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24년 설교문(손진길)

산중의 돌멩이가 부활의 보석이 될 수 있는 두가지 이유(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3. 1. 10. 06:11

제목; “산중의 돌멩이가 부활의 보석이 될 수 있는 두가지 이유”(벧전2:4-5)

설교일; 주후 2023115일 주일

작성자; 손진길 목사(110일 화요일 작성)

 

주전 1,446년에 인구 2백만명이 넘는 이스라엘 자손들은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출애굽하여 40년 동안 광야생활을 하게 됩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시나이반도 남단 시내광야에 자리잡고 있는 바위산에 친히 강림하십니다. 그 모습이 얼마나 두렵고 웅장한 것인지를 모세가 출애굽기 제19장에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광경을 보고서 두려움 가운데 떨고 있는 백성들은 장로들을 통하여 최고지도자 모세에게 간청합니다. 무엇인가 여호와의 뜻에 어긋나게 되면 자신들은 목숨을 잃어버릴 위험성이 다분하므로 부디 모세만이 산정상에 올라가서 여호와의 말씀을 듣고 하산하여 자신들에게 전해달라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그들은 그 말씀을 공동체의 법으로 삼아 자발적으로 준행하는 신앙생활을 영위할 것이라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모세가 백성들의 뜻을 여호와께 전달하고 허락을 얻어 그때부터 홀로 산정상에 올라가게 됩니다. 그는 그곳에서 여호와의 말씀을 백성들이 쉽게 준행할 수 있는 율법의 형식으로 배우고 익히게 됩니다.

모세가 여호와의 부름을 받아 바위산 정상으로 올라가 있는 동안 이스라엘 자손들은 그가 하산하여 자신들에게 여호와의 말씀을 전해줄 때까지 하염없이 시내산 정상의 바위만을 쳐다보는 생활을 영위하게 됩니다. 당시 그들이 천막생활을 하고 있는 시내광야에는 세가지가 풍성합니다; 모래와 돌멩이 그리고 굉장한 바람소리입니다.

하지만 백성들의 생존을 위하여 필요한 것 세가지가 신위적으로 제공되고 있습니다; 지하수와 구름기둥 및 불기둥 그리고 하늘에서 새벽에 이슬처럼 내리고 있는 광야의 양식 만나입니다;

그와 같은 창조주 하나님의 능력과 보호하심이 없었다고 한다면 그들 2백만명이 넘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한달도 버티지 못하고 광야에서 전부 멸절이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따라서 광야생활을 통하여 이스라엘 자손들은 창조주의 능력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한가지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것은 시내산 정상에 있는 바위와 돌멩이를 하염없이 쳐다보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실은 그곳에 임재하고 계시는 창조주의 능력과 영광을 보고 인생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깨닫는 것이 정말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맥락에서 여호와 하나님이 창조주의 능력으로 이스라엘 자손들을 출애굽시켜 시내광야에서 율법교육을 시키신 이유와 목적이 과연 무엇일까요? 역사적으로, 선민 이스라엘 자손들이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서 그만 그 이유와 목적을 잊어버리고 제멋대로 종교생활을 영위하다가 여호와의 버림을 받고 역사가운데 사라지고 맙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을 근원적으로 이해하기 위하여 출애굽기 제19장 제4-6절 말씀을 다시 생각해보면 그 내용이 다음과 같습니다; “전세계에 수백의 족속들이 살고 있지만 그 가운데 창조주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 자손을 자신의 거룩한 백성으로 선택하여 출애굽의 은혜를 주고 광야생활을 통하여 율법교육을 시키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여호와를 하나님으로 섬기는 신앙생활이 무엇인지 그들을 통하여 온세상에 보여주기 위한 것입니다. 여호와를 하나님으로 섬기는 신앙생활이란 한마디로 하나님이 보시기에 그들이 제사장나라거룩한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19:4-6절 의역);

 

모세가 기록으로 남기고 있는 출애굽기 제20장에는 율법의 취지를 십계명과 참된 제사의 규정으로 밝히고 있습니다. 그 다음 제21장에서 율법의 총칙이 히브리종에 관한 규정으로 먼저 나타나고 제22장부터는 율법의 세칙이 줄줄이 기록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 모든 율법의 취지, 총칙, 세칙을 주신 이유가 출애굽기 제19장에서는 제사장나라 거룩한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두가지 용어의 의미를 깊이 묵상하는 것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그것이 훗날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전개가 되고 있기 때문에 더욱 그러합니다.

