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24년 설교문(손진길)

믿음성숙을 위한 하나님의 선물, 지각(知覺)(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3. 2. 14. 03:06

제목 믿음성숙을 위한 하나님의 선물, 지각(知覺)”(5:11-14, 참고구절; 요일5:20, 14:1-4, 53:1-4, 27:11, 56:11-12)

설교일; 주후 2023219일 주일

작성자; 손진길 목사(214일 화요일 작성)

 

사도 바울은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4:16). 그런데 믿음의 본을 보이고 있는 아브라함이 창세기 제18장에서 이방도시의 구원을 위하여 여호와 하나님께 간절하게 호소하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아브라함은 장조카 롯의 가족이 살고 있는 소돔을 비롯하여 고모라 등의 성읍을 구원하기 위하여 여호와의 목전에서 수차례 중보기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려 6차례나 계속된 아브라함의 간구에 따라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단지 10명의 의인만 발견하여도 그 성읍을 멸하지 아니하겠다고 약속하십니다(18:32-33);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돔과 고모라 그리고 아드마와 스보임 등 4개의 성읍에 불심판이 임하고 맙니다(19:24-25, 29:23). 그 이유는 그 10명의 의인을 각 성읍에서 발견할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훗날 조그마한 이스라엘왕국을 여호와의 도우심으로 중동의 패권국 이스라엘제국으로 만든 위대한 다윗대왕이 자신의 영적인 깨달음을 시편의 노래로 역사 가운데 남기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제14편과 제53편에서 동일한 내용을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습니다;

(1)  1.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 그들은 부패하고 그 행실이 가증하니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2.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3. 다 치우쳐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 4. 죄악을 행하는 자는 다 무지하냐? 그들이 떡 먹듯이 내 백성을 먹으면서 여호와를 부르지 아니하는도다”(14:1-4);

(2)  1.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그들은 부패하며 가증한 악을 행함이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2. 하나님이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살피사, 지각이 있는 자와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3. 각기 물러가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을 행하는 자 없으니 한사람도 없도다. 4. 죄악을 행하는 자들은 무지하냐? 그들이 떡 먹듯이 내 백성을 먹으면서 하나님을 부르지 아니하는도다”(53:1-4).

(3)  둘 다 다윗의 시편입니다. 위에 예시한 내용이 의미상 동일합니다. 그와 같이 중복된 내용을 각각 다른 시편으로 등재하고 있는 이유는 반복을 해도 좋을 정도로 그 내용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 가운데 중요한 의미를 간추려보면 대체로 다음과 같습니다;

1)    1절에서 무신론자의 특징 3가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 올바른 지식을 가지지 못한 어리석은 자입니다. 둘째, 창조주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으므로 그 행실이 가증하고 생각이 부패합니다. 셋째, 창조주 하나님을 사랑하듯이 창조주가 만든 모든 생명을 동일하게 사랑하는 아가페 사랑과 창조주의 공의의 정신이 없는 것입니다(5:43-48, 3:4, 12:30-31);

2)    2절과 3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그대로 죄를 범한 성읍을 멸망시키기 전에 의인을 찾고자 하십니다. 10명만 찾아도 그 성읍에 불심판을 내리지 아니하실 터인데 아무리 찾아보아도 의인 한사람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훗날 이스라엘 12지파의 나라가 전부 이방제국의 군대에 의하여 멸망의 역사를 맞이하고 마는 것입니다;

그 점을 다윗이 의인이라는 용어를 알기 쉽게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로 바꾸어서 말하고 있습니다(14:2).

3)    4절에서 다윗은 자신이 사용하고 있는 용어 지각’(知覺)의 뜻을 풀이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한마디로, 창조주 하나님을 찾는 인간의 지성과 영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창조주 하나님을 찾지 아니하는 인간의 지성과 영성도 있을 수가 있습니다. 그 양자의 차이가 무엇일까요? 그 점을 다윗은 창조주 하나님을 찾지 아니하는 인간의 지성과 영성은 하나님이 창조한 피조물을 단지 이용과 착취의 대상으로만 취급하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컨대, 창조주를 두려워하며 하나님을 섬기는 올바른 지성과 영성은 백성의 생명을 돌보며 살리고자 하지만 창조주를 외면하고 있는 인간의 지성과 영성은 백성을 착취하며 그 생명을 해치고 있는 것이기에 하나님의 심판을 초래하고 만다는 것입니다.

