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히브리서 강해 제40강(히8:7-9)(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3. 2. 17. 02:57

히브리서 강해 제40(8:7-9)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터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7 6 4(주일)

 

첫 언약의 흠결(欠缺, 흠이나 결점)이 무엇인가?(8:7-9)

 

히브리서 저자는 본문에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맺으신 첫 언약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첫 언약에 흠결이 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8:7-8). 그 이유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그 언약 안에 머물지 아니하고 있다는 것입니다(8:9). 도대체 첫 언약의 내용이 무엇이기에 그들이 그 언약 안에 머물기를 원하지 아니한 것일까요? 그리고 그 첫 언약은 어째서 그들을 언약 안에 계속 머물 수 있도록 하는 능력으로 역사하지를 못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 점에 대하여 먼저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첫째, 이스라엘 자손들이 여호와 하나님과 맺고 있는 첫 언약이란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요? 한 마디로, 첫 언약은 출애굽 당시 시내 산에서 맺은 언약을 말하고 있습니다(8:9).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과 언약을 맺습니다(19:4-6). 그 언약의 내용은 두가지입니다;

1)    하나는 세상의 여러 민족들 가운데 특별히 이스라엘 족속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는다는 것입니다(19:4-5). 그 이유는 이방 땅에서 하나님의 선지자로서의 삶을 끝까지 살아간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후손들이기 때문입니다. 요컨대, 여호와께서는 일찍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준 언약을 그들의 자손인 이스라엘 족속에게 승계를 시키고 있는 것입니다(2:24-25). 구체적으로,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믿음의 조상들과의 언약을 기억하시고 이스라엘 자손들을 출애굽시키고 또한 시내 산에서 여호와의 율법으로 운영이 되는 인류최초의 신정국가를 세우시고 있습니다(19:4-5).  

2)    또 하나는 이스라엘의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처럼 여호와 하나님과의 언약 안에 머물라는 것입니다. 그 언약의 정신은 두가지입니다; ①첫째, 아브라함처럼 고향과 친척과 아비의 집을 떠나 이방 땅에서 하나님의 선지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12:1). 아브라함은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신앙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20:7, 17-18, 21:22-33). 그리고 그들의 구원을 위하여 중보기도를 해주고 있습니다(18:23-32). 그렇게 이방 땅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로 살아가고 있기에 거룩한 백성으로 불리고 있는 것입니다(19:6b, 22:12). ②둘째, 아브라함처럼 하나님과의 영적인 교제로 복의 근원이 되고 가는 곳마다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의 구원의 큰 복을 나누어 주는 것입니다(12:2-3). 가장 큰 복은 이방인들에게 여호와께서 죄 사함의 은혜를 줄 수 있도록 그들을 위하여 속죄의 제사를 드려주는 것입니다. 선민들이 그렇게 할 때에 제사장나라가 될 수 있습니다(19:6a)

(2)  둘째, 이스라엘 자손들이 그들의 첫 언약 안에 머물지 아니하고 있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일까요? 두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①하나는 출애굽과 홍해사건의 의미를 자기중심적으로 확대해석하고 있는 것입니다. ②또 하나는 다윗제국의 환상에 사로잡혀 있는 것입니다. 조금 설명을 해보겠습니다;

1)    첫째, 출애굽 사건이란 그 절정이 유월절 사건입니다. 유월절 어린양을 잡아서 그 피를 문에 바르고 유월절 음식을 먹고 있는 집안에서는 장자와 가축의 초태생의 죽음이 건너뛰고 있습니다(12:6-14). 그들이 주로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반면에 유월절 행사를 모르고 있는 애굽사람들은 그날 밤에 줄초상이 나고 있습니다(12:29-30). 그 결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노예해방의 기쁨이 찾아오고 있습니다. 반대로 애굽인들에게는 통곡의 날이 찾아오고 있습니다.

2)    홍해사건도 마찬가지입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홍해를 가르시고 추격하는 애굽군대를 혼내시는 여호와의 기적으로 무사히 홍해를 건너게 됩니다. 그러나 애굽의 추격군은 홍해에서 몰살을 당하게 됩니다(14:26-30). 그러므로 결론은 하나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선민인 이스라엘 자손들만 구원해주시고 그들을 괴롭히는 이방인들은 모두 처벌하시고 전멸시켜 버리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선민인 이스라엘 자손들은 이방인들의 구원을 위한 중보기도나 그들의 죄를 용서해주기 위한 제사장의 역할을 전혀 수행하지를 않습니다. 오로지 그들을 처벌해주기만을 하나님께 간구할 따름입니다.

