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히브리서 강해 제43강(히9:9-12)(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3. 2. 18. 11:03

히브리서 강해 제43(9:9-12)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터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7 6 7()

 

가축의 피로 드리는 제사의 한계에 대하여(9:9-12);

 

히브리서의 저자는 본문에 들어오기 전에 바로 앞절에서 의미심장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성령이 이로써 보이신 것은 첫 장막이 서 있을 동안에는 성소에 들어가는 길이 아직 나타나지 아니한 것이라”(9:8).

지난 번 강해에서 풀이한 내용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여 하늘의 성소에 대제사장이 되어 들어가심으로 말미암아 사실은 지상에 세워져 있는 성막과 성전의 기능이 사라졌다고 본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골고다 언덕에서 대속의 십자가를 지시고 운명을 하셨을 때에 성소의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둘로 갈라진 사건에서 이미 시사가 되고 있는 내용입니다(27:51).

그렇지만 개인적으로나 역사적으로는 그러한 변화가 늦게 찾아오고 있다고 이미 말씀을 드렸습니다. 왜냐하면, 역사적으로 예루살렘성전이 무너진 것은 주후 32년 무교절 기간에 예수님께서 유월절 어린양으로 별세하셨을 때가 아니고 그로부터 38년 후인 주후 70년이기 때문입니다. 그때 로마군대가 예루살렘과 유대 땅으로 진입하여 약 110만명의 유대인들을 살해하고 유대교의 예루살렘성전마저 불태워버린 것입니다(19:41-44).

또한 개인적으로는 성도가 자신의 믿음과 소망을 지상의 성전이 아니라 하늘의 성전으로 옮기는데 시간이 더 많이 걸리고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스스로 이제는 모세의 율법의 시대가 아니고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대이며 성도들이 이 땅의 성막이 아니라 믿음으로 하늘의 성소를 향하여 나아가는 시대라는 사실을 깨달아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그와 같이 지난 번 강해에서 살펴본 내용 이외에 본문에서는 히브리서의 저자가 또 다른 측면에서 제8절의 내용을 조명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유대교인들처럼 아직도 예루살렘성전이라고 하는 건물과 그 속에 자리를 잡고 있는 지상의 성소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는 동안에는 결코 하늘의 성소를 앙망하며 그곳을 향하여 전진하는 신앙생활이 이루어지지 아니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어떠한 일이 발생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 점에 대하여 히브리서의 저자가 본문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1)  첫째,  지상의 성막에서 드리는 제사를 가지고서는 사람의 양심까지 깨끗하게 만들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9:9). 그 이유는 유대교의 성전제사로써는 성령께서 사람들에게 임재하는 역사가 발생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십자가를 의지하여 회개의 제사를 성도가 드렸을 때에만 성령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자신의 양심을 깨끗하게 하는 변화를 체험할 수 있을 뿐입니다(2:37-47).

(2)  둘째, 유대교에서 강조하고 있는 결례나 율법에 따른 식단 등 육체의 예법이 여전히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9:10a). 내면적인 변화가 나타나지 아니하고 있기 때문에 얼마나 외면적인 예법을 행위적인 율법으로 강조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렇게 겉모양에 잔뜩 신경을 쓰고 있는 율법생활을 어떻게 사람들의 영혼과 양심을 깨끗하고 거룩하게 만들 수 있는 근본적인 변화 앞으로 끌고 올 수 있느냐 하는 것이 사실은 올바른 종교개혁의 방향입니다(9:10b).  

(3)  셋째, 피조세계를 새롭게 할 수 있는 완전한 개혁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취가 되고 있습니다(9:11-12). 그 개혁의 핵심을 두가지입니다;

1)    첫째는 보이는 피조세계의 성막이 아니라 보이지 아니하는 창조주의 성소를 하나님께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도들에게 개방한 것입니다(9:11). 부활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하늘의 성소에 들어가셔서 대제사장으로 일하고 계신다고 하는 사실을 믿고서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가는 성도들은 훗날 그곳으로 인도가 되어 영원한 제사장으로 일하게 될 것입니다.

2)    둘째는 가축의 피로써 속죄와 화목의 제사를 드리던 유대교의 성전제사의 시대가 끝나고 이제는 새로운 시대가 전개가 된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속죄의 제물 자체가 달라진 것입니다(9:12).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예루살렘성전에서 가축의 피로 아버지 하나님께 속죄의 제사를 드리신 것이 아닙니다.

