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강해 제13강(렘3:1-5)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터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8년 6월 3일(주일)
다윗왕조 유다 왕국 말기 선민들의 음란과 행악이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어느 정도에 달하고 있는가?(렘3:1-5)
예레미야 선지자가 기록하고 있는 본문의 말씀은 모세가 기록한 신명기 제24장의 말씀 그리고 선지자 이사야가 기록한 제50장의 말씀과 깊은 관련이 되고 있습니다. 먼저 신명기의 말씀과 이사야의 말씀을 적시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사람이 아내를 맞이하여 데려온 후에 그에게 수치되는 일이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면 이혼증서를 써서 그의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보낼 것이요, 그 여자는 그의 집에서 나가서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되려니와, 그의 둘째 남편도 그를 미워하여 이혼증서를 써서 그의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보냈거나 또는 그를 아내로 맞이한 둘째 남편이 죽었다 하자. 그 여자는 이미 몸을 더럽혔은즉, 그를 내보낸 전 남편이 그를 다시 아내로 맞이하지 말지니, 이 일은 여호와 앞에 가증한 것이라.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범죄하게 하지 말지니라”(신24:1-4); 다음과 같이 간략하게 풀이를 해봅니다;
1) 첫째, 선민사회에서 가장인 남편이 아내에게 이혼증서를 써서 주고 집밖으로 내보내는 경우는 아내가 부정을 저질렀고 그것을 남편이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는 경우에 한정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남편은 그 결정에 있어서 신중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고대가부장사회에서는 아내가 이혼을 당하고 나면 혼자서 먹고 살 수 있는 방도가 없기 때문에 다른 남자와 재혼을 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전 남편의 입장에서는 그가 내보낸 자신의 아내가 이제는 몸을 완전히 더럽히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2) 둘째, 아내가 한번 부정을 저질렀을 때에는 남편이 그것을 용서하고 계속 살아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다른 남자와 재혼을 하고 말았으니 다시 그녀를 자신의 아내로 맞아 들여서는 안됩니다. 설혹 모든 것을 용서하고 그녀를 한번 구제해주고 싶은 생각이 든다고 하더라도 모세는 여호와의 말씀으로 그렇게 하지를 말라고 강력하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어째서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일까요?
3) 셋째, 그 이유는 두가지입니다; ①하나는 여호와 앞에 가증스러운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가증스럽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증오하는 일을 함부로 행하는 것입니다. 창조주이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증오하시는 인간의 악함은 한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종의 자세를 벗어나서 제마음대로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내를 내보내는 것을 여호와 하나님께 여쭈어 보고서 행하지를 아니하고 또다시 맞아 들이는 것도 여호와 하나님께 여쭈어 보고서 시행을 하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것이 실로 가증스럽다는 것입니다. ②또 하나는 그와 같이 음행한 여인을 다시 집안에 들이게 되면 기업으로 주신 땅이 더러워져서 하나님의 진노를 사게 된다는 것입니다. 결국 여호와의 종으로서의 자세를 버린 사람의 방종과 음행이 이 세상의 심판을 초래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2) “(1)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내가 너희의 어미를 내보낸 이혼증서가 어디 있느냐? 내가 어느 채주에게 너희를 팔았느냐? 보라 너희는 너희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팔렸고, 너희의 어미는 너희의 패역함으로 말미암아 내보냄을 받았느니라. (2) 내가 왔어도 사람이 없었으며 내가 불러도 대답하는 자가 없었음은 어찌 됨이냐? 내 손이 어찌 짧아 구속하지 못하겠느냐? 내게 어찌 건질 능력이 없겠느냐? 보라 내가 꾸짖어 바다를 마르게 하며 강들을 사막이 되게 하며 물이 없어졌으므로 그 물고기들이 악취를 내며 갈하게 죽으리라. (3)내가 흑암으로 하늘을 입히며 굵은 베로 덮느니라”(사50:1-3);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율법으로 주신 이혼증서에 대한 이야기를 선지자 이사야가 다른 측면에서 풀이를 하여 선민 다윗왕조의 유다 왕국의 백성들에게 경고를 하고 있습니다. 그 요지는 다음과 같이 세가지입니다;
1) 첫째,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선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보호자가 되시고 그 남편이 되십니다. 그런데 여호와께서는 선민들을 불쌍하게 생각하여 한번도 이혼증서를 써주고 집밖으로 내보낸 적이 없으십니다. 그 반면에 선민들이 여호와를 버리고 우상을 섬기며 바람을 피운 것입니다. 그리고 선민들이 여호와께 패역함으로 말미암아 그들의 나라가 이방인들에게 멸망을 당한 것입니다. 그것이 제1절의 내용입니다.
