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예레미야 강해 제131강(렘23:23-28)(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2. 9. 29. 23:14

예레미야 강해 제131(23:23-28)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터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8929()

 

거짓을 예언하는 선지자들의 행태에 대하여 여호와께서 하시는 말씀이 무엇인가?(23:23-28)

 

선지자 예레미야가 본문에 기록하고 있는 여호와의 말씀은 거짓 예언과 진짜 예언을 구별할 수 있는 하나의 현실적인 안목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 내용이 다음과 같습니다;

(1)  첫째로, 시공간에 갇혀서 살아가고 있는 인간은 여호와의 말씀을 대함에 있어서 습관적으로 창조주이신 여호와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에 대하여 깜빡 잊어버리고 있습니다. 그 점에 대한 여호와 하나님의 명쾌하신 지적이 다음과 같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나는 가까운 데에 있는 하나님이요, 먼데에 있는 하나님은 아니냐?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사람이 내게 보이지 아니하려고 누가 자신을 은밀한 곳에 숨길 수 있겠느냐?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천지에 충만하지 아니하냐?(23:23-24). 시공간을 초월하여 존재하시고 모든 것을 감찰하고 계시는 창조주 여호와 앞에 피조물인 인간은 그가 숨기고 있는 모든 것들이 환하게 드러날 따름입니다(4:12-13). 그러므로 자신이 말하고 있는 내용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도저히 숨길 수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들의 눈만 속일 수 있으면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내세워서 자신의 말이 의로운 것이라고 항변을 하고자 합니다.

(2)  둘째로,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얻기 위하여 거짓선지자들이 주로 사용하고 있는 방법이 꿈을 꾸었다는 것입니다(23:25). 그것은 간교하게도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마치 꿈속에서 여호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인 것처럼 꾸미고자 하는 것입니다(23:26). 그렇게 여호와께서 꿈속에서 환상처럼 자신에게 보여준 것이라고 주장하게 되면 그 옛날 진짜 선지자들의 경우와 별로 달라 보이지가 않습니다. 그만큼 꿈 이야기는 검증하기가 어렵습니다. 따라서 이제 남은 문제는 그 말을 듣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그것이 진짜 여호와의 예언의 말씀인지 아니면 거짓으로 꾸민 이야기인지를 식별하는 방법입니다. 그 점에 대하여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하여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그 판별방법을 가르쳐주고 계시는 것일까요?

(3)  셋째로, 그 판별의 방법은 놀랍게도 그 옛날 선민 유대인들의 조상들이 요단 강을 건너오기 전 모압 평지 싯딤에서 경험한 바알 신을 섬긴 사건과 다음과 같이 관련이 되고 있습니다(23:27a);

1)    당시 거짓선지자 발람과 미디안의 왕들이 음모를 꾸며서 미인계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영적으로 타락시켜 여호와의 징벌을 받도록 유도하고 있습니다(25:18, 31:1-8, 16). 먼저 재색을 겸비한 미디안 수르 왕의 공주 고스비를 밀파하여 시므온 지파의 젊은 족장 시므리를 성적으로 유혹하여 포섭합니다(25:6-8, 14-15). 같은 방법으로 아름다운 미디안의 여성들을 첩자로 사용하여 이스라엘 여러 지파의 젊은 족장들을 미인계에 걸려들게 합니다(25:4).

2)    그들은 이제 대담하게도 싯딤 인근에 있는 모압 여인들을 이스라엘 진영으로 보내어 젊은 장정들을 유혹합니다(25:1). 그리고 남쪽 십리쯤 위치하고 있는 브올 산으로 데리고 가서 바알 신에게 절을 하게 한 다음에 모압 여인들이 바알의 여사제가 되어 이스라엘 장정들과 육체적인 관계를 가지는 것입니다(25:2-3). 그 명분은 굉장히 종교적인 것입니다; “농사의 신인 바알이 사람들의 제사를 받고서 아내 신인 아세라와 신계에서 합방을 하고 땅에서는 사람들이 바알의 여사제들과 합방을 하게 되면 이 땅에 풍요와 번영이 찾아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문의 번성과 나라의 번영을 위하여 여사제들과 혼음을 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명분입니다.

