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세기의 2호2룡(손진길 소설)

7세기의 2호2룡41(손진길 소설)

손진길 2023. 2. 24. 07:52

7세기의 2241(손진길 소설)

 

한편 백제의 동남부 국경지대 기노강성의 성주인 계백장군과 부장인 좌백은 의자왕 13년인 서기 653년에 들어서자 정초에 사비성에서부터 기쁜 소식을 듣게 된다. 그것은 좌백의 아내 사택홍련이 사비성 시집에서 건강한 남아를 출산하였다는 것이다.

사비성에서 정기적으로 기노강성으로 오는 전령이 있는데 그 자가 득남소식을 당사자인 좌백부장에게 먼저 전해준다. 계백장군의 아내인 상애영이 시동생 좌백에게 보내는 서신도 함께 주고 있다. 좌백이 서신을 읽어보니 득남을 축하한다는 글이다. 그는 그 서신을 읽자마자 성주의 집무실로 가서 친형인 계백장군을 만난다.

동생 좌백 부장의 말을 듣고서 계백장군이 크게 기뻐하면서 말한다; “좌백아, 축하한다. 이제는 아버지가 되었구나. 그래 이름을 무엇이라고 짓고 싶으냐?... “. 좌백은 얼굴에 기쁜 표정이 역력하다. 그가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대답한다; “형님, 저는 진작에 아내 홍련에게 말했어요. 아들을 낳으면 이름을 아비라고 부르자고요”;

그 말을 듣자 계백장군이 말한다; “내 아들 싸울이 금년에 22살이다. 이제 싸울은 사촌동생을 얻게 되었구나. 그것도 아비라고 하는 이름을 가지는 동생을 말이다. 그러니 그들 사촌은 함께 무장이 되면 훗날 서로 힘을 합쳐서 싸울아비가 되겠구나! 그것참 우리 무인 집안에 잘 어울리는 이름이야, 하하하… “.

그날 좌백은 형수가 자신에게 보낸 축하의 서신을 형에게 보여준다. 글을 읽어보고 계백장군이 말한다; “우리 집안의 맏며느리인 네 형수도 기쁜 모양이다. 어머니도 무척 기뻐하고 계신다고 말하고 있구나. 그런데 따지고 보면… “.

무슨 말씀을 하고자 하시는 것일까?’, 순간 좌백이 긴장하면서 귀를 기울인다. 계백의 은근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우리 집안도 엄연하게 성씨가 부여인 왕족이다. 하지만 조부님의 유언에 따라 왕의 성을 버리고 살아오고  있어! 지금 너와 나는 단지 백제의 무장이야. 좌백, 우리 자손들도 그저 무장으로 살아가도록 만들어 주자꾸나!... “;

그런데 3달이 지나 653년 봄이 되자 사비성 군부에서 인사발령이 나고 있다. 계백장군과 부장 좌백을 사비성으로 불러들이고 있다. 왕도를 지키는 인근산성의 성주와 부장으로 임명되고 있는 것이다. 장수는 누구나 군부의 인사발령에 따라서 움직이고 있다. 따라서 성주인 계백과 부장인 좌백은 후임자에게 업무를 인계하고 왕도인 사비성으로 올라간다.

수도인 사비성을 지키는 주요한 성이 북쪽의 임존성과 남쪽의 주류성이다. 참고로, 임존성은 오늘날 충남 예산에 있던 산성이고 주류성은 전북 부안에 위치하고 있는 산성인데 그 이름이 훗날 우금산성으로 바뀌고 있다. 그 이유는 서기 660년대 초반 백제부흥운동의 기지인 두 산성을 신라군과 당군이 점령하여 모두 허물어버렸기 때문이다.

계백은 주류성의 성주로, 좌백은 천부장으로 발령이 난다. 따라서 그들은 사비성 본가에서 열흘간 휴가를 보내고 곧바로 새로운 임지로 떠난다. 거리가 멀지 아니하여 부임하는데 시일이 별로 걸리지 않는다.

주류성의 지형은 특이하게도 산으로 둘러싸인 고지대 분지이다;

 그러므로 천혜의 요새지이다. 그 모습을 보고서 계백이 아우 좌백에게 기분 좋게 말한다; “이곳 주류성은 깊은 산중에 웅크리고 있는 범의 소굴이다. 이곳에 버티고 있으면 적들이 함부로 사비성을 공략할 수가 없겠구나! 여기서 출병하여 적의 후방을 치게 되면 그들은 패퇴하고 말 것이다. 하하하, 그 위치 한번 좋다, 하하하… “.

