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히브리서 강해 제59강(히11:11-13)(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3. 2. 25. 03:23

히브리서 강해 제59(11:11-13)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터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7 6 24()

 

늙은 불임여성인 자신을 치유하여 약속의 아들 이삭을 생산하게 하시는 여호와의 창조의 능력을 체험한 사라는 무엇을 꿈꾸고 믿으며 나그네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11:11-13)

 

본문은 3절에 불과한 짧은 글이지만 마치 히브리서 저자의 보물창고와 같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믿음이 무엇인가에 대한 자신의 깨달음을 아낌없이 진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표현방법이 굉장히 은유적이고 상징적입니다. 더구나 평범해 보입니다. 따라서 그 깊은 의미를 모르고 지나치기가 쉽습니다. 우선 그 깊은 묘미를 다음과 같이 파악해보고자 합니다;

(1)  첫째, 모세가 기록하고 있는 창세기 제11장에서는 아브람의 아내인 사래가 불임여성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11:30). 그런데 여호와께서는 그녀를 열국의 어머니가 될 것이라고 예언하시면서 그 이름을 사라로 바꾸어 주십니다(15:16). 실제로 그녀는 90세에 약속의 아들 이삭을 생산하게 됩니다(17:17, 21:5-7). 그런데 그러한 명백한 사실을 잘 알고 있는 히브리서의 저자가 달리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믿음의 눈으로 보면, 사라는 비록 늙었다고는 하지만 단산을 한 태가 다시 열려 잉태할 수 있는 능력을 다시 얻은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11:11). 조금 풀이를 해봅니다;

1)    그러한 경우는 훗날 그녀의 손주 며느리가 되고 있는 레아의 사례와 닮아 있습니다(30:9, 16-17). 믿음의 눈 곧 여호와가 창조주이심을 믿고 있는 영적인 안목으로 보자면, 사람의 태를 열고 닫으시는 것이 전부 하나님의 소관입니다(4:1, 20:17-18, 25:21, 30:2).

2)    그러므로 불임을 가임으로 만드는 것이나 단산한 자를 다시 태를 열어 자식을 생산하게 하는 것이나 별로 차이가 없습니다(18:11-14). 더구나 늙은 세포를 다시 젊은 세포로 회춘을 시키는 것도 자연의 법칙을 뛰어 넘으시는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에 속하고 있는 영역입니다.

3)    그와 같은 여호와 하나님의 광대하심과 창조의 능력을 믿는 것이 믿음이라고 히브리서의 저자가 교묘하게 설명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 설명의 방법이 불임을 고의적으로 단산으로 용어를 바꾸어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컨대, 이상하다고 여기는 성도들이 스스로 한번 깊이 생각을 해보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2)  둘째, 경수(經水)가 그 옛날에 끊어진 늙은 불임여성 사라와 그녀보다 10살이나 많은 99세의 남편인 아브라함이 어떻게 자식을 낳게 될까요? 불임여성을 가임여성으로 그리고 늙은 몸을 젊은 몸처럼 회춘을 시켜주고 있는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이 그곳에 함께할 때에 가능합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능력으로 얻게 된 약속의 아들 이삭의 후손이 이 세상을 뒤덮게 된다는 예언이 나타나고 있습니다(11:12);

1)    오늘날 미국을 움직이고 있는 큰 힘의 하나가 300만명 정도의 유대인들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삭의 후손에 대한 예언에서 히브리서의 저자는 슬쩍 하늘의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은 후손이 생육하였느니라”(11:12)고 평범하게 적고 있습니다. 그 표현은 모세가 벌써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15:5), “네 아들 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을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22:16-17).

2)    그런데 사실은 수천년 전부터 평범하게 사용하고 있는 그 표현 가운데 엄청난 하나님의 창조의 비밀이 숨겨져 있습니다; “이 지구상에 모래알의 수가 10의 23승 개 이상으로 추산이 되고 또 우주에 있어서 별과 같은 행성의 수가 역시 10의 23승 개 정도로 추정이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연한 이야기가 아니라 그 옛날부터 하나님의 세상창조의 비밀이 자연스럽게 사람들의 입을 통하여 매우 평범하게 흘러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대목을 히브리서의 저자가 한번 생각해보라고 본문에 적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3)  셋째, 히브리정경에 기록이 되고 있는 그 수많은 믿음의 선진들이 어떤 약속을 얻지를 못한 채 그들의 인생을 이 땅에서 끝내고 있는 것일까요?(11:13a) 한 마디로, 그 약속은 그리스도의 오심을 의미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11:25-26);

1)    그들 믿음의 선배들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시기 전에 향년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구원자로 오시면 자신들을 인도하여 영생의 천국으로 함께 들어가신다고 하는 사실을 욥처럼 믿고 있습니다(19:25-27). 그 사실을 세례 요한과 예수님께서도 증거하십니다(1:15-18, 26-28, 3:28-30, 5:25-29, 8:56). 그러므로 히브리정경의 신앙인들은 하나같이 그 사실만을 믿고서 훗날 그리스도를 만나기를 학수고대하면서 끝까지 이 세상에서 믿음의 길을 완주하고 있습니다.

