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히브리서 강해 제70강(히12:5-7)(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3. 3. 2. 08:39

히브리서 강해 제70(12:5-7)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터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7 7 5()

 

독생자를 징계하신 아버지 하나님께서 양자로 받아들인 너희도 징계하신다(12:5-7).

 

히브리서의 저자가 본문의 바로 앞절에서 적고 있는,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 흘리기까지는 대항하지 아니하고”(12:4)라는 문장은 다음과 같이 두가지로 해석이 될 수가 있습니다;

첫째의 해석은, 복음사역에 있어서 성도들은 주님만큼 큰 고난과 피 흘림의 희생을 감수하지 아니해도 된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큰 소와 작은 소가 한 겨리로 밭을 갈고 있기 때문입니다. 큰 소가 주인이신 예수님이시고 작은 소는 그 종이며 제자인 성도들입니다. 예수님께서 큰 몫을 담당하시고 제자들은 작은 몫을 담당하는 것입니다. 그 점에 대해서는 지난 번 강해에서 이미 설명을 했습니다.

둘째의 해석은  예수님께서 만민의 죄를 속죄하고자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실 때에 제자들이 그 자리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럴 수가 없습니다. 그 점에 대하여 히브리서의 저자가 본문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12:5-7);

(1)  첫째, 성도들이 스스로 유월절 어린양이 되어 대속의 십자가를 지시고 피를 흘리신 그리스도만큼 아직 복음사역에 있어서 희생하고 헌신한 것이 아닙니다(12:4). 그러나 이제는 주님의 부활 승천으로 말미암아 그 일을 성도들이 이어받아 죄와 싸워 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12:5-6). 그것이 이제는 성도들에게 주어지고 있는 십자가의 길입니다(16:24).

(2)  둘째, 그 십자가의 길은 마치 예수님의 경우처럼 하나님의 징계로 성도들이 죄를 물리치고 승리를 얻어 나가는 단련의 과정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그 징계가  연단의 과정임을 생각하면서 성도들은 믿음생활에 있어서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12:5).

(3)  셋째, 성도들이 낙심하지 아니하고 복음사역을 하면서 죄와 싸워 나갈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도와 주십니다. 그 방법이 바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를 의지하고 있는 성도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시는 것입니다(12:6). 이미 자녀로 삼아 주셨기에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영을 성령님으로 내주 역사하게 하십니다. 그러한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성도들이 죄를 대항하여 피 흘리기까지 싸울 수가 있으며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4)  넷째,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복음사역의 사명을 감당하다가 옆길로 가고 있는 성도들을 징계하십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채찍질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12:6-7). 그리고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복음사역의 사명을 전혀 감당하지 아니하고 있는 자들과 죄의식이 없이 세상적인 복락만 추구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자들에 대해서는 크게 징계를 하십니다. 그 이유는 창조주이신 여호와께서는 세상만민을 모두 구원하여 하나님의 자녀로 삼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3:16-17).

이상과 같은 사실들을 염두에 두고서 이제부터 본문의 말씀을 한 구절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그 깊은 의미와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파악해봅니다;

첫째로,아들들에게 권하는 것 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낙심하지 말라”(12:5); 세 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봅니다;

(1)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 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도 잊었도다”(12:5a);

1)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공생애를 지내실 때에 헬몬 산 남쪽 기슭에서 조용하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16:15)고 묻고 계십니다. 그때 사도 베드로가 다음과 같이 놀라운 신앙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16:16). 성령님의 감동으로 사도 베드로가 나사렛 예수님이 평범한 선지자가 아니라 구속자 그리스도이시며 구원역사를 이루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사실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2)    그와 같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시라고 더 일찍 인정하고 있는 사도가 있습니다. 그 사도가 바로 나다나엘입니다. 그에 대한 기록은 공관복음보다 30년쯤 늦게 나타난 요한복음에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사도 요한의 기억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갈릴리 가나에서 나다나엘을 처음 만나신 때는 공생애의 초기입니다(1:47). 그때 사도 나다나엘이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습니다;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1:49).

