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강해 제175강(렘31:21-26)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터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8년 11월 13일(화)
처녀 이스라엘아 돌아오라 그리고 유다의 농부들과 목자들아 돌아오라고 외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의 뜻이 무엇인가?(렘31:21-26)
본문에서 선지자 예레미야는 만민을 구원하시는 새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에 대하여 두가지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1) 하나는, 처녀 이스라엘과 이방인 남자들의 관계로 기술하고 있습니다(렘31:21-22).
(2) 또 하나는, 마지막 선민의 나라가 망하고 그 백성들이 이방 땅으로 끌려가서 포로생활을 하다가 마침내 여호와의 만민구원의 은혜로 고토로 돌아오게 되는 모습을 꿈속에서 보게 된 사실을 기술하고 있는 것입니다(렘31:23-26).
선지자 예레미야가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처녀 이스라엘과 유다는 장차 여호와 하나님께서 만민구원을 어떠한 모습으로 진행하실 것인지를 가리키고 있는 하나의 표본이며 예표가 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과 유다의 후손들을 돌이켜서 고토로 데리고 온다는 것이 바로 만민을 구원하여 본래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로 회복하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와 같은 관점에서 본문의 말씀을 한 구절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그 깊은 의미와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파악해봅니다;
첫째로, “처녀 이스라엘아, 너의 이정표를 세우며 너의 푯말을 세우고 큰 길 곧 네가 전에 가던 길을 마음에 두라. 돌아오라, 네 성읍으로 돌아오라. 반역한 딸아, 네가 어느 때까지 방황하겠느냐? 여호와가 새 일을 세상에 창조하셨나니, 곧 여자가 남자를 둘러싸리라”(렘31:21-22); 다음과 같이 세 부분으로 간략하게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처녀 이스라엘아, 너의 이정표를 세우며 너의 푯말을 세우고 큰 길 곧 네가 전에 가던 길을 마음에 두라. 돌아오라, 네 성읍으로 돌아오라”(렘31:21);
1) 여기서 ‘처녀 이스라엘아’(렘31:21a)라고 여호와께서 부르시는 용어는 다음 두가지 의미를 모두 지니고 있습니다; ①하나는, 진짜 이스라엘 12지파의 후손들이 여호와신앙을 회복하고자 몸부림을 치고 있는 그 모습을 가상하게 생각하여 기쁘게 호칭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②또 하나는 그들이 흩어져서 살고 있는 그 이방인의 땅에서 함께 창조주 하나님께로 나아가서 여호와의 종으로 살아가고자 결단하고 있는 모든 성도들을 일컫고 있는 용어이기도 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얼마 지나지 아니하여 주전 586년이 되면 마지막 선민의 나라 다윗왕조 유다 왕국이 이방 강대국 신바벨론제국의 군대에 의하여 멸망을 당하고 역사속으로 사라지고 말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여호와께 죄를 범한 유대인들이 모두 선민의 지위를 상실하고 이방 땅으로 끌려가서 포로생활을 영위하게 될 것이므로 이제는 더 이상 선민 이스라엘과 이방인을 구별할 필요성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2) 그런데 오늘날 성도들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히브리정경에 기록이 되어 있는 이스라엘 자손들의 여호와신앙의 모습은 참으로 큰 도움이 됩니다. 그 이유는 수많은 종족 가운데 그들이 여호와신앙을 가진 자로 먼저 살아가게 된 그 성공과 실패의 역사가 일목요연하게 기록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도들의 입장에서는 두가지의 도움을 받게 됩니다; ①하나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축복의 언약 안에 머물고 있다면 그 믿음의 역사를 보고 그대로 따라서 이방인들도 여호와를 모시고 살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②또 하나는, 그들이 여호와신앙을 버리고 우상을 섬기며 세상적인 탐욕과 정욕을 이루고자 죄악을 범하다가 여호와의 진노와 재앙 가운데로 들어가고 있다면 그것을 반면교사(反面敎師, 다른 사람의 잘못된 일과 실패를 거울삼아 나의 가르침으로 삼는 것)로 삼아 그렇게 살지 아니하면 되는 것입니다.
