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예레미야 강해 제135강(렘24:1-7)(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2. 10. 4. 13:57

예레미야 강해 제135(24:1-7)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터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8103()

 

무화과 두 광주리의 비유; 여호와께서는 바벨론으로 끌려가는 유다의 백성들을 잘 돌보셔서 장차 어떻게 사용하시겠다고 말씀하시는가?(24:1-7)

 

여호와께서는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하여 선민 유대인들에게 성전 앞에 놓여 있는 무화과나무의 열매 곧 무화과 두 광주리의 비유에 대하여 말씀하시는데 그 내용이 놀라운 것입니다(24:1-7). 왜냐하면, 당시의 언약과 600년 후에 가동이 되는 새 언약과의 차이가 무엇인지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째서 그렇게 볼 수 있는지 그리고 그 주요 내용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먼저 다음과 같이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첫째로, 역사적인 내용부터 먼저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 관점은 여호와께서 주신다고 약속하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 자손들이 어떻게 얻고 있으며 그것을 어떻게 역사적으로 경영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초점을 맞추고 있는 이유는 때로 무화과의 열매가 을 상징하고 있으며 대추야자의 열매가 을 의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

1)    여호수아 시대부터 선민 이스라엘 자손들이 여호와께서 주시는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자신들의 기업으로 얻어서 정착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모세오경 특히 민수기 제34장에 따르면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주신다고 말씀하시는 약속의 땅의 경계가 북쪽으로는 서에서 동으로 레바논 산맥에서부터 헬몬 산까지입니다. 그리고 동쪽으로는 바산의 산지와 길르앗 목초지를 전부 포함하고 있습니다. 남쪽으로는 에돔과 미디안의 땅을 침범하지 아니하는 조건으로 바산 광야를 지나고 애굽 시내를 거쳐서 지중해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2)    그런데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군대를 이끌고 그 약속의 땅을 얻기 위하여 고군분투를 하지만 전부 정복하지를 못합니다. 예를 들면, 북쪽으로 레바논 산맥과 헬몬 산 일대에 결코 이르지를 못하고 마는 것입니다(11:17). 그리고 그후 사사기 시대에는 자신들의 영토를 각각 고유한 기업으로 분배를 받게 된 이스라엘 12지파가 마치 12개의 부족국가처럼 행세를 하고 맙니다(17:6, 21:25). 자신들의 영토만 지킬 수 있으면 그만이지 구태여 다른 지파의 전쟁에 참여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3)    그것은 약속의 땅 가나안을 정복하기 위하여 그 옛날 모세와 여호수아의 명령에 따라 12지파가 4개의 진영을 형성하여 효과적으로 전투를 수행하던 모습과는 전혀 다른 양상입니다(2:1-32). 그렇게 이기적인 모습으로 자신들의 초장(草場)만 관리를 하게 되자 그 옛날 강력했던 이스라엘의 군대가 별볼일이 없는 약세인 12개 부족국가의 군대로 변모하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는 심각합니다. 왜냐하면, 12개로 분열이 된 이스라엘 12지파의 빈틈을 노려서 주변의 이방인 나라들이 다국적군을 형성하여 끊임없이 내침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요단 강 동편의 땅을 거의 잃어버리고 맙니다. 그리고 블레셋 족속의 북침을 막지 못하고 단 지파가 멀리 북쪽 국경지역 으로 이주를 하고 맙니다(18:27-31, 왕상12:29).

4)    그러한 이기적인 독자적 부족국가로 운영이 계속되면 이스라엘 12지파가 사라질 형편입니다. 따라서 필요한 경우에 국한하여 대사사의 지휘를 받는 연합군이 탄생합니다. 그러나 그것도 적을 효율적으로 물리치기에 충분하지가 않습니다 .그 결과 주변 이방나라처럼 용맹한 왕을 세우고 이스라엘 12지파가 하나의 강력한 고대국가를 형성하고 군대를 하나로 통합하여 전쟁을 수행하자고 합의를 하게 됩니다(삼상8:4-22). 그러나 여호와를 섬기는 신정국가 이스라엘이 강력한 왕정국가로 운영이 된다고 하는 것은 여호와의 뜻을 어그러뜨리는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삼상8:7-9).

