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강해 제130강(렘23:20-22)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터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8년 9월 28일(금)
거짓선지자들의 또 하나의 특징이 무엇이며 여호와께서는 그들을 반드시 어떻게 처벌하시고 어떻게 고쳐서 사용하실 것인가?(렘23:20-22, 계20:10)
본문에서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는 내용은 두가지의 해석이 가능합니다;
(1) 하나는, 여호와의 진노하심으로 보이는 그것이 사실은 나같이 완악한 자를 고쳐서 구원의 일꾼으로 사용하기 위한 과정이라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진노가 내 마음의 뜻하는 바를 행하여 이루기까지는 그치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끝날에 그것을 완전히 깨달으리라”(렘23:20). 그것은 멸망의 심판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영생의 구원을 주기를 원하시는 여호와의 뜻을 벌써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요3:13-17).
(2) 또 하나는, 거짓 예언을 진짜 예언인 줄 알고서 고집스럽게 평생을 바쳐서 자발적으로 온세상에 전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의 열심을 보면 정말 아깝다는 것입니다(렘23:21). 만약 그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정확하게 만나고 그 앞에서 인간의 좁은 생각과 어그러진 길을 선택하여 달려간 그 동안의 잘못에 대하여 진심으로 회개를 하고 앞으로 진짜 복음의 일꾼으로 거듭난 삶을 살아간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것입니다(렘23:22). 그러한 여호와의 마음을 모르고 끝까지 완악하게 대적행위를 하게 되면 거짓선지자가 되어 어쩔 수 없이 영벌에 처해진다는 것입니다(계20:10).
여기서 창조주 여호와를 만나서 그 앞에서 청산을 해야만 하는 것은 크게 보아 두가지입니다;
(1) 첫째가 인간의 좁은 생각입니다. 그것은 창조주의 생각과 능력을 인간의 것과 별로 다르지 아니하다고 가정하고 있는 속 좁은 생각입니다. 인간의 이성과 지성을 가지고 얼마든지 신의 경지를 판단하고 비판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그러한 인본주의적인 신관을 청산해야만 합니다. 만약 창조주의 전능하심을 헛된 신화에 불과한 기적과 이적들이므로 그것을 제거해야만 한다고 계속 주장한다면 그것은 초월적인 창조주의 역사섭리를 인간의 한계 안에 가두어 버리는 어리석음을 자초하게 됩니다. 그것은 신앙생활이 아니라 과학적인 탐구생활에 불과한 것입니다. 처음부터 그렇게 신의 영역을 인정하지 아니하고 있다고 한다면 그 후유증은 심각합니다. 인간이 스스로 신이 되고자 하는 자력구원의 방법을 끊임없이 인위적으로 찾아 나서고 말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는 사람이 만든 우상으로 창조주 여호와를 대신하고자 하는 것으로 나타날 뿐입니다. 그렇다면 과학을 의지하여 살지 구태여 과학을 초월하는 창조주의 영의 세계를 찾아 나설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탐구하는 자들은 애초부터 사람이 만들어 내고 있는 영생을 추구하고 있는 것이지 생명의 주인이 되시는 창조주 하나님을 발견하고자 하는 겸손한 안목이 결여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창조주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인 영생을 얻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태초의 창조의 법칙을 자력으로 깨달아서 스스로 영생을 쟁취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과연 가능할까요?
