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강해 제127강(렘23:9-12)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터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8년 9월 25일(화)
유다 왕국의 백성들의 죄와 영적 지도자인 제사장과 선지자들의 죄악이 무엇인가?(렘23:9-12)
본문에서 예레미야는 여호와의 거룩하신 말씀 앞에 서게 되면 선지자는 그 마음이 상하고, 모든 뼈가 떨리며, 취한 사람 같으며, 마치 포도주에 잡힌 사람과 같아진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말의 뜻이 무엇인지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1) 첫째로, 여호와의 거룩하신 말씀대로 인생을 살아가고 싶은데 자신을 포함하여 모든 사람들이 세상적인 탐욕과 육신적인 정욕 때문에 여호와 앞에 간음의 죄를 짓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훗날 사도 바울이 자신의 내면을 성찰하면서 고백하고 있는 곤고함과 같은 것입니다(롬7:21-24). 그 때문에 예레미야는 거룩하신 여호와의 말씀 앞에 서게 되면 먼저 자신의 마음이 상하고 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렘23:9a).
(2) 둘째로, 예레미야는 그의 동족인 선민들의 잘못 때문에 이제는 그들이 살고 있는 가나안 땅이 여호와의 저주를 받아 가뭄이 계속이 되고 있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렘23:10). 여기서의 간음은 두가지의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①하나는, 실제로 육체적인 음란입니다. 여사제와의 혼음을 즐기다가 마침내 선민의 사회에 음란의 문화가 만연이 되고 만 것입니다(렘3:2, 5:7b-9, 민25:1-3). ②또 하나는, 종교적인 간음입니다. 그것은 우상과 더불어 여호와를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렘7:9-11, 5:7a, 5:31, 6:15). 오직 유일하신 여호와 하나님만을 섬기는 신앙적인 순전(純全, 순수하고 온전)함이 그 때문에 사라지고 있습니다. 영적인 혼탁함과 종교적 혼합주의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3) 셋째로, 여호와의 말씀에 비추어 보니 자신의 잘못이 얼마나 큰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 앞에 서서 그 거룩한 말씀을 받고 있는 선지자 예레미야는 먼저 자신의 모든 뼈가 덜덜 떨리고 있는 두려움을 느끼고 있다고 진술하고 있습니다(렘23:9b). 예레미야가 여호와의 말씀을 백성들 앞에서 대언하기 전에 그 말씀에 먼저 자신을 비추어보고 있다는 사실이 그가 진짜 선지자라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 때문에 그는 마치 혼이 빠진 듯이 여호와 앞에서 자신이 죄인임을 실토하면서 자신의 잘못을 일일이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 모습이 마치 취한 사람과 같다는 것입니다(렘23:9c).
(4) 넷째로, 예레미야처럼 여호와 앞에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먼저 고백하고 있는 선지자가 있는 반면에 유다 왕국에는 자신이 의인이라고 여기고 있는 영적 지도자들이 수도 없이 많습니다. 그들에 대하여 여호와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선지자와 제사장이 다 사악한지라. 내가 내 집에서도 그들의 악을 발견하였노라. 그러므로 그들의 길이 그들에게 어두운 가운데 미끄러운 곳과 같이 되고, 그들이 밀어냄을 당하여 그 길에 엎드러질 것이라. 그들을 벌하는 해에 내가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23:11-12). 일반백성들은 여호와의 말씀을 직접 듣거나 그 말씀을 깊이 묵상하고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선지자나 제사장을 통하여 말씀을 배우고 그들의 본을 따라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에 따라 영적 지도자들의 잘못이 그대로 백성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맙니다. 결국 선민 유대인 사회가 다음과 같이 되고 말았다고 여호와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들의 행위가 악하고 힘쓰는 것이 정직하지 못함이로다”(렘23:10b).