5)    그 이유는 선민의 나라와 이방인들의 나라가 국가제도의 운영에 있어서 달라야만 하는데 그 특징이 없어지고 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전쟁을 수행함에 있어서 여호와를 섬기는 선민들이 이제는 여호와의 도우심이 아니라 자신들이 세운 왕과 군대의 힘만을 의지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옛날 모세나 여호수아의 시대처럼 여호와의 전적인 도우심을 구하지를 않습니다(17:9-16, 2:24-25, 3:2, 1:3-9, 5:14-15, 6:2-21). 그러므로 여호와 이레의 도우심이나 여호와 닛시의 신앙이 이제는 사라지고 마는 것입니다. 그 결과 여호와의 뜻을 구하지 아니하고 자신의 군대의 힘과 백성들의 지지만을 의지하는 사울 왕의 불신앙의 행적이 나타나고 맙니다(삼상13:5-14, 15:2-23). 그러한 오만한 왕정의 잘못을 시정하기 위하여 여호와께서는 자신의 마음에 맞는 종을 선민의 나라의 왕으로 세우고자 하십니다. 다윗왕과 솔로몬 왕이 그러한 경우입니다(삼상16:7, 삼하7:12-13, 왕상1:29-30, 3:10-15, 13:22).  

6)    그러나 그것도 완전한 방법이 아닙니다. 다윗왕과 솔로몬 왕이 여호와의 십계명을 보기 좋게 어기고 있기 때문입니다(삼하11:4-17, 왕상11:1-13). 그리고 다윗왕의 경우에는 여호와께서 주신다고 약속하신 가나안 땅의 경계를 훌쩍 뛰어넘어 더 많은 이방나라와 족속을 굴복시키고 조공을 많이 받기에 열심입니다(삼하8:1-14). 솔로몬은 계속 군비를 강화하고 전국을 요새지로 만들고 있습니다(왕상9:15-19). 그 작업을 위하여 자신의 유다 지파 및 작은 베냐민 지파를 제외한 기타 이스라엘 10지파의 등골을 빼고 있습니다(20:47-48, 왕상12:3-4). 따라서 여호와께서는 다윗과 솔로몬의 제국을 남과 북으로 둘로 쪼개어버리고 마시는 것입니다(왕상12:16-20).

7)    여호와를 섬긴다고 하는 신정국가에서 정치적인 논리가 신앙적인 차원을 지배하고 마는 참으로 비참한 사건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북조 이스라엘 왕국의 초대 왕이 된 여로보암1세가 금송아지를 두개나 만들어 출애굽의 신 여호와라고 부르면서 백성들에게 그것을 섬기라고 강요한 것입니다(왕상12:26-33). 이스라엘 10지파가 그 왕명을 환영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 옛날 시내 산 아래에서 금송아지 하나를 만들어 출애굽의 신 여호와라고 부르면서 제사를 드리고 축제를 벌인 그 끔찍한 죄악을 두배나 더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32:4-10). 그렇지만 금송아지 우상숭배를 처음 시작한 여로보암1세나 그 정책을 끝까지 추종한 이스라엘의 모든 왕들은 그 범죄의 심각성을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같이 절기 때마다 유다 왕국의 예루살렘으로 성지순례를 떠나는 백성들을 막기 위해서는 그러한 조치가 불가피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왕상12:26-30, 왕하17:21-23). 그것은 그들의 정치적인 논리가 여호와를 섬기는 순전한 믿음을 앞서고 있는 것입니다.

