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24년 설교문(손진길)

성도와 교회가 결코 망하지 아니하는 이유(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3. 2. 20. 05:16

제목; “성도와 교회가 결코 망하지 아니하는 이유”(7:22-26)

설교일; 주후 2023226일 주일

작성자; 손진길 목사(220일 월요일 작성)

 

지난 20세기 중엽 1945년에 세계 제2차대전으로 불리고 있는 유럽전쟁과 태평양전쟁이 차례로 끝나게 되자 유럽과 아시아의 지성인들은 일종의 절망감을 맛보게 됩니다;

 그 이유가 두가지입니다; 하나는, 독일의 천재적인 국가지도자 히틀러가 조국을 번영이 아니라 결국 패망으로 이끌었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는, 핵폭탄이라고 하는 대량살상무기가 과학의 힘으로 출현하였기 때문입니다.

그 내용을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첫째, 독일사람들이 히틀러를 천재적인 국가지도자 나아가서 독일의 구세주로 믿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전쟁을 벌여서 유럽대륙을 정복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종국적으로 히틀러는 그만 조국 독일을 다시 처참한 패전국으로 만들어버리고 맙니다. 1930년대에 독일사람들은 히틀러와 그의 손발이 되고 있는 나치당의 정치적인 선전에 열광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독일이 1919년에 끝난 제1차 유럽전쟁에서 패하여 여러 승전국에게 엄청난 전쟁배상금을 물어야만 하는데 그 문제를 새로운 국가지도자 히틀러와 나치정당이 깨끗하게 해결하였기 때문입니다. 그 비결은 전쟁배상금을 물지 아니하고 그 돈을 사용하여 군사력을 키워 다시 전쟁을 벌이고 승전국이 되면 그 문제는 간단하게 해결이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역사적으로 가능한 일일까요? 도저히 상식적으로 가능하지 아니한 그 놀라운 일을 독일의 천재정치인 히틀러와 그가 만든 젊은 나치정당이 해낸 것입니다;

(2)  그러므로 1939년에 히틀러의 나치군대가 유럽대륙을 단숨에 점령하였을 때에는 독일민족이 열광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두개의 큰 변수가 동쪽과 서쪽에서 발생하여 독일의 나치군대를 격파하고 있습니다. 그 두가지는 독일의 천재 히틀러와 당시의 나치정당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동부전선에서는 히틀러의 나치군대가 소련을 침공하였지만 그 옛날 프랑스의 천재 나폴레옹의 군대와 마찬가지로 그만 러시아의 결사적인 고육지계 곧 청야전략’(淸野戰略)에 걸려서 대패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서부전선에서는 미국이 합세한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막지 못하여 그 결과 독일의 나치군대가 동서에서 밀리고 있습니다. 결국 1945년에 소련군이 먼저 독일의 중심부를 향하여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그것을 보고서 독일이 자랑하던 천재지도자 히틀러가 자살하고 독일은 다시 패전국이 되고 만 것입니다;

(3)  둘째, 20세기에 인류가 개발한 양자역학의 발전이 장차 인류의 번영에 크게 기여할 것으로 당시 지성인들이 믿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천재물리학자 알버트 아인슈타인이 1905년에 특수상대성이론을 발표하면서 E=m(c제곱)이라는 하나의 놀라운 질량과 에너지의 변환공식을 제시하였기 때문입니다.  그 내용이 다음과 같습니다; “핵분열로 파생되는 에너지의 양은 실로 굉장한 것이다. 그것은 핵분열로 소진되고 있는 질량에 빛의 속도인 상수 C곧 초당 30km를 달리고 있는 그 속도에 제곱을 곱해야 하는 엄청난 에너지이다. 그 에너지를 이용하면 인류의 에너지 부족문제는 금방 해결이 될 것이다”;

(4)  그와 같은 순진한 과학자들의 아름다운 꿈은 종전과 더불어 그만 일장춘몽으로 끝나고 맙니다. 그 이유는 1945년에 태평양전쟁을 빨리 마무리하고자 미국이 핵폭탄을 먼저 제조하여 일본 본토의 지방도시 2곳에 투하함으로써 수십만명이 순식간에 죽음을 맞이하는 절망과 공포가 도래하고 말기 때문입니다;

 과학의 발전이 인류의 번영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우선적으로 인류멸망의 도구를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실제로 1960년대 후반이 되면 미국과 소련 간의 치열한 군비경쟁으로 말미암아 인류는 지구를 여러 번 태워버릴 수 있는 엄청난 양의 핵무기를 보유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세계의 지성인들은 허무주의와 절망감에 사로잡혀서 정신적으로 방황하고 맙니다.

