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창세기 강해 제278강(창47:28-31)(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2. 2. 8. 18:04

창세기 강해 제278(47:28-31)

작성자; 손진길 목사(갈릴리한인교회 담임) 

작성일; 주후 2014430()

 

야곱은 왜 요셉의 손을 자신의 허벅지 아래에 넣고 맹세를 하라고 요구하고 있는가?(47:29)

 

야곱은 그의 할아버지인 아브라함이 노년에 하던 일 하나를 똑같이 반복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상대방에게 자신의 허벅지 아래에 손을 넣고서 자신의 부탁을 들어준다고 맹세를 하라는 것입니다(24:2-4, 47:29-31)”. 당시 140세의 아브라함이 자신의 전 재산을 맡아서 관리를 하고 있는 충직한 늙은 종에게 허벅지 아래에 손을 넣고서 자신의 부탁을 들어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24:2-3). 그것은 상당히 중요한 부탁입니다; “아브라함의 가족이 살고 있는 가나안이 아니라 동생 나홀의 자손들이 살고 있는 북부 시리아의 하란 땅으로 가서 이삭의 신부감을 구해서 오라는 것입니다”(24:4). 그 이유는 하나님 신앙을 파수하고 있는 나홀의 성에서 며느리를 맞이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때 아브라함은 하늘의 하나님과 땅의 하나님에게 동시에 맹세를 하라고 늙은 종에게 요구했습니다(24:3).

여기서는 147세의 야곱이 아들 요셉에게 동일한 방법으로 중요한 부탁을 하고 있습니다(47:28-30); 첫째, 야곱 자신의 허벅지 아래에 요셉이 손을 넣으라는 것입니다(47:29a). 둘째, 야곱 자신이 죽거든 애굽에서 가나안으로 시신을 운구하여 조상들의 선영이 있는 막벨라 굴에 안치를 해달라는 부탁입니다(47:29-30). 셋째, 그 일을 인애와 성실함으로 행하겠다는 맹세를 (하나님 앞에서) 하라는 요구입니다(47:29b). 넷째, 요셉이 아버지의 말씀대로 행하겠다고 말하고 맹세를 하니 야곱이 침상머리에서 하나님께 경배를 하고 있습니다(47:31). 그것은 요셉의 맹세에 대한 이행을 야곱 자신이 죽더라도 항상 살아계시는 하나님께서 눈여겨보시고 계속 촉구해달라는 의식으로 보입니다. 일종의 위탁함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허벅지(thigh) 아래에 손을 넣게 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 의미가 무엇일까요? 여기서 허벅지는 대퇴부이며 엉덩이 아래쪽 넓적다리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 부위는 사람이 걷거나 달리기를 할 때에 힘을 내게 하는 부위입니다. 그곳에 상처를 입게 되면 사람은 잘 걷거나 달릴 수가 없습니다(32:31). 그러므로 140세의 노인 아브라함이나 147세의 늙은이 야곱은 허벅지에 힘이 빠진 사람들입니다. 자신들이 직접 타향에 가서 며느리감을 구해올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장례를 자신이 스스로 치를 수도 없는 법입니다. 따라서 가장 가까운 사람이나 충직한 종에게 부탁을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내가 같이 갈 수는 없지만 하나님께서 대신 가실 것이니 부디 맹세한 대로 나의 발이 되어 달라는 간곡한 당부의 의식이라고 하겠습니다.

그와 비슷한 표현이 역시 창세기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것은 야곱이 얍복 시냇가에서 숙적 에서와의 조우를 앞두고서 초주검이 되어 있을 때의 일입니다. 처자식과 가축을 시냇가를 건네놓고서 야곱은 밤새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에서가 도착하면 그 옛날 20년 전의 원한을 갚겠다고 자신과 처자식을 죽일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27:41). 그래서 밤새도록 하나님의 사람과 씨름을 했습니다(32:24). 실제로 씨름을 한 것인지 아니면 밤새도록 씨름을 하듯이 기도를 했는지는 모릅니다. 다만 씨름의 결과 자신의 환도뼈가 부상을 입고 말았습니다. 여기서 환도뼈(the socket of Jacob’s hip)는 엉덩이 아래쪽이며 허벅지와 맞물려서 유연하게 움직이고 있는 접합부분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곳에 부상을 입게 되면 역시 잘 걷지도 못하고 달리기를 할 수도 없는 법입니다(32:31).

얍복 시냇가의 야곱과 임종직전의 야곱 사이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이제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써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당신이 나의 허벅지가 되어 달라는 부탁입니다. 그리고 그 맹세의 실현조차 스스로 감독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오로지 하나님에게 자기 대신에 감독을 해달라고 간구할 따름입니다”.

 

요셉이 맹세한 인애와 성실함의 장례식은 누구의 도움이 있을 때에 이 땅에서 성취가 될 수 있다고 이스라엘이 몸소 가르쳐주고 있는가?(47:29-31)

 

본문에서의 인애는 자비와 사랑을 말하고 있습니다(47:29a). 그리고 성실함은 약속의 이행에 철저함을 의미합니다(47:29b). 야곱은 사랑하는 아들 요셉에게 자신의 장례에 대하여 부탁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너를 사랑한 것처럼 너도 나를 사랑하여 나의 부탁을 들어달라는 것입니다. 그 부탁은 부디 자신의 시신을 애굽 땅이 아니라 가나안 땅 선영에 안장을 시켜달라는 것입니다(47:30). 애굽의 총리인 요셉의 입장으로서는 그 일이 쉬운 일은 아닐 것입니다. 애굽 땅에 좋은 길지(吉地)나 명당(明堂)이 많은데 왜 하필이면 그 먼 길에 시신운구를 하여 장례를 지내야만 하는지 애굽의 황제와 귀족들을 설득시키기가 결코 쉽지가 않습니다. 그러므로 야곱은 아들 요셉에게 어려움이 있더라도 마지막 소원이니 꼭 들어달라고 당부하고 있습니다. 일단 맹세를 하고 신실하게 그 약속을 지켜달라는 것입니다.

이제부터 그 유언의 이행은 요셉의 의도와 능력에 달려 있습니다. 그렇지만 사람의 의도와 능력이 결코 완전한 것은 아닙니다. 상황의 변화가 있게 되면 불가피하게 변개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사람이 계획을 할지라도 그 성사는 하나님께 달려있습니다(16:9). 따라서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도우심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그 점을 야곱이 잘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요셉의 승낙과 맹세가 있고 나자 야곱이 바로 하나님께 경배를 드리며 마음 속으로 그 도우심을 간구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침상머리에서 하나님께 경배하니라”(47: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