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24년 설교문(손진길)

구원이란 무엇인가? 히브리서저자의 탁월한 글(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3. 2. 7. 02:28

제목; “구원이란 무엇인가? 히브리서저자의 탁월한 글”(5:1-4)

설교일; 주후 2023212일 주일

작성자; 손진길 목사(27일 화요일 작성)

 

구원이란 용어가 사람에 따라 달리 사용이 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크게 보아 다음과 같이 두가지로 집약할 수가 있습니다;

첫째, 이 세상에서 천우신조로 어려운 곤경을 벗어나게 되는 것을 흔히 구원을 받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특히 죽음의 위기에서 벗어나게 되면 확실하게 구원을 받은 것으로 생각합니다.

둘째, 그와 같은 현세적인 구원은 한시적인 것입니다. 따라서 영생의 구원을 얻는 것을 진짜 구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주장하고 있는 구원은 전자일까요? 아니면 후자일까요? 오늘날 성도들이 읽고 있는 성경 가운데 구약에 속하고 있는 히브리정경에 있어서는 현세적인 구원의 의미가 강합니다. 그러므로 현실적으로 유대인들은 전자의 견해가 강하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그들의 메시아론이 그러합니다. 그들은 다윗의 후손 가운데 메시아가 나타나서 신위적인 능력을 발휘하여 외세를 물리치고 강력한 다윗의 제국을 재건하여 주기를 오늘날에도 학수고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와 달리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십자가 희생과 부활 승천 그리고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고 성도들을 구원하기 위한 재림의 약속 등을 참조하면 하나님의 복음을 설명하고 있는 신약의 말씀은 천국에서의 영생구원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제자들의 견해는 당연히 후자의 구원론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면 히브리정경의 현세적인 구원론을 확신하고 있는 유대인들을 어떻게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이라고 하는 가르침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만들 수가 있을까요? 그것은 초대교회시대 히브리서저자의 관심사일 뿐만 아니라 오늘날 우리 성도들의 관심사이기도 합니다;

그 이유는 오늘날의 성도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그 옛날 유대교인들처럼 현세적인 구원론과 집단 이기적인 선민만의 구원론에 다시 집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하면 그들에게 가장 쉽게 그리고 아주 정확하게 구원이란 현세적인 것보다는 천국에서의 영생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라고 가르쳐줄 수가 있는 것일까요?

그와 관련하여 익명의 히브리서저자는 오늘의 본문말씀에서 그의 탁월한 견해를 선보이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가장 알기 쉬운 정의 곧 구원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하여 그것은 한마디로, “사람의 아들이 하나님의 아들로 그 신분이 바뀌는 것이라는 명쾌한 답변입니다.

그 점을 히브리서저자는 본문에서 과연 어떠한 방법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일까요? 구절설명에 들어가기 전에 그 주요한 견해를 우선 다음과 같이 전체적으로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익명의 히브리서저자의 견해가 다음과 같습니다; “구원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지 가장 쉽게 정의를 하자면 그것은 사람의 아들을 하나님의 아들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람의 아들로 태어난 인자(人子, son of man) 예수님을 그리스도의 삶을 살아가게 하심으로써 하나님의 아들(天子, son of God)로 그 신원을 회복시켜준 사실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구원이 무엇인지를 깨닫고자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일생과 교훈을 관찰하고 묵상을 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그 구원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자 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그 발자취를 따라서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신실하게 성도의 삶을 살아가면 됩니다;

 그와 같은 사실을 알 수 있도록 히브리서의 저자가 본문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 내용의 대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첫째, 성도들은 대제사장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백성들을 위하여 속죄의 제사를 드려주는 한편(16:11-34) 그들을 구원하여 하나님께 예물로 올려드리는(66:20) 인생을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5:1);

(2)  둘째, 성도들이 대제사장의 직분을 행할 수 있는 이유는 자신도 연약하고 죄성(罪性, 죄의 속성)을 지닌 육신을 가지고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다른 사람들의 처지와 형편을 이해하고 동정하며 긍휼을 베풀 수가 있는 것입니다(5:2). 그와 같은 하나됨과 인자됨이 없이는 연약한 육신의 절규와 소원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창조주 여호와의 한 위격이신 하나님의 독생자께서 이 세상에 성육신하신 이유이기도 합니다.

(3)  셋째, 죄성을 가진 연약한 육신을 입고서 살아가고 있는 성도가 어떻게 백성들을 위하여 속죄의 제사를 드려주는 대제사장이 될 수가 있을까요? 그 방법은 먼저 자신의 속죄를 위하여 여호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림으로써 가능합니다(5:3). 아론의 경우에는 이미 모세가 출애굽기 제29장에서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는 그대로 그것이 대제사장이 되기 위한 일주일 동안의 위임의 속죄의 제사입니다(29:1, 35);

(4)  넷째, 시나이반도 시내 산 앞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주고 여호와 하나님으로 알고서 섬기라고 말했던 중죄인 아론과 같은 인물을(32:1-10) 어떻게 대제사장으로 삼을 수가 있을까요?