(5)  셋째, 지성인들이 허무주의와 절망감에 사로잡혀서 살아가고 있는 20세기 후반기에 과학지상주의를 신봉하고 있던 구미의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새로운 변신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한때 과학의 발전이 초래하고 있는 비참한 전쟁의 결과 때문에 커다란 절망감에 사로잡혀 있었지만 자신들의 실수를 만회하기 위하여 기이하게도 기독교는 유대교의 한 분파라고 하는 이론을 개발하여 소위 바울신학을 제창하고 있습니다. 그 원리는 예수님 당시 유대사회에서 율법선생 랍비들을 중심으로 일부의 바리새인들이 유대교를 개혁하고 개방하여 헬라인과 로마인들에게 헤브라이즘을 전파하자고 하는 소위 힐렐학파가 등장하여 있었는데 그 일파가 바로 나사렛 예수파라고 하는 주장입니다. 그 예로서 랍비 사울이 그리스도의 제자 바울이 된 것입니다. 그는 본래 유대교의 개혁과 개방을 반대하는 폐쇄적인 샴마이학파에 속해 있었지만 다메섹 도상의 영적인 체험을 얻은 이후 서서히 자신의 이론을 개발하여 힐렐학파가 되고 나중에 기독교로 개종하여 나사렛 예수파의 리더가 되었다고 하는 설명입니다;

(6)  그와 같은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새로운 주장에 대하여 복음주의 신학자들은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요? 그 단초가 1981년에 신학자 김세윤의 박사학위논문 바울복음의 기원에서 발견이 되고 있습니다. 그 내용이 당시의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주장을 반박한 것입니다. 김박사는 랍비 사울이 다메섹도상에서 환상 가운데 자신에게 출현하는 주님을 만났는데 그 실체는 영적으로 부활 승천하여 자신에게 재림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랍비 사울은 영적으로 자신을 찾아오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를 만났기에 기존 유대교리를 신봉하고 있던 자신의 산술적인 유일신론과 주님에 대한 부인이 모두 깨어지고 만 것입니다;

 창조주가 산술적인 하나 곧 여호와 하나님만 계시는 것이 아니고 31의 신비를 지니고 계시는 유일하신 하나님이심을 믿고서 자신의 신관이 달라진 랍비 사울은 이제 유대교를 떠나 기독교인 바울이 되고 맙니다. 그리고 그는 영적으로 부활 승천하여 자신에게 재림하시는 주님을 만났지만 아직 자신은 육신을 지니고 살아가는 동안에 주님의 지상명령을 실천해야 하는 책무가 남아 있음을 깨닫고 있습니다. 따라서 남은 인생을 이방인선교사 바울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7)  그러므로 랍비 사울이 사도 바울로 변화하는 과정에서 다음 사실을 알 수가 있습니다; 하나는, 바울이 믿고 있는 자신의 부활과 승천 그리고 주님과 함께 재림하는 사건은 현실적으로는 미래의 것입니다. 그것은 소위 not yet’입니다. 또 하나는, 그러나 영적으로 그는 다메섹도상에서 벌써 부활 승천하여 재림하시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인물입니다. 따라서 그는 영적으로 이미 영생구원의 확신을 얻은 자입니다. 그 점을 알기 쉽게 already라고 표현할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믿음이란 영적으로 이미 이루어진 자신의 영생구원을 바라보면서 현실적으로 남은 인생 가운데 주님의 제자가 되어 만민구원의 복음을 온세상에 전파하고 그리스도의 제자를 길러내는 지상명령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 점을 히브리서저자는 그의 믿음의 장인 히브리서 제11장에서 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의 증거니, 2.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11:1-2)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결론에 이르기 전에 그에 대한 귀납적인 설명을 본문 히브리서 제7장 제22절부터 26절 사이에서 잘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제 본문에 대한 구절풀이에 들어가기 전에 다시금 다음과 같은 설명을 더해드리고 싶습니다; 본문말씀에서 히브리서저자는 새로운 제사장이 된 수많은 성도들의 일생과 천상의 영원한 큰 대제사장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역할에 대하여 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의 구체적인 논리의 전개가 다음과 같습니다;