여기서 제사장나라라고 하는 것은 수많은 세상의 족속 가운데 유일하게 창조주 여호와께서 신위적으로 선택한 백성 이스라엘 자손은 자신들의 이익만을 위하여 살지 말고 여호와 앞에 제사장이 되어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그들의 맏이나 레위인들만 제사장으로 삼는 것이 결코 제사장나라가 아닙니다.

선민이라고 하면 누구나 자신의 허물을 먼저 여호와 앞에 속죄하는 제사를 드리고 그 다음에는 남은 인생동안 하나님의 제사장으로서 다른 사람들의 죄를 하나님 앞에 고하고 속죄의 제사를 통하여 용서함을 받아주는 일을 계속해야 하는 것입니다(29:35-37, 9:7).

여기서 다른 사람이란 당연히 동족을 넘어서서 모든 이방인들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자손인 선민들이 전부 제사장나라의 구성원이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선민 또는 성도라고 한다면 이방인들과 믿지 아니하고 있는 사람들의 잘못과 죄악을 하나님 앞에서 용서받을 수 있도록 속죄의 제사를 드려주는 제사장으로 한평생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여호와의 제사장으로 그리고 여호와의 뜻을 이방인에게 전해주는 선지자로 살아간 인물이 모세가 기록하고 있는 창세기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의 조상인 아브라함입니다.

그가 창세기 제18장에서 멸망의 대상이 되고 있는 소돔과 고모라 등의 성읍과 주민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여호와께 드리고 있는 중보의 기도는 거룩한 백성의 의무가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가장 좋은 본보기가 되고 있습니다(18:22-33).

창세기 제19장을 보면 아브라함 당시에 세속적인 탐욕과 향락만을 추구하면서 죄악 가운데 살아가고 있는 이방인 가운데 소돔과 고모라의 주민들이 가장 타락한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들이 우선적으로 여호와의 역사심판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아브라함은 열심히 간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광야생활 40년을 통하여 여호와의 말씀을 율법으로 충분하게 교육을 받은 이스라엘 자손들이 약속의 땅 가나안을 차지하고 나자 그만 이상하게 변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기적이고 세속적인 삶에 익숙해지고 그 대신에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바라고 있는 제사장나라와 거룩한 백성의 의무와 책임은 모두 이행하지 아니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변의 이방인을 침략자로 인식하고 그들을 원수로 미워하고 있습니다(5:43). 그들의 회개를 위하여 여호와의 말씀을 전해주지 아니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변방 갈릴리의 선지자 요나를 이방도시 니느웨로 보내어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게 하지만 그가 처음에 얼마나 반대하고 있는지 모릅니다(1:1-3);

조상 대대로 유대교인들은 이방인에게 여호와의 심판과 구원의 진리를 전달하지 아니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방인들이 창조주 여호와의 뜻을 모르고 제멋대로 죄악 가운데 살다가 영원히 멸망을 받기를 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로지 여호와의 구원은 선민인 이스라엘 자손들만 향유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유대인사회에 하나님의 아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나타나서 창조주 여호와의 말씀의 뜻이 무엇인지 다시 한번 설명하고 있습니다.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의 천국복음을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밝히 들려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요지부동입니다.

결국 나사렛 예수를 유대교리를 어긴 죄인으로 정죄하고 로마총독의 권세를 빌려서 십자가에 처형하고 마는 것입니다. 그들은 가나안 땅에 흔한 돌멩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버려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지시고 돌아가신 예수님이 3일만에 무덤에서 영생의 몸으로 부활하는 초유의 사건이 발생하자 모든 것이 달라지고 맙니다. 더 이상 선민이라고 하더라도 이기적으로 그리고 현세적으로 신앙생활을 영위하게 되면 영생의 구원을 얻지 못한다고 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로 입증이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버린 돌멩이와 같은 예수 그리스도가 사실은 부활의 살아있는 보석이 되어 그를 주님으로 모시고 살아가는 제자들에게 영생의 구원을 얻게 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사실을 본문에서 사도 베드로가 함축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먼저 본문을 이해하기 더욱 편하게 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말씀을 또한 드려 두고자 합니다. 사도 베드로는 본문에서 예수님의 복음사역의 특징을 한 마디로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습니다; “4.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께 나아가”(벧전2:4).