1)   이 세상에서는 아무도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오직 존귀하신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께서만 그렇게 하실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의 고백과 같이 죄인 중의 괴수인 나와 같은 자를(딤전1:15) 불러서 대제사장으로 만들고 만민을 구원하시는 그리스도의 제자 곧 복음의 일꾼으로 사용하시는 분이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시며 그분의 창조적인 능력입니다(5:4);

2)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께서 나의 비천한 운명을 존귀한 하나님의 자녀로 바꾸어 주십니다. 그것이 향년을 맞이하면 죽을 수밖에 없는 연약한 육체를 가진 인간 곧 유한한 인생을 살아가는 나와 같은 인간을 영생으로 구원해주시는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의 능력입니다. 그러한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여 살아가는 성도들이 바로 믿음의 의를 가진 아브라함의 자손들인 것입니다(15:6, 4:16-18, 9:30).

이상과 같은 사실들을 염두에 두고서 이제부터 본문의 말씀을 한 구절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그 깊은 의미와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파악해봅니다;

첫째로,1. 대제사장마다 사람 가운데서 택한 자이므로 하나님께 속한 일에 사람을 위하여 예물속죄하는 제사를 드리게 하나니”(5:1);

(1)  그 정체를 도저히 알 수가 없는 하나님의 대제사장인 멜기세덱을 제외하면(7:1-3, 14:18) 모든 대제사장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사람 가운데서 택하여 사용했다고 하는 히브리서 저자의 주장입니다(5:1a, 28:1, 29:29). 그의 주장의 근거는 두가지입니다; ①첫째, 아론이 최초의 대제사장이고 그의 직계 아들 가운데서 대제사장의 후계자가 선택이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28:1, 29:1, 29). ②둘째,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도 사람의 아들로 태어나서 육신을 입고서 살아가면서 이 땅에서 모든 사람의 죄를 속죄하는 대제사장의 직분을 수행하셨기 때문입니다(1:30-38, 1:29). 그렇다면, 어째서 사람만이 대제사장의 직분을 수행할 수가 있는 것일까요? 그 이점(利點, 이로운 사항)이 무엇일까요? 그 점에 대한 설명이 제1절 후반부와 제2절의 내용입니다.

(2)  육신을 입고서 함께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진심으로 다른 사람을 구원하는 일을 수행할 수가 있습니다;

 육신을 벗고 나면 그 일을 계속할 수가 없습니다. 그와 같은 이치를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31. 이르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16:31), “18.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28:18-20). 하나님과 주님께서는 성도들에게 영으로 임재하십니다(14:16-20). 그리고 그 복음 전파의 일꾼이 되고 있는 자들이 아직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그리스도의 제자들인 것입니다.

(3)  새로운 대제사장인 성도들은 두가지의 일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는 것입니다(5:1b). 그것은 창조주를 모르거나 떠나서 살고 있는 불신자들을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구원하여 하나님께 예물로 올려 드리는 일입니다(66:20). 또 하나는 사람을 구원하기 위하여 속죄의 제사를 드리는 것입니다(5:1c). 선민 이스라엘 자손들이 제사장나라 거룩한 백성이라고 스스로 자랑하면서도 역사적으로 전혀 행하지 아니한 그 일을(19:4-6, 1:1-3) 성도들이 이제는 수행해야만 합니다(12:39, 16:4). 왜냐하면, 만민구원을 위하여 대속의 제물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온 세상을 구원하라고 지상명령을 주시고 있기 때문입니다(28:18-20, 1:8). 따라서 그리스도의 제자인 성도들이 이제는 그 일을 외면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1:17-3:4, 12:39-41);

둘째로,2. 그가 무식하고 미혹된 자를 능히 용납할 수 있는 것은 자기도 연약에 휩싸여 있음이라”(5:2);

(1)  다른 사람들과 똑 같은 육신을 입고 있는 사람들이므로 대제사장이 된 성도들은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고 그 처지를 헤아릴 수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체휼’(體恤, 몸으로 체험하고 불쌍하게 여기는 것으로 체험적인 긍휼을 말하고 있는 것임)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도 만물의 영장으로 창조가 된 사람들이 어째서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제대로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고 있는지 그 이유를 깊이 있게 파악하고 이해하고자 독생자를 이 땅에 사람의 아들로 태어나게 하신 것입니다.

