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강해 제54강(렘9:1-6)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터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8년 7월 14일(토)
여호와로 하여금 눈물을 흘리며 선민의 나라를 떠나게 만들고 있는 유대인들의 죄는 과연 무엇인가?(렘9:1-6)
본문에서 선지자 예레미야가 동족들에게 전하고 있는 여호와의 말씀은 상호대비가 되는 용어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용어들의 의미만 잘 새겨보면 문장의 뜻이 드러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 점을 다음과 같이 먼저 살펴봅니다;
(1) 첫째로, 제1절에서 ‘눈물’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선민 다윗왕조 유다 왕국의 멸망을 미리 바라보면서 흘리고 있는 여호와의 눈물입니다. 나라가 망하고 많은 선민들이 죽임을 당할 것입니다. 그리고 살아 남은 백성들은 이방인들의 땅에 끌려가서 노예와 같은 삶을 영위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한 미래를 아시는 여호와께서는 딸 시온이 당하는 고난을 생각하면서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여호와께서는 먼 훗날 그들의 눈물을 닦아 주기 위하여 이 세상에 구원자 그리스도를 보내어 주시는 것입니다(사65:19, 계21:4).
(2) 둘째로, 제2절에서 ‘광야’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의미상으로 ‘약속의 땅 가나안’과 다음과 같이 대조를 이루고 있는 용어입니다;
1) 첫째, 선민 이스라엘 자손들은 출애굽한 후 40년 동안 광야생활을 하면서 그곳에서 모세를 통하여 여호와께서 주시는 말씀을 신정국가의 법률체계인 율법으로 배웠습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매일 주시는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고 살았습니다. 또한 그들이 가는 길을 여호와의 사자인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안내를 했습니다. 뜨거운 광야의 열기를 구름기둥이 막아 주고 밤의 추위를 불기둥이 막아 주었습니다. 선민들은 안식일을 여호와 하나님과 함께 지내면서 영적인 교제의 삶을 살았습니다(출16:29-30).
2) 둘째, 그들이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와서 살게 되면서 모세의 염려 그대로 영성생활이 달라지고 맙니다(신8:11-20). 자신들의 힘으로 좋은 땅을 차지하였으며 자력으로 농사를 지어서 풍요로운 삶을 누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도우심이 더 이상 필요하지가 않다는 사고방식입니다. 이제는 자신들의 세상적인 소원성취와 풍성한 수확을 위하여 이방인들의 신과 우상을 도입하여 경배하며 섬기고 있습니다. 그것이 훨씬 쉽고 자신들의 마음에 들기 때문입니다. 요컨대, 신정국가의 왕으로 그리고 자신들의 주인으로 군림을 하시는 여호와를 떠나서 선민들이 이제는 하나님의 종이 아니라 이 세상의 주인으로 살아가고 싶은 것입니다.
(3) 셋째로, 제3절에서 ‘활’과 ‘혀’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무력’과 ‘비난’을 상징하고 있는 용어입니다. 선민들이 가나안 땅에서 살아가면서 서로 상대방을 비난하면서 힘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고 합니다. 그 결과 자신들은 여호와 앞에 의로운데 상대방이 악해서 사회문제가 발생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힘이 있는 자가 정의가 되고 힘이 약한 자가 부정한 자로 여겨지는 사회가 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약육강식의 짐승과 같은 사회를 만들어 놓고 마는 타락한 선민들의 사회입니다.
(4) 넷째로, 제4-6절에서는 ‘이웃’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선민들의 이웃은 주변의 이방인들입니다. 여호와께서 애굽제국의 노예와 같은 삶을 영위하고 있는 이스라엘 자손들을 모세를 보내어 해방시키고 광야에서 여호와를 섬기는 신정국가의 백성으로 훈련을 시킨 후 그들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신 것은 하나의 목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그들의 조상인 아브라함처럼 가나안 땅에서 여호와의 선지자로 살아가면서 이웃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그들에게 구원의 복을 나누어 주라고 하는 것입니다(창12:1-4, 출19:4-6). 그렇게 이웃인 이방인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제사장나라로 그리고 거룩한 여호와의 선지자로 살아가야만 하는 선민 이스라엘 자손들이 그렇게 행동을 하지 아니하고 맙니다. 그 이유가 본문 제4-6절에서 상세하게 설명이 되고 있습니다.
