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히브리서 강해 제4강(히1:10-12)(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3. 1. 29. 05:23

히브리서 강해 제4(1:10-12)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7 4 29()

 

낡아지는 율법과 세상을 숭배하지 말고 부디 영생하시는 여호와 그리고 주님께서 창조하시는 의로운 새 세상을 바라보라는 말씀(1:10-12).

 

히브리서 저자는 제1장 제9절에서 히브리정경에 실려 있는 시편 제45편 제7절 말씀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두 군데의 용어를 달리 해석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것은 인용이 아니라 원용이라고 하겠습니다. 그 달라진 두 대목이 다음과 같습니다; ①첫째, 시편 저자가 을 지칭하고 있는 것을 히브리서 저자는 하나님의 아들 주님을 일컫고 있는 것으로 바꾸고 있습니다. ②둘째, 시편 저자가 왕은 정의(justice)를 사랑하고”(45:7)라고 말하고 있는 부분을 히브리서 저자는 주께서 (righteousness)를 사랑하시고”(1:9)라고 바꾸어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변화가 어째서 발생하고 있는 것일까요? 히브리서 저자는 그와 같은 변화를 통해서 무엇을 말하고 싶어하는 것일까요? 그 해답의 실마리는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왜 이 세상에 오셨으며 또 어째서 다시 오셔야만 하시는지 그 이유와 관련이 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의 아들이 성육신하시고 공생애를 사시면서 복음사역을 하신 이유는 히브리정경에 기록이 되어 있는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의 뜻이 선민 유대인들의 생각과 다르다는 사실을 밝혀 주기 위한 것입니다. 선민들은 자신들만 구원을 받고 세상에서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율법을 숭상하고 낡아지는 이 세상에 집착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신들의 왕에게 기름을 부으시고 능력을 주셔서 이방인들을 물리치고 선민들의 정의를 온 세상에 떨치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방인들을 쳐부수고 선민들의 영광만을 드높이는 왕이 바로 선민 유대인들이 고대하고 있는 정치적인 메시아입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저자가 주장하고 있는 의로운 메시아는 그런 분이 아닙니다. 선민 유대인들의 이기적인 정의를 만족시키고자 오시는 분이 결코 아닙니다. 이방인까지 구원하여 아버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만민구원을 이루고자 하십니다.

그리고 모든 피조물을 함께 돌보고 그 생명을 전부 살리고자 하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과 창조주의 공의의 정신을 만족시키고자 하십니다. 그것이 그리스도 예수님의 복음사역의 내용이며 대속의 십자가의 희생의 목적입니다. 그 속죄의 제사를 아버지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 곧 주의 하나님이 즐거움의 기름을 주께 부어 주를 동류들보다 뛰어나게”(1:9)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복음사역을 하시고 대속의 십자가까지 지시고 부활 승천하여 아버지 하나님의 우편으로 돌아가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다시 오신다고 하십니다. 어째서 다시 오시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그 옛날 선민 유대인들처럼 세상사람들이 여전히 이기적인 구원론과 집단 이기적인 정의만을 부르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할 수 있는 능력을 자신들의 왕에게 달라고 간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피로 사신 교회와 성도들도 민족적인 이데올르기와 현세적인 축복만을 간구하고 있습니다. 그 옛날 유대교인들이 갈구하고 있던 정치적 메시아를 지금도 원하고 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공의의 정신을 실천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이기적인 정의가 이 세상을 지배하기만을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부활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버지 하나님의 명을 받아 다시 이 세상에 심판주로서 오실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다시 오셔서 어떻게 하실 것인가요? 그 대답을 히브리서 저자는 본문에 싣고 있습니다(1:10-12). 헌 부대에 더 이상 새 포도주를 담을 수가 없기에 새로운 부대로 새 세상을 창조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뜻을 드러내기 위하여 히브리서 저자는 새로운 세상을 갈구하고 있는 시편 저자들의 글을 한 대목 인용하여 본문의 말씀을 기록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이제부터 본문의 말씀을 한 구절씩 살펴보면서 그 내용을 자세하게 알아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본문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그 깊은 의미와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파악해봅니다;

첫째로,태초께서 땅의 기초를 두셨으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 바라”(1:10);

(1)  먼저 히브리서 저자가 인용하고 있는 시편 제102편의 글을 적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주께서 옛적에 땅의 기초를 놓으셨사오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 바니이다. 천지는 없어지려니와 주는 영존하시겠고 그것들은 다 옷같이 낡으리니 의복같이 바꾸시면 바뀌려니와 주는 한결같으시고 주의 연대는 무궁하리이다. 주의 종들의 자손은 항상 안전히 거주하고 그의 후손은 주 앞에 굳게 서리이다 하였도다”(102:25-28); 전체 문장을 그대로 적어본 이유는 마지막 구절 때문입니다. 세상은 낡아지고 천지가 없어지며 새로운 세상이 창조가 될지라도 주 앞에 서는 자는 영생을 누리게 된다고 하는 구절이 마지막 대목입니다. 그 뜻이 히브리서 저자가 그의 글 본문에서 담고 있는 의미라고 하겠습니다.