  히브리서의 저자는 본문에 앞서서 계명과 율법으로는 사람들을 구원할 수가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7:18-19a). 그 이유는 사도 바울이 그의 로마서에서 설명하고 있는 바와 동일합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주신 계명과 율법대로 한번 삶을 살아보고 싶지만 그것이 죄성을 지니고 있는 육신 때문에 불가능합니다(7:17-24). 세상적인 유혹과 탐심에 연약한 육신 때문에 하나님 보시기에 죄인이 되고 있습니다(3:20).

따라서 선민 유대인들의 선택은 하나님 보시기에 율법의 뜻대로 살아감으로써 의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눈을 속이고 이웃의 인정을 받음으로써 의인이 되고자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속마음이 아니라 보이는 행동만 보고 믿는 율법생활의 관행에 따라서 선민 유대인들은 서로가 의인이라고 우기고 있습니다.

율법선생인 랍비를 비롯한 바리새인들이 그러한 관행을 눈감아 주고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유대 땅에서 공생애를 살아가시면서 특히 유대교의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에서 당시 외식적(外飾的, 겉만 화려하게 꾸며서 보이는)인 율법생활을 용인하고 있는 바리새인들을 얼마나 야단치셨는지 모릅니다(23);

사도 바울 역시 그와 같은 가식적인 율법생활로는 도저히 의인이 될 수도 하나님의 구원을 얻을 수도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3:9). 따라서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의와 구원을 얻을 수 있는 또 다른 방법을 준비하신 것입니다(3:21-22).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제사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대속의 십자가를 믿고서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지고 있는 하나님의 죄 사함과 칭의의 은혜입니다(3:23-29).

히브리서 저자의 경우에는 사도 바울과 같은 그러한 친절한 설명이 생략이 되어 있습니다. 그 대신에 사도 바울이 사용하고 있는 용어를 일부 빌려서 사용함으로써 로마서의 내용을 참조하도록 유도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의 내용을 이해하려고 하는 성도들은 먼저 사도 바울의 로마서를 읽을 필요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와 같은 맥락에서 본문에 앞서 히브리서의 저자는 한가지 용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더 좋은 소망이라는 용어입니다(7:19). 율법을 하나님 보시기에 온전히 지켜서 하나님 가까이 갈 수가 없는 사람들의 딱한 형편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다른 방법을 마련하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의 방법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스스로 속죄의 제물이 되시고 나를 위하여 영원한 대속의 제사를 아버지 하나님께 드리셨다는 사실을 온전히 믿고서 회개하는 성도들에게는 천국으로 들어가서 영생을 누릴 수 있는 소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히브리서의 저자는 그 표현을  더 좋은 언약이라고 바꾸고 있습니다(7:22). 사실 소망이나 언약이나 모두 미래에 대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당장 현실적으로 성취가 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 대속의 은혜를 믿고서 성도로 살아가고 있지만 당장 온전한 의인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전히 연약한 육신이 성도의 영적인 삶을 방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성도들이 이 세상을 이기고 영적인 삶을 제대로 살아갈 수가 있을까요? 그 방법에 대하여 히브리서의 저자가 사실은 본문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1)  첫째,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구원주인 그리스도로 믿고 있는 성도들을 위하여 그들의 구원도 확실한 것이라는 사실을 확인해주고 있습니다. 그 방법이 바로 무덤속에서 예수님을 부활시키시고 승천을 시키신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공생애를 살아가며 대속의 삶을 살아가게 되면 성도들도 그와 같이 부활과 승천을 얻을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6:4-5, 고전15:20-21, 3:10-12).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더 좋은 언약의 보증이 되셨다”(7:22)고 하는 말의 의미입니다;

(2)  둘째,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육신이 연약하므로 온전히 제사장의 직분을 수행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더 좋은 언약을 성취할 수가 있을까요?

1)    육신의 죽음을 생각하게 되면 성도들의 제사장으로서의 삶이 불완전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7:23). 하지만 그 삶을 보호하시고 올바르게 인도하고 계시는 천상의 큰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되면 더 좋은 소망 가운데로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4:14, 7:24).