2)    히브리서의 저자가 그 사실을 새삼 본문에서 기록하고 있는 이유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성도들은 영생의 하나님께서 준비하시는 천성으로 가기를 소망하고 있을 뿐 언제 그 소망이 이루어지는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옛날 에녹처럼 살아 생전에 여호와에 의하여 휴거를 당하게 되는지, 아니면 아브라함처럼 죽은 다음에 굴속에 들어가서 부활을 기다려야만 하는 것인지도 자세히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 여쭈어 보아야 할 질문입니다.

3)    그런데 의사 누가가 기록하고 있는 사도행전 제1장을 살펴보면, 예수님의 답변이 벌써 나타나고 있습니다;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1:7-8). 사람이 자신의 운명을 알 수가 없듯이 이 세상의 종말의 시기도 역시 하나님이 관장하시는 일급 비밀입니다. 다만 그리스도의 재림과 더불어 반드시 그날은 오게 됩니다. 그러므로 약속대로 그 날이 오게 된다는 사실을 믿고서 평생을 바쳐서 복음사역에 전심전력을 다해야 하는 것입니다.

(4)  넷째, 여호와 하나님의 창조의 섭리로 이 세상이 움직이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인생도 그 섭리를 따라 인도가 되고 있습니다. 결국 인생의 목적지는 이 세상이 아니라 영생의 하나님께서 두 팔을 벌리고 기다리고 계시는 천성입니다(11:16). 그러한 사실을 깨닫고 이 세상을 한평생 하나님의 선지자로 이방 땅을 떠돌면서 믿음의 선진들이 나그네 인생을 살아갔다고 히브리서의 저자가 기술하고 있습니다(11:13b). 그 말은 초대교회의 성도들도 그러한 역사관과 인생관을 가지고 그리스도의 복음의 일꾼으로 살아가라고 하는 권면입니다.

이상과 같은 사실들을 염두에 두고서 이제부터 본문의 말씀을 한 구절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그 깊은 의미와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파악해봅니다;

첫째로,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가 많아 단산(斷産, 생산을 중단함)하였으나 잉태할 수 있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알았음이라”(11:11); 두 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봅니다;

(1)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가 많아 단산(斷産, 생산을 중단함)하였으나 잉태할 수 있는 힘을 얻었으니”(11:11a);

1)    여호와께서 그녀에게 아들을 낳게 해주겠다고 예언의 말씀을 주셨을 때에 사라는 벌써 나이가 많아 경수가 끊어진 여인입니다(18:11). 하지만 경수가 많이 생산이 되던 젊은 날에도 아기를 잉태할 수 없는 불임여성이었습니다(11:30).

2)    그런데 여기서 히브리서의 저자가 불임여성임을 강조한 것이 아니라 오직 사라가 나이가 많아 단산한 것이라고 좀 다른 뉘앙스로 설명하고 있습니다(11:11a). 그의 의도는 여호와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사라가 불임여성이었든지 아니면 아기를 생산하다가 이제는 늙고 경수가 끊어지고 단산을 하고 있는 여인이든지 그것이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3)    여호와 하나님이 창조주이심을 믿고 있는 여성의 경우 하나님 보시기에 필요하다면 그녀에게 태를 열어줄 수가 있으며 불임을 치료해줄 수도 있고 늙은 몸을 회춘시켜서 임신을 할 수 있도록 얼마든지 만들어 줄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두가지입니다; ①하나는 여호와께서 창조주이심을 믿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②또 하나는 자연의 섭리를 뛰어 넘어서 하나님께서 새로운 창조를 하실 필요가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2)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알았음이라”(11:11b); 히브리서의 저자는 사라가 여호와 하나님을 신실하신 분이며 믿을 만한 분이라고 여기고 있다고 적고 있습니다. 신실하다는 의미는 약속하신 것을 반드시 이행하는 속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사라에게 약속하신 아들의 탄생이므로 어떤 방법을 사용하시더라도 그 일을 실현시키실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사라 자신의 몸을 치유하고 회복시켜서 약속의 아들을 가지도록 하실 것임을 사라가 믿고 있는 것입니다. 실제로 예언을 받은 그 다음 해에 그러한 역사가 발생하게 됩니다(18:9-15, 21:1-7).