(5) 다섯째로, 여호와의 거룩하신 말씀에 비추어 보니 자신이 죄인임을 예레미야가 자각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여호와 앞에서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 고백을 들으시고 여호와께서는 예레미야에게 성령님의 감동으로 함께하십니다. 예레미야는 마치 포도주에 취한 것과 같이 성령님의 감동에 취하여 백성들에게 여호와의 거룩하신 말씀을 그대로 대언하고 있습니다(렘23:9d). 선지자 예레미야가 동족인 선민 유대인들에게 전하고 있는 여호와의 말씀은 두가지의 내용입니다; ①하나는, 영적인 지도자들부터 일반백성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여호와 앞에 간음한 자와 같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들의 죄를 회개하고 용서를 구하라는 것입니다. ②또 하나는, 그렇게 유다 왕국의 왕과 귀족들 그리고 백성들이 하나같이 죄인의 모습으로 여호와 앞에 나아올 때에 여호와의 진노로 임하고 있는 자연적인 재앙과 나라의 멸망을 막을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상과 같은 사실들을 염두에 두고서 이제부터 본문의 말씀을 한 구절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그 깊은 의미와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파악해봅니다;
첫째로, “선지자들에 대한 말씀이라. 내 마음이 상하며, 내 모든 뼈가 떨리며, 내가 취한 사람 같으며, 포도주에 잡힌 사람 같으니, 이는 여호와와 그 거룩한 말씀 때문이라”(렘23:9); 다음과 같이 네 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선지자들에 대한 말씀이라”(렘23:9a); 선지자는 여호와의 말씀을 대언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에 대하여 특별히 여호와께서 말씀하십니다. 그 이유는 선지자들 가운데에는 정직한 선지자가 있는 반면에 거짓선지자가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유다 왕국 말기에는 선지자들 가운데 우리야와 예레미야 정도만 정확하게 여호와의 예언의 말씀을 동족들에게 전달하고 있습니다. 그 때문에 우리야는 죽임을 당하고 예레미야는 감옥살이를 하게 됩니다(렘26:20-24, 38:6). 그 외의 선지자들은 권력자의 입맛에 맞는 거짓 예언을 전달하고 있습니다(렘20:6, 38:1-4). 그러한 사정을 알고 계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하여 선지자들에게 강력하게 경고의 말씀을 하십니다. 그 내용이 무엇일까요?
(2) “내 마음이 상하며, 내 모든 뼈가 떨리며”(렘23:9b);
1) 여호와의 말씀을 대언하는 선지자는 먼저 여호와 앞에 서서 그 거룩한 말씀을 받아야만 합니다. 그런데 여호와 앞에 정직하게 나아가서 그 거룩하신 말씀을 받게 되면 먼저 자신에게 떨림이 발생하고 또한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이 마음을 상하게 합니다. 어째서 그러한 현상이 발생하게 되는 것일까요?
2) 첫째, 창조주이시며 자신의 인생의 주인이신 여호와 앞에 서게 되면 피조물이며 종인 사람은 두려워서 떨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목숨 뿐만 아니라 영원한 생명에 대한 생사여탈권을 쥐고 계시는 창조주 앞에 서있기 때문입니다(마10:28). 따라서 모든 뼈가 덜덜 떨리고 있는 것입니다.
3) 둘째, 여호와의 거룩하신 말씀을 받게 되면 선지자는 먼저 자신에게 적용을 해야 합니다. 그 거룩하신 창조주의 말씀에 자신을 비추어 보니, 형편없이 초라하고 죄가 많은 자입니다. 감히 그 앞에 설 수조차 없는 죄인입니다. 자신이 그러한 여호와의 거룩하신 말씀을 사람들에게 대언하기에는 너무 형편이 없습니다. 따라서 그 마음이 상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거룩하신 말씀에 먼저 자신을 비추어 보니, 여전히 자신은 부족하고 죄인의 모습에 불과한 것입니다.
4) 마음으로는 그 거룩하신 말씀을 준행하면서 살고 싶습니다. 그러나 육신적인 정욕과 세상적인 탐욕이 그것을 방해하고 있습니다. 자신은 탐욕과 정욕을 이기지 못하여 쓰러지고 있는 죄인입니다. 그것 때문에 참으로 마음이 상합니다. 그러므로 곤고한 자신을 여호와께서 부디 구원하여 달라고 하는 기도가 먼저 터져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훗날 그렇게 정직하게 자신을 성찰하고 구원을 호소하고 있는 자가 바로 사도 바울이라고 하겠습니다(롬7:16-25).
(3) “내가 취한 사람 같으며”(렘23:9c);
1) 창조주이시며 영이신 영생하시는 여호와 하나님 앞에 서면 피조물인 인간이 어떠한 상태가 되는 것일까요? 그 점에 관하여 히브리서 저자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히4:12-13).