(2) 둘째가 선지자를 대신하고자 하는 바리새인들의 사고방식입니다. 바리새인들의 기본적인 생각은 창조주 여호와께서 친히 성령의 감동으로 선지자를 세워 하나님의 말씀을 그에게 위탁하여 백성들에게 대언하도록 조치하여 주지 아니하신다면 그 일을 자신들이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을 연구함으로써 얼마든지 대신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과연 가능할까요? 언뜻 보기에는 가능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학문적인 노력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율법으로 연구하여 생활에 적용을 한다고 하면 그것은 사람들에게 율법생활을 강제하는 효과만을 발생시키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는 비극적인 신앙생활입니다.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는 소위 외식적인 율법생활에 머물고 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신앙생활의 기본은 여호와 하나님 앞에 서있는 피조물인 인간의 두려움과 죄의식에서 출발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영적인 체험과 깨달음이 기본적으로 없다고 한다면 창조주이신 여호와의 도우심으로 신앙생활을 영위하지 못하는 치명적인 약점을 지니게 되는 것입니다. 그 결과 죄인을 의인으로 만들어 바른 신앙생활을 하도록 만들어 주시는 여호와의 역사가 그들에게 함께할 수가 없습니다(눅5:32, 18:9-14). 자신들이 이 세상에서 율법 선생이며 가장 의로운 자라고 자랑하고 있는데 어떻게 그들에게 죄인에게 주어지는 여호와의 말씀의 은혜가 역사를 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상과 같은 사실들을 염두에 두고서 이제부터 본문의 말씀을 한 구절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그 깊은 의미와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파악해봅니다;
첫째로, “여호와의 진노가 내 마음의 뜻하는 바를 행하여 이루기까지는 그치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끝날에 그것을 완전히 깨달으리라”(렘23:20); 다음과 같이 두 부분을 나누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여호와의 진노가 내 마음의 뜻하는 바를 행하여 이루기까지는 그치지 아니하나니”(렘23:20a);
1) 여호와의 진노와 징계의 목적이 무엇일까요? 그것을 온전히 깨달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인생살이가 힘들고 살아갈수록 어려움과 고난이 겹쳐 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앞길을 헤쳐 나가야 할지 아득합니다. 따라서 자신에게만 고난의 세월을 계속 주시는 것 같아서 창조주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원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도대체 내가 무엇을 그렇게 잘못하였기에 내 인생이 이렇게 꼬이고 하나님의 진노가 계속 찾아오고 있는 것일까요? 어째서 여호와께서 나에게 이토록 분노하시며 나의 인생을 고난 가운데로 인도하고 계시는지 그 이유를 정녕 알 수가 없습니다.
2) 그런데 여호와깨서는 선지자 예레미야를 보내어 나에게 “여호와의 진노가 내 마음의 뜻하는 바를 행하여 이루기까지는 그치지 아니하나니”(렘23:20a)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뜻은 내가 원하는 인생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원하시는 인생을 살아갈 때까지 여호와의 진노를 계속 나의 앞길에 퍼붓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실로 나에게 재앙일까요? 아니면 구원으로 인도하는 채찍일까요? 신명기에 기록이 되어 있는 40년 광야생활의 이유와 목적을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3) 참고로, 모세의 기록이 다음과 같습니다; “내가 오늘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법도와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지 않도록 삼갈지어다. 네가 먹어서 배부르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주하게 되며, 또 네 소와 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염려하노라. 여호와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이끌어내시고, 너를 인도하여 그 광대하고 위험한 광야 곧 불뱀과 전갈이 있고 물이 없는 간조한 땅을 지나게 하셨으며, 또 너를 위하여 단단한 반석에서 물을 내셨으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하심이었느니라”(신8:11-16). 다음과 같이 풀이를 해봅니다;
4) 여호와께서는 자신의 죄를 깨닫지도 못하고 세상적인 탐욕과 육신적인 정욕을 쫓아 제 마음대로 살아가고 있는 인생에게 진노하시며 고난의 채찍을 휘두르고 계십니다. 그것은 부디 그 잘못을 깨닫고 여호와께 돌아오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 목적을 이루실 때까지 계속 경고하시고 채찍을 가하시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본문이 바로 “여호와의 진노가 내 마음의 뜻하는 바를 행하여 이루기까지는 그치지 아니하나니”(렘23:20a)라고 하겠습니다.
(2) “너희가 끝날에 그것을 완전히 깨달으리라”(렘23:20b); 여호와의 진노가 언제 끝나게 될까요? 그것은 당사자가 어째서 여호와께서 그토록 내게 진노하셨는지 그 이유와 목적을 정확하게 깨닫게 되는 그때입니다. 여호와 앞에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정직하게 고백하면서 이제부터 제 마음대로 세상적인 탐욕과 정욕을 쫓아서 우상을 섬기며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신실하게 여호와의 종으로 살아가겠다고 결단하는 그때를 말합니다. 그때부터는 자신의 이익만을 도모하는 인생이 아니라 여호와의 말씀을 온세상에 전파하고 여호와신앙의 모범을 보여주는 인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실은 여호와께서 선택한 거룩한 백성의 사명이며 역할입니다. 다윗왕조의 멸망으로 이 세상에서 선민이 사라지고 나면 그때부터는 모든 사람들이 여호와의 제사장이며 선지자로서의 삶을 살아가야만 합니다(사66:20-21, 벧전2:9). 그것이 새 언약에 의거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가는 주님의 제자 곧 성도의 삶이라고 하겠습니다.
