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히브리서 강해 제46강(히9:23-25)(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3. 2. 19. 04:18

히브리서 강해 제46(9:23-25)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터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7 6 10()

 

그리스도의 피가 하늘 성소의 문을 열고 있다는 사실에 대하여(9:23-25);

 

히브리서의 저자는 예루살렘성전에서 이루어지는 대제사장의 속죄의 제사와 골고다언덕 대속의 십자가에서 이루어진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제사 가운데 어느 것이 하늘의 성소에 들어가는 문을 열고 있는 것인가에 대하여 본문에서 말하고 있습니다(9:23-25).

한 마디로, 율법을 따라 대제사장이 매년 대 속죄일에 드리는 제사가 하늘 성소에서 받아 들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십자가 제사만이 받아들여진다는 것입니다(9:23). 그 이유가 도대체 무엇일까요?

이제부터 본문의 말씀을 한 구절씩 살펴보면서 그 점을 한번 규명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그 깊은 의미와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파악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그러므로 하늘에 있는 것들의 모형은 이런 것들로써 정결하게 할 필요가 있었으나, 하늘에 있는 그것들은 이런 것들보다 더 좋은 제물로 할지니라”(9:23); 히브리서의 저자는 기본적으로 두가지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①하나는 예루살렘성전과 그곳의 성소는 하늘에 있는 것들의 모형이라는 것입니다. ②또 하나는 예루살렘성전에서 드리는 제사의 제물과 하늘의 성소에서 드릴 수 있는 제사의 제물은 다르다는 것입니다. 설명을 해보고자 합니다;

(1)  첫째, 성막은 본래 하늘의 여호와께서 선민 이스라엘 백성들의 진중에 함께 거하시기 위하여 모세에게 짓도록 한 것입니다(25:8). 그 모양은 하늘에 있는 것을 모방한 것입니다(25:9). 그 지시를 하실 때에 모세에게 하늘 성소의 모습을 환상 가운데 보여주시면서 그대로 닮도록 지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지은 성막은 일종의 모방이며 하늘의 원형의 그림자입니다.

(2)  둘째, 그 성막을 지어서 이스라엘 12지파가 12개의 진을 형성하고 있는 그 중앙에 애초의 계획대로 배치하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모세가 여호와를 만나기 위하여 시내 산 정상에 40일 동안 올라가 있는 사이에(24:18) 이스라엘 백성들이 최고지도자 모세의 장기간 부재로 말미암아 불안을 이기지 못하고 그만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출애굽의 신 여호와라고 부르면서 애굽의 제사방식으로 섬기면서 축제를 벌였기 때문입니다(32:1-6). 몸은 출애굽을 하였지만 정신사조와 의식은 아직도 애굽의 종교와 문화 가운데 깊이 빠져 있는 그들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시고 하나님께서는 크게 진노하십니다(32:7-10). 따라서 백성들 가운데 성막을 배치하는 것이 아니라 외떨어진 모세의 회막 내에 설치하라고 변경하십니다(33:7-11, 40:1-2). 그 사례는 지상의 성막이란 이동하는 것이며 여호와를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내용과 달리 제멋대로 섬긴다고 하면 언제나 백성들 가운데서 떠나버릴 수가 있다는 사실을 웅변적으로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3)  셋째, 그렇게 두려우신 여호와 하나님을 모시기 위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막을 건설합니다. 나중에는 솔로몬 대왕의 시대에 아름다운 성전을 예루살렘 성안에 건설하고 그 속에 하나님의 성소를 배치합니다(왕상6:1, 38, 8:1-11, 대하3:1, 8). 그리고 그 성막의 뜰에서 번제를 드리고 백성들이 기도를 합니다. 매년 태양력으로 10 10일에는 모든 백성들의 속죄를 위하여 대제사장이 제물의 피를 가지고 지성소까지 들어가서 대 속죄일의 제사를 드리고 있습니다(16:29). 매년 반복적으로 드리고 있는 대제사장의 대 속죄일 제사로 말미암아 선민 이스라엘 자손들이 계속하여 죄인의 신세를 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4)  넷째, 그렇게 피조세계의 제사는 반복적이며 유한한 효과만을 지니고 있을 뿐입니다. 그 이유는 세가지입니다;