2) 피조물인 인간의 추악한 면모가 창조주이신 여호와 앞에 숨김이 없이 드러나게 됩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여호와께서는 그 심판대 앞에 서있는 사람으로부터 듣고 싶은 고백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입술로 자신이 어떠한 자인지를 정직하게 진술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잘못을 솔직하게 고백하게 되면 여호와로부터 용서함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3) 그와 달리 자신은 죄가 없는 의인이라고 강변을 하게 되면 그 자리에서 마치 환상처럼 자신의 일생과 죄업이 드러나고 말 것입니다. 그런데 선지자 예레미야는 엄청난 여호와의 은혜를 입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마치 술 취한 자와 같이 자신의 입술로 술술 숨김이 없이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고 있기 때문입니다(렘23:9c).
(4) “포도주에 잡힌 사람 같으니, 이는 여호와와 그 거룩한 말씀 때문이라”(렘23:9d);
1) 마치 술에 취한 사람과 같이 자신의 죄악을 여호와 하나님께 스스로 실토를 하고 나면 놀라운 죄 사함의 은혜와 칭의의 은혜가 임하게 됩니다. 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흘리신 그 보혈의 대속의 은혜가 시간을 소급하여 자신의 잘못을 회개하는 자에게 임하기 때문입니다.
2) 그것은 영이신 하나님의 조치입니다. 따라서 시간을 소급하여 얼마든지 역사할 수가 있습니다. 그와 같은 맥락에서 훗날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운 말씀이 다음과 같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또 인자됨으로 말미암아 심판하는 권한을 주셨느니라. 이를 놀랍게 여기지 말라. 무덤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5:27-29).
3) 선지자들이 예레미야처럼 그렇게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여호와 앞에 솔직하게 고백을 하게 되면 그 다음에는 어떠한 일이 발생하게 될까요? 여호와의 말씀을 왕과 백성들에게 정직하게 대언할 수 있는 담대한 능력이 주어지게 됩니다. 성령님의 능력이 임하여 마치 포도주에 취한 사람과 같이 대담하게 여호와의 말씀을 선포하고 또한 왕에게 직언할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렘23:9d).
둘째로, “이 땅에 간음하는 자가 가득하도다. 저주로 말미암아 땅이 슬퍼하며, 광야의 초장들이 마르나니, 그들의 행위가 악하고 힘쓰는 것이 정직하지 못함이로다”(렘23:10); 다음과 같이 두 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이 땅에 간음하는 자가 가득하도다”(렘23:10a);
1) 선민 유대인들의 사회에 간음이 만연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어째서 거룩한 선민의 사회가 음란한 사회가 되고 만 것일까요? 그것은 육신적인 정욕이 음란한 탐심으로 발휘가 되도록 불을 붙이는 악한 영들의 충동이 그곳에 자리를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원형을 모세 시대 말기 모압 평지에서 찾을 수가 있습니다(민25:1-3). 당시 모압 평지 싯딤에 진을 치고 있던 이스라엘 군대를 영적으로 타락시키기 위하여 거짓선지자 발람이 악한 꾀를 낸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민25:16-18, 31:16).
2) 본래 북쪽 아람의 선지자인 발람은 남하하여 미디안 왕들을 찾아가서 이스라엘 족속이 여호와의 진노로 멸망을 당할 수 밖에 없도록 만드는 방법이 있다고 계책을 말합니다. 그는 그 대가로 많은 재물을 얻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의 악한 꾀는 일종의 미인계입니다. 먼저 재색을 겸비한 미디안의 미인들을 이스라엘 진영의 젊은 지도자들에게 침투시킵니다. 그리고 그들을 유혹하여 애인관계를 맺게 합니다. 그 다음에는 그들 젊은 족장들의 도움을 얻어서 모압의 젊은 여인들을 대거 이스라엘 진영으로 보내어 젊은 장정들과 사귀게 합니다.
3) 육체적인 관계를 맺게 하기 위하여 브올 산의 바알 신당을 활용합니다. 모압 평지 남쪽 4km 지점에 자리를 잡고 있는 브올 산 바알 신당으로 이스라엘 젊은이들을 유인하여 갑니다. 그곳에서 바알에게 제사를 드리게 한 후에 아름다운 모압 여인들이 바알의 여사제가 되어 그 땅에 풍요의 축복을 가지고 오는 종교적인 의식이라는 명분으로 육신적인 혼음의 축제를 그들과 벌이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발람의 계책이 엄청난 성공을 거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을 보호하기 위하여 여호와께서는 모세를 시켜 음란에 빠진 이스라엘 족장과 장정들을 발본색원하여 쳐죽이라고 명령하십니다(민25:3-5). 그리고 정예병을 파견하여 미디안 5왕과 발람을 잡아서 죽이게 하십니다(민31:1-8).