2) 둘째, 이 세상의 창조에 참여하신 여호와의 독생자께서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성육신하셔서 여호와의 말씀을 가지고 복음사역을 시작하십니다(사7:14, 9:6, 11:1-11, 요1:14). 그러나 선민 유대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 들이지를 아니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그리스도께서는 선민들에 의하여 배척을 받아 돌아가시고 다시 부활하여 주님이 되십니다(막8:31, 15:33-39, 16:9-20). 이제는 주님 앞에 자신들의 죄를 회개하고 여호와 하나님께 돌아오지 아니하는 자들은 선민 이방인 상관이 없이 모두가 멸망을 당하고 그들의 땅이 황폐해지고 말 것입니다. 그것이 제2절의 내용입니다.
3) 셋째, 주님의 제자들인 성도들이 땅끝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고 나면 이 세상은 종말을 고하게 됩니다. 그 내용을 제3절에서 선지자 이사야가 “내가 흑암으로 하늘을 입히며 굵은 베로 덮느니라”(사50:3)고 예언하고 있습니다.
이상과 같은 사실들을 염두에 두고서 이제부터 본문의 말씀을 한 구절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그 깊은 의미와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파악해봅니다.
첫째로, “그들이 말하기를 가령 사람이 그의 아내를 버리므로 그가 그에게서 떠나 타인의 아내가 된다 하자. 남편이 그를 다시 받겠느냐? 그리하면 그 땅이 크게 더러워지지 아니하겠느냐? 하느니라. 네가 많은 무리와 행음하고서도 내게로 돌아오려느냐?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3:1); 다음과 같이 두 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봅니다;
(1) “그들이 말하기를 가령 사람이 그의 아내를 버리므로 그가 그에게서 떠나 타인의 아내가 된다 하자. 남편이 그를 다시 받겠느냐? 그리하면 그 땅이 크게 더러워지지 아니하겠느냐? 하느니라”(렘3:1a); 여기서의 ‘그들이’는 선민 이스라엘 자손들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모세가 전하여 준 여호와의 율법을 잘 알고 있습니다. 신명기 제24장에서 말하기를 한번 이혼증서를 써주고 내보낸 아내를 남의 부인으로 살아간 전력이 있으면 다시는 아내로 맞아들이지 말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신24:1-4a). 그것은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가증스러운 일이며 선민의 땅을 음란의 문화로 더럽히는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신24:4b)..
(2) “네가 많은 무리와 행음하고서도 내게로 돌아오려느냐?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3:1b);
1) 그런데 선민 이스라엘 자손들의 행동이 마치 남편을 버리고 바람을 피우다가 불명예스럽게 이혼증서를 받고서 집에서 쫓겨난 아내가 다른 남자와 재혼하여 살다가 다시 전 남편에게 돌아오고자 시도하고 있는 것과 같다고 하시는 여호와의 말씀입니다. 그것도 한번 다른 남자와 살림을 차린 것이 아닙니다. 수 많은 외간남자들과 딴 살림을 차린 여자입니다.
2) 그러한 여자를 다시 아내로 받아줄 수가 있을까요? 율법규정에 비추어 보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것이야 말로 선민 이스라엘 백성들의 거룩한 땅을 여호와의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음란의 문화로 뒤덮어 버리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문에서는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가증스러운 그 일을 다시 한번 눈을 감고서 부디 용서하여 달라고 매어 달리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과연 어떻게 처리를 하실까요?
3) 사실은 그 해답이 사도 바울이 저술하고 있는 로마서 제3장에 다음과 같이 기록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롬3:20-22). 요컨대, 선민들에게 주시는 율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직접 이 세상에 대속의 제물로 오시는 복음의 시대가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네 눈을 들어 헐벗은 산을 보라. 네가 행음하지 아니한 곳이 어디 있느냐? 네가 길가에 앉아 사람들을 기다린 것이 광야에 있는 아라바 사람 같아서 음란과 행악으로 이 땅을 더럽혔도다. 그러므로 단비가 그쳤고 늦은 비가 없어졌느니라. 그럴지라도 네가 창녀의 낯을 가졌으므로 수치를 알지 못하느니라”(렘3:2-3); 다음과 같이 세 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봅니다;
(1) “네 눈을 들어 헐벗은 산을 보라. 네가 행음하지 아니한 곳이 어디 있느냐?”(렘3:2a); 여호와를 섬기는 신정국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율법은 무서운 것입니다. 율법을 범하게 되면 처벌이 따르게 됩니다. 그것은 개인에 대한 처벌에 그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호와의 진노는 그들이 살고 있는 터전을 황폐하게 만드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신24:4, 29:23). 따라서 산 위에 올라가서 푸른 나무 아래에서 우상을 섬기고 여사제들과 음란행위를 즐기게 되면 그 산을 아예 민둥산으로 만들어 버리십니다(렘3:2a). 그렇게 여호와의 진노로 벌거숭이 산이 늘어나고 있음을 바라보고서 부디 선민들이 회개를 하라는 예레미야의 강력한 권면입니다.