계백좌백은 주류성의 성곽을 보수하고 군사를 강병으로 만들고자 훈련에 열심이다. 그런데 성의 병력이 고작 5천명이다. 그들을 강군으로 만들어야 성을 수비하면서 2만명 정도의 적군을 물리칠 수 있을 것으로 계백형제가 판단하고 있다. 따라서 그들 형제는 5년간 주류성에서 아무 생각없이 그 일에 매진하고 있다.

그런데 그 5년 사이에 수도인 사비성에서는 국왕 부여의자의 독선과 오만이 심하다. 그 주요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첫째로, 백제의 국왕인 부여의자는 네번째 왕자 부여연이 줄기차게 진언하고 있는 20만 양병설을 번번히 거절하고 만다. 부여연 왕자는 550년에 당나라에 들어가서 염탐을 한 결과에 근거하여 백제의 국가안보를 튼튼히 하자면 20만 대군을 보유할 필요가 있다고 적극 주장하고 있다;

 지금과 같이 지방의 귀족이 사병을 거느리고 국왕은 중앙군 5만명만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는 국가안보가 위험하다는 것이다. 당제국과 군사동맹을 맺고 있는 신라가 거병하여 사비성으로 쳐들어오고 당의 수군이 백마강 하구로 들어오는 경우에는 5만명의 중앙군으로는 대처하기가 힘들다고 부여연이 설명하고 있다. 그렇다고 하여 국가 비상시에 지방의 귀족들이 자신들의 사병을 거느리고 즉시 사비성으로 달려올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국왕이 그의 주장을 묵살하면서 나름대로 다른 대책을 강구하고 있다. 

(2)  둘째로, 백제의 국왕 부여의자의 다른 대책이 바로 자신의 아들들을 조정의 좌평과 지방의 장관으로 계속 임명하는 것이다. 적자인 왕자들이 조정의 좌평으로서 국정을 장악하고 서자인 왕자들이 22개 담로인 지방의 장관이 되어 있으면 능히 중앙군과 지방군을 장악하고 전부 전장에 투입할 수가 있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안이한 판단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국왕의 정책을 보고서 중앙과 지방의 귀족들이 재빨리 제살길을 찾아 사병을 숨기고 변방으로 자신들의 세력을 이동하고 말기 때문이다. 왕자 부여연이 볼 때에는 백제의 국왕인 부친이 위험한 선택을 하고 있다. 그러나 자신은 4남에 불과하므로 국왕의 생각을 되돌릴 수 있는 힘이 없다. 큰형인 태자 부여융은 문약하다. 무장다운 기질이 조금도 없으며 병약하다. 그 점이 불안하여 국왕은 둘째 왕자인 부여태와 셋째 왕자인 부여효를 사비성에 계속 머물도록 조치하고 있다. 유사시에는 태자의 교체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상태에서 넷째 왕자인 부여연은 그저 일부 정보관리나 담당하고 있는 처지에 불과한 것이다.

(3)  셋째로, 그런데 백제국왕 부여의자가 재위 15년인 서기 655년에 들어서자 신하들에게 큰소리를 치고 있다. 그 이유는 동맹국인 고구려와 함께 신라를 공격하였는데 그 결과가 만족스럽기 때문이다. 고구려의 실력자인 대막리지 연개소문은 군사를 아끼기 위하여 말갈군을 많이 동원하고 있다. 고구려의 원정군은 동맹국인 백제의 군대와 함께 신라를 공격하여 30개의 성을 점령하고 있다;

 그것을 보고서 백제의 국왕이 신하들에게 큰소리를 치고 있는 것이다; “북방의 고구려가 우리 백제의 동맹국인 이상 동쪽의 작은 나라 신라는 감히 우리 백제를 넘볼 수가 없다. 성을 30개나 빼앗기고도 아무런 반격조차 못하고 있는 약소국 신라인 것이다, 하하하“.

(4)  넷째로, 백제국왕 부여의자는 자신의 8남이며 왜의 번왕인 부여용으로부터 정기적으로 보고를 받고 있다. 그런데 왕 10년 곧 650년에 번왕 부여용이 백제의 왜번을 둘러싸고 있는 직계왕국의 성을 전부 정복하여 영토를 크게 넓혔다고 하는 놀라운 승전보고를 하고 있다. 그 뿐만이 아니다. 북동쪽에 있는 고구려의 식민왕국과도 전쟁을 치루고 있는데 번왕부의 군대가 승승장구하고 있다는 보고이다. 그와 같이 수년간 전쟁에서의 승리의 소식이 계속 전해지자 부여의자는 흥분을 감추지 못한다. 따라서 그가 3가지 정책을 추진한다;

1) 첫째, 651년에 번왕 부여용을 아예 왜국을 전부 다스리는 왜왕으로 책봉한 것이다;

 그로 말미암아 부여의자의 5남인 야심가 부여풍은 왜에서의 발판을 전부 잃어버리게 된다.

