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예레미야 강해 제124강(렘22:24-30)(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2. 9. 22. 07:59

예레미야 강해 제124(22:24-30)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터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8922()

 

여호야긴 왕이 바벨론으로 끌려가고 나면 그의 자손 가운데 다시는 다윗의 왕위에 앉는 자가 없을 것임을 여호와께서는 어떻게 예언하고 계시는가?(22:24-30)

 

모세오경을 살펴보면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가문을 통하여 여호와의 언약을 어떻게 승계시켜 나가고 계시는지 그리고 이스라엘 자손을 통하여 또 어떻게 선민의 언약을 계승시켜 나가고 있는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또한 그들을 언약의 가문과 백성으로 삼으시는 여호와의 목적이 무엇인지도 파악할 수가 있습니다.

더구나 이스라엘의 역사서와 선지서를 보게 되면, 여호와께서 선민 이스라엘 자손들을 처음에는 다윗왕조에 위탁하셨다가 나중에는 그리스도에게 위탁하신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와 같은 맥락에서 여호와께서는 본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1)  첫째로, 다윗왕조 말기의 4왕 가운데 여호야김과 시드기야가 각각 11년 동안 유다 왕국을 통치하고 있습니다(왕하23:36, 24:18). 하지만 그들은 애굽의 바로 또는 신바벨론의 황제에 의하여 책봉이 된 괴뢰정권의 왕입니다(왕하23:34, 24:17). 그러므로 태생적으로 자주성이 부족하고 강대국의 속국의 왕에 불과합니다. 물론 그들은 선민의 자존심 때문에 외세의 간섭에서 벗어나 다윗왕조의 자주성을 되찾고자 애를 쓰지만 그 때문에 종주국의 침략을 맞이하고 맙니다(왕하24:1-3, 20, 25:1-7). 한편 유다 왕국의 신하들과 백성들이 옹립한 왕은 여호아하스와 여호야긴입니다(왕하23:30, 24:6). 그런데 두 왕은 모두 불운합니다. 적의 침입이 예상이 되고 있는 때에 급하게 세워진 왕들이며 각각 3개월만에 적의 침략으로 폐위를 당하고 말기 때문입니다(왕하23:31, 24:8).

(2)  둘째로, 여호아하스 왕은 주전 609년에 애굽으로 끌려가서 그곳에서 비참하게 죽게 됩니다(왕하23:34). 그와 달리 여호야긴 왕의 경우에는 본명인 여고냐로 불리고 있으며(22:24, 대상3:16-17) 주전 597년에 바벨론으로 끌려가서 무려 36년이나 감옥생활을 하지만 주전 561년에 즉위한 에윌므로닥 황제의 배려로 풀려나서 가문과 신원의 회복이라는 기적을 바벨론 황궁에서 체험하게 됩니다(왕하24:15, 25:27-30). 그것은 다윗왕조는 끝났지만 다윗의 가문만은 이어가라고 하는 여호와의 역사 섭리라고 하겠습니다. 그러한 역사의 섭리가 중요한 이유는 훗날 예수 그리스도가 법률적으로는 다윗의 후손인 목수 요셉의 맏아들로 등재가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2:1-7, 3:23-31). 그에 따라 이스라엘 자손을 다윗왕조에 맡겼듯이 이제는 그들을 다윗의 가문에 등재가 된 예수 그리스도에게 맡긴다고 하는 여호와의 뜻이 드러나고 있는 것입니다.

(3)  셋째로, 다윗왕조가 멸망을 하고 나면 이스라엘 자손들은 누가 돌보게 될까요? 여호와께서는 신바벨론의 황제에게 그 통치의 반지를 넘길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22:24-25). 그렇다면 다윗왕조가 다시 재건이 되고 그 통치의 반지를 되찾아 올 수가 있을까요? 여호와께서는 그렇게 되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이유는 바벨론에서 여고냐의 석방을 통하여 다윗의 가문이 회복은 되겠지만 다윗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 자손을 다스릴 수 있는 후계왕이 나타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22:30). 그 대신에 이방나라의 백성도 그리고 이방 땅에 흩어져서 살게 되는 이스라엘 자손도 모두 다스리게 되는 새로운 왕이 탄생하게 됩니다. 그에게 영원한 여호와의 통치의 반지가 주어지게 됩니다. 그가 바로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내면적으로 알게 해주는 글이 바로 본문이라고 하겠습니다(22:24-30).

