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히브리서 강해 제35강(히7:18-21)(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3. 2. 13. 23:18

히브리서 강해 제35(7:18-21)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7 530()

 

연약한 육신으로 말미암아 지킬 수 없는 율법 대신에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와 성령님을 보내어 주심으로 어떠한 새로운 제사장의 시대를 열고 계시는가?(7:18-21)

 

히브리서의 저자는 과연 누구일까요? 히브리서의 말씀을 계속 공부하고 묵상하면서 끊임없이 그러한 질문을 하게 됩니다. 본문을 들여다 보더라도 그러합니다. 18절과 제19절 말씀은 마치 사도 바울이 쓴 로마서를 읽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지만 제20절과 제21절을 음미하게 되면 그것은 히브리서 저자 자신의 독특한 깨달음과 발견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의 저자는 사도 바울이 아닌 다른 사람이며 여전히 익명이라고 하겠습니다.

어쨌든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두가지의 내용부터 먼저 살펴봅니다;

(1)  첫째, ‘7:18-19절의 내용과 관련하여 먼저 사도 바울이 그의 로마서에서 주장하고 있는 율법의 의믿음의 의에 대한 기본적인 개념을 이해하고서 제17-18절의 말씀을 묵상할 필요가 있습니다;

1)    율법을 온전히 지키는 자는 그것으로 의인이 되고 구원을 얻는다고 하는 모세오경의 가르침은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18:5). 그것이 사도 바울이 지적하고 있는 율법의 의의 내용입니다(7:12, 10:5). 하지만 문제는 연약한 육신을 가진 인간의 의지와 능력으로써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온전한 율법의 준행이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누구나 하나님 보시기에 죄인들입니다(3:9-10, 6:19). 그 사실을 사도 바울은 자신의 체험에 근거하여 실토를 하고 있습니다(7:18-23).

2)    그런데 그러한 실상을 선민 유대인들이 인정하지를 아니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다른 방법으로 스스로 의로운 선민들이라고 주장하고자 합니다. 그 방법이 눈에 보이지 아니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눈을 의식한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고서 율법생활을 영위하는 것입니다. 소위 사람들의 눈만을 의식하고 하나님을 속이고 있는 외식적인 종교생활의 모습입니다. 그러한 잘못된 외식적인 신앙생활의 모습을 보고서 예수님께서 얼마나 그들의 율법선생인 바리새인들을 질책하셨는지 모릅니다(23). 그러나 선민 유대인들은 그 잘못을 여전히 인정하지 아니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육체적인 할례와 성전의 속죄의 제사, 그리고 율법을 형식적으로 준수하고 있는 이상 창조주 하나님을 모르고서 살아가고 있는 이방인들보다는 의인들이며 우선적인 구원의 대상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3)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눈을 의식하는 신앙생활을 하라고 부르짖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며 사람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찰하고 계신다고 하는 사실을 믿음의 눈으로 인식하면서 그 말씀의 뜻을 실천하는 자들이 진정한 성도이며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성도의 삶을 원하시고 있다는 여호와 하나님의 뜻이 창세기에서부터 아브라함의 기사를 통하여 다음과 같이 드러나고 있다고 사도 바울이 주장하고 있습니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15:6), “아브람이 99세 때에 여호와께서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17:1). 아브라함이 선을 보이고 있는 믿음의 의가 옳다는 사실을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일생을 통하여 거듭 확인하고 있는 것입니다(1:16-17).

(2)  그와 같은 입장에서 히브리서의 저자는 본문에서 전에 있던 계명이 연약하고 무익하므로 폐하고, (율법은 아무 것도 온전하게 못할지라) 이에 더 좋은 소망이 생기니 이것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가느니라”(7:18-19)고 적고 있습니다. 그 자세한 풀이는 본문의 구절해석에서 하도록 하겠습니다.

(3)  둘째, 히브리서의 저자는 다윗왕의 시편인 제110편에서 놀라운 용어를 발견하고 있습니다; “여호와는 맹세하고 변하지 아니하시리라. 이르시기를 너는 멜기세덱의 서열을 따라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셨도다”(110:4). 그것이 맹세라고 하는 용어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맹세로 약속하신 것은 영원한 효력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가 지니고 계시는 대제사장의 직분은 영원한 것입니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맹세가 없이 단지 율법에 의하여 계승이 되고 있는 아론과 그 후손들의 제사장 직분은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한 사실들이 7:20-21절에서 강조가 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제자들인 성도들의 제사장 직분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그 점에 대해서는 다음 번의 강해에서 본문으로 다루게 될 것입니다.