3)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그 험한 광야를 지나 어떻게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들어올 수 있었는지 그 과정을 잘 생각해보라고 본문에서 말씀하십니다(렘31:21b). 광야에는 지명도 길도 제대로 없습니다. 따라서 200만명이 넘는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음과 같은 작업을 하면서 그 길을 함께 걸어서 여호와께서 주시는 약속의 땅으로 들어온 것입니다; ①첫째, 이정표(里程標, milestone)를 세운 것입니다. 목적지를 얼마 앞둔 지점인지를 표시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힘을 안배하기 위한 것입니다. ②둘째, 푯말을 세운 것입니다. 광야이지만 물이 있어 함께 오래 머문 그 장소를 기억하고자 합니다. 후일 그 장소를 지날 때에 도움을 얻고자 한 것입니다. ③셋째, 함께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던 그 행로를 마음에 두고 기억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함께 여호와를 찬양하며 그 험한 길을 걸어 여호와께서 주시는 기업 그 성읍으로 들어왔는지를 기억해야 합니다. 그렇게 서로 격려하며 믿음을 나누던 그 신앙적인 경험이 전체 믿음의 회복에 큰 도움이 되는 것입니다.
(2) “반역한 딸아, 네가 어느 때까지 방황하겠느냐?”(렘31:22a); 여기서 ‘반역한 딸아’(렘31:22aa)는 위에서 부르고 있는 ‘처녀 이스라엘아’(렘31:21a)와는 반대의 의미로 사용이 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여호와신앙을 버리고 우상을 섬기면서 세상적인 욕심을 성취하고자 죄악된 삶을 살아갔기에 여호와께서 주신 성읍에서 쫓겨나 광야에서 방황하고 있는 백성들을 일컫고 있는 용어가 ‘반역한 딸아’(렘31:22aa)이기 때문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죄악된 삶의 모습을 보고서 이방인들이 살고 있는 광야로 내쫓아 버렸지만 내심으로는 그들이 여호와신앙을 회복하여 그들에게 기업으로 주고자 하시는 곳으로 다시 돌아오기를 원하시고 계십니다(렘31:22ab). 따라서 앞절에서 볼 수 있듯이 그 옛날 광야를 어떻게 통과하여 가나안 땅으로 들어올 수가 있었는지를 곰곰이 되짚어 생각해보라고 자상하게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3) “여호와가 새 일을 세상에 창조하셨나니, 곧 여자가 남자를 둘러싸리라”(렘31:22b);
1) 여호와께서는 그 옛날 모세와 여호수아를 인도자로 세워서 출애굽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40년의 광야생활을 거쳐 요단 강 동쪽의 땅과 그 서편의 가나안 땅을 전부 그들의 기업으로 주었지만 그것으로 그들이 믿음생활에서 승리한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가나안 땅의 풍요로움에 취하여 그만 교만해지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여호와의 종으로 살지 아니하고 이 세상의 주인으로 제 마음대로 살고자 한 것입니다. 따라서 여호와신앙을 버리고 세상적인 욕심과 정욕을 이루기 위하여 자신들이 만든 우상을 섬기는 삶을 선택하고 말았습니다.
2) 그러한 모습은 그 옛날 노아 시대의 세상사람들의 모습과 똑같은 것입니다. 창세기의 표현을 빌리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120년이 되리라 하시니라”(창6:2-3). 여호와신앙을 잃어버린 남자들이 여자들을 취하여 육신적인 삶을 영위하는 것을 여호와께서 싫어하시고 그들을 떠나 버리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육신적인 삶만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영이신 하나님께서 함께하실 수가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3) 그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하여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세상을 창조하십니다. 그것은 두가지로 되어 있습니다; ①첫째, 그 옛날처럼 젖과 꿀이 흐르는 이 세상의 가나안 땅을 선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기업으로 주시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영생의 생수가 흐르는 하나님나라를 여호와의 종으로 그리고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가고자 하는 처녀 이스라엘과 모든 이방인 성도들에게 주고자 하시는 것입니다(렘31:22ba). 그 일은 대속의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영을 또다른 보혜사로 성도들에게 보내어 주심으로 가능해집니다. 그것이 바로 ‘새 언약’의 내용입니다(렘31:31-34).