8)    긴 세월 200년 동안이나 여호와께서 참고 지켜보았지만 그 우상숭배 정책에 하등 변화가 없습니다 .정치적인 논리를 버리고 여호와신앙으로 돌아오는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아니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는 북조 이스라엘 왕국의 멸망이며 선민 이스라엘 10지파의 소멸입니다(왕하17:6, 21-23). 그렇다면, 이제 유일하게 선민의 지위를 누리고 있는 다윗왕조의 유다 왕국에 있어서는 어떠한 것일까요? 그 점에 대하여 논구하고 있는 대선지서가 이사야와 예레미야입니다. 물론 그 가운데 유다 왕국 말기의 선지자인 예레미야의 기록이 더 생생합니다. 다윗왕조에 있어서는 여호와께서 북조 이스라엘 왕국과는 달리 한번의 기회를 더 주십니다(왕하19:34-35). 적어도 유다 왕국이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섬긴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앗수르제국의 강력한 군대를 여호와께서 진멸하시고 거대 앗수르제국의 광대한 영역 안에서 유일하게 다윗왕조 유다 왕국의 독립국가로서의 생존을 허락하신 것입니다(왕하19:29-37).

9)    그러나 그 귀한 기회를 다윗왕조가 낭비하고 맙니다. 현세적인 기복신앙과 이기적인 선민만의 구원사상에 빠져서 앗수르에 이어 메소포타미아의 새로운 패권국이 된 신바벨론제국과 전쟁을 하더라도 자신들이 이긴다고 하는 맹신적인 믿음을 선보이고 있습니다(20:1-6, 28:1-4, 38:1-6). 여호와께서는 선지자 예레미야와 우리야를 선민 유대인 사회에 보내어 전쟁을 하게 되면 여호와의 진노로 유다 왕국이 멸망을 당하게 된다고 수차 경고하였지만 그들은 결코 귀를 기울지를 않습니다(7:13-16, 25-28). 다윗왕조의 왕들과 귀족들 그리고 유다 왕국의 영적인 지도자들과 백성들이 그동안 여호와 신앙을 버리고 우상을 섬기며 세상적인 탐욕과 육신적인 정욕을 쫓아 이방인처럼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여호와께서는 신바벨론과의 전쟁을 통해서 다윗왕조 유다 왕국을 멸하고 그 남은 백성들을 바벨론의 포로로 삼아 이방 땅에서 망국의 백성으로 고난 가운데 살아가게 하는 징벌을 행하시는 것입니다.   

(2)  둘째로, 그런데 그러한 역사섭리와 보응의 징벌에 대하여 하나의 획기적인 변화가 모색이 되고 있습니다. 예레미야가 제31장에서 소위새 언약의 내용으로 기록하고 있는 그것이 미리 본문에서 성전 앞 무화과 두 광주리의 비유를 통하여 선을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24:1-7). 어째서 그렇게 볼 수가 있는지 조금 설명을 해보고자 합니다;

1)    첫째, 솔로몬의 성전에는 지성소가 있으며 그곳에는 여호와께서 임재를 하고 계십니다(25:22, 왕상8:6, 9:3). 그러므로 성전 앞이라고 하는 장소는 여호와께서 임재하여 보고 계시는 곳이라고 하는 의미가 강합니다(24:1).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선민 유대인들은 극히 나쁜 무화과 열매와 같다는 것입니다(24:2-3). 왜냐하면, 여호와신앙을 버리고 우상을 섬기며 세상적인 탐욕과 정욕을 쫓아 이방인들처럼 살아가고 있으므로 선민의 거룩한 열매를 도저히 찾아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2)    둘째, 여호와께서 선민 이스라엘 자손에게 기대하신 좋은 전도의 열매와 본이 되는 여호와의 종의 열매가 전혀 없기 때문에 그들에게 선민의 나라와 백성이라는 특권과 특혜를 줄 필요가 없습니다. 따라서 다윗왕조 유다 왕국마저 망하게 하고 그 백성을 이방 땅에서 이방인처럼 살아가게 하고 마십니다. 그것이 여호와의 공의의 정신에 따른 정확한 보응입니다(왕하21:11-13). 23장에 이르기까지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하여 여호와께서 선민 유대인들에게 말씀하신 예언의 내용이 그러한 것입니다.