1)    첫째, 대제사장이란 율법에 의거하여 아론의 혈통을 따라 세습이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수명이 다하면 그 아들 가운데 한 사람을 선택하여 대제사장의 예복을 넘겨 주어야만 합니다(29:29). 그렇게 인간의 대제사장의 직분이란 영원한 것이 아니며 짧은 수명으로 말미암아 겨우 대를 이어가고 있는 것입니다(7:23). 그렇게 불안전한 피조물인 인간이 대제사장으로 드리고 있는 속죄의 제사가 영원하신 여호와를 만족시키기에는 근본적으로 미흡한 것입니다(9:23).

2)    둘째, 제물에 있어서도 가축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비록 그 피에는 죄를 사하는 능력을 부여하고 있다고는 하지만(9:22) 죄를 범한 당사자의 피가 아니고 돈을 주고 살 수 있는 가축을 속죄물로 삼고서 그 피로써 제사를 드리고 있다고 하는 것이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내년에도 가축을 사서 속죄물로 바치면 되는 것이기에 백성들이 진심으로 자신의 죄를 회개하지를 않습니다. 그 마음에 여호와의 말씀의 뜻을 정확하게 실천하겠다고 하는 결심이 서지를 않습니다. 결국 가축을 희생하여 그 피로 드리고 있는 제사는 백성들의 영혼이 아니라 단지 육신적인 깨끗함만을 일시적으로 초래할 따름입니다(9:9-10).

3)    셋째, 예루살렘성전에서 율법의 규정에 의거하여 드리고 있는 대제사장의 속죄의 제사만이 여호와 하나님의 죄 사함의 은혜를 얻을 수 있다고 선민 유대인들이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에 따라 예루살렘성전 바깥에 있는 이방인들에 대해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속죄의 효과가 미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모두 선민 이스라엘의 종이 되어 그 울타리 안으로 들어오지 아니하는 한 하나님의 죄 사함의 은혜는 얻을 수가 없다고 유대교인들이 믿고 있습니다. 그것은 창조주 하나님의 공의의 정신에 대한 정면적인 도전입니다.  

(5)  다섯째, 그러므로 율법에 따라 예루살렘성전에서 매년 드리고 있는 대 속죄일의 대제사장의 제사 곧 가축의 피를 사용하는 선민들의 반복적이고 불완전한 제사를 온전한 것으로 개혁하고 동시에 여호와 하나님께 드리는 속죄의 제사의 효과를 모든 인류에게 적용할 수 있는 새로운 제사의 방법과 죄 사함의 방법이 요구가 되고 있습니다. 그것을 여기 본문에서는 히브리서의 저자가 그러므로 하늘에 있는 것들의 모형은 이런 것들로써 정결하게 할 필요가 있었으나, 하늘에 있는 그것들은 이런 것들보다 더 좋은 제물로 할지니라”(9:23)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말의 뜻은 두가지입니다; ①첫째, 지상에 선민들이 만든 예루살렘성전에서의 제사가 불완전한 것이므로 이제는 하늘에 있는 성소에서의 제사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②둘째, 하늘의 성소에 바쳐질 수 있는 제사는 피조물이 아니라 더 좋은 하늘의 제물을 사용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로,그리스도께서는 참 것의 그림자인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지 아니하시고 바로 그 하늘에 들어가사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시고”(9:24);

(1)  히브리서의 저자는 여기서 하늘의 성소에 제사를 드릴 수 있는 더 좋은 제물이 바로 그리스도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십자가 죽음 그리고 부활과 승천의 의미를 모두 가리키고 있는 것입니다. 간략하게 설명을 하고자 합니다;

1)    첫째, 십자가 대속의 죽음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이 세상의 창조에 참여하신 독생자께서(1:1-4, 14-15) 성육신을 하시고 스스로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을 맞이하십니다(3:16, 8:31).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비록 인자가 되어서 공생애를 살아가시고 있지만 하나님 아들의 신성을 지니고 계십니다(1:14-18). 그것은 피조물 가운데 유일하게 영원한 신성을 지니고 있는 그리스도가 자신의 몸을 대속의 제물로 모든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바친 것을 의미합니다(3:13-17). 피조물이라는 제물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창조주의 영원한 속성을 지니고 있는 그리스도의 몸을 제물로 삼아 하나님께 바친 속죄의 제사이기에 그 효과는 하나님 앞에서 단숨에 영원한 속죄의 효과를 초래하고 있습니다(7:27-28). 따라서 이제부터는 대속의 십자가 희생을 바라보고서 진심으로 자신의 잘못과 허물을 깨닫고 철저하게 회개를 하는 자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하나님으로부터 죄 사함과 칭의의 은혜를 얻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영원한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를 옷 입는 것입니다.