(4)  넷째로, 다윗왕조의 유다 왕국은 여호야긴 왕 다음에 시드기야가 왕이 되어 11년을 더 통치하게 됩니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바벨론으로 끌려간 여호야긴 왕의 통치의 인장반지가 시드기야에게 넘어간 것이 아니라 신바벨론제국의 황제인 느부갓네살에게 넘어간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22:24-25). 그 의미는 두가지입니다; ①하나는, 시드기야는 신바벨론 황제에 의하여 임명이 된 허수아비 왕이라는 것입니다. ②또 하나는, 여호야긴 왕의 후손이 다윗의 가문을 이어가지만 그들이 다윗왕조를 다시 세우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시드기야는 신바벨론제국의 침입으로 나라가 망하고 립나로 끌려가고 자신의 눈 앞에서 왕자들이 모두 죽게 되는 참상을 목격하게 됩니다(왕하25:6-7). 그리고 두 눈이 뽑힌 채 바벨론으로 끌려가고 맙니다(왕하25:7). 그것은 다윗왕조의 마지막 왕 시드기야는 절손이 되고 말았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의 가문은 여고냐의 후손으로 계승이 되고 있으며 나중에는 목수 요셉이 자신의 장남으로 삼은 예수 그리스도로 이어지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5)  다섯째로, 그와 같은 의미에서 선민 이스라엘 자손들은 처음에는 다윗의 왕조에 맡겨진 백성들입니다. 나중에는 이방인 강대국에 맡겨져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최종적으로는 다윗의 가문에 맏아들로 의제가 된 예수 그리스도에게 맡겨지고 있습니다. 차제에 다음과 같은 사실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1)    첫째, 창세기에 기록이 되고 있는 아브라함의 가계는 여호와의 종이 어떻게 대를 이어가면서 여호와의 언약을 계승하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한 출애굽기에서부터는 아브라함의 언약을 이스라엘 자손들이 민족적으로 계승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2)    둘째, 선민 이스라엘 자손들은 수많은 족속들 가운데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의 언약을 계승하도록 선택한 민족입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여호와의 말씀을 실천하면서 그 말씀을 주변의 이방인들에게 여호와신앙으로 전해주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전파하는 여호와의 말씀과 율법에 따라 이방인들도 제사장과 선지자의 삶을 살아갈 수가 있게 됩니다(66:20-21).

3)    셋째, 실제로는 이스라엘 역사서를 보더라도 선민들은 그러한 여호와의 뜻을 전혀 실천하지를 않습니다. 현세적으로 자신들만 여호와의 율법을 지켜 하나님의 축복을 받으며, 자신들만 속죄의 제사를 드려서 하나님의 죄 사함과 구원의 은혜를 누리면 좋겠다고 이기적으로 행동하고 말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선지서에서는 그렇게 이기적으로 그리고 기복적으로 행동하고 처신한 선민 이스라엘 자손들이 멸망을 당하고 만다고 거듭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상과 같은 사실들을 염두에 두고서 이제부터 본문의 말씀을 한 구절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그 깊은 의미와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파악해봅니다;

첫째로,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나의 삶으로 맹세하노니, 유다 왕 여호야김의 아들 고니야나의 오른손의 인장반지라 할지라도 내가 빼어 네 생명을 찾는 자의 손과 네가 두려워하는 자의 손 곧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의 손과 갈대아인의 손에 줄 것이라”(22:24-25); 다음과 같이 세 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나의 삶으로 맹세하노니”(22:24a);

1)    예레미야는 다윗왕조 말기 유다 왕국의 선지자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유다 왕국의 왕과 신하들과 백성들 앞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고 있습니다(1:1-3). 물론 때로는 자신의 말을 전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말이 아니고 정확하게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임을 밝힐 때에는 먼저 여호와의 말씀이니라”(22:24aa)고 전제하면서 위와 같이 이제부터 귀담아 들으라고 청중들의 주의를 환기하고 있습니다.

2)    본문의 말씀은 굉장히 중요한 여호와의 말씀입니다. 그것은 장차 이 세상에 임하게 되는 여호와의 역사섭리의 방향과 그 단계를 미리 선포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또한 그 말씀의 선포는 이제 변경이 있을 수가 없는 확고한 여호와의 정책입니다. 그러한 의미를 확실하게 전달하기 위하여 예레미야가 나의 삶으로 맹세하노니”(22:24ab)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영생하시는 여호와께서 자신의 이름을 걸고 말씀하시는 내용이기 때문에 지금부터 영원에 이르는 역사의 섭리의 방향이라는 것입니다.

