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요한복음 강해 제35강(요4:36-38)(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2. 3. 7. 00:44

요한복음 강해 35(4:36-38)

작성자; 손진길 목사(로토루아순복음교회 담임)

작성일; 주후 2013 51()

 

거두는 자가 이미 삯도 받고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나니(4:36a)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동시에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따라서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사함과 용서함이라는 긍휼을 베푸시지만 동시에 공의의 하나님께서는 응분의 대가를 치르게 하십니다(32:34). 점에 있어서는 예외가 없습니다. 어떠한 방법을 통해서라도 원칙을 준수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렇게 원칙에 철저하신 이유는 우주만물과 자연질서를 분께서 직접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창조주가 질서를 지키며 존중하기 때문에 모든 피조물에게 그렇게 행하도록 강제할 수가 있게 됩니다. 예를 들어 보면, 모세의 경우가 그러합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율법을 받고 가르침을 얻고자 40일간 시내 산에 올라가 있는 동안에 이스라엘 자손들이 그만 금송아지를 만들고 출애굽의 이라고 섬기고 있습니다(32:1-7). 출애굽을 했으면 이제부터는 하나님의 방법에 따라서 제사를 드리고 믿음의 열조들처럼 보이지 아니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을 섬겨야만 합니다. 그런데 그들 백성들은 그러하지를 못한 것입니다. 그만 애굽에서 배운 그대로 행하고 말았습니다. 생각해보면, 그들은 무려 430 동안이나 애굽에서 생활을 하다가 갑작스럽게 출애굽을 처지입니다. 그러므로 애굽에서 배운 그대로 상당기간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정상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용서하지 아니하고 계십니다. 너무나 단호하게 심판을 하십니다. 아예 모든 백성을 죽여버리고 모세의 자손으로만 제사장의 나라를 새로 시작하시겠다고 모세 앞에 먼저 밝히고 계십니다(32:10). 그렇게 냉정한 판단력과 타협이 없는 절대적인 원칙의 준수가 창조주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그러한 절대자 앞에서 모세가 손이 발이 되도록 백성들을 한번만 용서해달라고 간구하기를 시작합니다. 나중에는 차라리 자신의 이름을 생명책에서 지워버리더라도 부디 하나님의 백성의 생명을 살려달라고 매어 달립니다(32:31-32). 주신 하나님의 심판내용이 다음과 같습니다; “누구든지 내게 범죄하면 내가 책에서 그를 지워버리리라. 이제 가서 내가 네게 말한 곳으로 백성을 인도하라. 사자가 앞서 가리라. 그러나 내가 보응할 날에는 그들의 죄를 보응하리라”(32:33-34). 야훼 하나님은 모세를 지도자로 세워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시키고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으로 인도를 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과정에 있어서 범하고 있는 백성들의 죄악은 훗날 반드시 보응을 하실 것이라고 천명하고 계십니다. 여기서 가지 사실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첫째, 장차 보응의 날이 도래한다는 것입니다. 둘째, 그것이 보응이기 때문에 백성들이 범한 죄악의 무게만큼 속죄의 제사가 있을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그런데 백성들의 죄악이 엄청나므로 보응의 방법이 극악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있는 것이 하나님의 어린 양이 감당하신 십자가의 대속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극형이라고 있는 것이 십자가의 처형방법입니다.

구약을 참조하면, 말라기 선지자의 예언 그대로 대속의 보응이 있게 되는 때가 크고 두려운 야훼의 입니다(4:5). 그리고 응분의 대가는 하나님께서 스스로 준비하시는 대속자의 희생입니다. 요한복음에서는 대속자가 예수 그리스도임을 세례 요한이   밝히고 있습니다(1:29). 결론적으로, 십자가의 대속이 바로 보응의 방법이 되고 있습니다. 대속의 은혜를 입은 자들이 여기서는 삯을 받은 자들입니다. 달리 표현하자면 사랑에 빚진 자들입니다(13:8). 이제는 성도들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사랑의 이라는 대속의 은혜를 입었기에 남은 생애 동안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해야만 합니다(4:36a). 일이 바로 영생의 열매를 모으기 위하여 지상명령을 수행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28:18-20).

 

이는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하게 하려 함이라(4:36b)

 

이민생활을 하는 것과 해외관광을 하는 것은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관광을 하는 것은 좋은 것만 보고서 지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민생활을 하는 것은 다릅니다. 물이 설고 낯이 설은 이민지역에서 뿌리를 내리고 새로운 생활을 영위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모국에서 배운 학문과 기술이 현지에서 사용되는 경우는 극히 드뭅니다. 그래서 이민자들이 대체로 육체노동부터 시작을 합니다. 저의 가족의 경우에는 호주에서 청소 일을 했습니다. 그런데 대체적으로 청소에 있어서 가지의 지불방법이 등장합니다; 후불제, 청소 즉시 지불제, 선불제 등입니다. 가운데 가장 기분이 좋은 것이 선불제입니다. 품삯을 미리 받는 것입니다. 그렇게 일을 시작하는 경우에는 매우 기분이 좋습니다. 인정감과 안정감을 동시에 느끼면서 청소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이 힘이 드는지도 모릅니다. 그와 같은 경우를 여기서 사도 요한은 거두는 자가 이미 삯도 받고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나니라고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의인으로 인정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라는 안정적인 신분까지 부여를 받았는데 정도 영적인 추수,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서 남은 세월을 열심히 헌신하는 것이 무엇이 그리 대수이겠습니까? 일의 성과에 따라 칭찬도 받고 땅에서의 성취와는 비교도 없는 영생의 면류관을 장차 얻게 것입니다. 더구나 그리스도의 제자로 사는 삶이 아무리 고되다고 하더라도 예수님의 대속의 십자가 고통에 비하면 조족지혈에 불과하다고 하겠습니다. 그래서 꾀부리지 아니하고 기쁜 마음으로 만민구원의 사역에 동참을 합니다.

결론적으로, 삯을 대신 지불한 자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속전 때문에 의인이라는 신분을 삯으로 받은 자는 우리 성도들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뿌리는 자는 예수님이시고 거두는 자는 성도들입니다. 예수님과 우리들이 함께 일을 하여서 얻고자 하는 것은 영생에 이르는 열매들입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들을 구원하여서 영생의 열매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그보다 의미가 있고 고상한 일은 없습니다. 생명을 살리는 일이 얼마나 즐겁고 기쁜 일입니까? 더구나 나를 구원하기 위하여 스스로 십자가의 희생이 되어주신 분이 나의 주인이 되셔서 평생을 함께 영혼구원의 사역을 인도해주고 계시니 든든하기가 그지 없습니다.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 사도 요한의 남은 생애가 그러했습니다. 그러므로 요한은 자신의 간증을 겸하여 오늘 날도 그의 복음서에서 주님의 말씀을 이렇게 자신 있게 외치고 있습니다; “거두는 자가 이미 삯을 받고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나니 이는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하게 하려 함이라”(4: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