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예레미야 강해 제88강(렘15:15-18)(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2. 8. 18. 08:20

예레미야 강해 제88(15:15-18)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터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8817()

 

여호와에게 붙들려서 정직한 말씀의 대언자로 살아가고 있는 선지자 예레미야의 고통이 무엇이며 여호와신앙이 약해지면 어떠한 어려움에 처하게 되는가?(15:15-18)

 

본문에는 여호와께 드리는 선지자 예레미야의 가장 솔직한 기도가 기록이 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전반부의 두 구절은 나름대로 이해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 후반부의 두 구절은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어째서 그런 것일까요? 먼저 그 이유를 알아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첫째로, 먼저 제16절에서 예레미야는 자신이 여호와께서 세운 선지자로서 어떠한 은혜를 누리고 있는지를 진술하고 있습니다. 그 내용이 두가지입니다; ①하나는, 여호와의 말씀을 받았으며 그것을 여호와의 이름으로 백성들에게 선포하는 선지자로 세움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여호와의 은혜입니다. ②또 하나는, 여호와의 말씀이 자신에게 먼저 기쁨이 되고 마음의 즐거움이 되고 있으니 그것이 여호와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이 대목은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꿀보다 더 달다”(119:103)는 시편저자의 고백과 같은 것입니다.

(2)  둘째로, 15절에서는 선지자 예레미야가 여호와 하나님께 드리고 있는 솔직한 기도의 내용이 다음과 같이 5가지로 기록이 되고 있습니다;

1)    첫째, 여호와께서 예레미야 자신을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선지자로 세우시고 예레미야가 정직하게 그 사명을 감당하고 있는 것도 이미 알고 계시므로 부디 여호와의 종을 버리지 마시고 끝까지 기억하여 달라는 간구입니다(15:15a). 그것은 훗날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의 하나인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27:46)라는 부르짖음을 미리 보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2)    둘째, 선지자로 살아가는 삶이 어렵고 힘든 것인 줄 이미 아시오니 부디 항상 돌보아 달라는 것입니다(15:15b).

3)    셋째, 여호와의 예언의 말씀을 배척하고 도리어 선지자인 자신을 해치고자 하는 자들이 있음을 여호와께서 이미 알고 계시므로(8:5, 11:18-19) 그들에 대한 보복을 예레미야 자신은 여호와 하나님께 맡겨 드린다는 것입니다(11:20, 15:15c). 그러므로 여호와께서는 공의의 정신에 따라 여호와의 말씀을 멸시하고 정직한 선지자를 해치려고 하는 자에게 엄중함으로 보응하시는 것입니다(삼상2:29-30, 11:21-23, 15:15c, 12:19).

4)    넷째, 여호와께서는 멸망의 심판보다는 피조물을 회개하도록 기회를 주고 또한 구원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의 진술과 같이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9:22) 계십니다. 그 오랜 과정 중에 예레미야는 그들의 박해를 견디지 못하여 자신이 죽게 될까 염려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주의 오래 참으심으로 말미암아 나를 멸망하지 아니하게 하옵시며”(15:15d)라는 간구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5)    다섯째, 선지자 활동을 하고 있는 예레미야는 여호와의 말씀을 경멸하고 있는 동족들로부터 수치를 당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그렇게 백성들로부터 부끄러움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여호와께서는 감안하여 달라고 하는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15:15e). 그 말은 더 이상 동족으로부터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도록 조치를 하여 달라는 것입니다.

(3)  셋째로, 선민 유대인들이 100년 전에 먼저 망한 북조 이스라엘 10지파처럼 여호와신앙을 떠나서 제멋대로 우상을 섬기며 세상적인 탐욕과 육신적인 정욕을 쫓아서 자기들끼리 세상의 열락을 기쁘게 즐기고 있습니다. 그러한 모임에 선지자 예레미야는 발걸음을 아니하고 있습니다(15:17a). 그 대신에 그러한 모습을 바라보고서 그 마음속에 깊은 슬픔과 근심이 차오르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말씀의 세계 속에서 동족들의 미래를 미리 바라보니 이방 강대국에 의하여 나라가 망하고 백성들이 포로로 살아가게 됩니다(7:12-15). 그들의 죄악을 용서하여 달라고 말씀에 이끌려서 여호와께 기도를 드리자 그들에게 향하던 하나님의 분노가 예레미야 자신에게 먼저 부어져서 홀로 견딜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15:17b). 그러므로 부디 대속자 그리스도를 자신에게 먼저 보내어 구원하여 달라는 간구라고 하겠습니다.