(2)  유다 왕 여호야김의 아들 고니야나의 오른손의 인장반지라 할지라도”(22:24b);

1)    황제는 자신을 대신하여 나라를 다스릴 왕이나 총리에게 인장반지를 내어 줍니다. 그것은 다스리는 권한의 위임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경우는 창세기에서부터 나타나고 있습니다; 애굽의 황제인 바로가 요셉을 신임총리로 임명하면서 자신의 인장반지를 하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41:42). 그리고 성문서 에스더에서는 페르시아의 황제가 총리인 하만이나 모르드개에게 역시 왕의 인장반지를 빼어 주고 있습니다(3:10, 8:2).

2)    그런데 본문의 표현은 좀 다릅니다. 여호와께서는 여호야긴 왕에게 다윗왕조의 인장반지를 준 것이 아니라 그를 여호와의 오른 손의 인장반지로 삼고 있다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22:24b). 그 의미가 무엇일까요? 어째서 여호야긴 왕이 여호와의 인장반지가 되고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여호야긴 왕을 사로잡아 바벨론으로 끌고가는 그 행위가 바로 다윗왕조 유다 왕국의 통치권이 신바벨론제국의 황제에게 넘어가는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형식적인 인감도장의 인계인수가 문제가 아닙니다. 상대국을 점령하고 그 왕을 포로로 끌고가는 것이면 벌써 그 나라의 주권과 왕권은 적국의 황제에게 넘어간 것입니다.

(3)  내가 빼어 네 생명을 찾는 자의 손과 네가 두려워하는 자의 손 곧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의 손과 갈대아인의 손에 줄 것이라”(22:24c-25);

1)    여호와의 오른손에 다윗왕조의 왕들이 마치 인장반지처럼 끼워져 있습니다(22:24b). 그런데 유다 왕국 말기에 여호야긴 왕이 신바벨론제국의 침입을 막지 못하여 적국의 황제에게 인질로 끌려가고 있습니다(왕하24:15). 그렇다면, 다윗왕조는 여호야긴 왕을 끝으로 하여 주권과 왕권이 신바벨론 황제에게 넘어가고 만 것입니다. 하지만 느부갓네살 황제는 직접 유다 왕국을 통치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2)    유일신 여호와를 섬기고 있는 선민들이라고 알려진 유대인들을 직접 다스리기가 싫은 것입니다. 따라서 여호야긴 왕의 숙부인 맛다니아를 시드기야라고 부르면서 친 바벨론 정권의 유다 왕으로 책봉합니다(왕하24:17). 그러므로 시드기야 왕의 치하에서의 다윗왕조 유다 왕국은 사실상 신바벨론제국의 속국에 불과하다고 하겠습니다. 내부적으로, 그 주권과 왕권은 벌써 느부갓네살 황제에게 이전이 되고 그의 지시에 따라 꼭두각시 왕 시드기야가 유다 왕국을 통치하고 있을 뿐입니다. 

3)    그런데 본문의 표현, “내가 빼어 네 생명을 찾는 자의 손과 네가 두려워하는 자의 손 곧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의 손과 갈대아인의 손에 줄것이라”(22:24c-25)는 것이 상당히 의미심장합니다. 다음과 같은 의미를 은근히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①첫째, 유다 왕국의 왕인 여호야긴의 목숨이 신바벨론의 황제인 느부갓네살에게 달려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②둘째, 신바벨론제국의 군대가 다윗왕조의 유다 왕국으로 쳐들어 왔는데 그 가운데 주력부대인 갈대아인들의 군대가 얼마나 두려운지 모릅니다. 느부갓네살 황제는 다윗왕조 유다 왕국을 정벌하기 위하여 자신의 정예병인 갈대아 군대 뿐만 아니라 여러 속국의 군대를 동원하고 있습니다: “갈대아의 부대와 아람의 부대와 모압의 부대와 암몬 자손의 부대를 여호야김에게로 보내 유다를 쳐 멸하려 하시니”(왕하24:2).