2)    영생의 주님께서 큰 대제사장으로서 성도들의 지상에서의 직분수행을 돕고 계십니다(7:25);

따라서 성도들은 지상명령을 수행하면서 제사장으로서의 삶을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육신을 벗은 다음에는 주님께로 돌아가서 함께 영생을 누릴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감격스러운 말씀의 뜻을 생각하면서 이제부터 본문말씀을 한 구절 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깊은 의미와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파악해봅니다;

첫째로,22. 이와 같이 예수더 좋은 언약의 보증이 되셨느니라”(7:22);

(1)  이미 말씀드린 그대로 대속의 십자가를 바라보고서 자신의 죄를 회개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죄 사함의 은혜와 칭의의 은혜를 얻게 됩니다. 이제는 의인으로서 영생의 천국에 들어갈 수가 있다는 소망을 가지게 됩니다(7:19). 그런데 성도의 삶이란 그러한 구원의 확신을 얻게 된 다음에 향년을 맞이할 때까지 남은 인생이 있으며 또한 실천을 해야만 하는 사명이 있습니다. 거듭난 인생 영적인 삶을 살아가면서 주님의 지상명령을 실천해야만 합니다(28:18-20, 1:8).

(2)  그렇게 예수님의 제자답게 살아가는 성도들에게는 더 좋은 언약의 보증으로서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이 다가오게 됩니다(7:22). 만민을 구원하기 위하여 3 6개월간 공생애를 사시고 대속의 죽음을 맞이하신 예수님께서 무덤속에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셨으니 그 제자로 그 뒤를 따라가는 성도들에게도 동일한 상급이 주어질 것임을 확신하는 것입니다(22:28-30). 그와 같은 구원의 확신을 성령님의 내주 역사하심으로 제사장으로 살아가고 있는 성도들이 강하게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로,23. 제사장 된 그들의 수효가 많은 것은 죽음으로 말미암아 항상 있지 못함이로되, 24. 예수는 영원히 계시므로 그 제사장 직분도 갈리지 아니하느니라”(7:23-24);

(1)  두가지로 해석이 될 수가 있습니다;

1)    하나는 유대교의 제사장의 수가 많을지라도 그들은 영원한 속죄의 제사를 드릴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7:11).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영원한 구원에 이르는 속죄의 제사를 드릴 수가 있다는 의미입니다(7:27).

2)    또 하나는 예수님의 대속의 십자가 희생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죄를 회개한 사람들이 성도가 되고 지상에서 제사장으로서의 직분을 수행하고 있습니다(벧전2:9). 그 수가 자꾸만 늘어나서 참으로 많은 제사장들이 복음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완전한 것이 아닙니다. 오직 큰 대제사장이신 주님의 도우심이 있을 때에만 온전히 제사장의 직분을 수행할 수가 있습니다(7:23-25).

(2)  본문은 전자보다는 후자의 의미가 더 강합니다. 왜냐하면, 성도들이 지상에서 온전히 제사장의 직분을 수행할 수 없는 이유가 두가지나 있지만 그것을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와 주시는 주님의 은혜가 크시기 때문입니다;

1)    첫째, 성도들은 연약한 육신 때문에 영적인 삶이 어렵습니다. 예수님처럼 자신을 희생하고 전적으로 복음전파를 위하여 헌신하여야 하겠는데 그것이 어려운 것입니다. 이기적이고 현세적인 육신의 삶이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2)    둘째, 성도들의 앞에는 결국 죽음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성도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제사장으로서의 삶도 지상에서는 끝이 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사장의 삶은 세상의 종말이 올 때까지 계속이 됩니다. 천상에서 큰 대제사장 주님이 역사하시기 때문에 성도들의 제사장 사역은 대대로 계속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셋째로,25.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심이라”(7:25);

(1)  성도가 천국에 들어가게 되면 어떠한 사역을 하게 될까요? 그냥 천국의 잔치자리에 참석을 하고서 마냥 하나님 자녀로서 영광을 누리는데 그치는 것일까요? 그것이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그 이유는 두가지입니다;

1)    의사 누가가 그의 복음서에서 주님의 말씀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28. 너희는 나의 모든 시험 중에 항상 나와 함께한 자들인즉, 29. 내 아버지께서 나라를 내게 맡기신 것같이 나도 너희에게 맡겨, 30. 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또는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12지파를 다스리게 하려 하노라”(22:28-30). 나라와 백성을 다스린다고 하는 일이 보통 힘이 들고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그것도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는 통치입니다. 그러므로 전심전력을 다하여야 합니다. 그래서 진심으로 하나님의 충성된 종으로 일하는 자를 찾고 계십니다. 그것이 소위 달란트 비유이며 므나의 비유입니다(25:14-30, 19:11-27). 따라서 천국에서 놀고 먹겠다고 하는 생각은 애초에 접는 것이 옳습니다.

