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강해 제129강(요14:10-28)
작성자; 손진길 목사(갈릴리한인교회 담임)
작성일; 주후 2013년 7월 24일(수)
사도 요한의 성령론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유월절 만찬의 자리에서 제자들에게 장차 자신을 대신하여 그들이 하나님의 큰 일을 행할 수 있도록 능력을 부어주고 싶어하십니다. 그래서 그 말문을 다음과 같이 열고 있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요14:12). 예수님이 무덤에서 부활하여 승천을 하게 되면 제자들에게 두 가지 큰 혜택이 주어진다고 구체적으로 예언을 하고 있습니다; 그 내용은 첫째로, 제자들이 간구하는 바를 예수님이 천국에서 먼저 듣고서 아버지께 요청하여 긍정적으로 시행을 하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앞으로 정확하게 기도가 상달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여야 합니다(요14:13-14). 그리고 예수님이 그 기도에 대하여 뒷받침을 할 수 없는 경우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습니다; “서로 사랑하고 섬기라는 예수님의 새 계명을 무시하는 경우에는 그 기도의 효력이 없을 것입니다”(요13:34-35, 14:15반대해석).
둘째로, 제자들이 하나님의 큰 일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은 보혜사 성령님의 강림과 임재로 말미암아 주어지게 됩니다(요14:16-20, 26). 예수님은 자신이 부활하여 승천하게 되면 반드시 아버지 하나님께 요청하여 제자들에게 성령님을 보내어주겠다고 약속하고 있습니다(요14:16). 성령님이 제자들과 함께 하게 되면 그것은 마치 예수 그리스도의 동행과 같은 효과를 가지고 올 것입니다. 그러한 표현이 “또 다른 보혜사”입니다(요14:16).
성령님이 예수님과 같은 보혜사라는 의미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하나님 말씀의 뜻에 대해서 마치 스승이신 예수님처럼 그 진리를 가르쳐줄 것입니다(요14:17, 26). 둘째, 내주하여 역사하심으로 제자들이 마치 예수님처럼 이 세상에 하나님의 큰 능력을 선보이게 될 것입니다(요14:12, 16). 특이하게도 예수님은 사람의 인성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신성을 동시에 보유하고 계신 분입니다. 영적으로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계셨으며 사람으로서 제자들과 함께 지냈습니다. 이제 예수님이 승천하고 나면 제자들이 성령님의 임재를 통하여 하나님과 함께 지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신성을 보유했던 예수님과 비슷해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제자들이 하나님의 큰 일을 이 세상에서 행할 수가 있게 됩니다.
그러한 맥락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당부하고 있습니다; “그들을 향하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요20:22),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 이 성에 머물라 하시니라”(눅24:49),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1:8). 셋째, 스승이신 예수님과 함께 있을 때에 제자들은 안심했으며 언제나 평안을 누렸습니다. 예수님은 광풍을 잠잠하게 했으며 세상의 파도를 잠재웠습니다(요6:18-21, 눅8:23-25). 그리고 제자들은 물론 죄인들과도 함께 먹고 마시며 기쁨의 잔치자리를 만들어 주셨습니다(마9:15, 눅5:29, 요3:29). 그 기쁨과 평안을 성령님이 오시면 회복시켜 줄 것입니다(요14:27, 16:33).
다음으로, 성령님이 일단 제자들에게 강림하여 임재하게 되면 제자들의 몸이 성전이 될 것입니다(고전6:19). 그 성전에 영적으로 예수님도 하나님 아버지도 함께 임재하실 수 있게 될 것입니다(요14:18-20). 한 마디로, 그토록 원하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가 삼위일체 하나님의 임재하심과 내주하심으로 제자들의 인생 가운데 이루어지는 것입니다(눅17:21). 그렇게 삼위일체 하나님과 함께 인생을 살게 되는 제자들이 하나님의 큰 일을 어찌 이 세상에서 행할 수 없을 것입니까? 만약 그렇게 행할 수가 없다고 한다면 그것이 더 이상한 일일 것입니다.