(4)  넷째로, 본문 제18절에는 다음과 같은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1)    첫째, 히브리서의 저자는 구약상의 믿음의 열조들이 한결같이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셔서 자신들을 부활시켜 천성으로 인도하여 주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11:13-16). 그들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이 자신들의 인생의 목표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영원히 살아 계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것이 영생이며 그것이 인생의 궁극적인 구원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자들입니다.

2)    둘째, 이 세상에서는 고통과 여호와의 분노에서 성도들 자신도 자유스러운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있습니다. 육신을 입고서 살아가고 있는 성도들입니다. 세상적인 기쁨과 즐거움을 얻기 위하여 달려나가고 있는 자신들의 육신적인 탐욕과 정욕이 완전히 통제가 되지를 않습니다. 왜냐하면, 육신적인 죄의 욕구가 여호와신앙 안에 머물고자 하는 성도의 마음보다 더 강하기 때문입니다(7:23).

3)    셋째, 그와 같은 의미에서 훗날 로마서 제7장에 수록이 되어 있는 사도 바울의 부르짖음이(7:21-25) 벌써 여기서 예레미야의 탄원으로 다음과 같이 나타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나의 고통이 계속하여 상처가 중하여 낫지 아니함은 어찌됨이니이까? 주께서는 내게 대하여 물이 말라서 속이는 시내 같으시리이까?”(15:18).

이상과 같은 사실들을 염두에 두고서 이제부터 본문의 말씀을 한 구절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그 깊은 의미와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파악해봅니다;

첫째로,여호와여 주께서 아시오니, 원하건대 주는 나를 기억하시며, 돌보시, 나를 박해하는 자에게 보복하시고, 주의 오래 참으심으로 말미암아 나로 멸망하지 아니하게 하옵시며, 주를 위하여 내가 부끄러움 당하는 줄을 아시옵소서”(15:15); 다음과 같이 5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봅니다;

(1)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오니, 원하건대 주는 나를 기억하시며”(15:15a);

1)    예레미야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신을 아시는 것을 전제로 하여 자신을 기억하여 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 말은 자신의 속마음 곧 진심을 여호와 하나님께서 언제나 감찰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그가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삼상16:7).

2)    자신은 여호와께서 그 마음속을 들여다보신 그대로 정직하게 여호와의 말씀을 동족들에게 대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점을 아시고 여호와의 충직한 종인 자신을 항상 기억하여 달라고 간구하고 있습니다.

3)    창조주이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 인생을 기억하여 주신다고 하면 그 사람은 이 세상에 온 목적을 벌써 성취하고 있습니다. 그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이 될 것이며 영생의 하나님나라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자녀의 영광을 영원히 누릴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22:28-30, 21:26-27).

(2)  돌보시”(15:15b);

1)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창조주이시므로 모든 피조물을 돌보시고 그 생명을 전부 살리고자 하십니다. 그것이 창조주 하나님의 사랑이며 공의의 정신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선지자 예레미야가 여호와 하나님께 간구하고 있는 돌보심은 그러한 일반적인 돌보심이 아니라 더욱 절실한 것입니다(5:45).

2)    왜냐하면, 예레미야는 여호와의 말씀을 대언하고 있기 때문에 고향사람과 동족들로부터 미움을 받고 있으며 또한 목숨의 위협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11:9, 19-21). 따라서 예레미야는 그가 선지자활동을 하고 있는 동안에 항상 여호와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며 그를 지켜 달라고 하는 의미에서 여기서 특별한 돌보심을 간구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12:3).

(3)  나를 박해하는 자에게 보복하시고”(15:15c);

1)    겉으로 보면, 여호와의 종이며 선지자인 예레미야도 별 수가 없는 평범한 인간이구나 하고 생각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자신을 박해하는 사람에게 그는 여호와의 신위적인 능력을 빌려서라도 보복을 하고 싶어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2)    그러나 그것이 아닙니다. 예레미야는 자신을 박해하고 있는 사람에 대하여 직접 자신이 보복을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보다도 자신의 억울함과 보복심리를 상대방에게 말하고 있지 아니하며 오로지 자신의 인생의 주인이신 여호와 하나님께 기도로 아뢰고 있는 것입니다(25:21-22, 12:19). 그에 따라 창조주이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준엄하게 심판하실 것입니다.