이상과 같은 사실들을 염두에 두고서 이제부터 본문의 말씀을 한 구절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그 깊은 의미와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파악해봅니다;
첫째로, “어찌하면 내 머리는 물이 되고 내 눈은 눈물 근원이 될꼬? 죽임을 당한 딸 내 백성을 위하여 주야로 울리로다. 내가 광야에서 나그네가 머무를 곳을 얻는다면 내 백성을 떠나 가리니, 그들이 다 간음하는 자요, 반역한 자의 무리가 됨이니라”(렘9:1-2); 다음과 같이 두 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봅니다;
(1) “어찌하면 내 머리는 물이 되고 내 눈은 눈물 근원이 될꼬? 죽임을 당한 딸 내 백성을 위하여 주야로 울리로다”(렘9:1);
1) 예레미야는 선지자 이사야와 마찬가지로 여호와께서 다윗왕조 유다 왕국의 선민들을 무척 사랑하신다는 뜻으로 ‘내 딸 백성’, “딸 내 백성”, 또는 ‘시온의 딸’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사3:16-17, 4:4, 렘4:11, 6:2, 23, 8:11, 19, 21, 9:1).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신의 딸과 같이 사랑하며 애지중지하는 백성이 바로 선민 유대인들입니다. 그들의 나라가 얼마 지나지 아니하여 여호와께 버림을 받게 되고 이방 강대국에 의하여 멸망을 당하게 됩니다. 그리고 선민 유대인들이 신바벨론제국의 포로가 되어 노예와 같은 삶을 이방 땅에서 살아가게 됩니다.
2) 그러한 심판의 역사를 앞두고 계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마음이 무너질 것만 같습니다. 따라서 머리가 눈물로 가득차고 그것을 밤낮 울어서 모두 흘린다고 하더라도 그 마음이 시원해지지 아니하며 위로를 얻지를 못하게 된다고 하시는 말씀입니다(렘9:1, 8:18-19). 신정국가의 왕이시며 주권자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그토록 슬픔의 도가니로 몰아 넣고 있는 시온의 딸들이야 말로 전부 그들의 패역함을 내려놓고 이제는 한마음으로 회개의 마당으로 나아와야만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러하지를 않습니다. 그것이 여호와의 마음을 참으로 아프게 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2) “내가 광야에서 나그네가 머무를 곳을 얻는다면 내 백성을 떠나 가리니, 그들이 다 간음하는 자요, 반역한 자의 무리가 됨이니라”(렘9:2);
1) 자신의 딸과 같이 애지중지하던 선민 유대인들이라고 하더라도 여호와께서는 처벌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고 이방신과 우상을 도입하여 자신들의 하나님으로 섬겼기 때문입니다(렘8:19). 그리고 그 옛날 아모리 족속보다 더 죄악이 넘치는 사회를 만들어버리고 말았기 때문입니다(왕하21:10-13, 창15:16).
2) 그것은 생명의 주인이시며 아버지이신 여호와를 버린 불효자와 같습니다. 그리고 창조주를 우상으로 폄하하고 자신들이 이 세상의 주인이라고 강조하는 반역의 행위입니다(렘9:2d). 이방의 신과 우상을 도입하여 음란한 세상을 만들고 있으니 선민의 사회가 얼마나 영적으로 타락하고 악한 사회가 되어버렸는지 모릅니다(렘9:2c). 그러므로 육신이 되어 버린 선민사회를 버려 버리시고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약속의 땅 가나안을 떠나 버리시는 것입니다(렘9:2b, 창6:3).
3)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떠나신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어디로 가시는 것일까요? 그 목적지가 ‘광야’라고 언급이 되고 있습니다(렘9:2a). 여호와께서는 광야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을 다시 만들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제는 이스라엘 자손이 아니라 이방인 가운데서 제사장나라 거룩한 백성을 훈련시키시겠다는 역사섭리를 드러내시고 계십니다. 그와 같은 여호와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훗날 그리스도의 복음을 영접한 많은 이방인들이 성도가 되어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새로운 공동체를 형성하게 됩니다.