예수님의 복음사역은 사람들로부터 배척을 받게 됩니다. 그 이유는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을 주장하고 있는 예수님의 말씀이 선민 유대인들의 생각과 전혀 다르기 때문입니다. 근본적으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나님의 눈으로 이 세상의 구원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반면에 선민 유대인들은 선민들의 구원을 중심으로 이 세상의 구원문제를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 같은 세상구원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어떻게 예수님의 생각과 선민 유대인들의 생각이 전혀 다르며 서로 갈등관계에 있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사람들의 생각이란 기본적으로 이기적이며 현세적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살기다툼에 익숙한 피조물들의 본능적인 사고방식이며 행동의 양식입니다.

그와 달리 창조주이신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모든 피조물을 전부 돌보고 그 생명을 하나같이 살리시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이 만물의 어버이가 되신 창조주의 마음입니다(3:16-17, 2:5-11). 그렇게 모든 피조물을 돌보고 그 생명을 전부 살리고자 하시는 것이 창조주의 공의의 정신입니다(11:1-10);

그러한 맥락에서 창조주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의 자손들을 애굽의 압제에서 해방을 시키고 시내산 기슭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고 계십니다(19:4-5). 그들에게 아브라함에게 주신 여호와의 언약을(12:3, 22:18) 민족적으로 계승하게 하여 이방 땅에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로 살아가며 이방인들의 죄를 대신 속죄하는 제사장나라로 살아가게 만들고자 하시는 것입니다(19:6).

여호와 하나님께서 선민들에게 부여하신 만민구원의 뜻이 과연 역사적으로 실행이 되고 있는 것일까요? 어림도 없는 이야기입니다. 모든 피조물을 구원하여 함께 영생의 하나님나라에 들어가서 영화를 누리고자 하는 생각이 선민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도무지 없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주변 강대국들에게 시달려오면서 현세적인 여호와의 구원하심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선민의 영광을 떨칠 수 있는 다윗제국의 재건을 역사적으로 이루어 달라고 간구할 뿐입니다.

수백 년 동안 나라 잃은 백성으로 살아오면서 선민 유대인들은 현실적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가진 메시아가 나타나서 외세를 모두 물리치고 선민의 제국을 건설해주기를 간절히 소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선보이고 있는 나사렛 예수가 자신들이 바라고 있는 선민의 구원과 영광과는 전혀 다른 복음을 부르짖고 있습니다.

그 내용이 다음과 같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뜻은 이방인을 원수같이 미워하지 아니하고 동족같이 사랑하라는 것입니다(5:43-48). 그러므로 선민들이 할 일은 이방인들의 구원을 위하여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주고 속죄의 제사를 드려주며 중보의 기도를 드려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선민들에게 부여되고 있는 사명 곧 제사장나라 거룩한 백성으로 살아가라고 하는 의무조항입니다(19:6)”;

                                

예수 그리스도의 주장은 창조주이신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정확하게 전달한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을 대속의 제물로 십자가에서 희생하신 일은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자신들이 죄인임을 깨닫고 진심으로 회개하고 아버지 하나님께 돌아올 수 있는 구원의 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 반면에 선민만의 영광과 구원을 희구하고 있던 유대인들에게는 크나큰 배신감을 선사하고 맙니다.