다윗대왕의 영적인 깨달음의 노래의 뜻을 잘 파악하고 있는 선지자 이사야가 훗날 그의 선지서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1)  11. 가지가 마르면 꺾이나니, 여인들이 와서 그것을 불사를 것이라. 백성이 지각이 없으므로 그들을 지으신 이가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시며, 그들을 조성하신 이가 은혜를 베풀지 아니하시리라”(27:11); 피조물인 인간이 자신을 창조한 하나님을 찾는 지성과 영성을 가지고 살아가지 아니하게 되면 어떠한 일을 당하게 될까요? 그 결과 세상의 멸망과 그 인생의 멸망이라는 창조주의 심판을 초래하게 될 따름이라고 선지자 이사야가 알기 쉽게 예언하고 있습니다. 환언하자면, 하나님을 찾는 지성과 영성은 창조주의 생기를 얻어서 그 인생이 마르지 아니하지만 그러하지 못한 지성과 영성은 생명의 근원에서 끊어져 메마른 인생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 결과 마른 가지를 여인들이 불쏘시개로 사용하듯이 그렇게 영벌(永罰, eternal punishment)에 처해지는 인생이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27:11, 25:40-46, 5:24-29).  

(2)  11. 들은 탐욕이 심하여 족한 줄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요, 그들은 몰지각한 목자들이라. 다 제 길로 돌아가며, 사람마다 자기 이익만 추구하며, 12. 오라, 내가 포도주를 가져오리라. 우리가 독주를 잔뜩 마시자. 내일도 오늘같이 크게 넘치리라 하느니라”(56:11-12); 창조주 하나님을 찾는 지성과 영성이 상실되는 인생을 살아가는 자의 특징을 선지자 이사야가 알기 쉽게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1)    첫째, 창조주 하나님을 찾는 지성과 영성을 가지지 못한 인생은 현세적인 탐욕만을 추구하게 됩니다. 영생의 하나님을 찾지 아니하고 유한한 삶 만을 한평생 잘 누리고 살면 그만이라고 하는 사상에 매몰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것은 만물의 영장이 아니라 개와 같은 짐승에 불과한 인생이라고 하겠습니다(11a).  

2)    둘째, 특히 영적인 지도자들이 그러한 세속적인 함정에 빠지기 쉽습니다(11b). 우선적으로 사탄의 공격의 대상이 되기 때문입니다.

3)    셋째, 자신과 자신이 속한 집단의 이익만을 추구합니다(11c). 만민구원의 복음실천이 전혀 없는 인생입니다.

4)    넷째, 영적인 타락과 지성적인 타락은 성령에 취한 인생이 아니라 독주에 취한 인생이 되고 맙니다(12a). 그 결과 매일같이 세상적인 연회와 잔치에 취하고자 하며 그 정도가 심해집니다. 끝내 부어라 마시라 하며 그러한 세월이 계속이 되는 줄 착각하고 살아가고 마는 것입니다(12b, 12:19-21);

마지막 사도로 불리고 있는 사도 요한이 주후 90년대에 서신서를 작성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요한일서 제5장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20. 또 아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러 우리에게 지각을 주사, 우리로 참된 자를 알게 하신 것과 또한 우리가 참된 자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니, 그는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시라”(요일5:20). 간략하게 풀이를 해봅니다;

(1)   무엇보다도 사도 요한이 창조주 하나님을 찾는 성도의 올바른 지각(知覺)은 그 자체 주님의 선물이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20a);

(2)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교훈과 생애를 말씀 가운데 묵상하면서 그 모범을 따라 한평생 주님의 제자로 신실하게 살아가는 성도들이 남은 인생 가운데 벌써 영생을 맛보고 있다는 점을 말하고 있습니다(20b). 왜냐하면, 성도들이 이미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주님의 지상명령을 실천하는 인생 가운데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에 넘치는 지성과 영성을 누리며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3:18-19, 4:13-15).