4)    참고로, 갈대아인들은 본래 아람민족의 한 갈래입니다. 그들이 일찍 유프라테스 강을 타고서 남하하여 시날 평지를 점령하고 살았습니다(10:10). 그때부터 그곳을 갈대아 우르라고 부르면서 바벨론 문명을 일으킨 것입니다(11:28, 31). 갈대아 왕조는 한때 앗수르제국의 황제를 섬겼지만 강력한 군대를 만들어 독립을 되찾았으며 마침내 앗수르제국을 멸망시키고 느부갓네살 황제가 신바벨론제국을 시작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신바벨론제국의 정예부대인  갈대아 군대는 그 위용이 실로 두려우며 무시무시한 위력을 온 중동 땅에 떨치고 있는 것입니다(6:22-23, 1:6-11).

둘째로,내가 너와 너를 낳은 어머니를 너희가 나지 아니한 다른 지방으로 쫓아 내리니, 너희가 거기에서 죽으리라. 그들이 그들의 마음에 돌아오기를 사모하는 땅에 돌아오지 못하리라”(22:26-27); 다음과 같이 두 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1)  내가 너와 너를 낳은 어머니를 너희가 나지 아니한 다른 지방으로 쫓아 내리니, 너희가 거기에서 죽으리라”(22:26);

1)    아브라함의 집에서 쫓겨난 서장자 이스마엘과 그 모친 하갈의 이야기를 되돌아 보게 합니다(21:10-14). 이스마엘이나 이삭이나 모두 아브라함의 아들입니다(21:12-13). 그런데 이스마엘은 애굽 여인이며 안방마님 사라의 여종인 하갈에게서 서자로 태어났습니다(16:15). 이스마엘은 이방인 여인의 소생이므로 어려서부터 여호와신앙을 얻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믿음의 여인 안방마님 사라의 소생인 이삭은 어릴 때부터 여호와신앙으로 훈육이 됩니다.

2)    13살이나 나이가 많은 이스마엘이 동생 이삭을 힘으로 괴롭히는 것을 보고 안방마님 사라가 남편에게 그들 모자를 내어 쫓으라고 요구합니다(21:9-10). 고민이 된 아브라함이 여호와 하나님께 간구한 결과 그들 모자를 광야로 내어 보내라는 말씀을 얻게 됩니다(21:11-12). 브엘세바 남쪽 바란 광야에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들을 돌보고 장차 이스마엘을 광야를 호령하는 족장으로 세우겠다는 것입니다(21:13-21). 그것은 세상적인 성공을 말하고 있습니다.

3)    그러나 약속의 아들인 이삭에 대한 여호와의 보살핌은 그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칼과 활로써 족장이 되고 세상을 호령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호와의 말씀의 뜻을 온세상에 전하고 여호와신앙의 모습을 이방인들에게 보여주는 하나님의 족장으로 살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삭의 삶의 모습과 이스마엘의 삶의 모습이 전혀 다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며 그들의 언약을 계승하고 있는 선민 이스라엘 자손들은 이삭의 삶의 모습을 닮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그 앞길을 다윗왕조의 왕들이 인도해야만 합니다.

4)    그런데 현실은 정반대입니다. 이삭이 아니라 이스마엘의 삶의 모습을 선민 이스라엘 자손들이 닮아가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다윗왕조의 왕들이 우상을 섬기며 칼과 활로써 세상을 평정하고자 원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여호와께서는 이방인처럼 살아가고 있는 다윗왕조의 나라를 멸망시키고 그 백성들을 이방 땅에서 살아가게 만들고 마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 옛날에 이스마엘과 하갈을 이방인의 땅으로 쫓아낸 것과 같은 이유입니다.

5)    그렇다면, 그들이 생전에 다시 여호와신앙이 살아 있는 아브라함의 집으로 그리고 구원의 언약 안으로 들어올 수가 있을까요? 당장은 그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쫓겨난 그들 선민들이 이방 땅에서 모두 죽고 말기 때문입니다(22:26). 그러나 먼 훗날 그들의 자손들에게는 다른 구원의 기회가 주어질 것입니다. 그것이 소위 새 언약이며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31:31-34).

(2)  그들이 그들의 마음에 돌아오기를 사모하는 땅에 돌아오지 못하리라”(22:27);

1)    이스마엘이나 이삭은 모두 아브라함의 집에서 태어난 아들들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아버지 아브라함의 언약을 계승할 수가 있습니다. 다만 여호와를 신뢰하고 의지하여 한 평생을 하나님의 말씀의 뜻을 실천하면서 살아가고자 하는 믿음생활이 있을 때에 언약의 계승이 이루어집니다. 여호와의 언약은 이 세상에서는 출애굽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고 그곳에 들어가게 하는 것으로 비치고 있습니다.

