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마태복음 강해 제8강(마1:18-25)(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3. 5. 18. 11:42

마태복음 강해 제8(1:18-25)

작성자; 손진길 목사(갈릴리한인교회 담임)

작성일; 주후 20141115()

 

하나님의 아들을 이 세상에 태어나게 만들고 있는 하나님의 특별한 조치 세 가지(1:18-25)

 

구약의 예언대로 하나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육신을 입고서 태어나고 있습니다. 그 특징은 선지자 이사야가 예언하고 있는 그대로 첫째, 동정녀 탄생(7:14) 둘째, 이새의 가문(11:1) 셋째, 성령의 임재(11:2) 등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아들은 이 세상에서 그 옛날 다윗이 다스리던 선민의 나라를 공의의 나라로 만들어 직접 통치를 할 것입니다(9:7). 사도 마태는 이사야의 예언이 어떻게 성취가 되고 있는지를 다음과 같이 간략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사도 마태는 아기 예수를 낳게 되는 마리아는 목수 요셉과 약혼만을 했을 뿐 동거를 한 적이 없는 처녀의 몸이라고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1:18). 그 증거로서 저자 마태는 마리아의 약혼자인 요셉의 태도를 들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요셉은 약혼녀인 마리아가 자신과 동거하거나 합방을 한 일이 없는데 임신을 한 사실을 알고서는 가만히 약혼관계를 끊고자 했기 때문입니다(1:19).

여기서 요셉의 판단은 서너 가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1) 약혼자인 자신과 합방을 한 일이 없는데 마리아가 아기를 임신하고 있으니 다른 사람과 관계를 가진 것 같다. (2) 자신이 억울하다고 말하고 이 일을 떠들게 되면 자신의 집안에도 불이익이 닥친다. 그 이유는 조용히 변방 갈릴리의 나사렛 산골에 숨어서 살아야만 하는 것이 자신의 가문이기 때문이다. 만약에 소문의 진원지가 되게 되면 이두매 족속 헤롯 왕가가 다스리고 있는 땅에서 다윗의 왕손이라는 자신의 신분이 드러나게 되어 신변이 위험해진다. (3) 마찬가지로 대제사장 아론의 혈통인 마리아의 집도 어려운 형편에 처하게 될 것이다(1:5, 36). 지금까지 다윗의 가문과 아론의 가문은 오랜 전통에 따라 서로가 서로를 도와주면서 함께 나사렛에서 살아왔는데 이 일로 말미암아 그 유대관계에 금이 가서는 아니 된다. (4) 만약 약혼을 한 처녀가 혼전순결을 지키지 못하고 약혼자도 모르는 임신을 했다고 하는 사실이 밖으로 알려지게 된다면 큰일이다. 율법에 따라 인민재판을 받고 처형이 될 형편이다(38:24, 21:9). 그리고 정통 레위 가문인 마리아의 집안에 엄청난 수치가 될 일이다. 그러므로 가만히 이 일을 묻어버리고 그냥 요셉 집안의 형편과 사정의 변화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약혼을 파기한다고 통보를 하는 것이 모두를 살릴 수 있는 유일한 수습방안이 될 것으로 목수 요셉이 판단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1:19-20a).

둘째로, 목수 요셉의 판단은 합리적입니다. 여러 정황을 모두 살피고 모두를 살릴 수 있는 유일한 길을 찾아낸 것입니다. 그것은 옛날 요셉의 조상인 유다의 뛰어난 판단을 다시 보는 것과 같습니다. 당시 유다는 죽음의 위기에 처한 이복 동생 요셉도 살리고 나머지 형제들에게 닥치게 되는 재앙도 사전에 제거해주기를 원했습니다(37:26-27). 머리 좋은 유다가 형 르우벤의 계책을 미리 눈치를 챘기 때문입니다. 유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만약에 큰 형 르우벤이 밤중에 요셉을 살려서 아버지 야곱에게 데려가서 자초지종을 모두 말하게 되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37:21-22) 아버지 야곱의 침상을 더럽힌 장남 르우벤이야(35:22) 명예회복의 기회가 될지 몰라도 나머지 형제들은 모두 목숨이 위험해질 것이다. 그리고 르우벤의 계략이 맞아 떨어지지 아니할 경우에는 또 요셉의 목숨이 위험해진다. 그러므로 고육지책으로 요셉을 멀리 애굽에 노예로 팔아버리는 것이 모두의 목숨을 살릴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다(37:25-28)”.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을 사람으로 태어나게 하여 훗날 대속의 십자가를 지게 함으로써 그 십자가를 쳐다보고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모든 자를 살리고자 하는(3:13-17) 하나님의 고육지책을 미리 보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이제 목수 요셉을 통하여 그 옛날 하나님의 마음에 들었던 조상 유다의 판단이 다시 이 세상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마태는 목수 요셉의 성품을 의롭다고 감히 말하고 있습니다(1:19).

셋째로, 다윗 왕가의 후손인 목수 요셉이 그 옛날 의로운 사람이었던 조상 유다와 같이 그렇게 좋은 생각을 했다면 더 높은 뜻을 가지고 계시는 하나님의 생각은 과연 무엇일까요?(55:8-9) 겉으로 보면, 이 세상은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사람의 판단으로 움직여지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11:49-50). 하지만 그 깊은 속을 들여다보게 되면 상당히 다릅니다. 사실은 높은 차원의 창조주의 의도와 계획이 실현이 되고 있음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11:51-53, 3:14-15). 그러한 측면을 마리아에 대한 성령님의 임재와 요셉에 대한 주의 사자의 현몽이 다음과 같이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1) “그 아기는 생물학적인 아버지가 없다. 성령으로 잉태가 된 것이다(1:18, 20). 의사 누가가 그 점을 더 쉽게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그는 성령이 임하고 하나님의 능력이 역사하여 마리아가 임신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1:34-37). (2) 그러므로 무서워하지를 말고 마리아를 데려오라는 것입니다(1:20). 다른 사람들 눈에는 요셉이 약혼한 상태에서 약혼녀를 임신시킨 것처럼 보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비난의 눈초리를 무서워하지를 말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목수 요셉이 왜 그와 같은 불명예를 감수해야만 하는 것일까요? 그 치욕을 감내할 만한 대가가 과연 무엇일까요? 항목을 달리하여 아래에서 자세하게 살펴보고자 합니다.