(3)  유일하신 창조주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예수 그리스도가 구원주이심을 아는 지식이 영적인 깨달음으로 성도들에게 충만합니다(17:3). 그에 따라 성도들이 훗날 부활하여 천국에서 주님과 더불어 영생을 누린다고 하는 사실을 거듭 확신하게 되는 것입니다(20b, 22:28-30).

그와 같은 특별한 용어 지각’(知覺)의 의미를 원용하여(5:14) 히브리서저자가 제5장 본문에서 지각(知覺) 영성과 지성을 사용하여 믿음생활의 성숙을 이루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 내용이 어떠한 것인지 구절풀이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다음과 같이 간단하게 참고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본문에서 히브리서의 저자는 두가지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1)  첫째,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하나님의 제사장 멜기세덱의 이야기를 자세히 해주고 싶지만 그러한 영적인 신비를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을 정도로 선민들과 성도들의 영성이 발달이 되어 있지를 않다는 것입니다. 그의 주장은 공생애 당시 예수님께서 자신을 방문한 니고데모에게 주신 다음과 같은 말씀을 상기시켜주고 있습니다; “12.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3:12).

(2)  둘째, 오래 신앙생활을 했기 때문에 성도들이 충분히 믿음의 성숙을 이룰 수가 있어야만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가 못하다는 것입니다. 마치 초보자와 같이 믿음이 성장하지 못하고 답보상태에 빠져 있습니다. 그 이유는 지성과 영성을 함께 사용하여 믿음을 연단하지 아니했기 때문입니다. 지성과 영성 사이에 끊임없는 대화와 소통이 있어야 균형이 있는 신앙생활과 믿음의 성숙이 이루어지는데 그러하지 못한 것입니다.

(3)  조금 더 설명을 해보자면, 영성은 영성대로, 그리고 지성은 지성대로 따로따로 발전을 하다가 보니까 절름발이 신앙인들이 되고 만 것입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온전한 뜻을 분별하는데 실패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참고로, 그러한 사실을 잘 이해시키기 위하여 히브리서의 저자는 젖을 먹는 어린아이와 단단한 음식을 먹고 소화할 수 있는 장성한 자의 비유를 본문에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상과 같은 사실들을 염두에 두고서 이제부터 본문의 말씀을 한 구절 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그 깊은 의미와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파악해봅니다;

첫째로,11. 멜기세덱에 관하여는 우리가 할 말이 많으나, 너희가 듣는 것이 둔하므로 설명하기 어려우니라”(5:11);

(1)  멜기세덱에 관하여 히브리서 저자는 초대교회의 영적인 지도자들이 할 말이 많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11. (멜기세덱에 관하여는) 우리가 할 말이 많으나”(5:11a)라고 적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이야기를 일반 성도들 앞에서 모두 하기가 힘들다고 또한 말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성도들의 경우 말씀을 듣는 수준이 우둔하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듣는 것이 둔하므로 설명하기 어려우니라”(5:11b). 어째서 히브리서의 저자가 그와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 이유를 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2)  사실 히브리정경에 있어서 하나님의 제사장인 멜기세덱에 관하여 기록하고 있는 부분은 아주 적습니다. 창세기 제14장에서 개선장군인 아브람 앞에 잠시 나타나고 있습니다(14:18-20). 그리고 시편 제110편에서 한번 간단하게 언급이 되고 있을 뿐입니다(110:4). 더구나 그 정체에 대하여 밝히고 있는 문장은 18. 살렘 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제사장이었더라”(14:18) 그리고 (부활 승천하신 그리스도)멜기세덱의 서열을 따라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셨도다”(110:4)에 불과합니다;

(3)  그런데 어떻게 히브리서의 저자는 자신을 포함하여 초대교회의 성도들을 가르치고 있는 선생들이 멜기세덱에 대하여 말하고 싶은 것이 많이 있다고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 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천상의 제사장인 멜기세덱과 지상의 제사장인 아론의 차이를 대조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1)    첫째, 멜기세덱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천국에서 직접 세우신 제사장입니다. 반면에 아론과 그의 아들들은 여호와께서 이 땅에서 모세를 통하여 세운 제사장들입니다(28:1).