3)    셋째, 그러나 본문에서 여호와께서는 그 정책을 완전히 수정하고 계십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내가 이 곳에서 옮겨 갈대아인의 땅에 이르게 한 유다 포로를 이 좋은 무화과 같이 잘 돌볼 것이라. 내가 그들을 돌아보아 좋게 하여 다시 이 땅으로 인도하여 세우고 헐지 아니하며 심고 뽑지 아니하겠고, 내가 여호와인 줄 아는 마음을 그들에게 주어서 그들이 전심으로 내게 돌아오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24:5-7). 한마디로, 지극히 나쁜 무화과 열매를 지극히 좋은 무화과 열매로 변화시키는 새로운 창조의 역사를 진행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 내용이 과연 무엇일까요?

그 새로운 언약의 내용을 파악하기 위하여 이제부터 본문의 말씀을 한 구절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그 깊은 의미와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파악해봅니다;

첫째로,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유다 왕 여호야김의 아들 여고냐유다 고관들목공들철공들예루살롐에서 바벨론으로 옮긴 후에 여호와께서 여호와의 성전 앞에 놓인 무화과 두 광주리를 내게 보이셨는데, 한 광주리에는 처음 익은 듯한 극히 좋은 무화과가 있고, 한 광주리에는 나빠서 먹을 수 없는 극히 나쁜 무화과가 있더라”(24:1-2); 다음과 같이 두 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1)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유다 왕 여호야김의 아들 여고냐유다 고관들목공들철공들예루살롐에서 바벨론으로 옮긴 후”(24:1a); 다음 두가지 사실을 말해주고 있는 문장입니다;

1)    하나는, 주전 597년 유다 왕 여호야긴이 신바벨론제국 느부갓네살 황제가 이끄는 갈대아 군대의 침입을 막지 못하여 폐위를 당하고 바벨론으로 끌려간 다음에 발생하고 있는 사건에 대하여 선지자 예레미야가 기록을 하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사건은 여호야긴 다음에 즉위한 시드기야 왕 때에 발생한 것입니다.

2)    또 하나는, 주전 10세기에 솔로몬 대왕이 예루살렘성전과 자신의 궁궐을 지을 때에 선민 이스라엘 자손들이 건축기술이 발달하지를 못하여 목공술과 석공술에 뛰어난 페니키아인들의 도움을 많이 받고 있습니다(왕상5:18, 6:1, 7:13-14, 40). 그런데 솔로몬 대왕이 7년간 성전을 짓고 또 13년간 궁궐을 건축한 후에 전국적으로 신도시를 건설하다 보니까 이스라엘 자손들도 상당한 목공예와 석공술을 지니게 됩니다. 그에 따라 신바벨론제국의 황제인 느부갓네살은 유다 왕국에서 쓸 만한 목공들과 철공들을 포로로 삼아 전부 바벨론으로 끌고가고 있는 것입니다.

(2)  여호와께서 여호와의 성전 앞에 놓인 무화과 두 광주리를 내게 보이셨는데, 한 광주리에는 처음 익은 듯한 극히 좋은 무화과가 있고, 한 광주리에는 나빠서 먹을 수 없는 극히 나쁜 무화과가 있더라”(24:1b-2);