2)    둘째, 부활과 승천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예수님을 유대교의 율법에 따라 사형에 해당하는 하나님 모독죄로 정죄하고 로마총독 빌라도를 정치적으로 압박하여 십자가 처형의 판결을 얻어낸 대제사장을 비롯한 유대교지도자들의 행위가 정당한 것일까요? 아니면 스스로 만민구원을 위한 대속의 제물이 되기 위하여 골고다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신 예수님의 희생과 헌신이 올바른 선택일까요? 그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으로 이 세상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것은 유대교지도자들이 틀렸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주장과 선택이 옳다고 하는 사실을 온 세상에 밝히고 있는 대사건입니다(27:50-56, 28:9-10, 18-20, 1:16-17). 그로 말미암아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을 위하여 자신의 몸을 대속의 제물로 희생한 예수 그리스도는 승천하여 아버지 하나님 앞으로 들어가시게 됩니다(2:30-36, 9:24).

3)    셋째, 하늘의 성소가 무엇일까요? 히브리서의 저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올라가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하늘의 제사장인 멜기세덱의 반차를 쫓아서 천상의 대제사장이 되신 것이며 하늘의 성소에 들어가신 것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6:20, 9:11-12, 24). 그렇다면 과연 하늘의 성소가 무엇일까요? 본래 지성소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곳을 의미하고 있습니다(25:22, 40:33-34). 그러므로 하늘의 성소는 당연히 여호와 하나님께서 보좌를 두고 계시는 그곳입니다. 그 바로 오른쪽에 좌정하시는 주님께서 하늘의 성소에 들어가셔서 대제사장의 직분을 행하시고 있다고 말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110:1, 8:1).

(2)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부활 승천하셔서 하늘의 성소 곧 아버지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셔서 이 땅의 성도들을 위하여 무엇을 하고 계시는 것일까요? 그것은 히브리서 저자의 설명의 맥락을 따라가보면 두가지 역할임을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①하나는 하늘의 대제사장으로 일하시는 것입니다(4:14-16). ②또 하나는 성령님을 성도들에게 보내시고 영적으로 예수님께서는 말씀으로 성도들을 인도하시는 것입니다(16:13-14, 16:6-7).

1)    첫째, 하늘의 대제사장으로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땅에서 자신을 희생하여 아버지 하나님께 드린 그 영원한 속죄의 제사의 효과를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사람들에게 적용을 시키십니다. 그 결과 성도들이 죄 사함과 칭의의 은혜를 얻어 거듭난 인생을 살아가게 됩니다.

2)    둘째, 승천하신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나님께 요청하여 성도들에게 보내어 주신 성령님께서 내주 역사하십니다. 이제는 능력을 얻은 성도들이 지상명령을 수행하게 됩니다(1:8). 그 과정에 있어서 성령님과 함께 주님께서 영적으로 역사하십니다(14:16-20). 성도들로 하여금 말씀의 본뜻을 깨닫게 하고 예수님처럼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 주시는 것입니다. 그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성도들이 끝까지 말씀의 종으로 그리고 예수님이 제자로 살아갈 수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셋째로,대제사장이 해마다 다른 것의 피로써 성소에 들어가는 것같이 자주 자기를 드리려고 아니하실지니”(9:25);

(1)  연약한 육신을 가지고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은 단번에 자신을 희생하여 영원한 속죄의 제사를 드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제사보다는 매년 대 속죄일에 율법이 정한 바에 따라 백성들을 위하여 가축의 피로써 속죄의 제사를 드려주는 유대교의 대제사장의 제사가 더 편리하다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죄성을 지니고 있는 연약한 육신 때문에 성도들이 얼마나 고통을 당하고 있는지 모르기 때문입니다(7:24).