사도 요한의 삼위일체론
사도 요한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고 전제하면서 그의 복음서를 시작하고 있습니다(요1:1). 그리고 말씀이 육신이 되어 제자들 가운데 거하였다고 간증하고 있습니다(요1:14). 여기서 ‘말씀’(Logos)의 독특성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말씀’은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거할 수도 있으며 사람들과 함께 거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독특한 설명에 유의하여 혹자는 사도 요한의 기독론을 ‘로고스 기독론’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에는 동일한 논리가 다시 전개되고 있습니다;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14:20). 여기서 “너희가 내 안에”라는 개념이 하나 추가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너희가 내 안에’ 있을 수 있는 조건이 과연 무엇일까요? 친절하게도 사도 요한은 예수님의 말씀을 통하여 그 설명을 덧붙이고 있습니다;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요14:21). 한 마디로, 예수님이 말씀하신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주할 수가 있다는 말씀입니다(요13:34).
이제 우리는 알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말씀을 따르고 지키는 자와 함께 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뜻을 따르지 아니하는 피조물에게는 자리를 함께 하지 아니하십니다(창6:3, 롬1:26). 요컨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실천하는 자가 창조주에게로 돌아갈 수가 있습니다. 구원과 영생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예수님이 그러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가는 길을 앞으로 제자들이 손쉽게 따라오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의 뜻을 압축하여 하나의 계명으로 만들어서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13:34). 하나님이 본체를 버리고 이 땅에 비천한 인간으로 태어나서 함께 성장하고 살아가면서 사람들을 사랑한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 말씀의 실천이며 하나님과 함께 거할 수 있는 유일한 조건이라는 것입니다(빌2:5-11).
그런데 그러한 사랑의 실천은 신성과 인성을 동시에 보유하셨던 예수님에게나 가능한 일입니다. 육신의 소원을 이길 수 없는 인간이 어떻게 그러한 경지의 사랑을, 하나님 말씀의 실천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이 최후의 만찬자리에서 제자들에게 그 대안을 밝히고 있습니다; 부활, 승천하여 천국에 가서 하나님께 요청하여 반드시 성령님을 보내주겠다는 것입니다. 성령님의 내주 역사하심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받아서 말씀대로 행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서로 사랑하는 계명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제자들에게 영원히 함께 영적으로 동행할 수가 있게 됩니다. 그렇게 행하는 성도에게 주님은 아버지 하나님을 모시고 가서 함께 거주하겠다고 이렇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요14:23).
하나님 사랑과 인간 사랑을 동시에 이루는 방법
예수님은 공관복음에서 다음과 같이 선포하고 있습니다;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그리고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막12:30-31).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동시에 실천하라는 것입니다. 전자에 무게를 두게 되면 신본주의가 됩니다(막7:11-13). 후자에 역점을 두게 되면 인본주의가 됩니다(막7:6-9). 어떻게 하면 동시에 그 두 가지 사랑을 구현할 수가 있을까요? 유일한 방법이 예수 그리스도의 방법임을 알게 됩니다;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14:20). 제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방법대로 사랑을 하게 되면 예수님 안에 있게 됩니다. 그리하면 예수님이 아버지 안에 그리고 제자들 안에 동시에 거하면서 그 사랑을 하나로 만들어 줄 수가 있습니다. 그것이 신성과 인성을 함께 가지시고 이 세상에 오셔서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하며 동시에 인간을 사랑할 수 있는가를 확실하게 보여주신 그리스도 예수의 가르침입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의 생애와 교훈을 이해하지 아니하고서는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의 뜻을 제대로 깨달을 수가 없습니다. 아울러 하나님 사랑과 인간사랑을 동시에 실천할 수 있는 방법도 찾지를 못할 것입니다. 그 일이 가능하도록 하기 위하여 이제 예수님께서 대속의 십자가를 지고자 하십니다. 제자들을 의인으로 만들어서 그들에게 보혜사 성령님을 임재시키고자 합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영적으로 제자들에게 임재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삼위일체 하나님의 내주 역사하심으로 제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실천하는 한편, 서로 사랑하면서 하나님 사랑과 인간 사랑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을 수가 있게 될 것입니다. 그 일을 위하여 예수님이 이제 제자들과 잠시 이별을 하고자 하고 있습니다(요14:18-19, 25,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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