1)    여호와의 성전에는 성막이 그 중앙에서 서쪽으로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성막은 성소와 지성소로 구분이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성전의 뜰에는 그 중앙에 번제단과 물두멍이 있습니다. 여호와께 올려드리는 제물과 예물은 번제단의 주위에 두는 것이 원칙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무화과 두 광주리가 특이하게도 성전 앞에 놓여 있다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성전 안에 바쳐진 것이 아니라 성전 앞에 놓여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제사장들이 속죄의 제사를 드릴 때에 성전의 뜰이나 그 바깥에서 대기를 하고 있는 선민 유대인들을 가리키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2)    그런데 여호와께서는 선민 유대인들이 두 부류라고 말씀하십니다; ①하나는, 여호와께 바칠 수 있는 처음 익은 무화과 열매입니다. 그것은 좋은 예물입니다. ②또 하나는, 흠이 있는 무화과 열매입니다. 그것은 극히 나쁜 상태이며 무늬만 무화과 열매입니다. 따라서 여호와께 바쳐서는 안되는 나쁜 열매일 뿐만 아니라 선민 유대인들이 먹어서도 아니되는 악한 열매입니다. 여기서 좋은 무화과 열매와 나쁜 무화과 열매가 각각 무엇을 상징하고 있는지를 좀더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3)    무화과 열매는 젖과 같이 흰 액체가 흘러나오고 있으므로 흔히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 가나안이라고 말할 때에 그 에 해당이 되는 과일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은 그것을 먹으면 동물이 자랄 수가 있는 완전식품을 의미합니다. 그 무화과 열매와 같이 선민 유대인들은 주변의 이방인들에게 여호와의 말씀을 전파하고 여호와신앙의 모범을 보여주어 그들로 하여금 영적으로 거룩하게 자라날 수 있도록 도와 주어야만 합니다. 그러한 여호와의 사명과 기대를 지니고 있는 민족이 바로 여호와의 거룩한 백성인 선민 유대인들입니다(12:2-3, 19:4-6).

4)    그런데 역사적으로 선민 이스라엘 자손들이 전혀 그 사명을 감당하지를 아니하고 있습니다(12:39). 주변의 이방인들을 사랑하고 구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미워하며 저주하고 있습니다(5:43). 그 뿐만이 아닙니다. 이방인들을 미워하면서 동시에 선민들이 이방인들의 악한 풍습을 배우고 있습니다. 선민들이 여호와신앙을 버리고 이방인들의 신상과 우상을 도입하여 섬기고 있습니다. 세상적인 탐욕과 육신적인 정욕을 쫓아 이방인보다 더 악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좋은 무화과 열매를 기대하셨던 여호와께서는 너무나 실망을 하시고 이제는 선민 유대인들에게 진노하셔서 시드기야의 유다 왕국을 없애 버리고자 하시는 것입니다(23:39-40).

둘째로,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예레미야야 네가 무엇을 보느냐? 하시매 내가 대답하되, 무화과이온데 그 좋은 무화과는 극히 좋고, 나쁜 것은 아주 나빠서 먹을 수 없게 나쁘니이다 하니,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내가 이 곳에서 옮겨 갈대아인의 땅에 이르게 한 유다 포로를 이 좋은 무화과 같이 잘 돌볼 것이라”(24:3-5); 역시 다음과 같이 두 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봅니다;

(1)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예레미야야 네가 무엇을 보느냐? 하시매 내가 대답하되, 무화과이온데 그 좋은 무화과는 극히 좋고, 나쁜 것은 아주 나빠서 먹을 수 없게 나쁘니이다 하니”(24:3);

1)    여호와께서 환상 가운데 성전 앞에 있는 두 광주리의 무화과 열매를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보여 주십니다. 그리고 질문을 하십니다. 예레미야가 보기에 어떠하냐는 것입니다(24:3a). 예레미야가 정직하게 답변을 하고 있습니다. 좋은 무화과는 최상품이고 나쁜 무화과는 사람이 먹으면 탈이 나는 그렇게 변질이 된 악한 것이라는 답변입니다(24:3b).