(2)  히브리정경 제일 처음에 실려 있는 창세기 제1장에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태초에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1:1). 그런데 히브리서 저자는 달리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주께서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셨다”(1:10 의역). 그렇다면 어느 것이 맞는 주장일까요? 그 해답은 삼위일체(三位一體, 세개의 위격 그러나 신비스러운 하나의 본체이며 그  의사결정이 하나임)인 하나님의 신비에 속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창조주 하나님의 본체를 이루고 계시는 삼위(三位)께서 하나가 되어 태초에 이 세상을 창조하신 것이라고 말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3)  그러한 흔적이 창세기 제1장에서도 다음과 같이 발견이 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1:26). 고대어(古代語, 고대시대의 말과 글)일수록 용어의 사용에 있어서 단수와 복수의 구별이 더 확실하며 아예 한 단어 속에 그 개념을 분명하게 담고 있습니다. 따라서 복수의 위격으로 여호와 하나님이 묘사가 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둘째로,그것들은 멸망할 것이나 오직 주는 영존할 것이요, 그것들은 다 과 같이 낡아지리니”(1:11);

(1)  시편 말씀을 인용하면서 히브리서 저자는 독자들에게 여기서 멸망의 대상과 낡아지는 대상이 따로 있다는 사실을 깊이 생각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멸망의 대상이 되는 것일까요? 그것은 하나님께 죄를 범하고 회개하지 아니하고 있는 자들이며 그들이 살고 있는 터전입니다. 선민 뿐만 아니라 이방인들이 모두 하나님 보시기에 죄인들이므로(3:9-10) 진노의 자식들이 살고 있는 이 세상은(2:2-3) 전부 멸망의 대상입니다.

(2)  그리고 대속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자신의 죄를 회개한 성도라고 하더라도 육신적인 죽음을 향년이 되면 맞이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태에서 태어난 인간이 한번 죽는 것은 정해진 이치입니다. 그렇지만 그것을 여기서는 낡아진 옷과 같다고 비유하고 있습니다(1:11). 그렇다면 새로운 영생의 몸으로 갈아 입게 된다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그러한 부활과 영생의 구원이 있음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몸소 역사 가운데 자신의 대속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을 통하여 제자들에게 보여주십니다.

(3)  오늘날에도 성령님의 역사 가운데 성도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서 온 세상에 영생구원의 복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종말심판으로 천지가 없어지고 새로운 세상이 창조가 되지만 영생의 몸으로 부활한 성도들은 유일하게 예외적인 존재가 됩니다. 마치 주님처럼 영존하는 세상에서 살게 될 것입니다. 그와 같은 예언을 히브리서 저자가 이제부터 알기 쉽게 말하기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셋째로,의복처럼 갈아 입을 것이요, 그것들은 옷과 같이 변할 것이나 주는 여전하여 연대가 다함이 없으리라 하였으나”(1:12);

(1)  대속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자신의 죄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께서 속죄의 어린양이 되신 사실을 깨닫고 진심으로 회개하는 자는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죄 사함과 칭의의 은혜를 얻게 됩니다. 그렇게 영적으로 거듭난 성도들은 더 이상 육체의 소욕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내주하신 성령님의 능력으로 주님의 지상명령을 수행하는 신실한 복음의 전파자로 남은 인생을 살아가게 됩니다(18:18-20, 24:44-49, 1:8).

(2)  그 결과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향년을 맞이하게 되면 역시 무덤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 다음에는 스승이시며 주인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밟으신 그 순서대로 아버지 하나님께서 보내신 부활의 영에 의하여 부활과 승천 그리고 천국에서의 영생의 삶이 진행이 될 것입니다(8:11, 고전15:21-24). 사도 바울의 설명과 같이 성도들이 영생의 부활의 몸을 입고서 무덤속에서 나와서 승천을 하게 됩니다(1:23, 3:10-12). 재림하시는 주님을 만나서 기쁨을 함께 하게 됩니다(살전4:16-17).

(3)  이 세상은 멸망의 심판 가운데 들어가며 새로운 천지와 하나님나라가 건설이 됩니다(65:17-18, 21:1-2). 그 영생의 나라에서 성도들은 주님과 함께 아버지 하나님의 공의를 실천하는 자녀로 영원히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22:28-30, 8:15-17). 그렇게 성도들에게는 하나님 아들이 되는 영광된 미래가 기다리고 있다고 히브리서 저자가 말하고 있는 대목입니다. 그리고 다음 절에서는 그러한 하나님 아들의 영광을 누리지 못하는 천사들에 대하여 적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결론적으로, 히브리서 저자가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내용은 사도 바울이 그의 로마서 제8장에서 말하고 있는 다음 내용과 상당히 흡사합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8:29-30).

이 세상은 멸망을 당하고 성도들의 육신은 낡아질지라도 영원히 낡아지지 아니하는 영생의 부활의 몸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사도 바울은 성도들의 영화의 단계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점을 히브리서 저자는 의복처럼 갈아 입을 것이요, 그것들은 옷과 같이 변할 것이나 주는 여전하여 연대가 다함이 없으리라 하였으나”(1:12)라고 시편 말씀을 인용하여 말함으로써 성도들의 부활과 주님 안에서의 영생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영생의 하나님나라가 이 땅에 잠시 임하는 광경을 예수님의 공생애 당시 제자들이 환상 가운데 변화산에서 다음과 같이 보고서 증거하고 있습니다; “또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는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하시니라.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그 옷이 광채가 나며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매우 희어졌더라. 이에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그들에게 나타나 예수와 더불어 말하거늘”(9:1-4).

그러므로 아무쪼록 변화산상의 환상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를 본문과 더불어 깊이 음미하시면서 많은 깨달음과 소망을 얻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