3)    그것은 사람이 악으로써 악을 이기는 것이 아니라 선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손에 그 원수의 처결을 맡겨 드림으로써 여호와의 보응과 대속에 의한 생명살림의 역사가 동시에 발생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른바 훗날 사도 바울이 말하고 있는 선으로써 악을 이기는 방법이라고 하겠습니다(12:21).

(4)  주의 오래 참으심으로 말미암아 나로 멸망하지 아니하게 하옵시며”(15:15d);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주권자이시며 심판주이십니다. 그러므로 패역하는 자에게 진노하시며 준엄하게 심판하십니다. 그러나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더 위대한 역사를 섭리하시고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십니다. 그것은 진노의 그릇을 멸망시키지 아니하고 오래 참으심으로 그것을 관용하신다는 것입니다(9:22). 긍휼을 베풀어 회개하는 자를 치유하여 새로운 창조물로 만들고 계십니다(9:23). 그와 같은 여호와의 역사섭리를 선지자 예레미야가 잘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선민 유대인들이 모두 회개할 때까지 여호와께서 참으신다고 하시면 그 전에 자신은 여호와의 말씀을 외치다가 그들에 의하여 죽임을 당하고 말 것입니다. 그러한 희생물이 되지 않도록 자신을 보살펴 달라고 하는 기도가 주의 오래 참으심으로 말미암아 나로 멸망하지 아니하게 하옵시며”(15:15d)라고 하겠습니다.

(5)  주를 위하여 내가 부끄러움 당하는 줄을 아시옵소서”(15:15e); 제사장 힐기야의 아들인 예레미야는 유다 왕국에서 부끄러운 신분의 사람이 아닙니다(1:1). 자랑스러운 아론의 후손입니다. 그런데 그가 제사장이 아니라 선지자의 사명을 감당하고 있기에(1:2-3) 예루살렘에 가까운 고향 아나돗에서부터 배척을 받고 있습니다(11:21). 그들의 박해를 받으면서 수치를 당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여호와를 대신하여 당하고 있는 부끄러움입니다(53:3, 27:28-31). 그러므로 그 점을 부디 감안하여 더 이상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도록 역사를 섭리하여 달라는 예레미야의 간구라고 하겠습니다(15:15e).

둘째로,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시여, 나는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자. 내가 주의 말씀을 얻어 먹었사오니, 주의 말씀은 내게 기쁨과 내 마음의 즐거움이오나, 내가 기뻐하는 자의 모임 가운데 앉지 아니하며, 즐거워하지도 아니하고, 주의 손에 붙들려 홀로 앉았사오니, 이는 주께서 분노로 내게 채우셨음이니이다”(15:16-17); 다음과 같이 두 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1)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시여, 나는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자. 내가 주의 말씀을 얻어 먹었사오니, 주의 말씀은 내게 기쁨과 내 마음의 즐거움이오나”(15:16); 여호와의 종으로 불리고 있는 선지자 예레미야입니다. 하나님이 영이 그를 감동시키고 여호와의 말씀이 그의 입술을 통하여 백성들에게 선포가 되고 있습니다. 그 말씀이 우선 자신의 마음에 즐거움과 삶의 기쁨으로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그렇게 말씀의 종으로 기쁘게 평생을 살아가고 있는 선지자 예레미야입니다. 그러나 그가 여호와의 말씀의 뜻을 깨닫고 대언할수록 그는 점점 외로워지고 있습니다(8:20).

(2)  내가 기뻐하는 자의 모임 가운데 앉지 아니하며, 즐거워하지도 아니하고, 주의 손에 붙들려 홀로 앉았사오니, 이는 주께서 분노로 내게 채우셨음이니이다”(15:17);

1)    세상에는 넓은 길과 좁은 길이 있습니다; 선지자 예레미야처럼 여호와의 손에 이끌려서 선지자의 사명을 감당하고 있는 자는 좁은 길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 반면에 많은 선민 유대인들이 여호와신앙을 떠나서 세상적인 탐욕과 육신적인 정욕에 이끌려서 우상을 섬기며 제멋대로 인생을 즐기고 있습니다. 그들은 넓은 길로 가고 있는 자들입니다.