(4)  넷째로, 그러한 우상문화의 보급에 대하여 여호와 하나님께서 크게 진노하십니다(25:3-9). 그 진노하심의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이 바로 거짓선지자들의 거짓 예언에 대하여 진노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이유와 같은 것입니다(23:27);

1)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출애굽한 이스라엘 자손들을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아 이 세상에 그들의 조상인 아브라함처럼 여호와신앙을 전파하고 그 결과 회개하는 족속들을 위하여 속죄의 제사를 드려주는 제사장나라로 일하게 하고자 하십니다(12:1-5, 19:4-6, 42:5-10). 그렇게 선민 이스라엘 자손들이 가는 길에는 창조주이신 여호와 하나님의 축복이 많은 족속들에게 흘러 넘쳐야 합니다(12:2-3). 그것이 그 옛날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처럼 여호와의 축복의 언약을 이행하는 선민 이스라엘 자손들의 책무입니다.

2)    그런데 현실은 그와 정반대입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현세적인 이익을 얻고 육신적인 쾌락을 즐기기 위하여 여호와의 축복의 언약이 아니라 농사의 신 바알을 섬기고 여사제들과 혼음을 즐기는 그러한 우상문화를 선택하고 만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알과 같은 우상을 섬김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얻고자 하는 것과 창조주이신 여호와의 언약을 지켜서 얻고자 하는 것의 차이가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아는 것이 거짓 예언과 진짜 예언의 차이를 확실하게 식별할 수 있는 방법이 됩니다.

3)    그 점에 대하여 선지자 예레미야는 여호와의 말씀으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조상들이 바알로 말미암아 내 이름을 잊어 버린 것같이 내 백성으로 내 이름을 잊게 하려 함이로다”(23:27). 하나님의 이름인 여호와는 두가지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습니다(3:14); ①하나는, 만물보다 먼저 계신 스스로 존재하시는 창조주라는 것입니다(1:1-3, 15). 그러므로 창조주의 영광과 권능은 오로지 여호와 하나님께 속하고 있습니다. ②또 하나는, 피조물은 스스로 계시는 창조주를 어찌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호와께서 주시지 아니하시면 사람들은 그 어떠한 방법을 사용하더라도 이 세상의 구원과 영생의 구원을 도저히 얻을 수가 없습니다(3:13-17, 6:38-40, 53-54, 17:3, 4:12).

4)    그와 같은 자명(自明, 스스로 명백한 것)한 하나님의 진리를 깜빡 잊어버리게 하는 것이 거짓선지자들의 거짓 예언입니다. 거짓선지자들은 이 세상의 풍요와 번영을 얻기 위해서 바알 신을 섬기고 바알의 여사제들과 합방을 해야만 한다고 역설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우상을 섬기고 음란한 생활을 하게 되면 이 세상에서 번영을 누리고 쾌락과 행복을 맛볼 수가 있다고 선전하고 있습니다. 어떤 거짓선지자들은 사람들에게 현세적인 행복과 즐거움을 주기 위하여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꿈으로 환상으로 그러한 예언의 말씀을 주셨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무조건 마지막 선민의 나라 다윗왕조의 유다 왕국에게 전쟁의 승리를 주신다고 주장하고 있는 거짓선지자들도 그러한 시류에 편승하고 있는 것입니다(23:25-27, 28:1-4). 그것이 여호와의 이름을 도용하고 검증이 불가능한 매우 주관적인 꿈을 빙자하여 권력자의 비위를 맞추고 백성들을 미혹하고 있는 거짓선지자들의  혹세무민의 방법론입니다.

5)    그 말에 속아서 또는 속고 싶어서 사람들이 경건하고도 엄격한 여호와의 진리의 말씀을 버리고 편리한 우상문화를 선호하고 또한 거짓 예언을 선택하고 마는 것입니다. 그 결과 여호와의 처벌이 어떻게 이 세상에 임하게 되는 것일까요? 계속 그렇게 잘못 선택하고 거짓 예언을 말하며 또한 그것을 지지하게 되면 여호와께서는 거짓선지자는 물론 그 추종자들까지 모두 역사적으로 심판하시겠다고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꿈을 꾼 선지자는 꿈을 말할 것이요, 내 말을 받은 자는 성실함으로 내 말을 말할 것이라. 겨가 어찌 알곡과 같겠느냐?”(23:28), “둘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시니”(13:30).