2)    그러나 믿음의 열조들인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부부가 헤브론 막벨라 굴에 안장이 되어서 기다리고 있는 땅은 이 세상의 가나안이 아닙니다(49:29-33). 그곳은 영생하시는 여호와께서 계시는 그 영생의 처소인 천국입니다(11:16). 그런데 선지자 예레미야는 선민 이스라엘 자손들의 믿음생활을 잘못 인도한 다윗왕조의 왕들은 그들의 마음에 돌아오기를 사모하고 있는 그곳으로 돌아오지를 못하고 이방인의 땅에서 죽고 말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22:27). 그것은 참으로 두려운 여호와 하나님의 심판의 말씀입니다(10:28).

셋째로,이 사람 고니야천하고 깨진 그릇이냐? 좋아하지 아니하는 그릇이냐? 어찌하여 그와 그의 자손이 쫓겨나서 알지 못하는 땅에 들어갔는고? 땅이여, 땅이여, 땅이여, 여호와의 말을 들을지니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너희는 이 사람이 자식이 없겠고, 그의 평생동안 형통하지 못할 자라 기록하라. 이는 그의 자손 중 형통하여 다윗의 왕위에 앉아 유다를 다스릴 사람이 다시는 없을 것임이라 하시니라”(22:28-30);  다음과 같이 세 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이 사람 고니야천하고 깨진 그릇이냐? 좋아하지 아니하는 그릇이냐? 어찌하여 그와 그의 자손이 쫓겨나서 알지 못하는 땅에 들어갔는고? ”(22:28);

1)    여호야김 왕의 아들인 여고냐는 신바벨론제국의 군대가 내침하기 전에 부왕이 그만 승하하였기에 신하들에 의하여 즉위한 다윗왕조의 왕입니다(왕하24:6). 당시 18세인 여고냐는 여호야긴 왕으로 불리며 3개월간 침입한 신바벨론의 군대와 전쟁을 치르게 됩니다(왕하24:8). 그러나 역부족입니다. 예루살렘이 갈대아 군대에 의하여 점령이 되고 그는 포로로 끌려가는 신세가 되고 맙니다(왕하24:10-15).

2)    여고냐를 그러한 비참한 운명으로 몰아 넣은 것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를 미워하였기에 그렇게 한 것일까요? 아니면 그 정도의 역할을 할 수 밖에 없는 그릇이기 때문에 그러한 운명으로 자리매김한 것일까요? 예레미야는 여호와의 말씀을 가지고 그것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22:28a). 그렇다면 다윗왕조 유다 왕국 말기의 선민 유대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22:28b).

3)    그들이 이방인들보다 더 우상을 많이 섬기고 세상적인 탐욕과 정욕이 더 강해서 그렇게 망국의 백성이 되고 만 것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결론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선민이나 이방인이나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마찬가지이며 모두 영적으로 타락하고 육신적인 삶만을 영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3:9-10). 그러므로 모두가 진노의 자식이며 멸망의 운명입니다.

4)    이제 남은 문제는 어떻게 하면 고난을 통하여 그들을 믿음의 사람으로 만들어 낼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9:22-24). 그리고 그러한 변화가 가능하도록 언제 어떻게 그리스도와 보혜사 성령님을 그들에게 보내어 주는가 하는 것입니다(1:14, 29, 14:16-17). 그와 같은 구원의 역사를 이루는 방향으로 도도하게 여호와의 섭리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러한 시대를 멀리 바라보면서 선지자 예레미야의 예언이 계속 기록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2)  땅이여, 땅이여, 땅이여, 여호와의 말을 들을지니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22:29-30a);

1)    두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는 구절입니다; ①하나는, 땅 땅 땅 세번 땅을 친다고 하는 것은 여호와의 말씀이 이제 확정적인 것이라는 선포입니다. 마치 회의석상에서 의장이 의사봉을 세번 내리치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②또 하나는, 여호와께서는 다윗왕조 유다 왕국의 멸망으로 이 세상에서 선민이 사라졌다고 하는 사실을 말씀하십니다. 선민의 땅인 가나안 땅에서 그들이 이방인 땅으로 쫓겨났으며 그들의 기업이 황폐하게 되었으므로 이제 이 세상에서는 선민의 땅이 없습니다.

2)    모두가 이방인이 되어 이방 땅에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세 가지의 땅은 다음과 같이 분류가 될 수 있습니다; ①첫째가 사라지는 선민의 땅이며, ②둘째가 모두가 함께 살아가는 이방인의 땅이고, ③셋째가 영생의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와 성령님을 보내어 만민을 구원하여 들이는 그 새로운 땅입니다. 그 새로운 땅에 대해서는 선지자 이사야가 벌써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예언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65:17-18).