4) 그와 같은 여호와의 뜻은 모세오경에서 다음과 같이 진작에 드러나고 있습니다; ①첫째, 시내 산 앞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출애굽의 신 여호와라고 섬기고 축제를 벌였을 때에 여호와께서는 그들을 모두 진멸하고 모세의 자손만으로 새로운 선민을 만드시겠다고 언급하십니다(출32:10). ②둘째, 가데스 바네아에서 10정탐꾼들의 거짓 보고에 현혹이 된 이스라엘 자손들이 여호와를 불신하고 모세와 아론을 불신임하면서 새로운 지도자를 선출하여 애급으로 되돌아가려고 합니다. 그때 여호와께서는 다시 그들을 진멸하고 광야에서 새로운 선민을 만들고자 하십니다(민14:12).
5) 그와 같은 맥락에서, 여호와의 공의를 실천하는 메시아가 이 세상에 오시게 되면 선민과 이방인 구별이 없이 누구나 그리스도의 종으로 살아가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이 됩니다(사52:13-15, 65:11-16). 그러므로 선민 이스라엘이라고 부르는 이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누구나 여호와의 종으로 그리고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가는 그 복음적인 생애가 중요한 것입니다. 따라서 광야와 같은 인생길에서 여호와께서는 그러한 성도를 양육하시기를 원하신다는 것이 본문의 뜻입니다(렘9:2a).
둘째로,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들이 활을 당김 같이 그들의 혀를 놀려 거짓을 말하며, 그들이 이 땅에서 강성하나 진실하지 아니하고 악에서 악으로 진행하며, 또 나를 알지 못하느니라. 너희는 각기 이웃을 조심하며, 어떤 형제든지 믿지 말라. 형제마다 완전히 속이며, 이웃마다 다니며 비방함이라”(렘9:3-4); 역시 다음과 같이 두 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들이 활을 당김 같이 그들의 혀를 놀려 거짓을 말하며, 그들이 이 땅에서 강성하나 진실하지 아니하고 악에서 악으로 진행하며, 또 나를 알지 못하느니라”(렘9:3);
1) ‘활’과 ‘혀’를 언급하고 있습니다(렘9:3b). 여기서 ‘활’은 ‘무력’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혀’는 ‘언론의 힘’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선민들이 창조주이시며 모든 인생과 역사의 주인이신 여호와를 버리고 제멋대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대신하여 무엇을 의지하여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요? 그것이 바로 그들의 ‘활’과 ‘혀’입니다.
2) 세상적으로 힘이 있고 언론이 자신들을 지지하고 있으면 이 세상의 주인으로서 마음껏 자신의 포부를 펼칠 수가 있다고 선민들이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권력과 부를 장악한 자가 여호와를 제치고 신정국가의 왕이 되고 있습니다. 선민의 왕이 여호와의 뜻을 따르지 아니하고 다른 이방나라와 똑같이 군사력을 키워서 힘으로 세상을 지배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 힘을 사용하여 주변의 약소국들을 무찌르고 약탈을 하거나 조공을 많이 받아서 강성하고 부유한 제국을 만들고 있습니다(렘9:3c).
3) 그러나 그러한 선민의 나라에서는 세가지가 사라지고 없습니다(렘9:3d); ①첫째, 여호와의 말씀인 진리가 사라지고 없습니다. ②둘째, 하나님의 공의 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정의도 사라지고 없습니다. 따라서 군사력의 독점이 사회적인 폭력을 낳고 죄악이 장성하여 사망을 낳고 있습니다. ③셋째, 이방인보다도 못한 죄악된 선민사회를 여호와께서 버리시고 마침내 그 사회를 떠나 버리십니다. 그와 같은 여호와의 역사섭리가 오늘날에도 그대로 적용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예레미야가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9:3a)는 구절로 강조하고 있습니다.