둘째로,이러므로 죽은 자와 같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의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은 후손이 생육하였느니라”(11:12); 역시 두 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이러므로 죽은 자와 같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11:12a);

1)    어째서 아기를 낳을 수 없는 불임여성이었으며 이제는 늙고 경수마저 끊어진 여인 사라를 치유하고 회춘시켜서 약속의 아들 이삭을 태어나게 하시겠다고 여호와 하나님께서 창조주의 능력을 걸고서 약속의 말씀을 아브라함 부부에게 주신 것일까요?(17:15-19, 18:10-14) 그 이유는 사라가 믿음의 여인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여호와신앙을 믿음의 여인인 그의 아내 사라의 아들을 통해서 이 세상에 후대로 전하기를 원하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2)    그렇게 볼 수 있는 이유는 벌써 애굽의 젊은 여인 하갈을 첩으로 삼아 그녀에게서 낳은 튼튼한 서자 이스마엘이 13살의 나이가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16:1-3, 15-16).  지난 13년간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하갈의 소생 이스마엘을 믿음의 선지자인 아브라함의 후사를 이을 수 있는 신앙인이 될 수 있는지를 세밀하게 관찰하신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부정적입니다. 이스마엘은 한 마디로, 야인(野人, 들사람)입니다(17:20, 21:20-21). 장막에서 여호와의 신앙을 배우며 하나님께 예배를 하고자 하는 인물이 결코 아닙니다(25:27, 11:9). 싹수가 노랗다고 볼 수 있습니다.

3)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자연의 이치를 거슬러서 자신의 창조의 능력을 사용하더라도 믿음의 여인 사라에게서 아들을 낳게 하고 하나님의 선지자의 가문을 약속의 아들 이삭에게 승계하도록 하겠다고 결심하신 것입니다(17:17-21). 요컨대, 믿음의 가문이란 하나님께서 창조의 능력을 사용하시더라도 반드시 대를 잇게 하고 성령의 능력으로 지켜야만 하는 귀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4:23, 29-31).

(2)  하늘의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은 후손이 생육하였느니라”(11:12b);

1)    믿음을 상속하고 이 세상에 널리 전하는 하나님의 자녀의 수는 어느 정도일까요? 그 수의 무수(無數, 셀 수도 없이 많음)함에 대하여 히브리서 저자는 모세오경에서 자주 언급하고 있는 표현 곧 하늘의 별과 이 세상의 모래의 수를 가지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비유가 어떠한 과학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모두(冒頭, 머리 글)에서 상세하게 말씀을 드린 바가 있습니다.

2)    그렇다면 그렇게 많은 믿음의 용사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가 필요한 이유가 도대체 무엇일까요? 그 이유는 하나님의 복음과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그 생명을 돌보고 영생의 구원에 이르도록 인도를 해야만 하는 피조물의 수가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3)    그 점에 대한 사도 바울의 설명이 다음과 같습니다;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8:19-21). 요컨대, 온 우주에 흩어져 있는 모든 피조물의 수가 무수하게 많으므로 그 피조물을 전부 구원하기 위해서는 그 정도로 많은 하나님의 자녀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셋째로,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11:13); 두 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봅니다;

(1)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11:13a);

1)    히브리서의 저자가 여기서 이 사람들이라고 지칭하고 있는 인물들은 모두 히브리정경에 등장하고 있는 하나님 신앙인들입니다. 아브라함의 경우를 예로 들어보면, 그들의 신앙의 특징은 처음에는 약속의 땅을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구하여 그곳에서 풍요로움을 누리면서 안전하게 정착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2)    메소포타미아를 떠나서 북부 시리아를 거쳐 아브라함이 식솔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들어온 것도 지중해 연안의 비옥한 초생달 지역을 차지하여 부자로 한평생 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인도하심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자신은 일개 떠돌이이며 이주민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가는 곳마다 단을 쌓고 그렇게 해주시기를 여호와께 간구하고 있습니다(12:7-8, 13:18).