넷째로, 하나님의 계획하심이 이제 요셉에게 전해져 오고 있습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1:21). 다윗의 자손인 목수 요셉은 오랜 가문의 꿈이 자신의 대에 와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통하여 실현이 되는 것으로 얼른 이해를 했습니다. 자신의 도덕성에 먹칠을 당하는 것은 이제 문젯거리가 되지를 않습니다. 선지자 이사야의 예언에 따라(7:14) 자기 백성 곧 유다의 백성을 구원하게 될 메시아가 지금 약혼녀 마리아의 뱃속에 들어 있습니다(1:22-23). 그리고 그들 모자를 얼른 시집으로 데리고 오라고 하나님께서 지시를 하십니다. 순종하지 아니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끝으로, 한 가지를 더 생각해보아야만 합니다. 하나님 말씀의 뜻을 목수 요셉이 과연 정확하게 전부 이해한 것일까요? 아닙니다. 그는 다윗의 자손으로서 꼭 그만큼만 이해를 했을 따름입니다. 포기할 수 없는 다윗 왕손들의 꿈은 곧 다윗 왕조의 정통성을 인정하고 있는 모든 유대인들의 꿈입니다. 그래서 말라기 이후 선지자가 없던 세월 400여년을 지나서 처음으로 요단 강가에 선지자로 보이는 세례 요한이 나타났을 때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이 그토록 집요하게 탐색전을 편 것입니다(1:19-34).

유대교를 믿고 있는 모든 유대인들의 꿈은 다윗의 왕좌를 다시 얻게 되는 후계자 메시아가 이 땅에 오게 되면 모든 외세를 몰아내고 그 옛날 다윗 대왕처럼 중동 땅에 이스라엘 제국을 다시 건설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선민의 영광이 빛나는 그곳 예루살렘 시온 산에 하나님의 영광이 빛난다는 사고방식입니다. 과연 그러할까요? 만약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그 정도의 유대교인들이 아전인수격으로 주장하고 있는 시오니즘에 관한 이야기만을 되풀이하고 있다고 한다면 모든 이방인들이 기독교인이 될 필요가 전혀 없을 것입니다.

그와 관련하여 선지자 이사야의 메시아에 대한 예언을 다시 검토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 이사야는 다윗의 가문에서 메시아가 나타난다고 말한 것이 아닙니다. “이새의 줄기에서”(11:1) 또는 이새의 뿌리에서”(11:10)라고 말했습니다. 둘째, 그러나 다윗의 왕좌와 그 나라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 내용이 다음과 같습니다;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9:7). 메시아가 이 세상에 와서 활동하게 되는 무대는 다윗이 다스렸던 그 나라임이 맞습니다.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가 활동했던 무대는 가나안과 그 주변지역 곧 그 옛날 다윗의 이스라엘 제국의 영토 안에 국한이 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전혀 새로운 나라를 세우고 계십니다.

그리스도의 나라는 세상적인 정의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의 정신이 숨을 쉬고 있는 나라입니다.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공의는 혈통주의, 선민사상, 육체적인 관계를 모두 뛰어넘고 있는 영적인 것입니다(3:31-35, 1:13, 4:24). 그것은 만민과 만물을 모두 창조하신 하나님의 공평한 피조물 사랑에서 비롯되고 있는 사상입니다(3:16, 8:18-23). 그와 같은 공의의 정신을 피조물이 깨닫는 것은 무척 힘이 듭니다. 그 이유는 생존본능 때문에 서로 살기다툼을 하고 있기에 자기 희생의 공의사상이 자리를 잡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7:13-14, 16:24-27). 예수님 당시 자칭 선민 유대인 사회도 예외가 아닙니다. 그들은 자신들만이 의인이며 구원의 대상이 되고 있는 선민이고 이방인들은 모두가 죄인이며 멸망의 대상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이제 메시아가 오시게 되면 이방인들을 심판하고 선민의 영광을 다윗 제국의 부활로 이 세상에 드러내신다는 것입니다. 요컨대, 그와 같은 선민사상을 골수에 새기고 있는 자들이 여기서는 하나님을 지극정성으로 잘 섬기고 있다고 하는 목수 요셉이나 유대교의 지도자들이라고 하겠습니다.

사도 마태가 이 복음서를 저술하고 있는 시기는 주후 60년대로 보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초대교회가 하나님의 만민구원의 사상 위에서 건설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역사를 통하여 공의의 나라인 그리스도의 나라가 이 세상에 임하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 본문에서는 그 사실까지 말하고 있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단지 목수 요셉은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에 따라 다윗의 후계자인 자신의 가문에서 메시아가 탄생한다는 그 사실에 감격하여 마리아와 그 뱃속의 아기 예수를 자신의 집으로 데리고 왔다는 사실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1:22-24).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이 깨끗하게 이 세상에 탄생할 수 있도록 요셉이 아기가 태어날 때까지는 합방을 하지 아니했다는 사실을 덧붙이고 있을 따름입니다(1: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