(2) “네가 길가에 앉아 사람들을 기다린 것이 광야에 있는 아라바 사람 같아서 음란과 행악으로 이 땅을 더렵혔도다. 그러므로 단비가 그쳤고 늦은 비가 없어졌느니라”(렘3:2b-3a);
1) 여기서 “광야에 있는 아라바 사람”은 그 옛날 소돔과 고모라에 살고 있던 주민들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에돔 족속이 살고 있는 땅 세일산맥이 사실은 그 옛날 소돔과 고모라의 권역입니다. 그곳은 염해 남쪽 아라바 계곡과 그곳에 이어지고 있는 산지를 포괄하고 있습니다. 그 성의 주민들은 그곳을 지나가고 있는 대상들에게 오락과 휴식을 제공하는 한편 염해의 소금을 팔아서 큰 이익을 남기고 있습니다(창13:10, 19:26, 36:24).
2) 돈을 많이 벌게 되자 자연히 그들의 도시국가에 음란과 퇴폐문화가 창궐한 것입니다. 그 때문에 아브라함과 롯의 시대에 그곳에 여호와의 진노로 유황불 심판이 임하게 됩니다(창18:20-21, 32, 19:5, 24-25).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단비와 늦은 비가 사라지고 흉년과 가뭄으로 죽음의 땅이 되었다가(창19:28) 나중에 히위 족속의 한 갈래인 호리 족속이 그 땅에 다시 살게 됩니다(창36:20). 그들을 정복하고 에서의 후손들인 에돔 족속들이 그곳의 지배자가 된 것입니다(창36:9, 40).
3) 소돔과 고모라에 이어서 에돔 족속이 향락과 사치 그리고 음란문화에 빠져 들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선민 유다 왕국의 백성들이 에돔 족속처럼 우상을 섬기고 음란문화에 젖어 들고 있습니다. 그 결과 여호와께서는 유다 왕국의 땅에 경제적인 어려움과 환경적인 어려움이 찾아오도록 역사를 섭리하십니다. 그리고 메소포타미아의 강대국 앗수르와 신바벨론의 침략을 계속하여 받도록 하십니다. 나아가서 애굽의 바로 느고의 군대에 의하여 유다 왕이 폐위가 되고 허수아비 왕이 등극하게 되는 수치도 당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3) “그럴지라도 네가 창녀의 낯을 가졌으므로 수치를 알지 못하느니라”(렘3:3b);
1) 주전 609년 애굽의 황제인 바로 느고가 대군을 몰고서 시리아 땅을 차지하기 위하여 북상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을 해변 길목에서 막기 위하여 유다 왕 요시야가 변복을 하고서 참전을 했다가 그만 불의의 화살을 맞고서 후송 도중에 서거하고 맙니다(왕하23:29). 예루살렘에서 중신들에 의하여 왕위에 오르게 된 똑똑한 둘째 왕자 여호아하스가(왕하23:30) 전쟁 채비를 채 갖추기도 전에 갈그미스 전투를 통하여 유프라테스 강 서쪽의 시리아 땅을 평정한 바로 느고가 남하를 하게 됩니다(왕하23:33). 바로 느고는 유다 왕을 폐위시키고 요시야의 장남인 엘리아김의 이름을 제멋대로 여호야김으로 바꾸고 유다 왕으로 세웁니다(왕하23:34). 친 애굽 괴뢰정권을 만들고 엄청난 보화를 전쟁배상금으로 약탈하고 맙니다(왕하23:33, 35).
2) 똑같은 일이 주전 597년에 다시 발생합니다. 메소포타미아의 패권을 장악한 신바벨론제국의 느부갓네살 황제가 다윗왕조 유다 왕국을 침범하여 여호야긴 왕을 폐위시키고 요시야의 셋째 왕자인 맛다니아의 이름을 시드기야로 개명한 후에 친 바벨론 정권을 세웁니다(왕하24:10-17). 그리고 역시 엄청난 보화를 전쟁배상금으로 가져갑니다(왕하24:13). 그와 같은 수치를 당하게 되는 선민의 나라입니다. 그러나 유다의 왕과 귀족들 그리고 백성들은 반성할 줄을 모릅니다(렘3:3b). 여호와 하나님 앞에 나아와서 참회를 할 줄을 모릅니다. 그저 운이 나빠서 그러한 처지에 떨어졌다고만 치부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나라가 망할 짓을 여전히 계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셋째로, “네가 이제부터는 내게 부르짖기를 나의 아버지여, 아버지는 나의 청년시절의 보호자이시오니, 노여움을 한없이 계속하시겠으며 끝까지 품으시겠나이까? 하지 아니하겠느냐? 보라 네가 이같이 말하여도 악을 행하여 네 욕심을 이루었느니라 하시니라”(렘3:4-5); 다음과 같이 두 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봅니다;
(1) “네가 이제부터는 내게 부르짖기를 나의 아버지여, 아버지는 나의 청년시절의 보호자이시오니, 노여움을 한없이 계속하시겠으며 끝까지 품으시겠나이까? 하지 아니하겠느냐? ”(렘3:4-5a);
1)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유다 왕 요시야 시대의 종교개혁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즉위 18년에 요시야 왕의 신하가 우연히 성전에서 모세오경 가운데 신명기 경전을 발견하게 됩니다(왕하22:3-8). 그것을 왕 앞에서 낭독하고서 조정이 발칵 뒤집히게 됩니다(왕하22:911). 일찍이 모세를 통하여 여호와께서 경고하신 선민의 나라의 멸망의 조건이 모두 충족이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왕하22:12-13).