이상과 같은 사실들을 염두에 두고서 이제부터 본문의 말씀을 한 구절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그 깊은 의미와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파악해봅니다;

첫째로,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나는 가까운 데에 있는 하나님이요, 먼데에 있는 하나님은 아니냐?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사람이 내게 보이지 아니하려고 누가 자신을 은밀한 곳에 숨길 수 있겠느냐?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천지에 충만하지 아니하냐?(23:23-24); 다음과 같이 세 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나는 가까운 데에 있는 하나님이요, 먼데에 있는 하나님은 아니냐?(23:23);

1)    피조물인 사람은 시공간적인 제약을 받고 있습니다. 시간적으로는 당장의 현안문제의 해결이 우선입니다. 그리고 공간적으로는 자신의 시야에 들어오는 사람들 그리고 자신이 인식하고 있는 친지들을 돌보는 것이 우선입니다. 기타 먼 곳에 떨어져 있거나 미래에 마주칠 사람들에 대해서는 나중의 문제입니다. 그들까지 일일이 챙기고 돌볼 수 있는 안목과 여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2)    그렇게 시공간적인 제약을 가지고 살다 보니 사람들이 여호와 하나님에 대해서도 기본적으로 잘못 인식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당장 시공간적으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들에 대하여 여호와 하나님 역시 인식하지 아니하고 계시는 것으로 단정하고 마는 것입니다. 그것이 엄청난 착각입니다. 그러한 잘못된 인식 때문에 감히 거짓선지자들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제멋대로 거짓 예언을 만들어 백성들에게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3)    따라서 여호와께서 일갈을 하십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나는 가까운 데에 있는 하나님이요, 먼데에 있는 하나님은 아니냐?(23:23). 지금 너와 대면하고 있는 여호와 하나님은 창조의 신이며 영이시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동시에 통찰하시면서 사람 앞에 서 계십니다. 그리고 사람이 어떠한 간구를 하면서 무엇을 요청하더라도 그것을 기도자의 이익만을 생각하여 판단하시지 아니하십니다.

4)    여호와께서는 창조주이시므로 모든 피조물을 공정하게 돌보고 그 생명을 전부 살리고자 하십니다. 그것이 창조주의 공의의 정신입니다. 따라서 성도의 기도와 관련이 되고 있는 모든 관계당사자의 형편과 이익을 하나같이 동일하게 살피고 계십니다. 그 결과 모두의 생명을 살리는 방향으로 의사결정을 하십니다. 그와 같은 맥락에서 자신을 희생하여 아버지 하나님의 공의를 이루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사역과 대속의 십자가를 이해할 수 있다고 하겠습니다(3:13-17, 17:3, 12:1-2).

(2)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사람이 내게 보이지 아니하려고 누가 자신을 은밀한 곳에 숨길 수 있겠느냐?(23:24a);

1)    사람들은 여호와 하나님도 피조물처럼 눈에 당장 보이지 아니하면 모르시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특히 외식적(外飾的)인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자들이 그러합니다. 또한 거짓선지자들이 그러합니다. 따라서 자신의 본 모습을 사람들의 시야에서 감추듯이 그렇게 여호와 앞에서도 가식적으로 행동을 하려고 합니다. 그렇게 습관이 들게 되면 나중에는 신앙생활에 있어서 상습적인 이중인격자가 되고 맙니다. 사람들 앞에서는 신앙생활의 모범이 되는 것처럼 행동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마음속은 다릅니다. 자신의 내면 깊숙한 곳을 여호와 하나님께서 감찰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2)    그들은 사람들의 눈을 속여서 거룩한 영적 지도자인 척 행동하면서 속으로는 자신의 세상적인 이익을 얻고자 합니다. 외식적인 신앙인들 및 거짓선지자들이 노리고 있는 세속적인 이익이란 종교적인 권력의 자리일 수도 있으며 거짓 예언을 통하여 자신의 영적인 권위를 교묘하게 높이고자 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시도는 참으로 내면적으로 추악한 것입니다. 사실은 그 진면목이 백일하에 여호와 하나님 앞에 드러나고 있습니다(4:12-13).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짓된 영적 지도자들이 그러한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참으로 비참한 것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사람이 내게 보이지 아니하려고 누가 자신을 은밀한 곳에 숨길 수 있겠느냐?(23:24a). 