이상과 같은 사실들을 염두에 두고서 이제부터 본문의 말씀을 한 구절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그 깊은 의미와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파악해봅니다;

첫째로,전에 있던 계명연약하고 무익하므로 폐하고, (율법은 아무 것도 온전하게 못할지라), 이에 더 좋은 소망이 생기니 이것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가느니라”(7:18-19); 두 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봅니다;

(1)  전에 있던 계명연약하고 무익하므로 폐하고, (율법은 아무 것도 온전하게 못할지라)”(7:18-19a); 역시 두 부분으로 세분하여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전에 있던 계명연약하고”(7:18a); 하나님께서 주신 계명이 연약할 리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계명을 지키고자 하는 인간의 육신이 연약하다는 의미로 해석이 됩니다. 계명이란 모세가 전해준 십계명’(20:1-17) 또는 예수님께서 강조하신 하나님사랑과 이웃사랑의 계명’(12:30-31)과 같은 것으로서 율법의 대 원칙을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선민들이 하나님께서 주신 계명과 율법대로 살아보려고 애를 쓰지만 그것이 가능하지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사람의 육신이라고 하는 것이 태생적으로 죄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세상적인 유혹과 마귀의 거짓말에 쉽게 이끌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육신은 죄에 물들기 쉬우며 탐욕에 크게 흔들리고 있기 때문에 연약한 것이라고 히브리서의 저자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7:18a).

2)    무익하므로 폐하고, (율법은 아무 것도 온전하게 못할지라)”(7:18b-19a); 율법으로는 사람들이 하나님 보시기에 의로운 인생을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율법의 말씀에 비추어 보게 되면 자신들의 죄악이 자꾸만 드러날 뿐입니다(7:13). 따라서 선민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눈을 외면하고 오로지 사람들의 눈만 의식을 하고서 율법생활을 하고자 작심을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속이고 자신들의 영혼을 속이고 있는 외식적인 신앙생활에 불과합니다. 그와 같은 율법의 준행으로써는 도저히 죄를 청산할 수가 없으며 의인이 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히브리서의 저자는 율법으로는 선민들이 온전하게 구원을 얻을 수가 없으므로(7:19a) 무익한 것으로 간주가 되어 폐지가 되고(7:18b) 다른 구원의 방법이 등장한 것이라고 말합니다(7:19b). 그것이 과연 무엇일까요?

(2)  이에 더 좋은 소망이 생기니 이것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가느니라”(7:19b); 율법이 사람들의 행위를 온전하게 만들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제사가 영원히 사람들을 온전하게 만들어 줄 수가 있을까요? 엄밀하게 말하자면 그것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늘에서 주님께서 대제사장으로 사역을 하시고 지상에서는 성도들이 그 명령을 따라서 제사장으로 살아가게 되는 과정이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소위 성화의 과정과 지상명령 수행의 과정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히브리서의 저자는 더 좋은 소망에 대하여 말하고자 합니다. 그 의미가 무엇일까요?

1)    첫째,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자신을 십자가에서 대속의 제물로 바치십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만민구원을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는 속죄의 제사를 아버지 하나님께 지내신 것입니다. 그렇게 죄인이 의인이 될 수 있는 구원의 길이 제시가 되고 있습니다.

2)    둘째, 이제 그리스도의 대속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서 진심으로 회개하는 자들은 구원의 길로 나아갈 수가 있습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성도들에게 죄 사함의 은혜와 칭의의 은혜를 주십니다. 의인으로 거듭난 성도들에게 성령님의 임재와 내주 역사하심이 있게 됩니다. 그때부터 성도들은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하며 만민을 구원하는 일에 헌신하면서 성화의 과정을 밟고 있습니다.

3)    셋째, 성도들은 남은 인생 가운데 주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감당하고서 육신을 벗고 영생의 천국에 들어가기를 소망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영생의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고자 하는 것이 성도들이 누리고 있는 더 좋은 구원의 소망이라고 히브리서의 저자가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7:19b).  