(2)  성도들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죄를 범하고 있습니다(7:23). 다시 속죄의 제사가 필요합니다. 유대교의 방식으로 한다면 가축을 사서 속죄의 제사를 드리면 그만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백성이 되었기 때문에 이제는 그러한 편리한 방식을 의지할 수가 없습니다. 어찌하면 될까요? 그러한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던 사도 바울이 하나의 놀라운 깨달음을 얻고 있습니다. 그것을 정확하게 그의 로마서에서 기록으로 남기고 있습니다.

(3)  사도 바울의 기록을 그대로 옮겨봅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7:24-8:4). 간략하게 풀이를 해봅니다;

1)    첫째, 율법의 요구를 만족시키신 분은 내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여전히 자신이 율법의 요구를 만족시킬 수가 있다고 큰 소리를 치고 있습니다. 그것은 외식적인 바리새인의 잘못을 재현하고 있는 것입니다(18:9-14). 그것이 아닙니다. 성도들은 주님의 종입니다.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종을 대신하여 자신의 육신을 제물로 삼아 율법의 요구를 만족시키는 제사를 드렸습니다(8:4). 그러므로 주님의 종인 성도들은 겸손하게 그 은혜에 감사하며 이제부터는 예수님의 제자로 지상명령을 실천하는 인생을 살아가면 됩니다(28:18-20). 주님께서 이미 청산하신 그 문제를 다시 들추어낼 필요가 없습니다. 이미 주님께서 나를 위하여 대신 청산해버린 그 문제를 다시 수면 위에 떠오르게 하는 것은 마귀의 책동이며 시험일 따름입니다.

2)    둘째, 마귀의 책동과 비방을 이길 수 있도록 예수님의 말씀과 약속 그대로 보혜사 성령님께서 이미 강림하여 성도들의 심령 속에 그리고 속사람 속에 내주하여 역사하십니다(14:16-17, 24:49, 1:8, 2:1-4, 고전6:19-20). 그러므로 성도들은 마귀의 속삭임과 정죄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진리의 성령님께서 어떻게 깨우쳐 주시고 또한 적용을 시켜 주시는지를 주목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깨우치고 가르쳐 주시는 그 길을 따라서 하나님 자녀로서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자신의 고집과 기득권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만민구원을 위하여 주님처럼 어떻게 희생하고 헌신하면서 살아가야만 하는지를 늘 생각해야만 합니다(16:24-28).  

결론적으로, 성도들이 육신적인 생각과 삶에 집착하고 있으면 유대교적인 선민의 세속적인 삶과 비슷해지고 맙니다. 또 다시 자신의 잘못과 허물을 대신할 수 있는 속죄양을 찾아서 대제사장에게 매년 속죄의 제사를 의뢰하게 됩니다. 그것이 반복이 됩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단번에 자신을 골고다 십자가에서 대속의 제물로  희생하신 그 영적인 의미를 퇴색시키고 있는 행위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완전하고도 영원한 속죄의 제사를 이미 십자가에서 드리셨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그것을 신앙고백한 성도들에게 있어서는 이제 또 다른 속죄의 제사가 필요하지도 않으며 그것을 의지할 수도 없습니다.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남은 인생의 주인으로 모시고서 그리스도의 종이며 예수님의 제자답게 살아가는 사명만이 남아 있을 뿐입니다. 그 일을 도와주기 위하여 보혜사 성령님께서 성도들에게 임재하여 내주 역사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영적으로 주님께서도 성도들을 떠나지 아니하시고 성령님과 함께 역사하십니다. 그 사실을 알고서 말씀 가운데 복음의 빛을 발견하는 성도들은 마귀와 세상의 정죄로부터 자유함을 얻게 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사랑의 빚을 갚는 심정으로 남은 인생을 자신의 것을 희생하고 헌신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자 합니다.

그것이 연약한 육신을 이기고 하나님의 자녀로 당당하게 살아가는 성도들의 영적인 삶의 모습입니다. 아무쪼록 그러한 영적인 삶을 살아가시는 성도님들이 모두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