2)    그렇게 답변을 하면서 선지자 예레미야는 내심 자신의 동족인 선민 유대인들이 여호와께서 보시기에는 극히 나쁜 무화과 열매에 해당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다윗왕조 유다 왕국이 여호와의 진노와 재앙으로 시드기야 왕 때에 곧 망할 것이며 동족들이 바벨론으로 끌려가서 죽는 것보다 못한 삶을 영위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5:19, 26-31, 6:8, 15, 7:15, 32-34, 8:1-3). 그것이 선지자 예레미야가 지금까지 누차 예언한 여호와의 말씀입니다(23:39-40).  

(2)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내가 이 곳에서 옮겨 갈대아인의 땅에 이르게 한 유다 포로를 이 좋은 무화과 같이 잘 돌볼 것이라”(24:4-5);

1)    선지자 예레미야의 지레짐작이 완전히 틀리게 됩니다. 왜냐하면, 여호와께서는 내가 너희를 온전히 잊어버리며 내가 너희와 너희 조상들에게 준 이 성읍을 내 앞에서 내버려 너희는 영원한 치욕과 잊지 못할 영구한 수치를 당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23:39-40)고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하여 수없이 선포하신 그 내용을 스스로 뒤집으시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그러한 일이 가능할까요? 한마디로, 사도 베드로는 광주리에 담겨 있는 벌레가 부정하여 먹을 수가 없다고 하는데 주님께서는 이미 깨끗하게 하였으므로 걱정 말고 잡아 먹으라고 말씀하시는 것과 같습니다(10:10-20).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주님을 통하여 벌레 같은 죄인을 깨끗하게 만드시는 역사를 이루셔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대속의 역사입니다.

2)    일개 왕국에 있어서도 기존의 왕명을 뒤집자면 그 책임을 지고서 재상이 물러나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왕명을 스스로 뒤집게 되면 국왕의 권위는 크게 실추가 되고 맙니다. 백성들이 왕을 우습게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명예의 실추를 어떻게 감당하며 누가 국왕을 대신하여 그 책임을 지면 될까요? 여호와 하나님의 창조의 지혜가 그곳에서 번쩍이고 있습니다. 미리 그 대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①첫째, 여호와의 역사섭리에 따라 선민의 나라가 망하고 선민의 특권이 사라지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의 영적인 잘못에 대해서는 훗날 여호와께서 보응하실 때에 영원한 심판을 받도록 되어 있습니다(32:33-35). 그러한 사실에는 변화가 없습니다.

3)    ②둘째,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 살 수 있는 운명으로 바뀌고 영원한 멸망의 심판이 아니라 구원의 심판으로 바뀌고 있습니다(24:5-7, 3:13-17, 5:24). 도대체 영적으로 어떠한 일이 역사 가운데 발생하면 그러한 변화가 찾아오게 되는 것일까요? 그 해답이 여호와의 지혜이며 그동안 숨겨져 있었던 구원의 비결인데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오심과 성도들에 대한 성령님의 임재입니다. ③셋째, 그리스도가 대속의 십자가를 지시고 자신을 영원한 속죄의 제물로 여호와께 바침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에 영원한 속죄의 길이 열리게 됩니다. 그 은혜를 입자면 성도들이 자신의 죄악을 여호와께 고백하고 진심으로 남은 인생을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가겠다고 결심하고 또한 그렇게 살아가야만 합니다.

4)    ④넷째,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었다고 하여 성도들에게 영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이 곧바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육신을 입고서 남은 인생을 살아가고 있기에 자신의 탐욕과 정욕을 영적으로 이기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육신의 소원을 이길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보혜사를 보내어 주십니다(24:49, 14:16-20, 1:8, 2:1-4).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님께서 성도들에게 임재하여 내주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그 영적인 도우심으로 성도들이 아버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거룩한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마침내 두 광주리의 무화과 열매 가운데 극히 좋은 열매가 되는 것입니다(24:2). 고넬료의 가정에 사도 베드로를 보내시기 전에 주님께서 환상 가운데 하신 말씀과 흡사합니다(10:10-20).