둘째로,예수께서 제사장이 되신 것은 맹세 없이 된 것이 아니니”(7:20); 히브리서의 저자는 하나님의 맹세가 없이 제사장이 된 경우와 그러하지 아니한 경우로 나누고 있습니다;

(1)  먼저 여호와께서 창조주의 이름으로 영원한 대제사장으로 삼으신다고 맹세하신 경우가 있습니다. 그 유일한 경우가 시편 제 110편에서 다음과 같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여호와는 맹세하고 변하지 아니하시리라. 이르시기를 너는 멜기세덱의 서열을 따라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셨도다”(11:4).

(2)  그와는 대조적으로 단지 여호와께서는 모세에게 지시하여 아론과 그의 아들들을 제사장으로 삼으라고 하십니다. 그 내용을 모세가 율법서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 중 네 형 아론과 그의 아들들 곧 아론과 아론의 아들들 나답과 아비후와 엘르아살과 이다말을 그와 함께 네게로 나아오게 하여 나를 섬기는 제사장 직분을 행하게 하되”(28:1).

(3)  그러므로 아론과 그 아들들의 제사장 직분은 율법과 운명을 같이하고 있습니다(7:18). 그와 달리 부활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얻은 천상의 대제사장의 직분은 영원한 것입니다. 따라서 주님의 명령으로 복음전파에 나서고 있는 성도들의 제사장 역할도 영원한 것입니다.  

셋째로, “(그들은 맹세 없이 제사장이 되었으되, 오직 예수는 자기에게 말씀하신 이로 말미암아 맹세로 되신 것이라. 주께서 맹세하시고 뉘우치지 아니하시리니 네가 영원히 제사장이라 하셨도다)”(7:21);

(1)  본문은 이미 위에서 살펴본 내용을 다시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괄호 안에 들어 있습니다. 앞절의 내용이 너무나 중요하기 때문에 그 내용을 풀이하여 한번 더 강조를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2)  괄호 안의 내용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창조주의 이름을 걸고서 주님을 영원한 제사장으로 삼으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창조주의 맹세입니다. 따라서 결코 변개(變改, 스스로 변화하거나 타의에 의하여 바뀌는 것)함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3)  그에 따라 만민을 구원하여 하나님나라에서 영생을 누리게 하고자 하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선하신 뜻은 주님의 대제사장의 역할을 통하여 반드시 달성이 되어나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는 성도들이 주님의 손발이 되어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하고 만민을 구원하는 제사장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본문에서 괄호가 두번 사용이 되고 있습니다. 그렇게 성경에서 괄호를 사용하고 있는 경우는 추가설명, 반복설명 등이 필요하거나 또는 그 의미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표시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본문의 괄호를 다시 살펴봅니다;

(1)  첫째, 19절에서는 제18절의 내용이 중요하므로 한번 더 반복하여 설명해주기 위하여 친절하게 괄호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율법은 아무 것도 온전하게 못할지라)”(7:19a). 사람들의 육신이 연약하기 때문에 율법을 온전히 준행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으로써는 구원을 얻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2)  둘째, 21절에서는 괄호 속의 내용이 워낙 중요하기 때문에 그것을 괄호를 사용하여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맹세 없이 제사장이 되었으되, 오직 예수는 자기에게 말씀하신 이로 말미암아 맹세로 되신 것이라. 주께서 맹세하시고 뉘우치지 아니하시리니 네가 영원히 제사장이라 하셨도다)”(7:21).

한번 더 풀이를 해보자면, 유대교의 제사장들은 아론의 후손들이며 율법에 의거하여 제사장의 직분을 세습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부활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창조주의 이름으로 맹세를 하시고 영원한 대제사장으로 세우십니다. 그러므로 영생하시는 대제사장 주님의 인도함을 받고 있는 성도들은 이 땅에서 제사장으로 살아가는 한 온전한 구원을 얻을 수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히브리서의 저자가 특별하게 괄호를 사용하면서 강조하고 있는 본문말씀의 의미를 한번 더 묵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아무쪼록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제사장으로 살아가시는 성도님들이 모두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