2)    히브리서의 저자가 본문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25.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심이라”(7:25); 천국에서는 주님께서 큰 대제사장의 직분을 수행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역시 제사장으로서 큰 대제사장이신 주님을 보좌하는 직분을 계속 수행하게 됩니다. 주님께서 지상의 성도들이 제사장의 직분을 잘 수행할 수 있도록 도와 주시며 아버지 하나님께 중보의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일을 천국에서 성도들도 감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역시 놀고 먹는 것이 아닙니다.

(2)  중보기도의 힘이 어느 정도일까요? 그것이 매우 힘이 있기 때문에 천상에서도 주님께서 성도들이 제사장 직분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간구를 하고 있습니다.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중보의 기도는 아버지 하나님께 도우심을 구하는 것입니다(18:23-32). 그 기도를 들으시고 하나님께서는 능력으로 역사를 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을 움직이게 하는데 기여하고 있는 그 중보의 기도가 힘이 약할 리가 없는 것입니다;

넷째로, 26. 이러한 대제사장은 우리에게 합당하니, 거룩하고 악이 없고 더러움이 없고 죄인에게서 떠나 계시고 하늘보다 높이 되신 이라”(7:26);

(1)  이러한 대제사장은 부활 승천하셔서 천상에서 영원한 대제사장으로 사역을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습니다(7:26a). 영생하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주님께서 큰 대제사장으로서 지상의 성도들을 위하여 항상 살아 계셔서 아버지 하나님께 충만한 능력을 달라고 간구를 하고 계시기 때문에 성도들의 복음사역과 제사장 직분이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7:24-25).

(2)  그러한 대제사장이 성도들을 위하여 반드시 필요하다고 히브리서 저자가 강조를 하고 있습니다(7:26b). 그 이유는 벌써 서론에서 살펴본 그대로 두가지입니다;

1)    하나는 예수님께서 육신을 입고 복음사역을 하셨으나 죄악을 범하지 아니하고 창조주의 공의를 실천한 유일한 역사적인 선례가 되시기 때문입니다(7:26c). 그러므로 성도들이 예수님의 공생애의 모습만 따라가게 되면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육신을 이기고 영적인 삶을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2)    또 하나는 죄인의 죽음은 부활 후에 심판을 받아 영벌에 처해지지만 의인의 죽음은 부활하여 영생으로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부활 승천하여 하나님의 자녀로서 계속하여 제사장의 직분을 수행할 수가 있다는 그 영속성을 그리스도께서 보여주고 있다는 것입니다(7:27-28);

 결론적으로, 히브리서의 저자는 본문에서 성도 및 교회의 소망과 언약의 보증이 무엇인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성도들은 여전히 죄성(罪性, 죄의 속성)을 가진 연약한 육신을 지니고 영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이 온전히 그리스도의 제자 답게 살아가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교회가 내분에 휩싸이고 있으며 여전히 연약한 육신 때문에 이기주의와 현세적인 탐심이 성도들을 괴롭히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으로 성도들이 완전히 실족하거나 교회가 무너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 이유는 영원한 천상의 큰 대제사장이신 주님께서 성도들을 돌보시며 목숨이 다할 때까지 제사장의 직분을 수행할 수 있도록 다시 세워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와 같은 주님의 도우심을 영적으로 깨닫게 되면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이 자신에게도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거듭 확인하게 됩니다. 따라서 성도들은 영생하시는 천상의 주님을 쳐다보고서 그에게 소망을 두고서 달려갈 길을 끝까지 달려가게 되는 것입니다;

요컨대, 그와 같은 것이 성도들의 인생관이며 또한 교회관이라고 하겠습니다. 아무쪼록 성도와 교회를 다시 일으켜 세우시는 천상의 영원하신 큰 대제사장 곧 주님을 언제나 바라보시는 은혜가 저와 여러 성도님에게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