. 달리 유식하게 표현하자면 도구주의적인 신앙관이며 그 특징은 우상을 만들어 편리하게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경우에는 경제적인 문제가 해결되고 나면 십중팔구 하나님을 떠나게 됩니다. 모세의 예리한 지적이 다음과 같습니다; “네가 먹어서 배부르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주하게 되며 또 네 소와 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하노라”(8:12-14).

둘째로, 자신들에게 편리한 종교를 계속 유지하기 위하여 예수님의 만민구원사상을 배척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선민들의 이익을 극대화하고 있는 유대교를 지키고자 합니다. 그런데 만민구원사상을 설파하고 있는 예수님의 움직임이 그들의 종교적인 기반을 송두리째 뒤흔들고 있습니다. 따라서 어떻게 해서든지 약점을 잡아서 처형을 해버리고자 몸부림을 치고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만 그러한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에도 자기 교회와 교단의 이익을 극대화 해주고 있는 해석만을 고집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유일한 잣대로 사용하여 하나님 말씀과 예수님의 복음을 풀이하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면, 자신들의 교리를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님의 일생을 고찰하고 있는 경우가 다반사입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말하자면 그 반대여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뜻을 복음으로 밝히고 그것을 실천하고 있는 예수님의 복음적인 일생에 대하여 깊은 묵상을 해야만 합니다. 그 묵상의 결과를 가지고 자신의 삶도 종교적 교리도 재정비를 하는 것이 올바른 수순이라고 하겠습니다”. 차제에 너나없이 겸손하게 그렇게 생각을 해보는 것이 좋겠다고 하는 것이 본문에서 얻을 수 있는 또 하나의 소중한 결론이라고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