2)    둘째, 멜기세덱은 영원한 제사장입니다. 그러나 아론은 영원한 대제사장이 아닙니다. 그가 향년을 맞이하게 되면 그의 예복을 그의 아들 가운데 한 사람이 물려 받기 때문입니다(29:29).

3)    셋째, 멜기세덱의 영원한 제사장 직분은 부활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물려 받게 됩니다. 예수님이 아론의 후손들이 계승하고 있는 대제사장의 신분을 계승한 것이 아닙니다.

(4)  그러한 차이는 근본적으로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서 주장하고 있는 믿음의 의율법의 의에 대한 차이를 되돌아보게 해주고 있습니다;

1)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되고 있는 이유는 단 한가지입니다. 그가 도저히 피조세계에서 인간의 상식과 자연의 법칙으로는 믿을 수가 없는 여호와의 창조의 능력을 믿고서 의지했다는 것입니다(15:6, 4:3).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따라 아브람이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 10년 세월을 하나님의 선지자로 생활했지만 주신다고 하는 자손의 번성은(12:2) 공수표가 되고 있습니다(15:3). 그래서 자신의 가신인 다메섹 출신 엘리에셀을 후계자로 정하고자 합니다(15:2).

2)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반대를 하십니다. 85세의 노인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만들어 주시겠다고 하십니다(15:4-5). 그 말씀을 아브라함이 다시 믿고 있습니다(15:6). 그 이유는 자신과 같은 인간들은 피조물에 불과하고 여호와께서는 이 세상을 창조하신 능력이 많으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피조물이 창조주를 믿지 아니하고 자신의 생각과 피조세계의 통념을 창조주보다 더 믿는다고 하는 것이 불신앙임을 아브람이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아브라함처럼 여호와를 믿는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고 간주가 됩니다(4:3, 5:1). 그것이 이른바 믿음의 의입니다;

3)    그런데 율법의 의는 다른 것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이 주신 율법을 모두 지키게 되면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레위기 제18장에서 이미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18:5). 그렇지만 연약한 육신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율법을 모두 하나님 보시기에 온전히 지킨다고 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3:9-10, 7:23-24). 그러므로 사람이란 하나님 앞에 서게 되면 여전히 의롭지 못한 자이며 구원을 얻지를 못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의롭게 여김을 받으며 구원을 얻을 수가 있게 되는 것일까요?

4)    하나님께서는 대속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어 주십니다(3:16-17, 3:21-24, 5:1). 그러나 선민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구원의 방법을 외면합니다. 자신들의 전통적인 유대교가 편리하게도 선민들이 의롭게 되고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다른 방법을 고안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방법이 바로 하나님 앞에서가 아니고 사람들 앞에서 종교생활을 잘 하는 것입니다. 유대교지도자들과 이웃들이 보기에 율법을 잘 지키고 있는 것으로 인정이 된다고 하면 그것으로 의인이 되고 구원을 받는다고 유대교에서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5)  그것이 왜곡된 선민들의 율법의 의이며 행위로 의로움을 받는다고 하는 사상입니다. 그런데 현실적으로는 그 방법이 신앙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더 편합니다. 사람의 중심까지 훤히 꿰뚫어보고 계시는 하나님 앞에서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는 것이 훨씬 불편하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선민 유대인들의 선택은 그리스도의 복음이 아니고 유대교의 주장인 것입니다. 그와 같이 이해를 하고서 보면, 율법으로 세움을 받은 아론과 같은 대제사장과 여호와 하나님께서 직접 세우신 제사장 멜기세덱의 차이가 무엇인지를 분별할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째서 아론의 대제사장 직분을 계승하지 아니하시고 멜기세덱의 대제사장 직무를 승계하고 있는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율법의 의믿음의 의를 대비하고 있는 것과 같은 영적인 차이를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컨대, 그러한 깊은 영적인 측면을 히브리서의 저자가 본문에서 일일이 설명을 하지 아니하겠다고 하는 말씀이라고 하겠습니다(5:11).

