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강해 제210강(창38:7-11)
작성자; 손진길 목사(갈릴리한인교회 담임)
작성일; 주후 2014년 2월 26일(수)
유다의 세상살이의 모습을 반영하고 있는 장남 엘의 죽음(창38:7)
야곱의 4남인 유다가 가나안 족속 수아의 딸을 취하여 동침함으로써 얻은 장남의 이름이 엘입니다(창38:2-3). 그러므로 엘은 태어날 때부터 이스라엘 사람인 아버지와 이방인인 어머니를 보고서 자라나고 있습니다. 즉, 아버지 유다는 하나님 신앙을 간직하고 있는 이스라엘의 아들입니다. 반대로, 어머니는 이방 신과 풍습을 따르고 있는 가나안 원주민의 딸입니다. 그 가운데 만약 엘이 아버지 유다의 하나님 신앙을 상속했더라면 그의 이름은 생명의 책인 성경에 찬란하게 빛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엘은 정반대의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창38:7a).
엘은 유다의 장남이므로 자손의 번성을 바라고 있는 부모님이 그에게 일찍 아내를 얻어 준 것으로 보입니다. 마치 아버지 유다가 그러했듯이 소작 원주민의 딸들 가운데 가장 아름답고 건강한 처녀를 간택하여 결혼을 시켜준 것으로 보입니다. 그 여자가 바로 산골 딤나 출신 다말입니다(창38:6). 여기서 아버지 유다의 신앙의 문제점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유다는 하나님 신앙을 지니고 있는 어머니의 중요성을 잘 모르고 있습니다. 어째서 하갈의 아들 이스마엘이 아니라 사라의 아들 이삭이 아브라함의 후계자로 세움을 받고 있는지 그 의미를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믿음의 며느리를 맞이하기 위하여 그 먼 하란 땅까지 왜 늙은 종을 파견했는지도 모르고 있습니다”(창16:18-21, 24:3-4). 그렇게 하나님 신앙이 투철한 아내와 어머니의 존재를 필요로 하지 아니했던 유다였기에 그의 장남 엘마저 잘못 자라나고 있습니다.
열왕기하의 기록을 보면, 남조 유다왕국의 므낫세 왕이 하나님 보시기에 악했기 때문에 훗날 그의 나라가 자손 대에 망하게 되는 비극이 연출이 되고 있습니다(왕하21:11-15). 하지만 므낫세 왕의 통치기간 중에 나라가 망한 것은 아닙니다(왕하21:16-18). 그런데 엘의 경우에는 그의 악행 때문에 그가 결혼을 하고 나서 자녀를 생산하기도 전에 이미 죽음을 맞이하고 있습니다(창38:7b). 그 기록이 다음과 같습니다; “유다의 장자 엘이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를 죽이신지라”(창38:7). 그렇다면 젊은 나이에 바로 죽임을 당해야만 하는 엘의 악행은 과연 무엇일까요? 궁금하기 짝이 없습니다.
엘의 악행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알 길이 없습니다. 성경에 기록이 없기 때문입니다. 다만 원용을 할 수 있는 구절이 시편에 다음과 같이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시1:1), “악인들은 그렇지 아니함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시1:4).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이 날아가버리고 마는 인생은 세 가지의 특징을 보이고 있습니다; 첫째, 꾀를 사용하여 남을 넘어뜨리려고 합니다. 둘째, 하나님을 철저하게 외면하는 인생길을 살아갑니다. 셋째, 세상의 주인이 마치 자기인 것처럼 교만하고 거만하게 행동을 합니다. 사도 바울의 말처럼 그저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여’ 제멋대로 유물론자로 그리고 비도덕적으로 살아가는 경우에는 하나님께서 그 인생이 망가지든지 말든지 제 욕심껏 행하도록 내어 버려두실 수가 있습니다(롬1:21-24). 그러나 악한 꾀를 사용하여 사람의 생명을 해치며 무죄한 자의 피를 많이 흘리고 있는 경우에는 사정이 다릅니다. 하나님의 처벌이 즉시 임하고 있습니다. 엘의 경우가 그러한 것으로 추정이 됩니다.