3)    베드로와 나다나엘의 신앙고백에서 볼 수 있듯이 예수님을 3년 이상 따라다니면서 복음사역을 함께하고 있는 12사도들은 하나의 공통된 인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스승이신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한가지 잊어버리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 점을 히브리서의 저자가 여기서 지적을 하고 있습니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기 때문에 징계를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당하신 그 엄청난 십자가의 징계는 역설적으로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아들 예수님을 통하여 이 세상에서 반드시 이루고자 하시는 큰 과업이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들이 하나님의 자녀라고 한다면 그와 같은 사랑의 매를 징계로서 맞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성도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그리스도의 사명을 계승하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12:5a 의역).

4)    그와 같은 설명을 쉽게 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요? 히브리서의 저자는 솔로몬 대왕이 수집하여 편집한 잠언에 실려 있는 자녀에게 주는 교훈을 다음과 같이 인용하여 그 점을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내 아들아 여호와의 징계를 경히 여기지 말라. 그 꾸지람을 싫어하지 말라. 대저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기를 마치 아비가 그 기뻐하는 아들을 징계함 같이 하시느니라”(3:11-12).

(2)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경히 여기지 말며”(12:5b);

1)    여호와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신 것은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의 큰 사명을 담당하게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 사명을 감당하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가지의 절차를 거치고 있습니다; ①첫째,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아들로 태어나서 자라는 성육신입니다. ②둘째, 제자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복음사역을 감당해야만 하는 공생애입니다. ③셋째, 하나님말씀의 뜻을 저버리고 이기적으로 그리고 현세적인 축복만을 바라면서 잘못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을 회개시키기 위하여 대속의 십자가를 지시고 스스로 자신을 속죄의 제물로 희생하시는 것입니다.

2)    그런데 그와 같은 절차와 과정이 아버지 하나님의 공의의 정신과 세상구원의 뜻을 이루기 위한 것이라고 하는 깊은 내용을 모르고서 바라보게 되면 엉뚱한 결론을 얻게 됩니다;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그 저주의 십자가에 버리시고 죽도록 징계를 하시고 있다는 것입니다”(21:23, 3:13). 그 속을 들여다 보면, 하나님께서는 그 징계의 과정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사역이 이루어지도록 하십니다. 그것이 대속의 과정이기 때문에 하나같이 그러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짊어지시고 인내하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그 징계가 사실은 세상의 만민 특히 그 가운데 사랑하는 제자들을 위한 것입니다. 그들이 받을 징벌을 대신 받고 계신 것입니다. 그와 같은 맥락에서 성도들이 받고 있는 하나님의 징계가 바로 그들을 하나님의 아들로 세우고 대속의 삶을 살아가게 하는 방편이라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결코 하나님의 징계의 의미를 가볍게 여길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12:5b).

(3)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낙심하지 말라”(12:5c); 아버지 하나님의 그와 같은 깊은 속을 깨닫지 못하고 있으면 그 징계로 말미암아 고통스럽습니다. 아무리 노력하여 복음사역을 잘 하려고 해도 환난과 핍박이 몰려옵니다. 복음을 듣는 사람들이 회개의 마당으로 나아오지를 않습니다. 오히려 의심과 불신 그리고 거역함이 나타나고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복음사역과 복음의 실천을 그만두고자 하는 낙심마저 찾아 들고 있습니다. 히브리서의 저자는 그러한 성도들의 심정이 벌써 잠언서에 적혀 있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 꾸지람을 싫어하지 말라. 대저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기를 마치 아비가 그 기뻐하는 아들을 징계함 같이 하시느니라”(3:11-12). 요컨대, 하나님의 자녀가 된 성도들은 신앙생활에서 낙심하지 말고 아버지 하나님의 깊은 뜻을 바라보면서 심기일전(心機一轉)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로,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12:6); 두 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봅니다;

(1)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12:6a);`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큰 인물은 더 큰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더 많은 자의 잘못을 대신 짊어져야 합니다. 그에 따라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더 많은 징계를 받게 될 것입니다(12:6a). 그렇다면, 그와 같은 대속의 삶을 이 세상에서 인내로 끝까지 살아가게 되면 그 결과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예수님의 경우처럼 정확하게 대속의 십자가를 지는 산 제사의 삶이 성도들에게도 요청이 되고 있습니다(12:1). 그렇게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이루고 있기에 영생의 부활과 승천 그리고 창조주 하나님의 보좌 오른편에 앉으신 주님의 옆으로 인도가 될 것입니다(25:34, 22:28-30).