둘째로,12. (a) 때가 오래 되었으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되었을 터인데 (b)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에 대하여 누구에게서 가르침을 받아야 할 처지이니, (c) 단단한 음식은 못 먹고 젖이나 먹어야 할 자가 되었도다”(5:12);

(1)  히브리서의 저자는 신앙생활에 있어서 무엇이 중요한지를 간접적으로 시사해주고 있습니다. 신앙생활의 기간이 길다고 하여 믿음의 성숙이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5:12ac). 초대교회가 발생하고 수십년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그 동안 초대교회의 성도들이 사도들과 선지자들로부터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하여 많이 듣고 신앙생활을 잘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믿음이 성숙의 단계로 자라나지를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도대체 무엇일까요?

(2)  히브리서의 저자는 한 마디로, 신앙생활의 기본에 문제가 발생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에 대하여 누구에게서 가르침을 받아야 할 처지이니”(5:12b). 그렇다면 복음을 어떻게 전하고 생활화를 해야 하는 것일까요? 그 해답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공생애를 통하여 어떻게 행동하셨는가를 깊이 생각해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1)    예수님께서는 하루 종일 하나님의 말씀을 풀이하여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의 복음으로 백성들에게 선포하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을 따로 불러서 히브리정경에 들어 있는 선지자들의 예언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그 의미에 대하여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창조주의 공의의 정신을 구현하고 영생의 하나님나라를 건설하기 위하여 예수님과 제자들이 어떠한 복음사역을 해야만 하는지에 대하여 깊이 있게 설명을 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2)    그러므로 초대교회에 있어서 사도들과 선지자들이 성도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사역과 히브리정경에 담기어 있는 하나님 말씀 및 메시아 예언과의 관련성에 대한 깊은 깨달음을 전해주어야 합니다(24:44-49). 그리고 그리스도의 대속의 십자가 희생과 무덤 속 부활로 말미암아 유대교의 가르침이 어떻게 정죄가 되고 있는지에 대하여서도 정확하게 설명을 해주어야 합니다;

3)    그런데 그러한 기본적인 설명이 초대교회의 가르침에 있어서 미흡하다고 히브리서의 저자가 지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 내에서 유대주의자들이 율법적인 행위의 중요성을 다시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에 따라 성도들은 기독교적인 믿음의 반석을 굳건하게 얻지를 못하고 갈팡질팡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만 할까요? 그 해답이 다음 절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셋째로,13. 이는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아이,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14. 단단한 음식장성한 자의 것이니, 그들은 지각을 사용함으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이니라”(5:13-14); 세 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봅니다;

(1)  13. 이는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아이,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5:13); 히브리서의 저자가 믿음생활의 성숙을 어떻게 하면 얻을 수가 있는지에 대하여 본문에서 그 비결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 비결은 기본적으로 창조주 하나님의 말씀이 모든 피조물을 돌보고 함께 살리고자 하시는 공의의 정신에 입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경험할 때에 믿음의 성숙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5:13b). 반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피조세계를 전부 돌보고 살리고자 하시는 공의가 아니라 자신이나 자신이 속하고 있는 집단의 이익과 형통만을 담보하고 있는 것이라고 편파적으로 해석하고 이해하게 되면 그것은 여전히 젖을 빨고 있는 유아(乳兒, 젖먹이 아기)적인 것이며 미성숙한 신앙입니다(5:13a).

(2)  14. 단단한 음식장성한 자의 것이니, 그들은 지각을 사용함으로”(5:14a); 단단한 음식은 어린아이들이 먹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새로 난 치아가 강건하게 되면 단단한 음식을 씹고 그것을 분해하여 먹고 소화를 시킬 수가 있습니다. 건강한 어른이 단단한 음식을 먹고 소화할 수가 있기 때문에 히브리서의 저자는 14. 단단한 음식장성한 자의 것이니”(5:14aa)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단단한 음식을 부수는 강건한 치아와 그것을 소화시키는 장기(臟器, 오장육부)는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 것일까요?

1)    히브리서의 저자는 그 건강한 이빨이 바로 믿음이 성숙한 자의 지성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의미를 논리적으로 분석하고 문장의 전후와 행간의 의미를 파악해내는 능력이 바로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주신 지성입니다. 그것은 사람의 지각의 능력 가운데 첫번째의 것인 지성입니다.