(2) “너희는 각기 이웃을 조심하며, 어떤 형제든지 믿지 말라. 형제마다 완전히 속이며, 이웃마다 다니며 비방함이라”(렘9:4); 여호와의 말씀이 사라지고 하나님의 공의와 사회적인 정의가 사라지고 또한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들을 버리고 떠나 버리시면 선민이나 성도들이라고 하더라도 그들의 공동체가 어떠한 모습으로 전락하고 마는 것일까요? 다음과 같이 변하고 만다고 예레미야가 여호와의 말씀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렘9:4); ①첫째, 이웃이 믿음과 도움의 대상이 아니라 경계의 대상이 되고 맙니다. 이웃이 돌변하여 언제 자신과 자신의 집을 해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②둘째, 같은 부모에게서 태어난 형제라고 하더라도 믿을 수가 없습니다. 재산과 상속을 더 많이 차지하기 위하여 형제를 속이고 해치는 일이 비일비재하기 때문입니다. ③셋째, 모두들 자신은 옳고 상대방이 틀렸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상대방에 대한 비난이 극성하고 있습니다. 서로 상대방을 비난함으로써 자신이 정당하며 의롭다고 하는 사실을 부각하는 형식적인 논리가 지배하고 있는 두려운 사회가 되고 맙니다. 한마디로, 누구나 그러한 사회에서는 살고 싶지가 아니할 것입니다.
셋째로, “그(선민)들은 각기 이웃을 속이며, (이방인들에게) 진실을 말하지 아니하며, 그들의 혀로 거짓말하기를 가르치며, 악을 행하기에 지치거늘, 네가 사는 곳이 속이는 일 가운데 있도다. 그들은 속이는 일로 말미암아 나를 알기를 싫어하느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9:5-6); 다음과 같이 세 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봅니다;
(1) ‘그(선민)들은 각기 이웃을 속이며, (이방인들에게) 진실을 말하지 아니하며”(렘9:5a);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신 이유는 그들에게 다음과 같은 두가지 역할을 기대하셨기 때문입니다(출19:4-6);
1) 첫째, 진리의 하나님 앞에 서자면 선민들이 이 세상에서 이웃을 속이는 행위를 일체 행해서는 안됩니다(렘9:5aa). 그 대신에 거룩한 백성이 되어야 합니다. 여기서 ‘거룩’이라고 하는 것은 창조주이신 여호와의 속성입니다. 따라서 모든 천사들이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다”고 거듭 찬양을 하고 있습니다(계4:8).
2) 거룩하신 여호와 앞에 피조물인 사람이 똑바로 서기 위해서는 그 역시 거룩함을 옷 입어야 합니다. 그 거룩한 옷은 그리스도의 행위를 본받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종의 모습으로 살아간 그것이 거룩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일생에서 볼 수 있듯이 모든 사람들에게 여호와의 구원의 말씀을 복음으로 전파하고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대속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마16:24). 그러한 내용을 출애굽기 제19장에서는 “제사장나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출19:6).
3) 둘째,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정직하게 주변의 이방인들에게 전해야만 합니다(렘9:5ab). 말로써만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옛날 신실한 여호와의 선지자였던 아브라함의 본을 따라 그 자손인 선민들도 여호와의 선지자답게 행동을 하면서 여호와신앙의 모범을 이방인들에게 보여 주어야만 합니다(창20:7, 23:6). 그것이 이방인들에게 여호와의 뜻을 정확하게 전달하는 방법입니다.
(2) “그들의 혀로 거짓말하기를 가르치며, 악을 행하기에 지치거늘, 네가 사는 곳이 속이는 일 가운데 있도다”(렘9:5b-6a);
1) 아브라함처럼 이방인들이 살고 있는 땅에 나아가서 여호와 하나님의 살아 계심과 그 구원의 복을 온몸으로 전해주는 선지자로 살아가지 아니하게 되면 선민사회가 어떻게 되고 마는 것일까요?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성도들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구원을 위하여 희생하고 헌신하는 인생을 살아가지 아니하게 되면 그들의 사회가 어떻게 변하고 마는 것일까요?