(2)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는 인자’(人子, son of man)로서 직접 육신을 입고서 체험을 하고자 하십니다. , 죄와 사망의 굴레 때문에 신음하고 있는 인생의 처지와 형편을 몸소 경험하신 것입니다. 그 결과 창조주를 모르고 물질적이고도 육신적인 세상에서 살고 있는 이방인들과 여호와를 버리고 현세적인 소원성취를 위하여 우상문화에 미혹이 되어 있는 선민들을 모두 불쌍하게 여기시고 그들을 전부 구원해주고자 하십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대속의 십자가 희생이며 속죄의 제사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는 심판이 있을 것입니다. 그와 같은 의미를 모두 담아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27. 인자됨으로 말미암아 심판하는 권한을 주셨느니라”(5:27);

셋째로,3. 그러므로 백성을 위하여 속죄제를 드림과 같이 또한 자신을 위하여도 드리는 것이 마땅하니라”(5:3);

(1)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사람의 아들로 태어나 육신을 입고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 보시기에 죄인의 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어서도 먼저 자신을 위한 속죄의 제사가 필요합니다. 그것이 세례 요한으로부터 물세례를 받으신 이유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3:13-15). 그러자 하나님으로부터 죄 사함과 칭의의 은혜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하는 아버지 하나님의 선포와 비둘기 같은 성령님의 임재가 요단 강가에서 예수님에게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3:16-17).

(2)  그와 같은 일은 하나님께서 이미 정하신 대제사장을 위한 위임제사의 규정을 되돌아보게 해주고 있습니다(29:1-37). 아론과 그의 아들들을 제사장으로 세우시면서 여호와께서는 모세에게 7일간 그들을 위한 속죄의 제사를 먼저 드리라고 명령하십니다(29:35). 그것이 제사장을 세우는 위임식의 절차입니다. 그 기간 중에 세가지 일을 행하고 있습니다;

1)    첫째, 아론을 대제사장으로 세우기 위하여 예복을 입히고 그 머리에 관유(灌油, the anointing oil)를 붓고 있습니다(29:5-7).

2)    둘째, 어린 수소와 숫양으로 속죄의 제사를 드리면서 제단에 바친 제물의 피와 관유를 제사장들의 옷에 뿌리게 됩니다(29:21).

3)    셋째, 7일간 바깥출입을 하지 아니하고 여호와를 섬기며 그 앞에서 먹고 마시게 됩니다(29:30, 8:34-36).

4)    요컨대, 대제사장이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선택과 성령세례, 의로운 행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인생이 되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넷째로,4. 존귀는 아무도 스스로 취하지 못하고 오직 아론과 같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라야 할 것이니라”(5:4); 성도에게 줄 수 있는 존귀함은 이 세상이 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로지 존귀하신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께서만 다음과 같이 성도들에게 주실 수가 있는 것입니다;

(1)  이 땅에서 사람이 인생 가운데 얻을 수 있는 가장 귀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존귀하신 창조주 하나님께서 나같이 비천한 죄인을 불러서 사명자로 사용하시겠다고 하는 그 거룩하신 부르심(calling out)입니다. 그 옛날 아론처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대제사장의 직분을 행하는 성도들은 참으로 존귀한 자들입니다. 그리고 그 부르심은 진실로 기쁜 일입니다;

 따라서 엘리사와 같은 경우에는 너무나 기뻐서 밭을 갈 때에 사용한 소 두 마리를 잡아서 동네잔치를 한 다음에 선지자 엘리야의 제자로 따라 나서고 있습니다(왕상19:21).

(2)  그런데 성도가 이 세상에서 대제사장의 직분을 잘 행하게 되면 더 존귀하게 되는 일이 하나님나라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로 새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게 된다는 것입니다(21:27). 이 세상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기신 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4:1-11, 16:33). 그러므로 예수님처럼 역시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 세상을 이긴 성도들에게는 하나님의 아들로 세움을 받게 되고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상속과 기업을 얻게 됩니다(8:16-18, 21:7). 그렇게 면류관의 영광을 얻게 되기에 세상을 이긴 성도들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참으로 존귀하게 되는 것입니다(22:28-30);

결론적으로,  짧은 인생입니다. 그저 100년 안팎의 인생을 살다가 모두가 이 땅을 떠나게 됩니다. 그러나 육신을 입고서 살아가는 그 짧은 인생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하여 복음의 일꾼으로 살아가게 되면 하나님나라에서 존귀하게 되는 영원한 상속과 기업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반면에 창조주를 인정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뜻을 외면하고서 제멋대로 세상의 부귀영화만을 탐하여 살아가게 되면 마치 우상을 섬긴 것과 같이 그 결국이 허망할 따름입니다(1:4, 44:9).

그러므로 인생은 선택입니다. 그 옛날 모세의 유언을 되돌아보면서 올바른 선택을 해야만 합니다; “19. 내가 오늘 하늘과 땅을 불러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20.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의 말씀을 청종하며 또 그를 의지하라. 그는 네 생명이요 네 장수이시니, 여호와께서 네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 네가 거주하리라”(30:19-20).

무엇보다도 성도들은 피조물에 불과한 이 세상이 줄 수 있는 것과 창조주께서 주실 수 있는 것의 차이가 무엇인지를 분별하면서 존귀한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시종일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제사장으로 살아감으로써 영광스럽게 천국에 입성하시는 성도님들이 되어야만 하겠습니다. 아무쪼록 이 세상을 이기시는 성도님들이 모두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