(3)  너희는 이 사람이 자식이 없겠고, 그의 평생동안 형통하지 못할 자라 기록하라. 이는 그의 자손 중 형통하여 다윗의 왕위에 앉아 유다를 다스릴 사람이 다시는 없을 것임이라 하시니라”(22:30b);

1)    다윗왕조의 개창자인 다윗은 두가지 점에서 여호와의 마음에 크게 들고 있습니다(삼상16:7, 13:22); ①하나는, 사울 왕에게 쫓기어 10년이상 도망자로 살아가면서도 그의 앞에 가져다 놓은 사울 왕의 목숨을 취하지 아니한 자가 다윗입니다(삼상24:4-12). 하도 신기하여 여호와께서는 다윗의 믿음을 한번 더 시험하십니다. 그러나 결과가 같습니다(삼상26:7-12). 여호와께서 기름을 부어 세운 왕을 자신의 손으로 죽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종은 그 주인께서 직접 조치를 하신다고 하는 확고한 믿음을 다윗이 보인 것입니다. 그것이 여호와의 참된 종의 자세이며 하나님 경외 사상입니다. ②또 하나는, 간음죄와 살인죄를 저지르고서도 왕자무치(王者無恥, 왕은 부끄러운 일을 맘대로 행해도 된다는 것) 사상에 빠져 있던 다윗 왕이 나단 선지자를 보내어 야단을 치시는 여호와의 말씀에 정신이 번쩍 들고 있습니다(삼하12:6-15).

2)    창조주이신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피조물의 생명을 똑같이 여기시고 하나같이 돌보고 계십니다. 왕이라고 하여 그 생명이 귀하며 일반 백성이라고 하여 그 목숨이 하찮은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계명과 율법은 빈부귀천의 차이가 없이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적용이 되고 있습니다. 그 사실을 깨닫게 된 다윗은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고 어떠한 처벌이라고 달게 받겠다고 결심합니다. 그의 깨달음과 결심이 다시는 흔들리지 않습니다. 남은 평생을 2번의 왕자의 난과 1번의 지파의 반란을 맞이하여 칼날 위에서 살아가게 되지만 원망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여호와의 보응이며 처벌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온전히 회개의 인생을 살아간 다윗에게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제국을 주시고 영원한 다윗왕조를 약속하십니다.

3)    그러나 전제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누구나 다윗과 같은 인생을 살아가게 되면 다윗의 왕좌를 주겠다는 약속입니다”. 그러므로 다윗과 같은 회개와 온전한 믿음의 인생을 살아가지 아니하게 되면 다윗의 왕조가 망하고 선민의 나라가 사라지고 마는 것입니다. 그런데 선민이 사라진 땅에서는 선민과 이방인의 구별이 더 이상 있을 수가 없습니다. 선민을 다스리는 다윗왕조도 이제는 필요가 없습니다. 그와 같은 의미에서 너희는 이 사람이 자식이 없겠고, 그의 평생동안 형통하지 못할 자라 기록하라. 이는 그의 자손 중 형통하여 다윗의 왕위에 앉아 유다를 다스릴 사람이 다시는 없을 것임이라 하시니라”(22:30b)고 기록이 되고 있습니다. 사실 내적으로는 여호야긴 왕이 바벨론으로 끌려감으로 다윗왕조가 끝나고 있습니다. 바벨론으로 끌려간 다윗의 가문에서 다시는 선민의 왕이 탄생하지 아니하기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 선민이 사라진 세상이기에 이제는 이방인의 임금들만이 다스리는 시대입니다. 그런데 그 시대가 오래 가지를 않습니다. 600년 남짓 지나면 그 옛날 다윗왕조의 땅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속죄양이 되어 대속의 십자가를 지시고 무덤에서 부활하시게 되면 이 땅에서 세상의 임금들이 쫓겨나게 됩니다(12:31). 그리고 천국복음이 온세상에 전파가 되면 세상의 종말과 더불어 새로운 하늘과 땅이 하나님의 나라로 건설이 되는 것입니다(24:14, 21:1-2).

그와 같은 비전을 가지고 모두들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의 역사에 동참하는 그리스도의 복음의 일꾼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아무쪼록 그러한 하나님의 은혜가 여러 성도님들에게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