2) 둘째, 653년에는 고구려의 식민왕국 뿐만 아니라 신라의 식민왕국까지 모두 정복하라는 것이다. 나아가서 방계왕국까지 모조리 정복하여 왜국에 백제의 천황가를 세우라는 요청이다.

3) 셋째, 655년에는 만약 본국 백제가 적군의 침략으로 위험한 경우에는 즉시 군대를 파병하라는 것이다. 그 모든 백제국왕의 지시에 대하여 효자인 8부여용이 그대로 따를 것을 충성서약하고 있다. 그로 말미암아 부여의자는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이다. 이제는 신라의 도전 따위는 하등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5)  다섯째로, 기고만장한 백제왕 부여의자가 큰 실수를 하고 있다. 그는 20만 양병을 하여 국가안보를 튼튼히 할 생각이 전혀 없다. 그 대신에 655년에는 태자의 궁을 수리하고 656년에는 연일 잔치를 벌이는데 국고를 탕진하고 있다. 그것을 보다 못하여 상좌평 성충이 진언한다; “국정을 돌보지 아니하시고 연일 연회에만 빠져 계시니 우리 백제의 앞날이 참으로 걱정입니다. 폐하, 부디 정신을 차리시고 그 옛날의 영민한 국왕의 면모를 회복하십시오. 노신이 목숨을 걸어 놓고 충심으로 드리는 진언입니다!... “. 그와 같은 진언에 부여의자가 대노한다. 그는 즉시 시위대장에게 명령한다; “역심을 품은 성충을 당장 시위대의 옥사에 감금하라. 그는 감히 나의 자리를 넘보고 있다. 나를 무능한 국왕으로 몰아 폐위시키고 왕족인 자신이 국왕이 되려고 하는 술책이다!... “;

형 성충이 감옥살이를 하는 것을 보고서 친동생 윤충도 조정에서 물러난다. 그 대신에 국왕은 자신의 동생 의직을 상좌평으로 삼고 그 이듬해 657년에는 자신의 서자들을 대대적으로 지방장관으로 임명하여 전국의 22개 담로를 모두 차지하고 만다. 그 결과 백제의 귀족들은 부여의자의 지나친 왕권강화에 염증을 느끼고 만다. 중앙과 지방의 귀족들이 국왕 부여의자에게서 완전히 등을 돌리고 말자 백제는 마치 두개의 왕국처럼 변모하고 마는 것이다;

 

그와 같은 엄청난 변화를 인근 주류성에서 지켜보고 있는 무장이 바로 계백성주이다. 그는 최근에 백제의 국왕이 그를 대장군으로 승차시키고 달솔이라는 벼슬을 하사하고 있지만 그것이 별로 반갑지가 아니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저 군부세력을 달래기 위한 임시방편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이다.

주류산성에서 단지 군사 5천명을 거느리고 있는데 대장군이면 무엇을 한다는 말인가? 실속은 없는데 그저 관직만 높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천부장인 동생 좌백에게는 국왕이 장군의 지위를 제수하고 있다.

하지만 좌백 장군이 거느리고 있는 군사의 수는 2천명에 불과하다. 정상적으로 장군이라고 하면 5천명에서 1만명의 군사를 지휘해야 한다;

 백제에서는 그것이 아닌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백장군이 아직도 한 가닥 희망을 지니고 있다. 그것이 무엇일까?

그것은 문무를 겸비한 의직이 상좌평을 맡고 있으며 성충의 뒤를 이을 만한 인재로 손꼽히고 있는 흥수가 좌평의 자리에 아직 남아 있다는 것이다;

 그들이 사비성에서 아무쪼록 국왕 부여의자의 이상한 정책을 바로잡아 주기를 계백과 그의 아우 좌백이 주류성에서 바라고 있다.

그와 같은 시절이므로 동무들로부터 좌호(左虎)로 불리고 있는 좌백은 자신의 역량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세월만이 무심하게 흘러가는 것을 안타깝게 지켜보고 있다. 과연 그들의 바램은 제대로 이루어질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