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강해 제23강(렘4:19-22)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터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8년 6월 13일(수)
다윗왕조 유다 왕국이 망하고 예루살렘성전이 붕괴가 되고 마는 환상은 어떻게 온 땅의 전쟁과 패망으로 이어지고 있는가?(렘4:20) 그리고 여호와께서는 예레미야의 글을 통하여 어떠한 슬픔과 아픔을 토로하고 계시는가?(렘4:19, 21-22)
일찍이 선지자 이사야는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시며 새 예루살렘을 영생의 즐거운 성으로 창조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계획에 대하여 예언하면서 선민과 이방인들에게 새로운 믿음과 소망을 말하고 있습니다(사65:17-25). 그와 같은 이사야의 환상은 성경의 끝을 장식하고 있는 사도 요한의 계시록에 다시 기록이 되고 있습니다(계21:1-8).
따라서 성도들은 육신적인 탐욕과 죄악으로 더럽혀진 이 세상이 여호와 하나님의 종말심판으로 멸망을 당하고 하나님의 나라가 새 하늘과 새 땅으로 그리고 그 수도로서 새 예루살렘성으로 건설이 되는 줄 믿고 있습니다. 지금의 물질적이고도 육신적인 세상은 멸망을 당하더라도 영적인 하나님의 나라가 이 세상에 나타나게 되면 아무런 슬픔이나 걱정이 없다고 소망 가운데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에 나타나고 있는 예레미야의 예언은 다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창조한 선민의 나라와 또한 온 세상의 많은 족속들이 전쟁과 투쟁으로 하나같이 패망하고 멸망을 당하는 그 비참한 역사를 바라보시면서 참으로 슬퍼하시고 아파하시기 때문입니다(렘4:19-22).
사람들이 자신의 육신 가운데 들어 있는 탐욕과 정욕을 이기지 못하고 악한 영들의 충동을 받아 서로를 죽이며 멸망시키는 도구로 전락하고 있는 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다음과 같은 탄식을 자아내고 있습니다; “내가 저 깃발을 보며 나팔소리 듣기를 어느 때까지 할꼬. 내 백성은 나를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요, 지각이 없는 미련한 자식이라. 악을 행하기에는 지각이 있으나 선을 행하기에는 무지하도다”(렘4:21-22).
그런데 그와 같은 여호와 하나님의 탄식과 아픔으로부터 성도들과 선지자들이 이 세상에서 어떤 사명을 감당해야만 하는지 다음과 같은 교훈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1) 첫째, 이제는 전쟁의 깃발을 내리고 전투를 독려하는 나팔소리를 멈추도록 성도들과 선지자들이 나서야만 합니다. 서로 상대방을 원수로 여기고 미워하며 전쟁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방법으로는 아무도 구원을 얻을 수가 없다는 사실을 온세상에 전해야만 합니다. 그렇게 하여 모든 피조물들이 인류의 잘못 때문에 전멸을 당하게 된다면 그것을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가장 가슴 아프게 생각하신다고 하는 사실을 말해야만 합니다.
(2) 둘째, 미움과 전쟁의 악순환으로 말미암아 역사의 종말을 고하게 되는 것이 이 세상이라는 사실을 선지자 예레미야가 이사야의 예언을 통하여 벌써 알고 있습니다. 선지자 이사야의 예언에 따르면, 이 세상의 종말 다음에는 새 하늘과 새 땅 그리고 새 예루살렘성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나라가 새로이 창조가 된다고 합니다(사65:17-18). 그렇다면 하나님나라에 들어가게 되는 새로운 인간은 기존 인류의 멸망이 있은 다음에 새로이 창조가 되는 것일까요? 그것이 아닙니다.
(3) 셋째, 그렇게 된다면 그것은 참으로 창조주이신 여호와의 가슴을 아프게 하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새로운 인류를 창조하기 위하여 이 세상의 모든 인류를 전멸시키는 것이 사랑하는 백성들을 모두 쳐죽이고 정이 든 자식들을 모두 죽여버리는 아버지의 심정과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구세주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어 자신들의 죄를 회개하는 성도들을 먼저 구원하고자 하십니다. 그들을 복음전파와 구원의 용사로 다시 파송하십니다. 그것이 종말을 맞이하기 전에 구원을 받을 자를 많이 생산해내는 방법입니다.