2)    동족들이 서로 끼리끼리 만나서 향락을 즐기고 있는 그 자리에 선지자 예레미야는 함께할 수가 없습니다(15:17a). 왜냐하면, 그는 여호와의 말씀과 예언 가운데 벌써 선민 유대인들의 엄청난 불신앙과 죄악의 결과가 어떠한 모습으로 곧 여호와의 보응을 받게 되는지를 깨달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너희 모든 형제 곧 에브라임 온 자손을 쫓아낸 것같이 내 앞에서 너희를 쫓아내리라 하셨다 할지니라”(7:15).

3)    예레미야는 또한 그를 향하고 있는 동족들의 박해가 심해지고 있으며 때로는 그의 마음속에서 동족들을 향한 분노도 나타나고 있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 옛날 모세와 아론이 가데스 바네아에서 새로운 세대인 동족들을 향하여 분노한 사실과 일맥상통하고 있는 것입니다(20:13).  

4)    여기서 이는 주께서 분노로 내게 채우셨음이니이다”(15:17b)고 하는 대목은 또다른 의미를 전달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선민 유대인들에게 분노하시기 이전에 여호와께서는 영적인 지도자들에게 먼저 그 책임을 묻고 계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선지자와 제사장들은 속죄하는 마음으로 대속의 삶을 살아가야만 합니다. 그러한 맥락에서  대속의 십자가에서 부르짖은 예수님의 부르짖음이 다음과 같습니다; “9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27:46).

셋째로,나의 고통이 계속하며, 상처가 중하여 낫지 아니함은 어찌됨이니이까? 주께서는 내게 대하여 물이 말라서 속이는 시내 같으시리이까?”(15:18); 역시 다음과 같이 두 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1)  나의 고통이 계속하며, 상처가 중하여 낫지 아니함은 어찌됨이니이까?”(15:18a);

1)    유다 왕국의 말기에 여호와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을 동족들에게 대언하고 있는 선지자 예레미야의 마음이 참으로 고통스럽습니다. 여호와의 말씀 가운데 드러나고 있는 동족들의 반역하는 마음과 육신적인 죄악이 너무나 중하여 견딜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엄중한 여호와의 심판의 예언을 들었으면 선민들이 회개를 하고 그 옛날 니느웨 성읍에서와 같이 왕과 백성들이 하나같이 여호와께 구원을 호소하여야 마땅한데(3:3-10) 그러한 움직임이 전무합니다. 그러므로 동족들의 멸망을 예견하고 있는 선지자 예레미야의 마음이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2)    무려 40년 동안 예레미야가 선지자로 활동하면서 여호와의 예언의 말씀을 대언하고 있지만 선민 유대인들은 전혀 회개할 조짐이 없습니다. 도리어 예레미야가 거짓 예언을 외치고 있다고 몰아세우고 해치려고 합니다(11:19, 21, 28:1-11). 오죽이나 선민 유대인들이 악했으면 예레미야가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다니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정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읍을 용서하리라”(5:1)는 여호와의 말씀까지 외치고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유다 왕국의 멸망은 이제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에 따라 선지자 예레미야의 마음속 고통은 더욱 심해지고 그의 상처는 전혀 낫지를 아니하고 더욱 위중해지고 있다고 하겠습니다(15:18a).

(2)  주께서는 내게 대하여 물이 말라서 속이는 시내 같으시리이까?”(15:18b); 예레미야는 비가 오지 아니하는 건기가 되면 완전히 물이 말라버리는 가나안의 계곡 와디에 대하여 잘 알고 있습니다. 평소에는 마른 하천으로 보이지만 비가 오게 되면 일시에 물이 흐르는 시내나 호수가 됩니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선지자 예레미야는 와디에 다시 하늘에서 비가 내려서 푸른 물이 흘러 넘치기를 학수고대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마음이 바짝 마른 와디와 같이 여호와의 구속의 단비를 기다리고 있으니 부디 오래 동안 그냥 버려 두지 마시고 하루 속히 구원의 단비를 하늘에서 내려 달라는 것입니다(15:18b).

결론적으로, 그 구원의 단비가 바로 이른 비늦은 비로 상징이 되고 있는 그리스도의 오심과 성령님의 강림하심입니다(2:23).

선지자 예레미야가 그토록 앙망하고 있던 대속의 그리스도와 능력의 성령님께서 600년이 지나자 주후 1세기에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은혜의 시대를 살고 있는 성도들은 참으로 복이 많은 자들입니다.

그와 같은 사실을 깨닫고 너나 없이 아무쪼록 여호와의 종으로 그리고 그리스도의 종으로 신실하게 끝까지 충성하시는 성도님들이 모두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