둘째로, “이 선지자들은 내가 보내지 아니하였어도 달음질하며, 내가 그들에게 이르지 아니하였어도 예언하였은즉”(렘23:21); 역시 다음과 같이 두 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이 선지자들은 내가 보내지 아니하였어도 달음질하며”(렘23:21a);
1) 여호와께서 선지자를 세우시는 방법에 대하여 예레미야의 경우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베냐민의 땅 아나돗의 제사장들 중 힐기야의 아들 예레미양의 말이라. 아몬의 아들 유다 왕 요시야가 다스린 지 13년에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였고, 요시야의 아들 유다의 왕 여호야김 시대부터 요시야의 아들 유다 왕 시드기야의 11년말까지 곧 5월에 예루살렘이 사로잡혀 가기까지 임하니라”(렘1:1-3). 선지자가 되는 요체는 여호와의 말씀의 임재입니다. 즉,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여야 선지자로 세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2) 여호와의 세움을 받은 선지자는 자신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을 사람들에게 정직하게 그리고 담대하게 대언할 따름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함부로 덧붙이거나 자신의 마음에서 생각나는 그것을 제멋대로 여호와의 말씀이라고 선포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여호와의 종이 주인이 맡기신 말씀이 아니라 종의 생각을 함부로 말하는 것이므로 주의하여야 합니다.
3) 그런데 선지자 예레미야의 시대 곧 다윗왕조 유다 왕국의 말기에 여호와의 말씀이 당사자에게 임재하여 그 말씀을 백성들에게 대언하도록 하는 하나님의 조치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선지자 활동을 하고 있는 자들이 많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들이 소위 거짓 선지자들입니다(렘20:6, 27:9-10, 28:1-4). 그들은 자신들의 경험적인 신앙과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것들을 여호와의 말씀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영지주의자들의 깨달음과 같은 것이며 고행하는 수도승들의 깨달음의 전파와 같은 것입니다.
4) 한마디로, 자력적인 깨달음의 종교에서 득도한 자들이 열심히 그 심득(心得, 마음속의 깊은 깨달음)을 전파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은 창조주 여호와께서 선지자를 선택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도록 위탁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창조주 여호와로부터 말씀으로 주어진 영적인 선물이 아니라 피조물인 인간이 스스로 자신의 고행과 노력으로 얻은 심득을 사람들에게 전달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쉽게 표현하자면 진짜 선지자의 경우는 신본주의적인 것이고 가짜 선지자의 경우에는 인본주의적인 것입니다.
5) 그런데 그냥 창조주 여호와로부터 선물로 받는 것보다는 자신의 고행과 수련을 통하여 받고자 하는 그것이 더욱 인간적으로는 종교적인 열심에 속합니다. 그러므로 고행과 금욕주의자들이 스스로 진리를 깨닫고자 얼마나 열심인지 모릅니다. 그리고 자신이 깨달은 경지를 일방인들에게 선포하고 또한 가르침을 베풀고자 얼마나 적극적인지 모릅니다. 그 점을 본문에서는 “이 선지자들은 내가 보내지 아니하였어도 달음질하며”(렘23:21a)라고 알기 쉽게 표현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2) “내가 그들에게 이르지 아니하였어도 예언하였은즉”(렘23:21b);
1) 우주의 법칙과 인생의 비밀을 깨닫고자 고행하며 금욕주의 생활에 힘쓰고 있는 자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그들은 태초에 어떠한 법칙과 에너지에 의하여 우주가 탄생하였으며 인간이 이 세상에 존재하게 되었는지 참으로 궁금하게 생각하면서 모든 이성적인 노력과 고행 그리고 금욕적인 명상을 통하여 그 비밀을 풀고 깨닫고자 합니다. 그 결과 스스로 깨우친 그 깨달음을 자신의 목숨보다 더 소중하게 여깁니다. 그 득도의 기쁨은 이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며 그 진리의 이치와 자신이 본 그 놀라운 피안의 세계를 사람의 말로써는 도저히 표현할 수가 없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깨달음에 의지하여 이 세상의 종말과 다가올 미래에 대하여 예언활동을 개시합니다.
2) 그와 흡사하게 여호와를 섬기는 신정국가 다윗왕조의 유다 왕국에서는 거짓선지자들이 등장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여호와 앞에서 겸손하게 그 종으로 말씀을 위탁 받은 바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성들 앞에서 선지자활동을 하고자 합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백성들에게 전하고 있는 말씀은 어떠한 성격의 것일까요? 그것은 여호와의 말씀이나 예언이 아닙니다. 반면에 그것은 유다 왕국의 왕과 권력자들이 선지자들로부터 꼭 듣고 싶어하는 종류의 예언입니다. 다윗왕조 말기의 왕인 여호야김과 시드기야의 시대에는 메소포타미아의 패권을 장악한 신바벨론제국이 유다 왕국의 내정에 심하게 간섭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유다 왕국은 거의 속국과 같은 처지입니다. 따라서 다윗왕조의 유다 왕국은 신바벨론으로부터 간절하게 자주독립을 원하고 있습니다.