(3)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천지에 충만하지 아니하냐?(23:24b); 창조주 여호와께서는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그냥 내버려 두신 것이 아닙니다. 그 사실을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습니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1:20), “하나님도 한분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4:6). 선지자 예레미야는 진작에 여호와의 말씀으로 그러한 사실을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천지에 충만하지 아니하냐?(23:24b)고 여기서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둘째로,내 이름으로 거짓을 예언하는 선지자들의 말에 내가 꿈을 꾸었다 꿈을 꾸었다고 말하는 것을 내가 들었노라. 거짓을 예언하는 선지자들이 언제까지 이 마음을 품겠느냐? 그들은 그 마음의 간교한 것을 예언하느니라”(23:25-26); 다음과 같이 두 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1)  내 이름으로 거짓을 예언하는 선지자들의 말에 내가 꿈을 꾸었다 꿈을 꾸었다고 말하는 것을 내가 들었노라. 거짓을 예언하는 선지자들이 언제까지 이 마음을 품겠느냐?”(23:25-26a);

1)    거짓선지자들이 백성들에게 자신의 말이 여호와께로부터 직접 받은 예언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진위여부를 참으로 검증하기가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여호와께서는 영이시므로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 아니하십니다. 더구나 육신을 가진 피조물인 사람들이 영이시며 거룩하신  창조주의 영광 앞에 설 수가 없습니다. 직접 여호와의 얼굴을 대면하게 되면 그 체질이 녹아버리고 죽고 말기 때문입니다(33:20, 벧후3:12).

2)    그러므로 선지자들도 환상이나 꿈 가운데 여호와의 음성을 듣고 그 모습을 어렴풋이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사람의 능력으로 검증할 수가 없다고 하는 것이 거짓선지자들이 교묘하게 거짓 예언의 권위를 주장할 수 있는 방편이 되고 있습니다. 그들이 꿈 가운데 여호와를 만나고 직접 그러한 예언의 말씀을 들었다고 강하게 주장하게 되면 그것이 백성들에게 먹힌다는 것입니다.

3)    그러한 맥락에서 거짓선지자들이 수도 없이 꿈속에서 여호와께로부터 직접 받은 예언의 말씀이라고 주장하면서 허무맹랑한 꿈 이야기를 가지고 성령님의 음성이라고 혹세무민을 계속하고 있습니다(23:25). 그렇지만 여호와께서는 그러한 잘못에 대하여 그냥 버려 두지 아니하시고 이제 철퇴를 가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거짓을 예언하는 선지자들이 언제까지 이 마음을 품겠느냐? ”(23:26a). 그 방법이 과연 무엇일까요? 

(2)  그들은 그 마음의 간교한 것을 예언하느니라”(23:26b);

1)    진짜 선지자와 거짓선지자는 그 마음에 소원하고 있는 것이 다릅니다. 진짜 선지자는 여호와의 진실한 종이므로 정직하게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말씀을 백성들에게 대언하는 것을 자신의 사명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따라서 선지자의 신분으로 인하여 그 어떠한 세상적인 명성이나 지위를 얻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와 달리 거짓선지자의 입장은 다릅니다; “그들은 그 마음의 간교한 것을 예언하느니라”(23:26b).

2)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①첫째, 현재 자신이 누리고 있는 종교적인 지위와 권력을 거짓 예언을 세간에 퍼뜨림으로써 공고히 하고자 합니다. ②둘째, 왕이나 귀족들이 원하고 있는 정치적인 명분을 종교적인 거짓 예언을 통하여 제공하여 줌으로써 자신이 속한 교단이나 가문에 대한 정치적인 지지를 계속 얻어내고자 하는 것입니다.

3)    ③셋째, 자신의 눈앞에서 진짜 선지자들이 여호와의 말씀을 대언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은 본래 양약과 같아서 백성들의 입맛에 쓴 것입니다. 따라서 거짓선지자들은 그 점에 착안하여 백성들의 입맛에 달콤한 거짓 예언을 만들어 여호와의 이름으로 포장하여 선포를 합니다. 그 일을 통하여 진짜 선지자의 입을 봉하고 탄압하며 다수의 지지를 얻어서 자신의 영적인 권위를 높이고 자신의 교권을 확실하게 지키고자 하는 것입니다.