3)    둘째, 그와 같은 선민들의 편파적이고도 이기적인 사고방식이 역사적으로 절정을 이루고 있는 것이 다윗제국의 건설입니다. 사울 왕의 작은 이스라엘 왕국이 하나님의 마음에 든 다윗이 왕이 되자 급팽창을 하게 됩니다(13:22). 가는 곳마다 여호와의 도우심으로 백전백승의 전과를 올리게 되기 때문입니다(삼하8:1-14). 따라서 그 옛날 아브라함에게 준 언약의 성취가 국토의 확장으로 나타납니다(15:18). 메소포타미아와 나일 강 사이에 있는 땅을 전부 차지하고 그 사이의 나라들을 속국으로 삼아 다윗과 솔로몬  때에는 조공을 엄청나게 받게 됩니다(왕상10:11-12, 15, 21-29). 그것을 이스라엘 자손들은 시온의 영광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 의미는 선민의 제국이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건설이 될 때에 온 세상은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고 세상의 평화가 찾아온다는 것입니다.

4)    그러나 그것은 굉장히 이기적인 사고방식입니다. 그들 선민들이 세상의 중심이 되고 지배자가 될 때에 비로소 창조주의 영광이 빛난다고 하는 사고방식이기 때문입니다. 요컨대, 모든 이방인들도 선민들과 똑같은 권리를 가진 여호와 하나님의 창조물이라고 하는 이른바 하나님사랑과 이웃사랑의 생각이 전혀 없는 것입니다(19:18, 12:30-31). 그들 이방인들은 오로지 정복의 대상이며 하나님의 진노로 처벌을 받고 선민을 주인으로 섬기는 종의 신분이 된다고 하는 사고방식입니다. 그것이 이름하여 선민우월사상이며 선민만의 구원사상입니다. 그와 같은 선민사상이 훗날 메시아사상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방제국의 지배를 받으면서 선민 유대인들은 끊임없이 다윗의 후계자가 메시아로 나타나서 선민의 제국을 재건해주기를 소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메시아를 알기 쉽게 정치적인 메시아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3)  셋째, 첫 언약은 어째서 선민인 이스라엘 자손들을 그 언약 안에 머물 수 있도록 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것일까요? 두가지 이유를 생각해볼 수가 있습니다; ①하나는 그들의 마음판에 하나님의 말씀이 새겨지지 아니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②또 하나는 하나님의 법이 그들의 생각을 지배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조금 설명을 해보고자 합니다;

1)    첫째,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복음사역이 바로 성도들의 마음판에 하나님의 말씀을 새겨준 것입니다. 구약시대에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소위 마음 따로, 행동 따로라고 하는 외식적인 율법생활에 젖어 있습니다(23). 그들의 마음은 벌써 하나님을 떠났지만 제사장을 통한 속죄와 화목의 제사는 계속하고 있는 것입니다(7:6). 그리고 하나님의 눈을 의식하지 아니하고 오로지 사람들이 보고 있는 앞에서만 율법을 지키는 시늉만을 하고 있습니다. 그와 같이 생각 따로, 행동 따로라고 하는 이중적인 신앙생활이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깨어지고 있습니다.

2)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란 모름지기 이웃을 사랑하고 구원하기 위하여 자신을 희생할 줄 아는 대속의 십자가 사랑으로 나타나야만 한다는 진리를 눈으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12:30-31). 그 대속의 십자가 앞에 서게 되면 더 이상 마음 따로, 행동 따로라고 하는 가식적인 신앙생활이 설 자리가 없습니다. 그저 자신이 변명만 늘어놓고 있는 몹쓸 죄인이라고 하는 신앙고백밖에 없습니다. 이제부터는 마음판에 하나님의 말씀을 새기고 그대로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하는 간구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3)    둘째, 성령님의 임재와 내주 역사하심이 사람들의 생각을 바로 잡아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성도들의 심령 속에 임재하여 역사하지 아니하게 되면 도저히 육신의 소욕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그와 같은 사실을 사도 바울이 웅변적으로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을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7:21-8:2).

이상과 같은 사실들을 염두에 두고서 이제부터 본문의 말씀을 한 구절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그 깊은 의미와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파악해봅니다;

첫째로,첫 언약무흠(無欠, 흠이 없음)하였더라면 둘째 것을 요구할 일이 없었으려니와”(8:7);

(1)  앞에서 자세하게 설명한 그대로 첫 언약이란 출애굽 당시 시내 산에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맺은 언약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 옛날 여호와의 선지자로서 신실하게 이방 땅에서 살아갔던 그들의 조상인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신 하나님의 언약을 그 후손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승계를 시켜준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들이 아브라함처럼 살아가게 되면 온 세상 모든 족속에게 하나님의 말씀의 복과 구원의 복이 흘러 넘치게 되는 것입니다(12:3, 22:18, 19:4-6).

(2)  하지만 그들은 그렇게 하지를 않습니다. 이기적이고도 현세적인 선민들만의 축복사상에 빠져서 우상을 섬깁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마치 우상처럼 여기고서 자신들만의 복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어째서 하나님의 언약이 그들을 하나님신앙으로 돌아오게 만들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그 언약에 흠결이 있기 때문이라고 히브리서의 저자가 명쾌하게 지적을 하고 있습니다.