셋째로,내가 그들을 돌아보아 좋게 하여 다시 이 땅으로 인도하여 세우고 헐지 아니하며 심고 뽑지 아니하겠고, 내가 여호와인 줄 아는 마음을 그들에게 주어서 그들이 전심으로 내게 돌아오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24:6-7); 다음과 같이 세 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1)  내가 그들을 돌아보아 좋게 하여 다시 이 땅으로 인도하여 세우고 헐지 아니하며 심고 뽑지 아니하겠고”(24:6);

1)    언뜻 보면, 바벨론 포로생활 70년이 지나면 여호와께서 페르시아 황제 고레스를 통하여 선민 유대인들을 자유민으로 만들고 예루살렘 귀환이 이루어지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보입니다(25:11-12, 1:1-4).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내용이 아닙니다; “내가 그들을 돌아보아 좋게 하여 다시 이 땅으로 인도하여 세우고 헐지 아니하며 심고 뽑지 아니하겠고”(24:6)라고 기록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2)    주전 586년에 예루살렘성전이 불에 타고 유대인들이 바벨론 포로가 됩니다. 그러나 주전 516년에는 페르시아에서 돌아온 유대인들이 감격스럽게도 예루살렘 제2성전을 건립하게 됩니다(6:15-16). 하지만 주후 70년에는 그 성전이 다시 붕괴가 되고 맙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이 로마의 병정에 의하여 가나안 땅에서 다시 쫓겨나고 마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역사적인 사실에 비추어보면 이 땅으로 인도하여 세우고 헐지 아니하며 심고 뽑지 아니하겠고”(24:6b)라는 말씀은 아닌 것입니다.

3)    그렇다면 본문은 무엇을 가리키고 있는 말씀일까요? 그것은 선지자 다니엘이 기록하고 있는 바 그대로 영원한 그리스도의 나라와 성도들의 나라를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다(7:14, 18, 22). ‘새 언약과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대 그리고 영원한 약속의 땅인 하나님의 나라를 벌써 의미하고 있는 여호와의 예언의 말씀이라고 하겠습니다(31:34, 11:16).

(2)  내가 여호와인 줄 아는 마음을 그들에게 주어서 그들이 전심으로 내게 돌아오게 하리니”(24:7a);

1)    여호와께서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한치의 의심도 없이 온전히 믿는 것이 여호와신앙입니다. 그것이 여기서 언급하고 있는 내가 여호와인 줄 아는 마음”(24:7aa)입니다. 인간의 지혜와 능력으로 할 수가 없는 그것들을 여호와께서는 새로운 창조로 역사 가운데 펼쳐 보이십니다. 이 세상의 구원을 위하여 여호와께서는 새로운 창조를 두가지 하십니다;

2)    하나가 하나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대속자 그리스도로 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아들로 이 세상에 태어나셔서 자신을 십자가에서 대속의 제물로 희생하신다고 하는 것이 인간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지혜의 발현입니다. 그때문에 그리스도의 속죄의 제사 곧 십자가의 대속의 진리를 믿고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성도들에게는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죄 사함과 칭의의 은혜가 주어지게 됩니다.

3)    또 하나는, 진심으로 회개를 하고서 남은 인생을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주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완수하기 위하여 살아가고자 결심하는 성도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성령님을 보내시여 내주 역사하게 하십니다. 그때부터 성도들은 육신의 소욕을 이기는 영적인 삶을 살아갈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8:1-6). 그와 같은 의미를 그들이 전심으로 내게 돌아오게 하리니”(24:7ab)에서 엿볼 수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4)    사도 바울의 지적과 같이 창세기 제15장에서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15:6)라는 말은 믿음의 의가 무엇인가를 정확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4:18). 그것은 피조물인 인간의 생각과 사람들의 상식에 의지하여 여호와의 말씀을 판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의 실체는 다음과 같습니다; ①첫째, 자신의 형편과 인간의 생각에 비추어보면 불가능하게 보이는 여호와의 예언입니다. ②둘째, 그러나 그 예언의 말씀을 주시는 분이 여호와이시기 때문에 그 이행이 틀림이 없다고 믿는 것입니다.