4) ②둘째, 여호와신앙을 회복하는 ‘처녀 이스라엘’이 세상의 남자들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그리스도의 부활의 소식과 함께 전파하는 시대가 열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 옛날 노아 시대에 남자들이 무력으로 세상을 지배하던 시대와는 전혀 다릅니다. 왜냐하면, 여호와의 종인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세상사람들을 구원하고자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의 정신을 실천하는 성도들의 희생과 헌신의 삶을 부드러운 ‘여자’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렘31:22bb).
둘째로,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내가 그 사로잡힌 자를 돌아오게 할 때에, 그들이 유다 땅과 그 성읍들에서 다시 이 말을 쓰리니, 곧 의로운 처소여, 거룩한 산이여, 여호와께서 네게 복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 것이며”(렘31:23);
(1)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독생자를 이 세상에 그리스도로 보내어 죄와 사망에 사로잡혀 있는 모든 백성들을 구원하기를 원하십니다. 영생의 하나님을 떠나서 죽음의 세력에 사로잡혀서 살아가던 백성들이 대속의 그리스도를 믿고 회개함으로써 이제는 하나님의 영의 임재를 받아 성령님과 함께 인생을 살아가는 성도가 되고 있습니다. 그들이 ‘새 언약’에 의한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렘31:31-34, 요1:12-13). ‘하나님의 자녀’들이 어떠한 특권을 누리게 되는지에 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5:24).
(2) 마지막 선민 유대인들이 여호와신앙을 버리고 우상을 섬기며 세상적인 탐욕과 육신적인 정욕을 쫓아 죄악을 범하며 살아갔기에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진노하시고 재앙으로 심판하십니다. 그 결과 이방 강대국의 침략으로 나라가 망하고 이방인들의 노예로 살아가게 됩니다. 그들의 기업인 가나안 땅은 적군에 의하여 초토화가 되고 황폐해져 버립니다. 그들의 땅은 여호와께서 버린 저주 받은 땅이 되고 만 것입니다. 그러나 먼 훗날 이방인이 되어 버린 그들과 세상의 모든 백성들을 구원하고자 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새 언약’의 시대가 도래합니다. 대속의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세상에 대속의 제물로 오시고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백성들에게는 하나님의 영이 임재하여 성령님으로 내주 역사하시는 새로운 시대가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3) 그러한 만민구원의 결과는 영적으로 그들과 하나님께서 함께 인생을 살아가시게 된다는 것입니다(요14:16-20). 그러므로 새로운 축복의 눈으로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는 자신들의 강토를 바라보게 됩니다. 온 천지에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하며 성도들이 걸어가는 그곳에 하나님의 축복이 빛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의미를 담아서 선지자 예레미야가 여기서,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내가 그 사로잡힌 자를 돌아오게 할 때에, 그들이 유다 땅과 그 성읍들에서 다시 이 말을 쓰리니, 곧 의로운 처소여, 거룩한 산이여, 여호와께서 네게 복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 것이며”(렘31:23)라고 미리 예언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셋째로, “유다와 그 모든 성읍의 농부와 양떼를 인도하는 자가 거기에 함께 살리니, 이는 내가 그 피곤한 심령을 상쾌하게 하며, 모든 연약한 심령을 만족하게 하였음이라 하시기로, 내가 깨어보니 내 잠이 달았더라”(렘31:24-26); 다음과 같이 세 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봅니다;
(1) “유다와 그 모든 성읍의 농부와 양떼를 인도하는 자가 거기에 함께 살리니”(렘31:24);
1) 선민 유대인들이 타락하자 여호와의 진노와 재앙으로 신바벨론에 의하여 그 나라가 망하고 백성들이 이방 땅으로 끌려가서 포로의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나 느부갓네살 황제가 그 땅에 남겨둔 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바로 그 땅을 관리하고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농부들입니다(왕하25:12). 비록 모든 성읍은 사람이 살 수가 없도록 불태워버리고 말았지만 농촌지역에는 농부들이 살면서 농사를 지어 황제에게 조공을 바칠 수 있도록 조치를 한 것입니다. 그들 농부들은 선민의 왕이 다스리던 시대나 이방 황제에게 조공을 바치고 있는 시대나 상관이 없습니다. 여전히 신분상 비천한 자들이며 나름대로 여호와신앙을 지니고서 살아가고 있는 그들입니다. 그들은 역사의 무대에 화려하게 등장하고 있는 인물들이 아닌지는 몰라도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계속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삼아 살아갈 수 있는 특혜를 누리고 있는 자들입니다. 그와 같은 의미가 본문에서 “유다와 그 모든 성읍의 농부”(렘31:24a)에 진하게 내포가 되어 있다고 하겠습니다.