그 결과 예수님께서 복음사역의 현장에서 유대교지도자들로부터 받고 있는 핍박과 환난은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결국 십자가에서 처형을 당하시고 맙니다. 그와 같은 이야기를 사도 베드로가 어째서 초대교회의 성도들에게 상기시켜주고 있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예수님 당시의 일이 로마제국과 초대교회 사이에서 재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로마의 황제는 현인신으로 숭배를 받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속국의 백성들은 모두 로마황제의 초상을 바라보고 경배를 하며 예배를 드려야만 합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골칫거리입니다. 여호와를 섬기면서 로마황제를 우상으로 취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을 부르짖으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로마제국에 전파하고 있는 기독교인들과 그들의 교회지도자들이 문젯거리입니다. 로마황제를 섬기지 아니하며 만민의 평등과 구원을 주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영악한 로마의 제5대 황제 네로가 정치적인 목적으로 초대교회를 탄압하고 성도들을 박해하기를 시적하고 있습니다. 로마시에 들어와서 한창 선교에 박차를 가하고 있던 사도 베드로바울도 신변이 위험합니다. 더구나 속국에 황제의 명령이 시달이 되자 소아시아 북부와 동부지역에서 초대교회에 대한 탄압이 극심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상황에서 사도 베드로가 성도들에게 사람을 쳐다보지 말고 세상권력을 두려워하지 말며 오로지 하나님을 쳐다보고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의지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탄압을 받아 십자가를 지셨지만 그것이 아버지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으로 영생의 부활을 얻게 되는 계기가 되고 있음을 상기시켜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사도 베드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예수님은 보배로운 산 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벧전2:4). 그 돌이 날아가면 마치 다니엘의 예언처럼 세상의 제국이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2:44-45). 그러므로 초대교회의 성도들도 예수님의 제자답게 이방인들의 구원을 위하여 자신을 희생의 제물로 드리는 제사장의 직분을 실천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벧전2:5, 19:6).

이상과 같은 사실들을 염두에 두고서 이제부터 본문의 말씀을 한 구절 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그 깊은 의미와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파악해봅니다;

첫째로,4.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께 나아가”(벧전2:4);

(1)  예수님의 복음사역이 사람들의 뜻에는 맞지가 않는 것입니다(벧전2:4a). 그 이유는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께서 선민 유대인들이 원하고 있는 선민의 제국을 건설하는 것을 반대했기 때문입니다;

1)    선민들이 상상하고 있는 메시아는 하나님의 능력을 가지고 이 세상에 나타나는 선지자 중의 선지자입니다. 그들의 역사 가운데 나타난 바가 있는 모세나 다윗대왕보다 위대한 능력의 소유자입니다. 그러므로 메시아가 선민 유대인들의 땅에 오시게 되면 가장 먼저 외세인 로마제국과 헤롯 왕가를 몰아내어버릴 것입니다.

2)    그리고 그 옛날 다윗대왕처럼 메소포타미아와 애굽을 제외한 그 사이의 모든 땅을 정복하여 이스라엘 제국을 다시 건설할 것입니다. 옛날처럼 선민 유대인들은 많은 족속과 나라들을 지배할 것입니다. 시온 산에 하나님의 영광과 더불어 선민의 영광이 빛날 것입니다. 속국이 된 여러 나라의 왕들과 귀족들이 조공과 예물을 가지고 예루살렘으로 찾아와서 여호와를 경배하고 창조주의 영광을 소리 높여 찬양할 것입니다.

(2)  예수님께서는 어째서 그와 같은 선민 유대인들의 소원을 외면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인류의 역사를 이미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1)    수많은 강대국들이 자신들만의 민족우월주의를 내세우고 무력으로 주변국들을 정복하여 피의 제국을 세운 것입니다. 그들 제국의 황제들과 귀족들은 하나같이 그것이 자신들 선민들의 영광이며 하나님의 뜻이라고 주장한 바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정복하고 살해한 그 모든 피정복민들도 전부 창조주이신 여호와 하나님의 자식과 같은 창조물들입니다.

2)    창조주 앞에 더 귀하거나 더 천한 백성과 민족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집단이기주의와 현세적인 영광에 도취가 된 족속들이 자신들만이 세상의 지배자가 되겠다고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고 바벨탑과 같은 제국을 만들고 있습니다(11:2-4). 그 점에 있어서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선민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방인들과 하등 다른 것이 없습니다.

3)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께서 그들 선민 유대인들의 소원을 들어주거나 보호해줄 필요가 전혀 없는 것입니다. 그들 모두가 이제는 세상적인 정복의 논리를 벗어나야만 합니다. 오히려 이방인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그들을 미워하지 말고 사랑해야만 합니다(5:44-45). 이제는 선민 유대인들부터 회개하는 마음으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선민들에게 위탁하신 제사장나라로서의 사명을 감당해야만 합니다(19:6, 12:1).

