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강해 제126강(렘23:5-8)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터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8년 9월 24일(월)
온세상에 흩어진 유대인들은 물론 열방과 만민을 모두 구원하시는 메시아에 대한 여호와의 예언의 말씀이 어떠한가?(렘23:5-8)
본문에서 여호와께서는 지금까지 다윗왕조가 행한 정의와는 다른 창조주 하나님의 공의의 정신을 실천하는 메시아의 시대와 성도의 시대가 오게 될 것이라고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하여 말씀하십니다. 그 점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시고 계십니다;
(1) 첫째로, 그동안 다윗왕조가 행한 의로움은 창조주이신 여호와의 공의의 정신을 온전히 행한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역사적으로 다윗의 왕조가 멸망을 당하고 그 백성들이 온세상으로 흩어져서 망국의 백성이라고 천대를 받으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다윗왕조의 현세적이고도 이기적인 정의를 바로잡아줄 수 있는 메시아가 유대인사회에 나타나서 창조주의 공의의 정신이 무엇인가를 온세상에 보여줄 것입니다. 국내적인 정의를 뛰어넘어 국제적인 공의를 실천할 수 있는 하나님의 지혜가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 세상에 선을 보이게 된다는 것입니다(렘23:5).
(2) 둘째로, 다윗왕조의 솔로몬 왕은 지혜의 대왕이라고 칭찬을 받고 있지만 그의 후반기 20년의 통치는 굉장히 이기적이며 자기 지파 중심의 정책으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1) 당시 이스라엘제국에는 12지파가 참여하고 있으며 제사장을 비롯한 레위인들이 예루살렘 솔로몬의 성전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고 있습니다. 솔로몬은 7년 동안 성전을 짓고 또한 13년 동안 화려한 궁궐을 짓느라고 국가 재정을 많이 사용했습니다. 그렇게 이스라엘제국을 20년간 통치한 그는 호화사치의 생활과 전국의 성읍을 요새화하는 작업을 멈추지를 않습니다.
2) 재정이 부족하므로 자신의 유다 지파 및 왜소한 베냐민 지파를 제외한 이스라엘 10지파에게 엄청난 세금과 부역을 부과하고 있습니다. 한달씩 10지파가 돌아가면서 국가의 재정과 건설공사를 모두 감당하라는 왕명입니다. 그렇게 10지파가 20년을 지내오면서 허리가 휘고 피폐해지고 맙니다. 그 엄청난 학정을 견디지 못하고 10지파의 장로들은 폭군 솔로몬이 죽기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3) 그들은 솔로몬이 죽고 르호보암 왕이 즉위하자 솔로몬을 반대한 경력이 있는 여로보암을 앞세우고 다윗왕조를 찾아가서 지나친 세금과 부역을 철폐해 달라고 요구합니다. 그 요구가 거절을 당하자 북쪽의 10지파가 다윗왕조를 버리고 독립을 선언하고 만 것입니다(왕상12:13-20). 그에 따라 둘로 쪼개어진 북조 이스라엘 왕국과 남조 다윗왕조의 유다 왕국은 서로 반목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주전 722년에 북조 이스라엘 왕국이 앗수르제국에 의하여 멸망을 당하지만 같은 형제인 남조 유다 왕국이 그것을 슬퍼하지를 않습니다. 그 반대로 여호와신앙을 버렸다고 오히려 사마리아인들을 멸시하고 있습니다.
4) 다윗왕조의 유다 왕국에서는 북쪽 이스라엘 10지파의 후손들이 사마리아 땅에서 이방인과 혼혈이 되고 여호와를 우상의 하나로 섬기고 있는 모습을 보고서 이방인보다도 못한 개라고 취급하고 있습니다(스4:3-4, 요4:9). 그런데 훗날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시게 되면 유다 왕국의 후손과 이스라엘 왕국의 후손을 똑같이 사랑하시고 구원하신다는 여호와의 공의의 정신을 실천하실 것입니다(렘23:6). 그로 말미암아 남북간의 화해가 만민구원의 복음으로 이루어지고 함께 온세상을 구원하는 일에 나선다는 것입니다.
(3) 셋째로, 예레미야 제16장 제14-15절 말씀이 다시 한번 여기서 기록이 되고 있습니다. 그 내용이 워낙 중요하기 때문에 다시 등재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1) 이스라엘 자손들은 선민의 정통성을 다윗왕조에서 찾고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선민의 제국을 건설했던 그 다윗왕조가 여호와의 시온의 영광을 떨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칼로써 주변의 이방인 족속과 나라들을 복속시키고 속국으로 삼아 조공을 받는 것입니다. 그것이 선민 이스라엘 자손들이 원하고 있는 지극히 이기적인 여호와신앙의 모습입니다.