재산이 축나는 것이 아까워서 과부가 된 형수에게 살길을 마련해주지 아니하고 있는 오난의 죽음(창38:8-10)
과부가 된 형수를 아내로 삼아서 아들을 생산하고 죽은 형의 대를 잇게 해준다고 하는 것이 고대사회의 소위 ‘수혼제도’(嫂婚制度)입니다. 이스라엘 야곱의 집안에서 대대로 수혼제도를 가지고 있는 이유는 두 가지로 보입니다; 첫째, 유목민의 전통에 따른 것입니다. 초지를 찾아서 끊임없이 이동을 해야만 하는 유목민의 삶은 고달픈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고달픈 삶에 익숙한 여자는 매우 중요한 자산입니다. 비록 과부가 되었다고 하더라도 며느리로 계속 집안에 붙들어 두는 것이 유익합니다. 그 방법이 수혼제도로서 구체화되고 있습니다. 둘째, 고대 족장사회는 가부장 사회입니다. 여자에게는 재산의 소유권과 상속권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아들이 없이 과부가 된 며느리는 살길이 없습니다. 그 살길을 열어주기 위하여 아들을 만들어 주어야만 합니다. 그렇다고 다른 혈통의 남자에게 씨를 받게 할 수는 없습니다. 가장 적합한 방법이 바로 아래 시동생과 한시적으로 결혼을 시키는 것입니다. 그것이 ‘수혼제도’의 의미입니다.
그래서 유다는 수혼제도에 따라서 다말과 합방을 하라고 둘째 아들인 오난에게 명령을 하고 있습니다(창38:8). 그 제도의 의미를 뻔히 알고 있는 오난입니다. 그러므로 형수에게 아들을 만들어줌으로써 재산을 얻을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만 합니다. 그런데 그는 재산이 축나는 것을 엄청 아까워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편법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형수에게 들어갔을 때에 그의 형에게 씨를 주지 아니하려고 땅에 설정하매 그 일이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도 죽이시니”(창38:9-10). 고아와 과부를 돌보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대가가 오난에게 죽음으로 돌아오고 있습니다. 마치 다음과 같은 예수님의 비유의 말씀을 미리 듣는 것과 같습니다;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 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 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지 아니하였느니라”(마25:41-43).
대를 이어갈 막내 아들이 또 죽임을 당할까 두려워하고 있는 유다가 다말에게 거짓말을 하다(창38:11).
유다는 한두 해 사이에 두 아들을 잃어버리는 불상사를 당하고 있습니다. 며느리 다말이 복 덩어리가 아니라 재앙덩어리인 것만 같습니다. 그녀를 나중에 막내 아들과 합방을 시켰다가는 또 어떠한 불행한 일이 발생을 할지 겁이 납니다(창38:11b). 그래서 유다가 비상조치를 취하고 있습니다; “다말을 친정에 돌려보내기로 결정을 합니다”(창38:11).
고대 유목민 사회에서 며느리를 친정으로 돌려보낸다고 하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입니다. 무언가 시집에 큰 화를 일으키는 애물단지가 되었으므로 더 이상 한 식구로 먹여 살려주지 아니하는 경우입니다. 원칙적으로, 맏며느리인 다말이 아들이 없이 청상과부가 되었으니 유다 집안에서 시동생을 줄줄이 그녀에게 주어서 아들을 얻게 하고 상속에 참여시키는 것이 옳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아버지 유다는 더 이상 수혼제도를 실시하고 싶은 마음이 없습니다. 아들 3명 가운데 이제 어린 막내 아들 셀라만이 집안에 남아 있습니다. 그 마저 훗날 형수 다말과 합방을 하다가 불행을 당하게 되면 유다의 대가 끊기는 것입니다. 유다는 자신의 두 아들이 왜 죽임을 당했는지 그 이유를 잘 모르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 맏이였던 엘과 둘째였던 오난의 죄가 과연 무엇인지 정확하게 인식을 하지 못하고 있는 딱한 유다입니다. 그의 영성과 분별력이 상당히 무디어진 것만 같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살 길이 막막한 며느리 다말을 친정으로 돌려보내버리는 비인간적인 방법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물론 좋은 말로 달래서 보내고 있는 중입니다; “수절하고 네 아버지 집에 있어 내 아들 셀라가 장성하기를 기다리라”(창38:11a). 그렇지만 그 말은 ‘립 서비스’(lip service)에 불과합니다. 어쨌든 맏며느리 다말은 시아버지 유다의 말을 철석같이 믿고서 딤나의 친정부모님 댁으로 들어갑니다(창38:11c). 가난한 친정 집에서 온갖 눈총과 멸시를 받으면서도 딤나는 오로지 셀라가 장성하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시부 유다가 그녀를 다시 시집으로 불러들이기를 학수고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과연 다말의 기대는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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