(4) 넷째,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종말을 고하고 있는 이 세상에서부터 되도록 많은 사람들을 구원하여 하나님의 나라로 맞아 들이고자 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복음을 듣고서 많은 인류들이 하루 빨리 그리스도의 구원의 방주로 옮겨 타야만 합니다. 그 주님의 방주만이 새 하늘과 새 땅 그리고 새 예루살렘성으로 성도들을 데리고 들어갈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 작업을 주님께서 그리고 그 제자들이 대를 이어서 감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상과 같은 사실들을 염두에 두고서 이제부터 본문의 말씀을 한 구절씩 다음과 같이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그 깊은 의미와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파악해봅니다;
첫째로, “슬프고 아프다. 내 마음속이 아프고 내 마음이 답답하여 잠잠할 수 없으니, 이는 나의 심령이 나팔소리와 전쟁의 경보를 들음이로다”(렘4:19); 다음과 같이 두 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봅니다;
(1) “슬프고 아프다. 내 마음속이 아프고 내 마음이 답답하여 잠잠할 수 없으니”(렘4:19a);
1) 여호와 하나님께서 선지자 예레미야의 입술을 통하여 자신의 심정을 사람들이 알기 쉽게 세가지로 말씀하십니다; ①첫째, 슬픔으로 말미암아 창자가 끊어질 듯이 애간장이 모두 아프다고 하십니다. 그것은 지극한 슬픔이 주고 있는 육신적인 고통을 말하고 있습니다. ②둘째, 마음속 그 심령이 아프다고 하십니다. 그것은 영적인 슬픔과 그 아픔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③셋째, 마음이 답답하여 소리를 치고 싶다는 것입니다.
2) 구체적으로, 이성적인 냉정을 유지할 수가 없으며 감정을 조절할 수도 없고 인내의 의지마저 바닥이 나고 있어 당장 강력한 조치를 취하고 싶다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영과 육과 혼을 지니고 있는 인간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여호와 하나님의 극도의 슬픔과 아픔을 표현하고 있는 문장입니다(렘4:19a).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이 창조주이신 여호와 하나님에게 극도의 아픔과 슬픔을 초래하고 있는 것일까요?
(2) “이는 나의 심령이 나팔소리와 전쟁의 경보를 들음이로다”(렘4:19b); 위와 같은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요인이 무엇인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걸작품 곧 인간들이 서로 원수가 되어 전쟁으로 상대방을 제거하고자 혈안이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전투의 시작을 알리는 나팔소리가 요란합니다. 적의 내침으로 인하여 민간인들의 희생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따라서 적의 침입에 대비하라는 경보가 끊임없이 울리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지상의 상황을 매일같이 지켜 보시는 여호와의 심정은 자식을 잘못 둔 아버지의 마음과 같아서 아프고 쓰리기 그지 없습니다(렘4:19b).
둘째로, “패망에 패망이 연속하여 온 땅이 탈취를 당하니, 나의 장막과 휘장은 갑자기 파멸되도다”(렘4:20);
(1) 선지서 예레미야가 예언하고 있는 내용은 주전 722년 북조 이스라엘 왕국이 여호와를 버리고 우상을 섬기며 음란에 빠져버렸기에 멸망을 당하고, 이어서 주전 586년에는 남조 유다 왕국이 신바벨론제국에 의하여 같은 잘못으로 패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렘2:14-17, 3:8-10, 4:5-10). 그 뒤를 이어서 주변의 이방나라들도 멸망을 당하는 것으로 예언이 되고 있습니다(렘25:29). 그러므로 선민의 나라의 멸망이 먼저이고 이방나라의 멸망이 그 뒤를 잇고 있습니다. 요컨대, 선민 다윗왕조의 예루살렘성전이 먼저 붕괴가 되고 그 다음에 이방나라들이 멸망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2) 그런데 본문에서 여호와께서는 예레미야를 통하여 그 반대로 말씀하십니다; “패망에 패망이 연속하여 온 땅이 탈취를 당하니, 나의 장막과 휘장은 갑자기 파멸되도다”(렘4:20). 온 세상이 전란에 휩싸이게 되므로 여호와의 장막과 휘장이 갑자기 파멸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에 나타나고 있는 여호와의 장막과 휘장은 예루살렘성전 지성소와 성소 사이를 가르고 있는 그 휘장이나 장막이 아닙니다. 훗날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위로부터 아래로 두 쪽으로 찢어지게 되는 그 휘장이 아닌 것입니다(마27:50-51).
(3) 그렇다면 본문의 여호와의 장막과 휘장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이 세상에 머물고 계시는 여호와의 임재를 상징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시104:2). 그런데 온 세상이 전쟁의 도가니에 들어가게 되자 여호와께서는 그것이 보기가 싫어서 떠나 버리십니다(창6:3). 창조주 여호와께서 떠나시자 이 세상은 더 이상 생명력을 얻지를 못하고 완전한 파멸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창6:5-8). 그것이 이 세상의 종말입니다.