3)    유대교의 대제사장이 시행하고 있는 것은 대 속죄일에 가축의 피로 드리는 속죄의 제사이므로 그 효력이 일년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는 성육신하신 자신의 몸을 만민을 위한 속죄의 제물로 드리신 것입니다. 따라서 그 사실을 믿고 회개하는 자들에게는 단번에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온전한 속죄의 은혜를 얻게 됩니다. , 죄 사함과 칭의의 은혜를 성도들이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상과 같은 사실들을 염두에 두고서 이제부터 본문의 말씀을 한 구절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그 깊은 의미와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파악해봅니다;

첫째로,이 장막은 현재까지의 비유, 이에 따라 드리는 예물이 제사를 섬기는 자를 그 양심상 온전하게 할 수 없나니, 이런 것은 먹고 마시는 것과 여러가지 씻는 것과 함께 육체의 예법일 뿐이며 개혁할 때까지 맡겨 둔 것이니라”(9:9-10); 네 부분으로 나누어서 조금 자세하게 그 의미를 살펴봅니다;

(1)  이 장막은 현재까지의 비유”(9:9a); 비유적인 의미에서 보자면, 두가지의 장막이 있습니다; ①하나는 성막을 의미하고 있습니다(25:8-9). 그것은 예루살렘성전에 들어 있습니다. ②또 하나는 사람들이 입고 있는 육체라고 하는 장막입니다(고후5:1). 그것은 때가 되면 이 땅에서 벗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고 있는 성도들은 예수님의 선례를 따라 역시 생명의 부활의 몸을 입고서 승천하게 되는 것입니다(22:28-30, 고전15:20-24, 6:4-11, 3:10-12).

(2)  이에 따라 드리는 예물이 제사를 섬기는 자를 그 양심상 온전하게 할 수 없나니”(9:9b);

1)    율법에 따라 건설이 된 지상의 성막에서는 가축의 피로써 속죄의 제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절기가 되면 선민들이 땅의 소산의 첫 열매를 십일조와 함께 여호와의 전에 바치고 있습니다. 그것이 여호와를 섬기는 레위인들의 생계비용이 되는 것입니다(18:21).

2)    그렇게 물질적인 땅의 소산을 십일조의 예물로 바치고 가축을 제물로 삼아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는 것으로 사람의 양심이 깨끗함을 받을 수가 있을까요? 히브리서의 저자는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하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어째서 그런 것일까요?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사람의 양심까지 온전하게 만들 수가 있는 것일까요?

(3)  이런 것은 먹고 마시는 것과 여러가지 씻는 것과 함께 육체의 예법일 뿐이며”(9:10a);

1)    유대교에서 율법으로 강조하고 있는 것은 그 주안점이 식단에 관한 것과 깨끗한 손으로 식사를 하라고 하는 소위 결례의 예법에 주어지고 있습니다. 그러한 육체적인 예법으로써는 사람의 속까지 깨끗하게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일찍이 예수님께서 갈파하십니다.

2)    참고로, 예수님의 지적사항을 옮겨봅니다; “이르시되, 이사야가 너희 외식하는 자에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기록하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느니라”(7:6-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도 이렇게 깨달음이 없느냐? 무엇이든지 밖에서 들어가는 것이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함을 알지 못하느냐? 이는 마음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배로 들어가 뒤로 나감이라. 이러므로 모든 음식물을 깨끗하다 하시니라. 또 이르시되,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둑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질투와 비방과 교만과 우매함이니,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7:18-23).

(4)  개혁할 때까지 맡겨 둔 것이니라”(9:10b);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이유는 유대교의 입장에서 보자면 그들의 가식적인 율법생활이라고 하는 소위 육체적인 예법을 뛰어 넘어서 본질적인 신앙의 양심과 하나님을 섬기는 마음의 자세를 올바르게 고쳐주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는 율법생활이 아니라 하나님의 눈을 의식하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만들 수가 있을까요? 그와 같은 유대교의 개혁과 개방을 위한 방법론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선민 유대인들에게 알기 쉽게 자신의 행보와 자기희생적인 결단으로 보여주십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일생입니다.  

둘째로,그리스도께서는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것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9:11);

(1)  히브리서의 저자는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셔서 하늘의 성소에 대제사장으로 들어가시게 됨으로써 이 세상에 존재하는 선민 유대인들의 성막이 그 기능을 상실하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온전하고도 영원한 하늘의 성소가 이 세상에 영적으로 나타나게 되었으므로 더 이상 이 세상의 성막이 성도들의 신앙생활을 좌지우지하지를 못하게 된 것입니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이 세상은 피조된 세계이며 이 세상에 존재하는 성막은 사람들이 지은 것으로서 하늘에 있는 영원한 하나님의 성소의 모조품에 불과하다는 사실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요컨대, 사람이 만든 성막이나 계명 그리고 종교적인 의식이 모두 불완전하며 한시적인 것이며 오로지 영생하시는 창조주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하늘의 것이 영원하며 온전한 것이라고 하는 말입니다(9:11). 그러므로 어느 것이 옳은가 라고 하는 사람들의 논쟁도 결국에는 창조주 하나님의 역사섭리에 의하여 그 가부가 결정이 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7:24-27, 5:38-39).