2)    영이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피조물인 인간의 지성만으로써는 그 말씀의 뜻을 온전히 파악하거나 실생활에 적용할 수가 없습니다. 당연히 인간의 지성이 추구하고 있는 논리적인 이해와 현실적인 타당성을 뛰어 넘어서 더 높은 차원에서 하나님과 영적인 대화를 할 수 있는 능력이 요구가 되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영성입니다;

  

3)    지각(知覺, 지성과 각성, 지식의 차원과 영적인 깨달음의 차원을 함께 말하고 있음)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특별한 선물입니다. 사람을 지으실 때에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서 주신 것입니다(1:26-27). 그러므로 사람들은 우선적으로 피조세계를 관찰하면서 인식하고 경험한 자료들을 체계화합니다. 그리고 세대 간에 지식을 전달하고 성장시킵니다. 그 결과 학문이 탄생하고 지성이 발달하게 됩니다.

4)    시공간에 갇혀서 살고 있으며 과거의 경험을 가지고 현실을 진단하고 미래를 예측하고 있는 인간의 지성적인 노력만으로써는 시공간을 초월하고 있으며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동시에 통찰하시면서 사람들을 상대하고 계시는 창조주 하나님과의 대화가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뜻을 온전히 깨닫고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교제를 가능하게 해주고 있는 영성이 필요합니다.

5)    그 영성은 사람들이 보고 이해할 수 있도록 예수 그리스도의 교훈과 생애 가운데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진리의 성령님의 내주 역사하심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영적인 각성과 깨달음이 찾아오고 있습니다. 그러한 영성이 발휘됨으로 말미암아 지성적인 하나님 말씀의 이해가 한 차원 높게 성숙한 신앙으로 자리를 잡게 됩니다. 따라서 히브리서의 저자는 마치 사도 바울처럼 지성에서 흘러나오고 있는 성도들의 영적인 깨달음이 믿음을 성숙하게 만드는 요소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5:14ab, 3:17-19).

(3)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이니라”(5:14b);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성적이고 영적인 깨달음만 지니고 있으면 그냥 성도의 믿음이 성숙해질까요? 그것이 결코 아닙니다. 예수님처럼 공생애를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온 세상에 복음을 전파하는 성도의 삶입니다(28:18-20, 1:8). 그리고 대속의 희생과 중보기도의 노고가 있어야 합니다(19:6, 16:24). 고난 가운데 이방인들을 구원하고자 희생하고 헌신하는 그것이 연단의 과정입니다. 그렇게 예수님과 닮은 삶을 성도가 살아가게 되면 그 연단의 과정을 통하여 하나님 말씀의 의미를 깊이 있게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성령님의 역사가 영성의 충만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그 결과 눈이 밝아져서 무엇이 하나님의 생명살림의 길이며 무엇이 이기적이고 현세적인 욕심인지를 분별하게 됩니다. 그러한 사실을 알기 쉽게 히브리서의 저자가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이니라”(5:14b)고 말하고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일찍이 선지자 이사야가 지각의 중요성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11. 백성이 지각이 없으므로 그들을 지으신 이가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시며 그들을 조성하신 이가 은혜를 베풀지 아니하시리라”(27:11). 한 마디로, 창조주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고 하는 사실을 깨닫고 그 말씀을 모든 지성과 영성을 사용하여 이해하고 실천하고자 하는 노력이 없게 되면 그 나라가 망하고 백성들이 구원을 얻지 못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대목을 원용하여 히브리서의 저자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각 곧 지성적인 이해와 영적인 깨달음이 있는 성도가 믿음의 성숙을 이룰 수가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영이신 하나님의 말씀을 지성적으로만 이해하려고 하는 성도나 지성적인 노력이 없이 영적으로만 비약적으로 깨달으려고 노력하는 성도는 똑같이 미성숙한 신앙인이 되고 말 것입니다. 왜냐하면, 신앙의 발란스가 깨어진 채 절름발이 믿음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아무쪼록 하나님의 말씀과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하여 지성적인 이해의 노력을 게을리하지를 말고 동시에 영적인 차원의 깨달음도 중시하시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균형 있는 신앙인의 자세이며 믿음의 성숙을 얻을 수 있는 비결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아무쪼록 단단한 하나님의 말씀도 튼튼한 치아와 같은 지성으로 곱씹어 보시고 내주 역사하시는 성령님과의 교제로 넉넉하게 고난과 역경을 이기시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모두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