2) 여호와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감당하지 아니하는 선민들과 성도들을 여호와깨서는 보호하실 필요가 전혀 없으시기에 그들을 떠나 버리십니다. 그 결과 창조주 하나님의 진리와 생명의 능력이 아니라 거짓의 아비인 마귀가 죄와 사망으로 지배하는 세상이 되고 맙니다. 그와 같은 비극적인 선민사회 유다 왕국의 말기의 모습을 여호와께서는 선지자 예레미야의 글을 통하여 아주 사실적으로, “그들의 혀로 거짓말하기를 가르치며, 악을 행하기에 지치거늘, 네가 사는 곳이 속이는 일 가운데 있도다”(렘9:5b-6a)라고 지적하십니다.
(3) “그들은 속이는 일로 말미암아 나를 알기를 싫어하느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9:6b);
1)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과 치유의 복을 자신들만 독점하고자 하는 선민사회는 여호와의 버림을 받게 됩니다. 그 때문에 여호와의 말씀인 진리가 아니라 사탄의 비진리인 거짓말이 성행하게 됩니다(렘9:6ba, 요8:44). 오늘날 성도들의 사회도 그러한 현세적인 이기주의 생각에 젖어 있게 되면 마찬가지입니다. 왜냐하면, 여기서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9:6bc)고 하는 문구가 사용이 되고 있는데 그것이 시공간을 뛰어넘어 항상 여호와의 말씀의 역사적인 섭리가 그와 같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2) 여호와 하나님의 창조주이심을 인정하지 아니하게 되면 선민이거나 성도이거나 상관없이 누구나 여호와의 종으로 살아가고자 하지를 않습니다. 자신이 이 세상의 주인이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주인인 자신의 입맛에 맞는 이방신과 우상을 도입하여 그것을 신처럼 섬기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것은 신이 아니라 사실은 인간이 만든 종입니다. 주인의 소원을 듣고서 그것을 성취하고자 하는 요술램프의 요정과 같은 것입니다. 그렇게 요정과 같은 종을 신이라고 부르면서 현세적인 이익만을 탐하고 있으니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을 위하여 헌신하고 희생하라는 여호와의 말씀을 싫어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렘9:5bb).
결론적으로, 선민들이 만만하고도 편리한 우상을 만들어서 자신의 하나님으로 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여호와의 거룩한 백성으로 선택이 된 민족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 구원의 말씀을 모든 이방인들에게 전달하고 그들의 죄 사함을 위하여 중보의 기도와 속죄의 제사를 드려주는 제사장나라 거룩한 백성으로 살아가야만 합니다(출19:4-6).
그런데 그들이 그렇게 행하지를 아니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들을 괴롭히고 있는 주변의 이방인들을 미워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원수들은 쳐부수는 것이 원칙이지 어떻게 그들을 사랑하며 구원해주고자 자신들을 희생하고 헌신하겠습니까?(마5:43-45) 그렇게 유다 왕국의 정치적 지도자들과 종교적 지도자들이 주장하면서 백성들을 이끌고 있습니다.
그러한 마음을 지니고서 여호와를 섬기는 신앙생활을 영위하고자 하므로 그들의 신앙행태가 이중적이며 가식적입니다. 형식적으로는 율법에 따라 절기를 지키고 제사를 드리며 안식일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마음속은 여호와의 뜻과 말씀을 떠나서 세상적으로 편리한 우상문화에 젖어 있습니다. 선민들이 현세적이며 이기적인 자신들의 소원을 복으로 빌기에는 창조주 여호와보다는 사람이 만든 우상이 훨씬 편리하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그들의 역사가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본문에서 두가지 사실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①하나는, 마지막 선민의 나라까지 이방 강대국에 의하여 멸망을 당하고 선민들이 이방인의 땅에서 떠돌이로 살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②또 하나는, 여호와께서는 선민 이방인 구별을 하지 아니하고 새로운 성도를 선택하여 여호와의 종으로 그리고 그리스도의 복음사역의 일꾼으로 사용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요컨대, 구약적인 선민의 뒤를 새로운 성도들이 잇게 된다는 사실을 본문에서 벌써 표출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무쪼록 그 옛날 예레미야 시대의 선민 유대인들이 잘못한 사실을 타산지석으로 삼아서 이제는 건강한 여호와의 종으로 그리고 참된 복음의 일꾼으로 살아가시는 성도님들이 모두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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