(2)  사실 그와 같은 히브리서 저자의 주장은 사도 바울의 가르침을 생각할 때에 그 의미가 더 생생하게 드러나게 됩니다. 바울은 유대교지도자들의 주장이 옳은지 아니면 대속의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주장이 옳은지가 아버지 하나님에 의하여 결판이 나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그의 로마서 제1장의 내용입니다; “하나님의 판정은 무덤속에서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부활시키심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선민들의 주장, 곧 율법으로 말미암아 유대인들이 의인이 되고 유일하게 구원을 얻을 수 있는 민족이 된다고 하는 선민사상의 허구성이 드러내고 만 것입니다. 그 대신에 자신의 몸을 만민구원을 위한 대속의 제물로 희생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선택이 옳으며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는 사실이 부활의 영광으로 증명이 된 것입니다”(1:16-17 의역).

셋째로,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리라”(9:12);

(1)  히브리서의 저자는 예루살렘성전에서 유대교의 율법에 따라서 제사장으로 섬기는 자들의 속죄의 제사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제사와의 차이가 무엇인지를 명쾌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한 마디로, 유대교의 제사장들은 가축의 피를 의지하여 백성들의 속죄의 제사를 여호와께 드린 것입니다. 반면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몸을 대속의 제물로 희생하신 것입니다.

(2)  유대교에서는 백성들이 스스로 자신의 속죄를 위하여 자신을 제물로 삼지를 않습니다. 불쌍한 가축을 잡아서 그것으로 대신 속죄의 제물로 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돈으로 속죄를 대신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것은 소위 유전무죄 무전유죄라고 하는 풍조를 제례의식에서도 엿보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가축만 대신 희생양으로 바치면 되는 속죄의 제사이므로 별로 양심에 가책으로 사람들에게 다가오지를 않습니다. 죄를 지은 당사자가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죄를 회개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양심을 깨끗하게 하는 속죄의 제사가 아닙니다.

(3)  그 반면에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몸을 희생하여 만민의 구원을 위하여 드린 대속의 제사는 그것이 아닙니다. 그 대속의 십자가 희생을 바라보게 되면 사람들은 마음이 아프고 양심이 찔려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죄에서 나를 구원하고자 나를 대신하여 스스로 희생을 한 것입니다. 따라서 그 사실을 깨닫게 되면 이제는 나도 예전처럼 살 수가 없습니다. 너도 나처럼 너 자신을 희생하여 남을 구원하라고 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지를 영적인 깨달음으로 듣게 되기 때문입니다. 요컨대, 나 자신의 희생이 없이는 결코 그리스도의 제자가 될 수 없으며 복음을 온 세상에 전하는 만민구원의 사역에 나설 수가 없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히브리서의 저자는 본문에서 가축의 피로써 여호와 하나님께 매년 자기와 백성들을 위한 속죄의 제사를 드린 이 땅에서의 유대교 대제사장의 제사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십자가 희생이 어떻게 근본적으로 다른 것인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가장 큰 차이는 가축의 피를 사용한 제사는 간접적인 희생이며 제한적인 효과를 가지지만 예수님이 자신의 피와 살을 희생의 제물로 사용한 제사는 직접적이며 영원한 효과를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하늘의 성소의 제사가 창조주의 것이므로 영원한 것이며 이 땅의 성막의 제사가 그 모방에 불과한 인위적인 것이라는 점과 같은 것입니다.  

그에 따라 예루살렘성전에서 매년 대 속죄일에 드려지는 율법에 따른 대제사장의 속죄의 제사는 일년짜리이며 그 효과가 백성들의 마음을 크게 움직이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희생이 아니라 가축을 대신 사용하는 희생인데 그것이 어떻게 자신의 목숨을 좌지우지하는 제사라는 심정으로 다가오겠습니까?

그렇지만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류를 대표하여 자신의 피와 살을 제물로 바친 십자가 대속은 그 의미가 다릅니다. 그것은 결코 남의 일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가 대속의 피를 흘릴 때에 모든 죄인들이 예수님과 함께 자신의 피를 흘린 것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창조주이신 아버지 하나님과 피조물인 인간과의 관계에 있어서 특이하게도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 및 모양을 물려 받고 있으므로 특별한 관계를 가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 인간이 피조물에 그치고 있는 별개가  아니라 그 영적인 생명에 있어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로 연결이 되어 있는 존재입니다(17:21-24).

그러므로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여 하늘의 성소에 대제사장으로 들어가신 이후에는 성도의 삶의 방법이 달라지게 됩니다. 더 이상 사람이 만든 성소나 성전에 연연하는 삶이 아닙니다. 가축의 피로써 속죄의 제사를 매년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한 율법의 제례의식에 의한 것들을 벗어나서 성도들이 이제는 하늘의 성소를 바라보고 자신을 희생함으로써 만민의 구원을 이루는데 헌신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저자의 그러한 설명은 사도 바울이 로마서 제12장 첫머리에서 주장하고 있는 구절을 다시 음미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12:1). 아무쪼록 자신의 인생을 드려서 아버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의 뜻을 이루는데 헌신하시는 성도님들이 모두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