2) 선민들의 정의에 의한 여호와신앙은 모든 나라와 백성을 돌보시고 만민을 구원하고자 하시는 창조주의 공의의 정신과는 정반대입니다. 왜냐하면, 다윗왕조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하여 출애굽의 여호와에게 다시 한번 주변의 이방인들에게 진노와 재앙을 내려 달라고 소원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렘23:7).
3) 비유컨대, 하나님의 복음은 희년(禧年, 50년만에 찾아오는 종의 해방과 기업회복이라는 기쁨의 해)의 제도를 온세상에 확대하는 것입니다(레25:8-13). 여호와께서 주신 각 족속의 기업을 더 이상 서로 뺏고 뺏기는 것이 아닙니다. 율법에 따라 희년이 되면 모두 각자의 기업을 회복하고 그 분깃을 얻을 수 있도록 해주는 것과 같이 이제는 선민이거나 이방인이거나 상관없이 누구나 여호와께서 주신 자신의 기업으로 돌아가서 평화스럽게 살 수 있도록 보장을 해주는 것입니다(렘23:8).
궁극적으로 그러한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의 하나님나라를 건설하기 위하여 이 세상에 하나님의 아들이 대속의 그리스도로 그리고 공의의 왕으로 오시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사실을 염두에 두고서 이제부터 본문의 말씀을 한 구절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그 깊은 의미와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파악해봅니다;
첫째로,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이 되어 지혜롭게 다스리며, 세상에서 정의와 공의를 행할 것이며”(렘23:6); 다음과 같이 두 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이 되어”(렘23:6a);
1) 만약 다윗이 여호와의 공의의 정신을 온전하게 실천을 했다고 하면 그가 온세상을 구원하는 그리스도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럴 능력이 없습니다. 그저 자신의 동족인 이스라엘 자손들을 위하여 선민의 제국을 중근동에 건설하는 대왕일 따름입니다. 특히 다윗은 제국의 건설이 거의 마무리가 되어가는 시점에 있어서는 출전을 하지 아니하고 왕궁에 머무르고 있다가 실족을 하게 됩니다. 왕자무치(王者無恥, 왕은 아무리 수치스러운 일을 자행해도 그것이 죄가 되지 않는다는 것) 사상에 빠져서 부하의 아내와 간통을 하고 임신을 하게 되자 그 남편을 살해하고 맙니다(삼하11:4-17).
2) 그것이 자신의 주인인 여호와의 십계명을 정면으로 어기고 있다는 사실조차 인지를 하지 못하고 있는 딱한 다윗 왕입니다(출20:13-14). 나중에 여호와의 질책과 보응의 심판을 전해주는 나단 선지자의 대언의 말씀을 듣고서 그는 회개를 합니다(삼하12:6-15). 다시는 똑같은 죄악을 저지르지 아니한 다윗 대왕이라고 하더라도 그가 여호와 보시기에 죄인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는 기본적으로, 두가지 잘못을 범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①하나는, 선민 이스라엘의 구원과 영광을 위하여 정의를 행한다는 미명 하에 주변의 이방 족속을 너무 많이 쳐죽였으므로 그의 손에 피냄새가 진동을 하고 있습니다.
3) 그러므로 여호와의 집인 성전을 지을 수가 없는 죄인입니다(왕상5:3). ②또 하나는, 여호와 보시기에 왕이나 장군이나 모두 그 목숨의 값이 같으며 누구나 여호와의 계명과 율법을 지켜야만 한다는 사실을 깜빡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창조주의 공의의 정신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모르고 있으며 나아가서 그것을 실천한 자가 아니라는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후계자들로 이어가고 있는 다윗왕조의 행태도 그러합니다. 선민들의 아집과 이기적인 욕심이 마치 하나님의 공의인 것처럼 말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그것은 잘해야 집단 이기적인 것이며 자신들만의 정의의 개념에 불과한 것입니다.
4) 그에 따라 여호와의 진노로 망해버린 이스라엘 자손들을 온전한 여호와신앙인으로 만들어 구원하기 위해서는 다윗과 같은 정의의 왕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창조주의 공의를 제대로 실천하는 그리스도가 필요합니다. 그와 같은 맥락에서 여호와의 예언이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이 되어”(렘23:6a)라고 기록이 되고 있습니다. 그 의미는 ①첫째, 다윗의 의로움인 집단 이기적인 정의로써는 다윗왕조와 이스라엘 자손들이 멸망을 당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②둘째, 이제는 창조주의 공의의 정신을 실천할 수 있는 새로운 왕이 구원자로서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 메시아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2) “지혜롭게 다스리며, 세상에서 정의와 공의를 행할 것이며”(렘23:6);
1)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지혜를 가지고 이 세상을 다스리십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사람들이 추구하고 있는 정의와 창조주께서 원하시는 공의의 실천을 함께 추구할 수 있게 해주는 것입니다.