셋째로, “내가 저 깃발을 보며 나팔소리 듣기를 어느 때까지 할꼬? 내 백성은 나를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요, 지각이 없는 미련한 자식이라. 악을 행하기에는 지각이 있으나, 선을 행하기에는 무지하도다”(렘4:21-22); 다음과 같이 세 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봅니다;
(1) “내가 저 깃발을 보며 나팔소리 듣기를 어느 때까지 할꼬? ”(렘4:21);
1)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창조한 인간들이 서로를 죽이겠다고 전쟁의 깃발을 세우고 전투를 독려하는 나팔소리를 계속 울리는 것을 싫어하십니다. 그렇게 피조세계가 멸망을 당하는 것을 창조주께서는 참으로 슬퍼하십니다. 따라서 그러한 자신의 슬픔과 아픔을 제19절에서 구체적으로 말씀하신 여호와이십니다.
2) 그러므로 이제는 전쟁의 깃발과 전투의 나팔소리 대신에 생명을 구원하는 복음의 소리를 듣고 싶어 하십니다. 선민 이스라엘 자손들이 원수같은 주변의 이방인들을 용서하고 그들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하여 여호와의 말씀을 전해주고 죄 사함의 제사를 드려주는 제사장나라 거룩한 백성의 역할을 신실하게 수행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출19:4-6). 그러나 그것이 헛된 희망이 되고 맙니다. 마지막 선민의 나라마저 여호와를 버렸기에 곧 멸망을 당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3) 그렇다면 새로운 구원의 방법은 무엇일까요? 선지자 예레미야가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듣고 싶은 내용이 그것입니다. 그것은 대속자 그리스도의 오심과 하나님의 영의 강림으로 말미암아 성도들에게 이루어지는 심령속의 새 언약입니다(렘31:33-34). 율법규정과 제례의식 그리고 육체적인 할례가 선민들을 제사장나라 거룩한 백성으로 일하게 하는데 실패했다면 이제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성도들의 마음과 영혼속에 회개의 영과 진리의 영 그리고 부활의 영을 심어주고자 하시는 것입니다(롬8:1-15).
(2) “내 백성은 나를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요, 지각이 없는 미련한 자식이라”(렘4:22a);
1) 선민 이스라엘 자손들은 어리석게도 여호와께서 생명의 근원이 되신다고 하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살아갑니다.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이 아니시면 이 세상에서 구원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이 없다고 하는 사실도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자손들은 더 이상 출애굽의 하나님,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 가나안을 주신 여호와를 원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가나안 땅을 차지하여 대대로 살고 있기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축복은 이미 모두 얻었다고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2) 그러므로 이제는 이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향락과 사치 그리고 물질적인 풍요와 성적인 만족을 마음껏 누리고자 합니다. 그들의 지각이 묘하게도 세상적인 것을 탐을 내고 있으며 더 이상 여호와의 영생과 구원을 추구하지 아니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몰지각하게도 이스라엘 자손들의 눈에는 이방인들의 우상문화가 마냥 매력적인 것입니다. 그 결과 선민들이 선택하고 있는 것은 이방인들의 무신론적인 사고방식이며 동시에 그들이 다양하게 소원을 빌고 있는 각종 우상들은 결코 구원을 줄 수 없는 범신론적인 산물입니다.
(3) “악을 행하기에는 지각이 있으나, 선을 행하기에는 무지하도다”(렘4:22b);
1) 훗날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의 땅에 오셨을 때에 부자청년이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영생의 구원을 얻을 수가 있는지 묻기 위하여 접근을 하고 있습니다. 그 청년은 예수님을 일컬어 ‘선한 선생님’이라고 불렀다가 혼이 나게 됩니다(눅18:18).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는 육신을 가진 자신은 결코 선하지가 않으며 오로지 영이신 여호와 하나님만이 선하시다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눅18:19).
2) 예수님의 말씀은 사람들은 피조물이므로 상대적인 선의 개념만을 지니고 있으며 창조주이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원하고 계시는 그러한 아가페적인 절대선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생명살림의 선을 행하기 위해서는 아버지 하나님께 배우고 그 말씀을 들어야만 합니다. 자신들의 뜻대로 행하게 되면 선에 대해서는 무지하고 악행만을 익숙하게 행할 따름입니다(렘4:22b).
결론적으로, 사람들은 이기적인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그러한 사람들이 창조주의 공의와 생명을 살리는 구원의 선을 행할 수 있을까요? 그 방법이 대속의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의 교훈을 실천하며 그 삶의 모습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바로 만민을 구원하려는 아버지 하나님의 선을 행하는 성도들이라고 하겠습니다.
그와 같은 시대가 오기를 예레미야가 바라고 있습니다. 그때에는 세상의 종말을 앞두고 선민과 이방인을 막론하고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 일에 앞장을 서는 새로운 여호와의 선지자들이 바로 성도들입니다. 아무쪼록 그와 같은 생각을 가지시고 이 세상의 종말이 오기 전에 더 많은 영혼을 구원하시는 성도님들이 모두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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