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오므리 왕
(1) 남조 유다 왕국과 대치하며 남방 전선을 총괄하고 있던 이스라엘 왕국의 군대 장관이 오므리였다. 그는 바아사의 아들 엘라 왕 때 발생한 반란과 그 후의 내전을 평정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백성들의 추대를 받아 전체 이스라엘 왕국의 왕으로 즉위한 인물이었다. 이 사실은 그가 뛰어난 군 지휘관이었을 뿐만 아니라 백성들의 고단한 삶을 살필 줄 아는 지도자라는 점을 의미하고 있다.
당시의 역사를 조금 더 살펴 보면, 수도 디르사에서 술을 마시던 엘라 왕이 왕성 수비대장 시므리에게 암살당하고 시므리가 스스로 왕위에 오르는 반란 사건이 발생했다. 이 때 오므리의 부관들과 인근 백성들은 즉시 오므리 장관을 자신들의 왕으로 등극시키고 왕도 디르사를 향하여 진군하였다(왕상16:16-17). 오므리의 신속한 회군 때문에 시므리 왕의 천하는 단 7일만에 끝나고 말았다(왕상16:15, 18-20). 그러자 북쪽 지역에서는 차제에 잇사갈 왕조의 통치를 벗어 날려는 여러 족속들이 기낫의 아들 디브니를 왕으로 내세우고서 분리 독립을 획책했다(왕상16:21). 이에 오므리 왕은 4년만에 내전을 종식시키고 비로소 전체 이스라엘 왕국의 신왕으로 정식 등극했던 것이다(왕상16:10,23).
(2) 4년 동안 반란과 내전을 겪으면서 오므리 왕은 국가 통합을 강화하고 잇사갈 왕조를 반석위에 올려 놓을 수 있는 방안을 모색했다. 이 것이 그가 재위 12년 동안 추진한 정책의 방향이었다.
그 내용을 보면, 초대 왕 여로보암의 정책과 대동소이하다(왕상16:25).
첫 째로, 천도를 한 것이다. 여로보암 왕의 수도였던 세겜(왕상12:25), 바아사 왕의 왕도였던 디르사(왕상15:33)가 아니라 전혀 새로운 신천지 사마리아에 성을 짓고 6년만에 천도한 것이다. 교통의 요지이며 군사 이동이 원활한 사마리아는 일국의 수도로서 제격이었으며 새 세상을 여는 왕도로서 모자람이 없었다(왕상16:23-24). 그래서 오므리 왕가가 4대(오므리, 아합, 아하시아, 여호람) 44년만에 망한 후에도 BC722년 앗수르에 의하여 북조 이스라엘 왕국이 완전히 멸망당할 때까지 사마리아는 계속 북 왕국의 수도 역활을 담당했으며 북쪽 이스라엘 백성들은 속칭 사마리아 인으로 불리게 되었다.
둘 째로, 강력한 왕권을 확립한 것이다. 그 방법은 여로보암의 정책을 계승한 것이었다(왕상16:25-27). 제사장 임명권 뿐만 아니라(왕상13:33) 금 송아지 우상을 섬기게 함으로써(왕상12:28) 남조 유다 아사 왕의 여호와 하나님 숭배 사상과(왕상14:2-5) 차별화를 시도했다. 그리고 자신의 왕권에 도전할 만한 종교적, 정치적 지도자 감을 전혀 키우지 아니하면서 백성들을 우민화시키는 정책을 지속적으로 밀고 나간 것이다. 그 결과 북조 이스라엘 왕국은 제사장 나라로서의 색깔을 거의 상실하기에 이르렀다.
결론적으로, 오므리 왕은 정권 유지에는 귀재였으나 하나님을 섬기는 데 있어서는 반역자였던 것이다(왕상16:25-26). 따라서 하나님 경외자들은 어쩔 수 없이 북 왕국을 떠나 아사 왕이 있는 남 유다로 계속 은밀하게 이주할 수 밖에 없었다(대하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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