(3)  그 흠결이란 선민들의 권리와 의무사항만을 언약의 내용으로 제시하고 있을 뿐 그 언약을 준행할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이 구체적으로 백성들의 마음 속에 그리고 생각 속에 깃들어 있지 아니하기 때문에 비롯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첫 언약을 보완할 수 있는 새 언약이 필요합니다. 그 부족한 점을 메꾸기 위해서 하나님의 아들을 성육신시켜 구원사역을 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또 다른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어 성도들의 심령속에 내주 역사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둘째로,그들의 잘못을 지적하여 말씀하시되, 주께서 이르시되, 볼지어다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유다 집과 더불어 언약을 맺으리라”(8:8); 시내 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맺은 처음 언약의 내용에 대해서는 이미 살펴본 바와 같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히브리서의 저자가 선지자 예레미야의 선지서 제31장에 실려 있는 내용을 인용하여 더 구체적인 내용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먼저 예레미야의 글을 옮겨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맺으리라”(31:31). 조금 풀이를 해봅니다;

(1)  새로운 언약을 맺는 날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으심 및 부활과 직결이 되어 있습니다. 구약의 시대가 끝나고 신약의 시대가 그때 열리기 때문입니다. 좀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으심과 부활 그리고 승천에 이어 아버지 하나님께서 또 다른 보혜사 성령님을 제자들에게 보내어 주심으로 말미암아 새 언약의 시대 곧 교회와 성도들의 시대가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14:16-17, 1:8, 2:1-4).

(2)  예수님께서 인자로 오셔서 복음사역을 하신 때는 주후 1세기 전반기입니다. 그때에는 북조 이스라엘 왕국이 망한 지 700년이 지났으며 남조 다윗왕조의 유다 왕국이 망한지도 600년이나 되는 시점입니다. 당시에는 선민 유대인들이 망국의 백성으로 가나안 땅에서 살아가고 있는 시점입니다. 그나마도 북쪽의 사마리아 인들 곧 그 옛날 이스라엘 10지파는 거의 정체성이 사라지고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예레미야 선지자가 이스라엘 10지파와 선민 유대인들을 다 함께 새 언약의 상대방이라고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 의미가 무엇일까요?

(3)  유다 집이라고 하는 것은 아직 선민의 자존심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 다윗왕조 유다 왕국의 후손들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 맞습니다. 그렇지만 사마리아 인들은 이미 이방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집을 또다른 언약의 대상으로 삼아서 새 언약을 맺는다고 하는 선언은 첫 언약과 그 대상이 다르다고 하는 점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 ‘새 언약은 선민은 물론이고 이스라엘 집으로 표현이 되고 있는 사마리아 인을 비롯한 모든 이방인들을 언약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것입니다(31:31, 8:8, 7:4-9).

셋째로,또 주께서 이르시기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그들과 맺은 언약과 같지 아니하도다. 그들은 내 언약 안에 머물러 있지 아니하므로 내가 그들을 돌보지 아니하였노라(8:9); 벌써 앞에서 상세하게 설명을 하였으므로 약간의 반대해석만을 해보고자 합니다;

(1)  첫째, 새 언약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과 시내 산에서 맺은 첫 언약과 다릅니다. 그 이유는 첫 언약의 시대에는 그 언약 안에 머물러 있지 아니하면 여호와께서 그들을 돌보지 아니하고 버려버렸지만 이제는 그렇게 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 옛날 노아 시대의 무지개 언약처럼 일종의 안전장치를 마련하고 있다는 선언입니다(9:11-17).

(2)  둘째, 그 안전장치의 하나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보혈의 은혜입니다. 구약시대에는 율법에 따른 대제사장들이 가축의 피를 사용하여 한해 동안만 유효한 속죄의 제사를 드렸지만 이제는 그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께서 영원한 능력을 가진 자신을 제물로 삼아서 속죄의 제사를 드린 것이기에 그 효과가 단번에 영원한 것입니다(7:27-28). 그러므로 한번 성도가 되면 그를 끝까지 돌보시는 것입니다.

(3)  셋째, 성도를 영원히 돌볼 수 있는 방법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부활 승천하시면서 아버지 하나님께 부탁하여 또 다른 보혜사이신 성령님을 성도들에게 보내어 주신 것입니다(24:49, 1:8). 성령님께서는 성도의 심령 속에 그리고 속사람 속에 내주하여 역사하십니다(고전6:19-20). 영적인 삶을 살게 하며 세상을 이길 수 있도록 직접적으로 도와 주십니다(8:2). 그렇게 하나님의 영의 도움과 하나님 말씀을 직접 몸으로 보여주신 그리스도의 도움으로 말미암아 성도들이 세상을 이기며 새 언약 안에 계속 머물 수가 있는 것입니다(8:37-39).

결론적으로, 그와 같은 내용이 선지자 예레미야의 글에 진작부터 예언으로 실려 있습니다. 그것을 히브리서의 저자가 놀랍게도 재해석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예레미야 선지자의 글을 한번 음미해보는 것으로 결론을 대신하고자 합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맺으리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조상들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맺은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깨뜨렸음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다”(31:31-33).

아무쪼록 주님 및 성령님과 동행하시는 새 언약의 은혜가 성도님들에게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