셋째로,그들이 서로 꿈꾼 것을 말하니 그 생각인즉, 그들의 조상들이 바알로 말미암아 내 이름을 잊어버린 것같이, 내 백성으로 내 이름을 잊게 하려 함이로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꿈을 꾼 선지자는 꿈을 말할 것이요, 내 말을 받은 자는 성실함으로 내 말을 말할 것이라. 가 어찌 알곡과 같겠느냐?”(23:27-28); 역시 다음과 같이 두 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1)  그들이 서로 꿈꾼 것을 말하니 그 생각인즉, 그들의 조상들이 바알로 말미암아 내 이름을 잊어버린 것같이, 내 백성으로 내 이름을 잊게 하려 함이로다”(23:27);

1)    그 마음속에 있는 간교한 의도가 문제입니다. 거짓선지자가 꿈속에서 여호와를 만나 그러한 예언의 말씀을 들었다고 주장하면서 거짓 예언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지 판별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거짓 예언을 여호와의 이름으로 세간에 퍼뜨림으로 말미암아 그가 얻고자 하는 세속적인 이익이 따로 있습니다. 그것을 파악하게 되면 그 예언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금방 식별이 된다는 여호와의 지혜의 말씀입니다(23:26-27). 그러한 사례를 그 옛날 바알 신을 섬긴 사건에서 쉽게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2)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모압 평지에 모아 싯딤에 진을 치게 하고 후계자 여호수아를 세워서 요단 강을 건너가게 하고자 준비를 하고 있던 시절의 일입니다. 아람의 무당인 거짓선지자 발람이 미디안 왕들에게 이스라엘 군대를 자폭하게 만들 수 있는 교묘한 꾀를 알려주고 재물을 챙깁니다(31:8, 16). 발람의 계책에 따라 미디안 왕들은 미인계를 사용하여 이스라엘 지파의 젊은 족장들을 성적으로 타락시키고 있습니다(25:4, 6, 14-15). 그 다음에는 모압 여인들을 동원하여 많은 이스라엘 장정들을 유혹하여 브올 산에 올라가서 바알 신에게 제사를 드리고 여사제가 된 모압 여인들과 혼음을 즐기게 만들고 맙니다(25:1-3).

3)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신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들을 전염병으로 전멸시키고자 하십니다(25:8-9). 거짓선지자 발람과 그 계책을 사용한 미디안 왕들의 책략이 완전히 성공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 마음의 간교함을 통찰하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시켜 미디안 여인은 물론 그녀들에게 포섭된 젊은 족장들 그리고 브올 산에 올라가서 바알을 섬긴 모든 장정들을 색출하여 처형하라고 지시하십니다(25:3-5). 그리고 정예병을 파견하여 미디안 5왕을 치고 발람을 죽이라고 명령하십니다(25:16-18, 31:1-8). 그 종교적인 정화운동에 앞장을 선 비느하스가 훗날 부친 엘르아살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의 대제사장이 됩니다(25:7-8, 24:33).  

4)    거짓선지자 발람과 그의 계책을 많은 재물을 주고 사서 사용한 미디안 왕들의 마음속 의도는 하나입니다; “그들은 모세의 막강한 이스라엘 군대와 맞서서 전투를 벌일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나 음모를 꾸며서 계책을 잘 사용하면 이스라엘 장정들을 성적으로 타락시키고 여호와의 진노로 멸망을 시킬 수가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것이 두가지 있습니다; ①하나는, 자신의 백성들이 여호와신앙을 버리고 이방신상과 우상을 섬기는 것입니다. ②또 하나는, 선민들이 여호와께서 원하시는 경건하고도 거룩한 영적인 삶이 아니라 세상적인 탐욕과 육신적인 정욕을 쫓아 제마음대로 이방인들처럼 음란한 생활을 즐기는 것입니다. 그 점에 착안하여 악한 세력들이 선민 이스라엘을 무너뜨리고자 합니다.

5)    이제 선지자 예레미야의 시대에 있어서는 거짓선지자들이 유다 왕국의 왕과 귀족들 그리고 백성들에게 거짓 예언을 퍼뜨리고 있습니다. 그 내용은 크게 보아 두가지입니다; ①하나는, 이방신상과 우상을 섬기며 세상적인 탐욕과 정욕을 쫓아 이방인처럼 살아가고 있는 유다 왕국 말기의 선민들입니다. 그들의 잘못에 대하여 선지자 예레미야는 여호와의 책망을 강력하게 전하고 있지만 거짓선지자들은 결코 질책하지를 않습니다. ②또 하나는, 거짓선지자들은 단지 선민이라는 이유로 여호와께서는 그들을 구원하고자 신바벨론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주시기로 하셨다는 것입니다(28:1-4). 그것은 다윗왕조 유다 왕국의 영적인 잘못에 대해서는 외면을 하고 만 것입니다.