2) 그와 같은 맥락에서 선지자 이사야가 선지자 예레미야보다 먼저 다음과 같이 예언하고 있습니다;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그의 위에 여호와의 영 곧 지혜와 총명의 영이요, 모략과 재능의 영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강림하시리니, 그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을 것이며, 그의 눈에 보이는 대로 심판하지 아니하며, 그의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하지 아니하며, 공의로 가난한 자를 심판하며 정직으로 세상의 겸손한 자를 판단할 것이며, 그의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 그의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일 것이며, 공의로 그의 허리띠를 삼으며, 성실로 그의 몸의 띠를 삼으리라”(사11:1-5).
3) 참고로, 사람들의 지혜는 정의의 구현에 머물고 있습니다. 재화가 한정이 되어 있는 피조세계에서 자기 집단이나 조국의 희생을 감수하면서 다른 집단이나 타국을 돕는 일에 나설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하늘의 곳간을 여시고 창조적인 능력으로 공의로운 새로운 세상을 만드실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새로운 창조의 능력과 함께하고 있는 하나님의 지혜의 속성입니다.
둘째로, “그의 날에 유다는 구원을 받겠고, 이스라엘은 평안히 살 것이며, 그의 이름은 여호와 우리의 공의라 일컬음을 받으리라”(렘23:6);
(1) 창조주이신 여호와의 공의의 정신은 참으로 현세적인 이기주의에 입각하여 자기 중심적으로 살아가고 있는 피조물인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이해하기가 힘이 들고 실천하기는 더욱 어렵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사람들이 자신의 희생을 감수하면서 남을 사랑하고 그 생명을 살리는 것이 창조주를 사랑하고 공의의 정신을 실천하는 종의 모습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마5:44-48, 막3:4, 12:30-31, 눅10:33-37). 그런데 자신이 먼저 살고자 하는 인간세상에서 그것은 허망한 소리로 들리는 것입니다.
(2) 여호와의 마음에 든 왕이라고 칭찬을 받고 있는 다윗이라고 하더라도 창조주의 공의의 정신을 실천한 것이 아닙니다(삼상16:7, 행13:22, 렘23:5). 선민의 영광을 위하여 이스라엘제국을 중근동에 건설했을 따름입니다(삼하8:1-14). 그것은 선민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이요 승리인지 몰라도 다윗의 군대에 의하여 멸망을 당하거나 복속이 된 여러 족속과 이방인들의 입장에서는 대단한 재앙입니다.
(3) 그런데 그리스도가 오셔서 이 세상에 이루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나라는 이기적인 선민의 제국이 결코 아닙니다. 유다 왕국과 이스라엘 왕국이 서로 갈등하며 미워하고 전쟁을 벌이는 그러한 구태를 청산하고 있습니다; “그의 날에 유다는 구원을 받겠고, 이스라엘은 평안히 살 것이며, 그의 이름은 여호와 우리의 공의라 일컬음을 받으리라”(렘23:6).
(4) 그리스도께서 대속의 십자가를 지시고 3일만에 여호와의 창조의 능력으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인간의 능력으로는 그 실천이 불가능했던 창조주의 공의의 정신이 실천이 되는 새로운 복음의 시대가 열리고 있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서로가 구원을 얻을 수 있도록 도와주고 함께 창조주 하나님을 모시고 살 수 있는 그러한 그리스도의 성도들의 나라가 이 세상에 건설이 되는 것입니다(단7:14, 18, 22, 27).
셋째로, ‘그러므로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그들이 다시는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하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집 자손을 북쪽 땅, 그 모든 쫓겨났던 나라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할 것이며, 그들이 자기 땅에 살리라 하시니라”(렘23:7-8); 다음과 같이 두 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1) “그러므로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그들이 다시는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하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집 자손을 북쪽 땅, 그 모든 쫓겨났던 나라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할 것이며”(렘23:7-8a);
1) 선지자 예레미야는 그의 조국 유다 왕국이 멀지 아니하여 여호와의 진노로 신바벨론제국의 군대의 침입으로 멸망을 당하고 유다의 백성들이 바벨론으로 끌려가게 되고 만다는 사실을 여호와의 예언의 말씀으로 벌써 알고 있습니다(렘7:8-15). 그의 동족들이 대외적으로는 선민이라고 자랑하면서 정작 대내적으로는 여호와신앙을 버리고 세상적인 탐욕과 육신적인 정욕을 쫓아서 이방인처럼 살아가면서 이방신상과 우상을 섬기며 여호와를 우상의 하나로 여기고 말았기에 여호와께서 크게 진노하신 것입니다.