2) 그대로 두면 곧 마지막 선민의 나라 다윗왕조 유다 왕국이 망하고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시야 왕은 전면적인 종교개혁을 강력하게 전국적으로 시행합니다. 모든 우상문화를 타파하고 유월절 행사를 다시 시행합니다(왕하23:1-23). 그렇게 선민의 나라를 여호와신앙의 초석 위에 다시 세우고자 노력을 합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13년 후에 전장에서 불의의 객이 되고 맙니다(왕하23:29).
3) 요시야 왕은 그렇게 여호와신앙을 바로 세우게 되면 다윗왕조의 유다 왕국의 멸망만은 면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종교개혁에 임했습니다. 그러한 그의 심정이 선지자 예레미야가 전하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 “네가 이제부터는 내게 부르짖기를 나의 아버지여, 아버지는 나의 청년시절의 보호자이시오니, 노여움을 한없이 계속하시겠으며 끝까지 품으시겠나이까? 하지 아니하겠느냐? ”(렘3:4-5a)는 구절에 그대로 담겨 있습니다.
(2) “보라 네가 이같이 말하여도 악을 행하여 네 욕심을 이루었느니라 하시니라”(렘3:5b); 그러나 너무 늦었습니다. 왕은 그렇게 열심히 우상문화를 타파하고자 했는데 백성들의 자각이 너무나 둔합니다. 므낫세 왕 때부터 오랜 세월 우상과 더불어 살아 오고 자신들의 탐욕을 이루기 위하여 이방인보다 더 악한 퇴폐와 향락사회를 경영하고 있는 그들이므로 나라가 망하고 망국의 유민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왕하23:25-27). 그와 같은 사실을 예레미야가 여호와의 말씀으로 위와 같이 백성들에게 전달하고 있습니다; “보라 네가 이같이 말하여도 악을 행하여 네 욕심을 이루었느니라 하시니라”(렘3:5b). 비록 요시야 왕의 종교개혁이 강력한 것으로 보이지만 그것이 백성들의 마음속까지 바꿀 수 있는 것은 되지를 못했다고 하는 하나님의 평가인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종교개혁이라고 하는 것이 다윗왕조의 왕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백성들의 마음속에서부터 자신들의 죄악상을 진심으로 깨닫고 세상적인 사치와 향락 그리고 음란의 문화를 버리고 여호와 앞으로 나아오는 대 회개운동이 일어나야만 합니다.
그것은 마치 ‘세겜 사건’이라고 하는 엄청난 위기를 만난 야곱의 집안이 여호와 하나님께 제발 살길을 열어 달라고 간구하면서 그 지시에 따라 벧엘로 달려가는 것과 같습니다(창34:30-35:6). 그들은 이방신상을 제거하고 자신을 정결하게 하며 호화 사치품을 버리고 벧엘로 찾아가서 여호와 하나님께 경배를 드리는 것입니다(창35:7-15).
그것이 야곱이 하나님의 대 족장인 이스라엘로 다시 태어나는 방법입니다. 그와 같은 진심 어린 참회의 기록을 다윗왕조 유다 왕국의 말기의 기록에서 엿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마지막 선민의 나라가 예레미야의 예언 그대로 종말을 고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왕 우상문화와 음란으로 향하는 호화사치를 청산하고 새로운 몸과 마음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려고 결심하고 있다면 그 옛날 야곱처럼 직접 여호와 하나님을 만나고 경배하는 성도님들이 되어야만 하겠습니다. 그것이 유일한 살길입니다.
그러므로 아무쪼록 진심으로 잘못된 것을 알았으면 여호와 하나님 앞에 직접 나아가서 철저하게 회개하고 주님의 제자답게 살아가시는 성도님들이 모두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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