(3)  아버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만민구원의 인생을 살아가신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되신 것일까요? 사도 베드로는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께 나아가”(벧전2:4b)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1)    출애굽한 이스라엘 자손들을 선민으로 선택하신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제 그들을 버리신 것입니다. 이방인을 구원하기 위하여 속죄의 제사를 드려주는 제사장나라로서의 역할을 전혀 이행하지를 아니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사명을 감당하라고 일깨워 주기 위하여 하나님의 아들을 메시아로 보내어 주었지만 그를 배척하고 십자가에 처형한 것입니다.

2)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유대교지도자들을 버리시고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새로운 왕으로 선택하십니다. 그를 무덤속에서 살리시고 선민사상을 버리고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모든 사람들의 주님으로 삼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처럼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을 위하여 제사장으로 살아가는 성도들에게는 반드시 예수님처럼 영생의 부활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22:28-30).

3)    그것이 이름하여 예수님의 제자들인 성도들에게 주신 아버지 하나님의 새 언약의 핵심 내용입니다(31:31-34, 28:18-20, 1:8, 8:8-13). 그 새 언약으로 성도들이 하나님나라를 건설하고 있는데 그 기초가 바로 하나님 앞에 택하심을 받은 살아 있는 돌과 같은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겠습니다(벧전2:4b).

둘째로,5. 너희도 산 돌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벧전2:5);

(1)  사도 베드로는 초대교회의 성도들에게 사람들에게는 버림을 받더라도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예수님처럼 신령한 삶을 살아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벧전2:4a). 그리고 베드로는 예수님의 복음사역의 결과는 보배로운 산 돌과 같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벧전2:4b). 왜냐하면 예수님의 보배로운 대속의 삶이 마치 신령한 돌과 같아서 영생의 하나님나라를 건설하는 초석이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벧전2:5a).

(2)  이제 예수님의 제자들이 모두 만민을 구원하는 복음사역에 나서고 자신의 인생을 이방인들을 구원하기 위한 대속의 삶으로 살아가게 되면 아버지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는 성도의 삶이 될 것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사도 베드로는 이 글을 읽으시는 모든 초대교회의 성도님들이시여 대속의 십자가를 지신 그리스도의 제자답게 부디 아버지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리는 거룩한 제사장들이 모두 되십시오”(벧전2:5b 의역)라고 강력하게 권면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결론적으로, 사도 베드로는 성도들이란 사람들의 인정을 받기 이전에 여호와 하나님의 인정을 받을 수 있는 믿음생활을 영위해야만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창조주이신 여호와 하나님의 뜻은 모든 피조물을 구원하여 하나님나라에서 영생을 누릴 수 있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그와 달리 여호와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는 선민 유대인들의 뜻은 ①첫째, 선민만이 하나님의 구원을 받고 ②둘째, 선민을 괴롭히는 모든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능력에 의하여 멸망을 받아야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③셋째, 그들의 소원을 현세적으로 이루어 줄 메시아가 하나님의 뜻으로 이 세상에 오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메시아로 이 세상에 오십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사명은 선민 유대인들의 생각과는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첫째, 선민 유대인들에게 이방인들을 미워하지 말고 원수를 사랑하듯이 모두 돌보고 그 생명을 살리라고 하십니다(5:43-48). 둘째, 여호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의 뜻은 피조물을 멸망시키는 심판이 아니라 모두 구원하여 영생을 누리게 하는 것이라고 선포하십니다(3:16-17, 6:39). 셋째, 그 일을 성취하기 위하여 예수님께서 오셨으며 천국복음을 전파하시고 자신의 목숨을 대속의 제물로 희생하신다는 것입니다(8:31, 3:13-15).

사도 베드로는 선민 유대인들의 뜻을 성취하지 아니하고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신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하나님나라의 초석이 되셨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벧전2:4). 그러므로 그 제자들인 초대교회의 성도들도 예수님처럼 하나님 아버지께서 보시기에 보배롭고 신령한 대속의 삶을 살아가야만 한다는 것입니다(벧전2:5);

그러므로 아무쪼록 사도 베드로의 권면의 말씀을 깊이 묵상하시고 복음의 일꾼으로 대속의 삶을 살아가시는 귀하신 성도님들이 모두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