2) 이스라엘 자손들이 여호와의 신실한 종으로 살아간 것이 아니라 반대로 여호와 하나님을 자신들의 종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출애굽의 신인 여호와는 그 옛날처럼 무조건 이스라엘 자손들을 구원해주기 위하여 주변의 이방인들에게 진노와 재앙을 내리시는 그러한 신으로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선민인 자신들이 주변의 이방인들에게 어떠한 횡포를 부린다고 하더라도 자신들의 수호신인 여호와는 항상 그 옛날 애굽에서처럼 이방인들에게는 진노와 재앙을 내리시고 자신들은 모두 구원해주는 그러한 능력이 많은 종이 되어 주기를 바라고 있는 것입니다(마4:5-6).
3) 여호와께서는 주객이 전도가 된 그러한 잘못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이스라엘 자손들의 나라를 차례로 멸망시켜 버리십니다(렘7:15). 더 이상 출애굽의 신으로 그들에게 불리고 싶어하시지 않습니다(렘23:7). 그 이유는 그러한 집단 이기적인 편파적 정의의 소원을 들어주는 그러한 우상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창조주이신 여호와는 모든 피조물을 사랑하시고 그 삶을 돌보시며 그 생명을 하나같이 살리고자 하십니다. 그것이 창조주의 공의의 정신입니다. 그와 같은 공의의 정신을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듣고서 실천하는 자를 열방에서 구원하여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렘23:8).
4) 선지자 예레미야는 망국의 백성이 되어 이방 땅에서 고난 가운데 살아가게 되는 그의 동족들에게 장차 그러한 회개와 구원의 기회가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주어질 것이라고 여기서 제16장 제14-15절에 이어서 다시 한번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그들이 다시는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하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집 자손을 북쪽 땅, 그 모든 쫓겨났던 나라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할 것이며”(렘23:7-8a). 여호와의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이기적인 정의의 실천이 아니라 온세상을 구원하는 창조주의 공의의 정신을 그리스도처럼 실천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 내용이 너무나 중요하기에 그렇게 두번이나 동일한 내용을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2) “그들이 자기 땅에 살리라 하시니라”(렘23:8b); 선민 이스라엘 자손들만 우상을 섬기며 세상적인 탐욕과 정욕을 쫓아 살다가 여호와의 눈 밖에 나서 조국이 망하고 이방 땅에서 망국의 백성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앞으로는 많은 이방인들도 동일한 여호와의 진노와 재앙으로 같은 처지가 되고 말 것입니다(렘25:29). 그러므로 이제는 선민이나 이방인이나 상관이 없습니다. 누구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어 창조주 여호와의 공의의 정신을 실천해야만 구원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성도들이 장차 여호와께서 주시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자신들의 영원한 기업과 분깃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눅22:28-30, 요14:1-3). 그러한 사실을 여기서는 “그들이 자기 땅에 살리라 하시니라”(렘23:8b)고 예레미야가 기록하고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정의는 인간의 법정에서 선포가 되고 있습니다. 그와 달리 공의는 하나님의 법정에서 의롭다고 인정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국가에 의한 해방이나 구출을 생각한다면 자신이 속한 집단이나 국가의 정의를 실천하면 됩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을 원하고 있을 때에는 정의가 아니라 창조주의 공의의 정신을 실천해야만 합니다.
본문에서 선지자 예레미야는 다윗대왕과 메시아와의 차이를 말하고 있습니다. 다윗대왕은 선민 이스라엘의 제국을 건설하고 그들의 정의를 온세상에 떨치고자 노력한 자입니다. 그러므로 그가 행한 일은 동족들에게는 이익이 되지만 주변 이방인에 대해서는 재앙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이스라엘 자손들 뿐만 아니라 모든 이방인들에게도 구원의 이익이 미치도록 역사를 하십니다. 그 방법이 하나님의 창조의 지혜로 공의의 정신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대속의 제물로 희생하시면서 회개하고 여호와를 믿는 자 모두를 살리고자 하십니다(요6:39).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가는 성도들은 공의가 우선이며 그 공의의 정신 아래 사람들의 정의가 구현이 될 수 있도록 행해야 합니다. 그 우선순위가 뒤바뀌게 되면 안됩니다. 아무쪼록 그러한 이치를 깊이 생각하시는 은혜가 성도님들에게 있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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