3)    그러나 평생을 통하여 약속의 땅을 당대에 주신다고 하는 하나님의 약속은 실현이 되지를 아니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의중은 무엇일까요? 여호와께서 자신과 후손들에게 주신다고 하시는 그 땅은 이 세상에 실제로 존재하는 것일까요? 의심이 끊임없이 나타날 때에 하나님께서는 하늘의 별을 쳐다보게 하시고 해변의 모래알을 세어보라고 하십니다(13:16, 15:5, 22:17). 그 저의가 무엇일까요?

4)    평생을 이방 땅에서 나그네 생활을 한 결과 마지막으로 겨우 자신의 육신을 안장할 굴 하나만을 얻은 채(23:19-20, 25:9-10) 아브라함은 깨닫게 됩니다; “구원주 그리스도를 만나 영생의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인생의 목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생활의 종착역은 이 세상이 아니고 천국입니다”(11:13 의역). 그와 같은 깨달음을 아브라함이 얻었다는 사실을 훗날 예수님께서 증언해 주십니다;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8:56), “예수께서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하시니”(8:58).

5)    그 약속의 땅은 하늘에 있는 것이며 이 땅의 모래알과 같은 믿음의 후손들이 하늘의 별이 되어 들어갈 수 있는 영생의 천국인 것을 비로소 깨닫게 된 것입니다(12:3). 그러므로 100년 안팎을 살 수 있는 육신의 거주지를 이 땅에서 구하는 것이 하나님신앙이 아닙니다. 그 유한한 인생을 바쳐서 무한한 생명의 기운이 숨쉬고 있는 여호와 하나님 앞으로 인도가 되는 것이 믿음의 목적인 것입니다.

6)    그와 같은 깨달음을 모세 역시 노년에 얻게 됩니다(11:25-26). 그는 하나님의 뜻에 의하여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운명이 되고 맙니다. 마지막 소원으로 요단 강 동편 느보 산에 올라가서 강 서편의 가나안 땅을 북에서 남으로, 그리고 동에서 서편 지중해 연안까지를 모두 내려다 보게 됩니다(34:1-4). 그러나 그곳에는 그의 영혼이 영생을 누릴 수 있는 장소가 없습니다. 오로지 자신의 영혼이 돌아가야만 하는 곳은 창조주 여호와의 품속입니다(23:46). 그리고 그곳에서 영생의 안식을 누릴 수가 있을 뿐입니다. 그 깨달음을 얻고서 그는 이 땅에서의 자신의 사명을 끝내고서 만족하게 하늘을 바라보고서 숨을 거둔 것으로 보입니다.

(2)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11:13b); 아브라함이나 모세처럼 영생의 천국이 바로 궁극적인 약속의 땅이라고 하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어떠한 믿음생활을 해야만 할까요? 한 마디로, 이 세상은 거쳐가는 곳이며 자신의 인생의 종착역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는 오로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맡기신 그 사명만을 감당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이 땅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 외국인이나 나그네처럼 사명을 감당하면서 살아갈 것입니다. 히브리서의 저자는 그러한 마치 유목민과 같은 인생’ (nomad life-style)을 믿음의 선배들이 하나같이 살아갔다고 하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11:13b).

결론적으로, 현대사회는 산업화가 극도로 진행이 되어 있고 개인소유권이 강력한 사회입니다. 자본이 있어야 개인이나 국가가 생존이 가능하고 그것이 부족하면 생존의 위협을 받고 있습니다. 현실이 그러한데 과연 유목민과 같은신앙생활을 믿음만을 가지고 살아갈 수가 있을까요? 현실만을 바라보게 되면 그 해답은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는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에게 밤하늘을 쳐다보라고 하십니다. 인류가 살고 있는 지구는 그 수많은 별들 중의 하나에 불과합니다. 자신이 처하고 있는 그 환경도 그 별 중의 하나 그것도 그 가운데 모래알과 같이 작은 장소에 국한이 된 것입니다. 그것으로 무한하시며 영생하시는 창조주 여호와의 능력과 섭리를 감히 평가한다고 하는 것이 한없이 불경스러울 따름입니다.

따라서 아브라함은 여호와를 믿기로 작심합니다. 자신의 판단과 집착을 내려놓습니다. 그리고 평생을 바쳐서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선지자로서 이방 땅에서 나그네로 살아갈 뿐입니다. 그와 같은 모범사례를 바라볼 때에 본문 히브리서의 내용도 이해가 됩니다.

그러므로 아무쪼록 믿음이 무엇인가를 다시 한번 깊이 깨달으시는 은혜가 성도 여러분에게 있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