6)    그러한 거짓 예언은 유다의 왕과 귀족들을 만족시키고 있습니다. 그들은 거짓 예언을 받아 들이고 예레미야와 우리야가 전하고 있는 진짜 예언의 말씀을 배척하고 맙니다. 그들은 우상문화와 기복신앙에 빠져서 여호와의 말씀의 뜻을 완전히 잊어버린 것입니다; “그들이 서로 꿈꾼 것을 말하니 그 생각인즉, 그들의 조상들이 바알로 말미암아 내 이름을 잊어버린 것같이, 내 백성으로 내 이름을 잊게 하려 함이로다”(23:27). 그 결과는 참혹합니다. 다윗왕조의 유다 왕국이 여호와 하나님의 버림을 받아 신바벨론제국의 군대에 의하여 멸망을 당하게 됩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이 선민의 땅 가나안에서 살지를 못하고 쫓겨나서 이방 땅에서 망국의 백성으로 천대를 받으면서 살아가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로 말미암아 이 세상에서는 선민이 사라지고 모두가 이방인이 되어 버리고 맙니다.

(2)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꿈을 꾼 선지자는 꿈을 말할 것이요, 내 말을 받은 자는 성실함으로 내 말을 말할 것이라. 가 어찌 알곡과 같겠느냐?”(23:28);

1)    거짓선지자 뿐만 아니라 거짓 예언을 받아 들인 유다 왕국의 왕과 귀족들 그리고 백성들이 모두 한꺼번에 멸망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 사건은 거짓선지자와 그들의 추종자들이 동일하게 여호와의 역사적인 심판에 들어가게 되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일반성도들이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영적인 지도자가 자신들에게 거짓 예언을 전했으며 그 길을 잘못 인도하였다고 항변을 해보아야 정상참작이 되지를 못하기 때문입니다.

2)    그렇게 겨와 알곡을 구별하시기 위하여 추수 때까지 계속 지켜 보시는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몰라서 그냥 두고 보시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그렇게 지켜 보시는 그 시간이 한편으로는 성도들이 정신을 차리고 무엇이 거짓 예언이며 참 예언인지를 식별해야 하는 중요한 기간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잘못에 대하여 회개를 하고 이제부터 여호와의 진실한 종으로 살아가겠다고 결심을 해야 하는 때입니다. 그와 같은 의미에서 예레미야가 여기서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꿈을 꾼 선지자는 꿈을 말할 것이요, 내 말을 받은 자는 성실함으로 내 말을 말할 것이라. 가 어찌 알곡과 같겠느냐?”(23:28)고 기록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결론적으로, 겨와 알곡을 반드시 구별하시겠다는 여호와의 말씀을 명심해야 합니다. 검증을 할 수가 없는 영적인 일이라고 하여 꿈에 받은 여호와의 말씀이라고 짐짓 주장하면서 거짓 예언을 함부로 전파해서는 안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모두 지켜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 거짓 예언과 진짜 예언을 어떻게 구별하면 되는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전전 번 강해에서 설명한 바 여호와의 말씀에 비추어 보는 방법 외에 또 하나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 내용은 그러한 예언을 전하고 있는 자가 그로 말미암아 무엇을 얻고자 하고 있는지를 살펴보라는 것입니다.

그 옛날 모세의 시대에는 바알 신을 섬기도록 이방여인들을 이스라엘 진지로 보내어 장정들을 유혹함으로써 여호와의 진노로 이스라엘 자손들을 전멸의 위기로 몰아넣고 있는 거짓선지자 발람과 미디안 왕들이 있습니다. 예레미야 시대에도 거짓선지자들이 그러한 우상 섬김과 음란한 일에 대하여 언급을 하지 아니하고 여전히 여호와께서는 선민의 나라를 보호하시고 구원하여 주신다고만 선전을 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선지자 예레미야는 유다 왕국의 왕과 백성들이 우상을 버리고 여호와신앙을 회복하지 아니하면 신바벨론에 의하여 멸망을 당하게 된다고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입에는 쓰지만 선민의 나라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따라서, 자신의 입맛에 맞는 말씀만을 취하여 자신의 생활을 합리화하지 말아야 합니다. 성경말씀의 전체적인 맥락에 비추고 누가 여호와의 예언이라고 주장하더라도 그것이 우상문화와 육신적인 쾌락을 용인하고 있는 것이지 아니면 여호와 하나님 앞에 두려운 마음으로 자신을 바로 세우고자 하는 것인지를 식별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아무쪼록 그러한 분별력을 가지시는 성숙한 신앙인들이 모두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