4) 유다 왕국 말기에 선민 유대인들이 몰렉에게 인신제사를 드리고 바알에게 제사를 드린 다음에는 여사제들과 스스럼 없이 혼음을 즐기고 있습니다. 그것이 산위에서만 벌어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선민의 사회에 음란한 문화가 누룩처럼 퍼지자 모든 야산과 바위 틈 그리고 집안에서 육체의 향연이 벌어지고 맙니다(렘23:10a). 그러한 세태를 여호와께서는 벌서 다음과 같이 질책하십니다; “네 눈을 들어 헐벗은 산을 보라. 네가 행음하지 아니한 곳이 어디 있느냐? 네가 길가에 앉아 사람들을 기다린 것이 광야에 있는 아라바 사람 같아서 음란과 행악으로 이 땅을 더럽혔도다. 그러므로 단비가 그쳤고 늦은 비가 없어졌느니라. 그럴지라도 네가 창녀의 낯을 가졌으므로 수치를 알지 못하느니라”(렘3:2-3).
(2) “저주로 말미암아 땅이 슬퍼하며, 광야의 초장들이 마르나니, 그들의 행위가 악하고 힘쓰는 것이 정직하지 못함이로다”(렘23:10b); 음란과 행악으로 그 땅을 더럽히게 되면 그 땅에 여호와의 진노와 저주가 임하게 됩니다. 그 결과 단비가 그치고 늦은 비가 없어져서 식물이 제대로 자리지를 못합니다(렘3:3, 23:10ba). 먹거리가 없어지므로 사람과 짐승이 모두 굶주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재앙이 임하게 되면 선민들이 빨리 자신들의 잘못과 악행을 회개하고서 여호와 하나님께 용서를 구해야만 합니다. 그런데 그 행위가 악하고 신앙적으로 정직하지 못한 백성들이 회개할 줄을 모르고 있습니다(렘23:10bb). 더구나 다윗왕조의 왕들과 영적인 지도자들인 선지자와 제사장들마저 영적으로 타락하고 있으므로 재앙이 계속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마지막은 외적의 침입이 되고 맙니다.
셋째로,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선지자와 제사장이 다 사악한지라. 내가 내 집에서도 그들의 악을 발견하였노라. 그러므로 그들의 길이 그들에게 어두운 가운데 미끄러운 곳과 같이 되고, 그들이 밀어냄을 당하여 그 길에 엎드러질 것이라. 그들을 벌하는 해에 내가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23:11-12); 다음과 같이 세 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선지자와 제사장이 다 사악한지라. 내가 내 집에서도 그들의 악을 발견하였노라”(렘23:11);
1) 예루살렘의 선지자들과 제사장들이 다 사악하다는 사실을 다음과 같이 여호와께서는 벌써 말씀하고 계십니다;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다니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정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읍을 용서하리라”(렘5:1), “선지자들은 거짓을 예언하며 제사장들은 자기 권력으로 다스리며 내 백성은 그것을 좋게 여기니, 마지막에는 너희가 어찌하려느냐?”(렘5:31).
2) 영적인 지도자들마저 사악하게 행동하므로 그들의 왕국이 다음과 같이 여호와의 진노로 비참하게 망하고 마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때에 사람들이 유다 왕들의 뼈와 그의 지도자들의 뼈와 제사장들의 뼈와 선지자들의 뼈와 예루살렘 주민의 뼈를 그 무덤에서 끌어내어, 그들이 사랑하며 섬기며 뒤따르며 구하며 경배하던 해와 달과 하늘의 뭇별 아래에서 펼쳐지게 하리니, 그 뼈가 거두어지거나 묻히지 못하여 지면에서 분토 같을 것이며, 이 악한 민족의 남아 있는 자, 무릇 내게 쫓겨나서 각처에 남아 있는 자들이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을 원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8:1-3), “그러므로 내가 그들의 아내를 타인에게 주겠고 그들의 딸을 그 차지할 자들에게 주리니, 그들은 가장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욕심 내며 선지자로부터 제사장까지 다 거짓을 행함이라”(렘8:10).
3) 선지자들과 제사장들의 사악함이 그 정도에 그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조차 마치 의인인 것처럼 자신을 포장하며 속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선지자와 제사장이 다 사악한지라. 내가 내 집에서도 그들의 악을 발견하였노라”(렘23:11). 그것이 참으로 가증한 행동입니다. 피조물인 그들의 행적과 죄악이 하나도 빠짐없이 여호와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처럼 드러나고 있는데 그것을 알지 못하고 자신들의 무죄함을 주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눅18:11-12).