2) 그들의 땅에 훗날 여호와께서는 새로운 백성들이 함께 살도록 조치를 하십니다(렘31:24b). 여호와께서는 이방인들 가운데 여호와의 종으로 살아가고자 결단하는 백성들을 구원하여 성도로 삼아 약속의 땅에 남아 있는 농부들과 함께 평화스럽게 살아갈 수 있도록 조치를 하시는 것입니다. 그들 이방인 성도들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는 자들이 바로 목자들입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도들을 천국복음으로 교육을 시키고 목자로 발령하신 그 전통을 따라 오늘날에도 교회를 중심으로 하나님의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의 복음을 온 세상에 전하고 새로 믿은 성도들을 그리스도의 제자로 양육하는 자들입니다(마28:18-20, 눅24:44-49, 요21:15-19, 고전11:1).
3) 참고로, 그 옛날 북조 이스라엘 왕국이 멸망을 당하게 된 때에는 이스라엘 출신의 농부들조차 한사람도 그 땅에서 살지를 못하게 됩니다. 앗수르 황제가 북조 이스라엘 왕국을 얼마나 증오하였는지 이스라엘 10지파의 백성들을 모조리 전쟁포로로 끌고가서 앗수르 변경에서 근근이 살아가도록 조치하고 말았기 때문입니다(왕하17:6, 23). 그리고 사마리아와 북조 이스라엘의 성읍에는 앗수르 변방의 온갖 잡족(雜族)들을 식민(植民, planting people)으로 들여보낸 것입니다. 그러한 식민정책으로 말미암아 사마리아와 북조 이스라엘의 성읍에서 이스라엘 10지파가 완전히 사라지고 만 것입니다. 혹시 그 흔적이 남아 있다고 하면 전란을 피하여 남쪽으로 사전에 피신한 일부 백성들과(눅2:36) 훗날 앗수르가 멸망을 하자 몰래 고토(故土)로 돌아와서 살게 되는 혼혈아들만이 있을 뿐입니다(눅9:52-53, 요4:20). 따라서 훗날 예루살렘에 제2성전을 짓고 살아가게 되는 유대인들로부터 사마리아 사람들이 그토록 이방인 취급을 받으며 혼혈이 된 죄인들이라고 온갖 멸시를 받게 된 것입니다(스4:1-4, 요4:9).
(2) “이는 내가 그 피곤한 심령을 상쾌하게 하며, 모든 연약한 심령을 만족하게 하였음이라 하시기로”(렘31:25);
1) 가나안 땅에서 농사를 지어 이방인 황제에게 매년 조공을 바치고 나면 그 생활이 참으로 힘이 듭니다. 속국의 백성으로 살아간다고 하는 것이 바로 ‘농노’(農奴, 농사를 짓는 노예)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목자의 인도를 따라 목축지를 옮겨 다니면서 풀을 뜯어 먹어야만 하는 양들의 처지도 힘이 들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와 같이 이 세상에서의 사람들이나 모든 피조물들은 마치 유배생활을 하듯이 그렇게 힘이 드는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창3:17-19, 23-24, 4:12-17). 그것이 이른바 ‘실락원’(失樂園, the lost paradise)의 삶인 것입니다.