5)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이신 여호와의 전능하심을 믿지 아니하면 이 세상에서 도대체 무엇을 믿고서 온전한 인생을 살아갈 수가 있을까요? 그보다 더 확실한 것은 이 피조세계에서 없다는 사실을 겸손하고도 정직하게 고백할 때에 사람들이 아브라함처럼 믿음의 의를 가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맥락에서 여호와께서 창조하시는 대속의 그리스도의 은혜와 성령님의 내주 역사하심을 믿을 수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3)  그들은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24:7b); 다음과 같이 네 가지의 경우에 사용이 되고 있는 표현입니다;

1)    첫째, 출애굽한 이스라엘 자손들을 시내 산 앞에서 여호와의 백성으로 삼으실 때에 사용하고 있습니다;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19:5-6). 선민은 여호와의 언약과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야 합니다. 그 뜻은 이방인을 구원하는 제사장나라 거룩한 백성이 되라는 것입니다. 이 대목은 하나님의 말씀의 뜻이 만민을 구원하는 제사장의 나라 곧 그리스도에게 있음을 벌써 밝히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2)    둘째, 레위기 제26장에서 다음과 같이 사용이 되고 있습니다; “내가 내 성막을 너희 중에 세우리니, 내 마음이 너희를 싫어하지 아니할 것이며, 나는 너희 중에 행하여, 너희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될 것이니라”(26:11-12). 성령님께서 성도들에게 임재하여 그 심령속에 성전을 짓는다는 예언의 말씀입니다(2:21-22, 고전6:19).

3)    셋째, 선지자 예레미야가 벌써 제11장에서 그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언약은 내가 너희 조상들을 쇠풀무 애굽 땅에서 이끌어내던 날에 그들에게 명령한 것이라. 곧 내가 이르기를, 너희는 내 목소리를 순종하고, 나의 모든 명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는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리라”(11:4). 여호와의 언약을 지켜야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4)    넷째, 선지자 에스겔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내가 그들에게 한 마음을 주고, 그 속에 새 영을 주며, 그 몸에서 돌 같은 마음을 제거하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 내 율례를 따르며, 내 규례를 지켜 행하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11:19-20). 하나님의 영이 성도들에게 성령님으로 내주 역사하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비결입니다.

결론적으로, 여호와의 성전 앞에 놓여 있는 무화과 두 광주리의 비유는 실로 획기적인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영원한 치욕과 영구한 수치를 당하도록 다윗왕조 유다 왕국을 멸하시고 그 백성들을 이방나라에서 망국의 백성으로 살아가도록 조치하시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구원할 계획을 시사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자면 무엇보다도 먼저 여호와신앙을 버리고 우상을 섬기며 세상적인 탐욕과 육신적인 정욕을 쫓아 살아간 선민 유대인들의 죄가 여호와의 용서를 받아야만 됩니다. 그 방법이 무엇일까요? 대속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그 죄짐을 대신 지심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자손들이 회개를 하고 다시 여호와께 돌아오게 된다는 내용을 말하고 있습니다(1:29).

그리고 선지자 예레미야는 내가 여호와인 줄 아는 마음을 그들에게 주어서 그들이 전심으로 내게 돌아오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24:7)고 기록함으로써 여호와의 영이 장차 전심으로 회개를 하고 성도로 살아가고자 하는 백성들에게 성령님으로 임재하여 내주 역사하실 것임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맥락에서 새 언약을 미리 보여주고 있는 본문을 깊이 음미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아무쪼록 많은 영적인 성취가 있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