4) 사람의 눈을 속일 수 있으면 능히 여호와의 눈도 속일 수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사실은 외식적인 율법생활의 특징입니다. 그러한 인본주의적인 신앙생활은 그 기원이 참으로 오래됩니다. 그 원형을 창세기 제4장의 가인에 대한 기록에서 벌써 찾을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창4:8-11). 창조주의 능력과 통찰력을 피조물인 사람의 능력과 안목 정도로 생각하고 있는 그것이 불신앙이며 여호와에 대한 모독입니다. 그러한 모습이 바리새인들의 외식적인 신앙생활로 나타나고 있기에 훗날 예수님께서도 그 점을 강력하게 질책하시는 것입니다(마23:13-28).
(2) “그러므로 그들의 길이 그들에게 어두운 가운데 미끄러운 곳과 같이 되고, 그들이 밀어냄을 당하여 그 길에 엎드러질 것이라”(렘23:12a); 질책과 경고 정도에 그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정을 하지 아니하면 그들의 잘못된 신앙생활은 세가지 결과를 초래하고 만다고 분명하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①첫째, 마치 어두운 길에 미끄러지는 것처럼 그러한 외식적인 신앙생활은 영적으로 앞이 캄캄하여 그만 실족하고 맙니다(렘23:12aa). ②둘째, 자신만 실족을 하는데 그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가식적인 신앙생활이 누룩처럼 사회 전반에 퍼져서 민족이 함께 망하고 마는 것입니다(마15:14, 18:7). ③셋째, 여호와께 구원을 부르짖는다고 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모른다고 외면하십니다(마7:21-23). 결국 여호와께로부터 밀어냄을 당하여 완전히 망하고 마는 것입니다(렘23:12ab)
(3) “그들을 벌하는 해에 내가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23:12b);
1)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이 교만하게도 여호와의 이름으로 거짓 예언을 함부로 백성들에게 전파할 수 있는 이유는 당장 여호와의 심판이 그들에게 임하고 있지 아니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내심 여호와께서는 이 세상을 창조하셨지만 지금은 자신들에게 그 경영을 전부 맡겨 놓으시고 일체 관여하거나 개입하지 아니하신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참으로 완전히 망하는 지름길입니다. 왜냐하면 여호와께서는 보응하는 날을 따로 정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2) 일찍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에게 그러한 뜻을 정확하게 밝히십니다; “이제 가서 내가 네게 말한 곳으로 백성을 인도하라. 내 사자가 네 앞서 가리라. 그러나 내가 보응할 날에는 그들의 죄를 보응하리라. 여호와께서 백성을 치시니 이는 그들이 아론이 만든 바 그 송아지를 만들었음이더라”(출32:34-35). 그러한 여호와의 심판의 날이 분명하게 기다리고 있음을 명심하라고 본문에서 선지자 예레미야가 여호와의 말씀으로 다음과 같이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을 벌하는 해에 내가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23:12b).
결론적으로, 그들의 죄악에 대하여 여호와께서 징벌하시고 재앙을 내리시는 때가 과연 언제일까요? 역사적으로는 선민의 유다 왕국이 망하는 그때입니다(렘39:1-10). 그러나 그들의 자손들은 망국의 백성이 되어 이방인의 땅에 흩어져서 고난 가운데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종국적인 심판의 날이 아직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때가 바로 이 세상의 종말과 더불어 이루어지는 여호와의 심판입니다. 이미 죽은 자는 무덤에서 그 심판대 앞으로 불려 나오게 됩니다(요5:28-29). 이제는 영생이냐 영벌이냐의 마지막 심판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중요한 심판의 때에 그리스도께서 아버지 하나님과 함께 심판의 보좌에 앉으셔서 성도들을 위하여 변론을 하십니다(요5:27, 히4:14-16). 그러므로 성도들은 살아 생전에 신실하게 주님의 제자로 그리고 여호와의 종으로 살아가야만 합니다. 그것이 이 세상에서의 역사적인 구원은 물론 영원한 심판대를 통과하여 영생의 구원을 얻는 길입니다.
그러므로 아무쪼록 살아 생전에 여호와 앞에 선 두려움으로 그리고 거룩하신 말씀에 자신을 먼저 비추고 그것을 전파하는 그리스도의 종으로 신실하게 살아가시는 성도님들이 모두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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