(2)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12:6b); 예수 그리스도께서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을 원하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기 위하여 대속의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로마의 병정들로부터 엄청난 채찍을 맞으셨습니다(27:26, 19:1). 자신이 저지르지 아니한 잘못과 허물에 대하여 대신 채찍질을 당하는 그 고통이(53:4-5) 예수님 다음에는 누구에게 있게 될까요? 히브리서의 저자는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하나님의 아들들로 받아 들이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과정이 있을 것이라고 본문에서 말하고 있습니다(12:6b).

셋째로,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12:7); 세 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봅니다;

(1)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12:7a); 대신 징계를 받는 것으로 알고서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그 징계에 대하여 참고 인내를 하라고 히브리서의 저자가 말하고 있습니다. 욥기를 보면 동방의 의인인 욥이 그러합니다;

1)    처음에는 욥이 동방 땅의 인과응보(因果應報, 뿌린대로 거두는 것) 사상에 젖어서 의인인 자신에게 어째서 악인이 받게 되는 그와 같은 저주와 징계가 임하고 있는지 전혀 그 이유를 모르고 있습니다. 따라서 질병에 시달리면서 욥은 그가 죽기 전에 반드시 여호와 하나님을 만나서 그 이유를 설명 듣고자 합니다.

2)    그는 속죄의 제사를 드리는 제사장의 사명이 무엇인지를 깊이 모르고 있습니다. 자신이 스스로 속죄의 제물이 되는 대속의 삶을 그리고 중보자의 삶을 살아가야만 한다는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전혀 이해하지를 못합니다. 그렇지만 마지막 순간에 창조주께서 나타나셔서 그 이치를 설명해 주십니다.

3)    욥은 자신이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고 불평불만을 하던 죄인임을 인정합니다(42:4-6). 그리고 여호와의 말씀의 뜻에 따라 미워하게 된 세 친구를 용서하고 그들을 위하여 속죄의 제사를 드려주고 중보의 기도를 올립니다(42:7-10a). 그 즉시 욥의 신원의 회복이 있게 됩니다(42:10b).

(2)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12:7b);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도 바울의 증언에 따르면 이 세상의 모든 피조물을 구원하는 사명을 감당하게 됩니다;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이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8:19).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에 이어서 그의 제자들인 모든 성도들이 대속의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들이 모두 하나님의 아들들의 사명을 감당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3)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12:7c); 그와 같은 사명자로 세우기 위하여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을 자녀로 삼으시고 사랑의 징계를 하십니다. 설혹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다른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대신 징계를 받고 있는 부분이 많다는 사실을 인식해야만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실천하는 소위 그리스도의 제자인 성도들의 산 제사의 삶이며 영적인 예배라고 하겠습니다(12:1-2).

결론적으로, 옛말에 손자를 너무 귀여워하면 할아버지의 수염을 뜯는다고 합니다. 그렇게 응석받이로 키우게 되면 버릇이 없게 되고 사람 구실을 제대로 못하게 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제대로 사람 구실을 할 수 있도록 올바르게 키우기 위해서는 엄격한 가르침과 잘못한 부분에 대해서는 징계가 필요합니다.

그러한 징계가 부모와 스승에 의하여 이루어집니다. 정말 미워하는 원수가 그렇게 징계를 해서는 안됩니다. 반드시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가 징계를 행하고 제자를 사랑하는 스승이 징계의 매를 들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더구나 복음사역에 있어서는 성도들이 그리스도처럼 대속의 삶을 살아가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대신 속죄를 하고 당사자를 구원하는 사역을 감당해야만 합니다. 그것이 억울하다고 불평불만을 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억울한 그만큼 그리고 대속의 산제물로 살아간 그만큼 하나님 자녀의 영광이 상급으로 주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아무쪼록 그리스도의 제자답게 대속의 삶을 끝까지 살아가시는 성도님들이 모두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