3) 결국 독립전쟁을 벌여야만 하는데 과연 약소국인 유다 왕국이 패권국인 신바벨론을 이길 수가 있을까요? 100년전에는 유다 왕 히스기야가 패권국 앗수르제국의 침략군을 물리친 적이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신위적인 도우심이 나타났기 때문입니다(왕하19:34-36). 이번에도 그러한 기적이 발생할 수가 있을까요? 아나돗 출신의 선지자 예레미야나 기럇여아림 출신의 선지자 우리야는 전쟁을 하면 유다 왕국이 망하고 만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렘26:20-24, 38:1-6). 그러나 다른 선지자들은 이구동성으로 유다 왕국이 필승을 하게 된다고 예언하고 있습니다.
4) 예를 들면, 거짓선지자 하나냐의 경우에는 자신이 직접 여호와로부터 받은 말씀이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렘28:1-4). 예루살렘성전의 총감독인 바스훗 제사장도 하나냐처럼 주장하면서 선지자 예레미야를 탄압하고 있습니다(렘20:1-6). 그렇게 누가 검은 고양이이고 누가 흰 고양이인지 구별이 어려운 시대가 예레미야 시대입니다. 그런데 여호와께서는 “내가 그들에게 이르지 아니하였어도 예언하였은즉”(렘23:21b)이라고 거짓 예언을 전파하고 있는 자들이 똘똘 뭉쳐서 참으로 진짜 선지자를 박해하고 처벌하는데 열심이라고 그 인간적인 열심에 대하여 놀랍다고 말씀하십니다. 그와 같은 사실을 훗날 사도 바울이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롬10:2-3)고 더 알기 쉽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셋째로, "그들이 만일 나의 회의에 참여하였더라면, 내 백성에게 내 말을 들려서 그들을 악한 길과 악한 행위에서 돌이키게 하였으리라”(렘23:22);
(1) 거짓선지자들이 자기들끼리 단합하여 거짓 예언을 서로 옳다고 열심히 유다 왕국에 전파하고 있습니다(렘5:31, 20:6, 롬1:32). 그리고 그것이 아니라고 여호와의 예언을 정확하게 대언하고 있는 선지자 우리야와 예레미야를 탄압하는데 열과 성을 다하고 있습니다(렘20:1-3, 26:20-24). 그 모습을 보시고 여호와께서는 그들이 하나님 앞에 스스로 죄인임을 깨닫고 회개함으로써 겸손한 여호와의 종으로 살아갔더라면 다윗왕조 유다 왕국이 멸망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게 되었을 것이라고 안타까워하십니다(렘23:22).
(2) 그렇게 종교심이 많고 예언을 전파하는데 인간적인 열심이 대단한 유대인들입니다. 그들이 랍비 사울처럼 환상 가운데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을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만나고 그 만민구원의 하나님의 복음의 말씀을 위탁 받아 온세상에 전하는 소위 새로운 여호와의 종이며 그리스도의 제자인 이방인 사도로 살아갔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행9:1-22) 자신의 동족만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온세상을 구원하는 선민 유대인들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선민 유대인들이 스스로 율법을 사람들 앞에 잘 지켜서 종교적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을 쟁취한다고 하는 이른바 ‘외식주의’(外飾主義, 겉만 번지르르하게 꾸미는 것) 신앙생활에 빠져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선지자 예레미야 시대에 있어서 거짓선지자들과 유다 왕국의 백성들이 구원이란 여호와 하나님께서 신위적으로 주시는 선물이 아니라 자신들의 율법적인 종교단체에서 영적인 지도자들이 줄 수 있는 일종의 자격증 정도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참으로 유다 왕국 말기의 비극이며 오늘날 현대교회의 많은 인본주의적 구원론에 빠져 있는 성도들의 비극이기도 합니다. 피조물에 불과하며 시공간에 묶여 있는 육신을 가진 인간이 어떻게 시공간을 초월하는 영생의 구원을 다른 피조물에게 줄 수가 있겠습니까?
그렇게 영생의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교만이며 창조주 여호와를 섬기는 종의 자세가 아닙니다. 스스로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죄인임을 고백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는 이상 영생의 구원이라고 하는 선물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그러한 맥락에서 아무쪼록 성도님들에게 깊은 성찰과 깨달음이 있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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