2) 그와 같은 모습을 훗날 사도 바울이 다음과 같이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이 자녀들의 영광이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그 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롬8:19-23). 그것은 죽을 수밖에 없는 육신을 가진 ‘에노스’가 아버지 ‘셋’과 할아버지 ‘아담’과 함께 영생의 여호와 하나님께 영원한 구원을 달라고 부르짖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창4:25-26).
3) 아담의 셋과 에노스의 가문처럼 역시 하나님을 경외하고 있는 아브라함이 영생의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자신의 소원을 두가지로 부르짖고 있습니다(창21:33, 22:12, 히11:16, 19); ①하나는, 죽을 수밖에 없는 육신을 벗고 영생의 몸으로 부활하는 것입니다(히11:19). ②또 하나는, 영생의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께서 계시는 에덴동산이나 천국으로 되돌아가서 영원히 함께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히11:16). 그와 같은 소망이 장차 대속의 그리스도의 오심과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영의 임재로 말미암아 성취가 될 것이라는 사실을 선지자 예레미야가 여기서 “이는 내가 그 피곤한 심령을 상쾌하게 하며, 모든 연약한 심령을 만족하게 하였음이라 하시기로”(렘31:25)라는 여호와 하나님의 복음의 말씀으로 선포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3) “내가 깨어보니 내 잠이 달았더라”(렘31:26);
1) 꿈과 같은 일이 과연 생시에도 발생할 수가 있을까요? 꿈에는 두가지가 있습니다; ①하나는, 거짓선지자에 속하는 꿈꾸는 자가 있습니다(렘27:9). 그것은 꿈을 빙자하여 거짓 예언을 퍼뜨리는 것입니다. 꿈에 본 것이므로 그것에 대한 책임이 없다는 점에서 개꿈이나 같은 것입니다. ②또 하나는, 하나님께서 뜻이 있어서 예언의 일종으로 주시는 꿈입니다. 그것은 영적인 환상을 꿈의 형태로 주시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17세의 청소년 요셉이 가나안에서 꾼 꿈이 그러합니다(창37:6-11).
2) 요셉의 꿈은 훗날 그가 애굽에서 여호와의 도우심으로 30세에 총리가 되어 7년 연속 흉년으로부터 애굽과 주변국의 모든 백성들을 구원하는 만민구원의 역사로 성취가 되고 있습니다(창45:4-8, 50:20). 선지자 예레미야는 여기서 전자가 아니라 후자에 속하는 꿈을 꾸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 꿈은 잠에서 깨어났지만 꿀같이 단것으로 기억이 되고 있습니다(렘31:26). 여호와의 말씀을 먹고 소화하게 되면 그것이 꿀과 같이 달게 느껴지듯이 여호와께서 복음 안에서 성도에게 주시는 그 꿈도 그렇게 달게 느껴지는 것입니다(시119:103, 겔3:3).
결론적으로, 마치 꿈과 같은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의 은혜가 여호와 하나님께로부터 장차 이 세상에 임하게 된다는 사실을 선지자 예레미야가 본문에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죽을 수 밖에 없는 육신을 가진 사람들이 영생의 하나님께 영생의 몸을 달라고 간구하고 있습니다. 그 기도에 긍정적으로 응답하여 주시는 창조주 하나님의 대답이 훗날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으심과 부활 승천을 통하여 이 세상에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도들이 그리스도처럼 부활하여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원히 하나님의 자녀로 살고 싶어합니다. 그 소망이 내주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의 확신으로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사실이 본문에서는 “이는 내가 그 피곤한 심령을 상쾌하게 하며, 모든 연약한 심령을 만족하게 하였음이라”(렘31:25)는 여호와의 예언의 말씀으로 선포가 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31-34절에서는 ‘새 언약’의 깊은 내용으로 선포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뜻을 새기시면서 본문의 내용을 다시 음미하여 보시기를 바랍니다. 아무쪼록 하나님의 천국복음에 대하여 깊이 감사하시는 성도님들의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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